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에드가 드가와 폴 고갱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 중에 특히 드가와 교분이 두터웠습니다.
드가는 고갱보다 14살이 많았습니다.
동료 화가들이 “불평꾼 드가와 잔소리꾼 에드가”라고 할 정도로 독설가로 악명 높았던 그가 성미가 고약하고 불손해서 동료 화가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려한 고갱을 돌보며 평생 호의를 베푼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는 화가로서의 고갱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이며 그는 고갱의 재능을 알리고 후원하는 데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는 1881년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주로 구입하고 전시회를 열던 화랑 주인 뒤랑-뤼엘에게 고갱의 작품을 구입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구입하여 고갱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었습니다.
뒤랑-뤼엘은 고갱의 작품 세 점을 1,500프랑에 샀는데 아마추어 화가의 그림을 한 점에 500프랑을 주고 산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크게 배려한 일이랍니다.
전업작가 모네와 르누아르 작품이 때로는 50프랑 미만에 팔리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비싸게 팔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1834~1917)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가 드가의 성은 de Gas인데 두 단어를 붙여서 Degas로 사용했습니다.
1855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스로부터 수학했는데 앵그르는 다비드의 제자로 프랑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가입니다.
나이 많은 앵그르는 라모스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다 젊은 드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젊은이, 선으로 그림을 그리게. 선을 회화의 생명으로 여기게”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드가는 앵그르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선을 중심으로 그리면서 프랑스 전통을 이었습니다.

드가는 현대인의 삶을 소재로 삼았으며 특히 경마, 발레, 극장, 서커스, 리허설, 카페, 세탁소 장면 등을 주로 그렸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비대해지고 경마장, 극장, 카페, 음악연주실, 세탁소 등이 신흥업소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명의 레크레이션을 즐기는 현대인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 당시에는 현대화였습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도 마네에게 현대인의 삶을 그리라고 충고했듯이 현대화는 현대인의 삶을 소재로 그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보통이었습니다.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전에 일곱 차례나 참여하여 주요 멤버가 되었지만 마네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화가로 불렸더라도 그들과는 상이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인상주의라는 개념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 고갱과 반 고흐도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인상주의가 아니랍니다.
드가가 풍경화를 별로 그리지 않은 것만 봐도 그는 인상주의 화가가 아닙니다.
빛과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연을 직접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카데미 배경을 가진 드가는 숙련된 기교를 사용하면서 돌발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 예정되지 않은 장면 등에 관심을 갖고 잘못 찍은 사진처럼 가장자리에서 인물이 잘리는 등 친숙하지 않은 장면을 재현했습니다.
이런 방법은 사진과 일본 판화에서 받은 영향입니다.

1880년부터 모델을 왁스로 제작하면서 조각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생전에 조각을 한 점 소개했을 뿐이며 그것이 <열네 살의 발레리나>입니다.
그는 조각에 실재 발레리나의 의상 튀튀tutu를 입힌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청동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890년대에 시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여 더욱 작업에 박차를 가했는데 말의 다양한 동작, 목욕하는 여인의 다양한 행동, 누드 댄서 등을 재구성했으며 이것들 역시 그가 사망한 후 청동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말년의 20년은 거의 실명한 상태가 되어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쓸쓸하게 지냈습니다.
르누아르는 조각에서의 드가의 위상을 오귀스트 로댕보다 더 높게 평가했으며 피사로는 드가를 당대의 최고 예술가로 꼽았습니다.

고갱은 드가의 과격한 화면 구성에 늘 감탄했습니다.
그가 1881년에 그린 <화가의 집 내부, 카르셀 가>를 보면 모델이 뒤에 있고 테이블과 꽃병이 화면 앞에서 관람자의 시야를 가리는데 드가의 구성을 상기시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메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관람자로 하여금 그녀의 얼굴을 절반만 볼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은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아내의 연주를 감상하는 포즈를 취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화적 의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메테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 팔지 않고 1917년까지 자신의 소장품으로 아꼈습니다.

고갱은 1882년 제7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화가의 집 내부, 카르셀 가>를 포함한, 유채와 파스텔로 그린 작품 12점과 조각 한 점을 소개했습니다.
출품작이 늘어난 데서 미술에 대한 그의 자세가 더욱 진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듬해 초 그는 피사로와 오스니로 가서 휴가를 보내며 함께 작업했습니다.
종이 한 장에 피사로가 고갱의 초상을 그리고 고갱이 파스텔로 피사로의 초상을 그린 드로잉은 이때 그려진 것입니다.

1882년 11월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프랑스 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졌습니다.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고갱과 슈페네커도 1883년 직장을 잃었습니다.
고갱이 피사로와 친구 화가들에게 전업작가로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회화에 대한 고갱의 열정을 잘 아는 그들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작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염려했습니다.
피사로는 친구들에게 고갱이 “분발한다면 화가로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잘 해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만
정작 아들 루시앙에게는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고갱을 가리켜 “예상 외로 고지식하구나”라고 본심을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고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행로로 진입하는 것으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는 이번 기회에 전업작가로 나서지 않는다면 평생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신감과 행운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낙천적인 성격이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용이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주식거래인이 아닌 화가라고 적기 시작한 건 1883년부터였습니다.

막내 폴-롤라를 막 출산한 메테는 남편이 전업작가로 나서겠다고 하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메테는 남편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자 살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벌어놓은 돈은 이내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고갱은 루앙에서 주식거래를 시도해보았지만 경기가 매우 침체된 상태라서 주식 파는 일이 작품을 파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알았습니다.
고갱은 1884년 1월 임신중인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비가 적게 드는 루앙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메테는 루앙으로 이사한 여섯 달만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코펜하겐 친정으로 가버렸고 고갱은 다음달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로 갔습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프랑스 회사로부터 방수외투를 수입해서 팔아보았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코펜하겐에 체류하면서 다락방에서 자화상 <이젤 앞의 고갱>을 그렸는데 자신감과 고뇌가 엇갈려 스스로를 달래기 어려운 표정입니다.
우울한 표정의 자화상입니다.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을 보고 그리게 되는데 그는 거울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몹시 착잡했을 것입니다.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든 모습으로, 자신이 전업작가라는 점을 내세우려고 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매우 위축되었으며 얼굴에 닿은 빛으로 생긴 명암이 그를 고뇌하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비스듬히 내려온 대들보와 의자가 맞닿아 다락방이 협소함을 알 수 있으며 이국의 아파트 다락방에서 그린 것이라서 그런지 편안해보이지 않습니다.

<만돌린이 있는 정물>에서는 자신이 소장한 아르망 기요맹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사용했는데 1881년 여름 그는 기요맹과 함께 작업한 적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풍경화가이자 판화가인 기요맹은 매우 가난했고, 토목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1892년 복권에 당첨되어 10만 프랑을 탄 후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회화에 전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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