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고갱의 <누드 습작, 바느질하는 수잔>
 
고갱은 인상주의 그룹전을 관전한 후 회화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 파리의 서북쪽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아틀리에로 가서 수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평소 존경한 좋아한 세잔을 만나 자신보다 9살 많은 그와 어울렸습니다.
고갱은 25살 때인 1875년 <퐁레나 다리와 퐁 드 그레넬레 다리 사이 파리의 센 강>을 그렸습니다.
문명이 자연에 어울리지 않다는 점을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며 어머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그려넣어 평화스러운 자연을 의도적으로 찬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법으로 말하면 인상주의 특유의 쓱쓱 문지르는 붓질을 사용했습니다.
인상주의 방법은 한 마디로 빛이 사물에 닿아 부서지거나 굴절하며 반사하는 것을 영롱한 무지개색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이는 화가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갱이 1876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은 보수주의자들의 심사를 통과하고 입선되었습니다.
살롱전에 입선하자 고무되어 더욱 회화에 전념하면서 화가로 전업할 것을 고려했습니다.
피사로는 고갱에게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했고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고전주의 화법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의 고유한 기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갱은 1879년 4월에 열린 제4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외에도 자신이 수집하고 있던 피사로의 작품 세 점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으므로 아마추어 화가 고갱에게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해 여름 퐁투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사과나무를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는 피사로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형적인 구성과 기법으로 그렸으며 야외에서 드로잉한 것을 작업실에서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과 그 외의 작품들을 1880년 제5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했지만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룹의 리더 모네와 르누아르가 불참하고 고갱과 같이 덜 알려진 화가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작품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평론가들이 전시회에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1830~1903)
교사로 유명하며 세잔과 고갱을 지도한 카미유 피사로는 1830년 7월 10일 덴마크의 식민지 미국 플로리다 주 남쪽 세인트 토마스(버진 아일랜드의 수도)에서 유대교 신자 가정의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파리로 유학을 와 여러 학교에서 수학한 뒤 1847년에 세인트 토마스로 돌아갔다가 1855년에 다시 파리로 와서 영주했습니다.
그는 1859년에 모네를 만났으며 이후 두 사람은 인상주의 그룹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피사로만 여덟 차례에 걸친 인상주의 그룹전에 모두 참여했고 나이로 보나 정신적인 면에서 그룹 화가들에게 어버이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피신했는데 파리의 집에 있던 작품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영국으로 피신한 모네를 그곳에서 만났으며, 두 사람은 영국의 풍경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특히 터너와 컨스터블의 작품에 감동했습니다.

피사로는 1866~69년에 체류한 적이 있는 퐁투아즈에 1872년에 안주했고 근처 오베르에 살고 있던 세잔과 가까이 지내면서 수년 동안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1895년경 시력이 나빠져서 야외에서 그리는 것을 중단하고 실내에서 그렸으며 파리에서 그린 많은 작품이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었습니다.
그가 타계할 무렵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집을 따로 세 얻어 아틀리에로 사용하면서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열의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공예가이면서 보석가인 장-폴 오베와 조각가 줄 어네스트 부일로에게서 조각을 배우면서 부일로의 아틀리에에서 처음 아내와 아들의 흉상을 석고와 대리석으로 제작했습니다.

고갱이 처음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작품은 <누드 습작, 바느질하는 수잔>(1880)으로 에드가 드가의 기교가 부분적으로 엿보여 그가 드가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는 빛의 강렬함을 영롱한 색조와 명암으로 묘사하며 빛에 의해 흩어지는 밝은 색들을 나타내기 위해 붓질을 짧게 했는데 바로 이런 점이 인상주의 화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흐름이 캔버스 전체로 확대되지 않은 걸로 봐서 이런 화법을 부분적으만 수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제6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했는데, 에밀 졸라의 제자이면서 상징주의 작가인 유이스망의 호평을 받자 매우 기분이 들떴습니다.

누드화를 그린 동시대 화가들 중 현실의 음조를 이보다 더 격렬하게 다룬 화가가 없다고 난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옷을 모두 벗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왜 누드로 그렸을까요?
이는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전투를 하거나 운동하는 남자를 누드로 제작했는데,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전통이 르네상스 시대에 받들어져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면 다윗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누드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이런 고전주의를 계승했으며 이를 신고전주의라고 해서 르네상스와는 구별하는데,
그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그릴 때도 벗은 모습을 상상하고 스케치한 후 옷을 입히는 방법으로 그렸습니다.
인체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화가와 조각가들이 미술공부를 할 때 누드를 그리거나 제작하는 이유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인체를 통해 그 사람의 정신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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