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비아와 기계주의 미학
프랑시스 피카비아(1879~1953)는 1879년 1월 22일 파리에서 쿠바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1953년 타계했다. 에콜 데 보자르와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피사로의 지도를 받았고, 1903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했고 1905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09~11년 입체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으며 퓌토 그룹에 가담하여 자크와 레이몽, 마르셀 뒤샹 형제를 알게 되었다. 퓌토에 살던 자크의 집에 주로 모인 퓌토 그룹의 중추적 역할은 자크와 레이몽이 했고, 이 그룹에 시인 아폴리네르, 리브몽-드세뉴, 글레이즈, 메쳉제, 레제 등이 모였다. 이 그룹에서 마르셀 뒤샹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메쳉제가 소개한 아마추어 수학자 모리스 프린스를 통해 퓌토 그룹 예술가들은 사차원에 관심을 기울였고 삼차원보다 수준 높은 사차원의 세계가 가까운 장래에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뒤샹이 8살 많은 피카비아를 만난 것은 1911년 10월에 열린 가을전을 통해서였다. 뒤샹은 그에 대해 훗날 술회했다. “놀랄 만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회의주의자였다. 항상 ‘그래, 하지만 ...’이라고 말하거나 ‘아냐, 그러나 ...’라고 했다.” 성적으로 조숙한 피카비아는 18살 때 학교를 자퇴하고 파리에 익히 알려진 언론인의 애인을 데리고 스위스로 달아났다. 그는 바람둥이였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방탕했고 거의 매일 밤 술을 지독히 마셨으며 아편을 피웠는데 당시 아편은 아주 귀했다. 자동차를 여러 대 가지고 있었고 돈을 물 쓰듯 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던 가브리엘 뷔페와 1909년에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의 첫 번째 아내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입체주의 양식을 선호했고, 들로네의 오르피즘 방법으로 작업했으며, 육안으로 분별할 수 있는 사물의 색보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간성적인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하늘을 빨간색으로 땅을 파란색으로 칠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다. 그의 그림은 만화경 같았다.
그는 말했다.
“나의 작품에서 주관적인 표현은 제목에 있으며, 시각적 묘사는 객체일 뿐이다. 하지만 객체는 객체임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기도 한 이유는 제목을 나타내는 판토마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체가 인간의 심장과도 같은 잠재적 요소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제시해준다.”
피카비아는 1913년 아모리 쇼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나 그와 자신이 1915년에 창간한 비평지 <291>에 글을 기고했다. 이 비평지는 1913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아폴리네르의 책임 하에 발간된 비평지 <스와레 드 파리>를 모델로 했다. <291>은 나중에 <카메라 워크>로 명칭이 바뀌었다. 창간호에는 피카비아의 상상에 의한 기계를 모티프로 한 독창적인 데생들을 여러 점 소개했으며, 아폴리네르의 표의문자, 데 자야의 인쇄적인 구성작품, 스티글리츠의 시를 소개했다. <291>은 맨해튼 5번가 291번지에 소재한 스티글리츠의 화랑에서 딴 것으로 그의 화랑 명칭은 291 화랑이었다. 291 호랑은 모더니즘의 황무지와도 같았던 미국 미술계에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불리는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을 처음 뉴욕에 소개한 곳도 이 화랑이었으며, 다양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여 미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피카비아는 291 화랑을 중심으로 뉴욕에서 뒤샹과 함께 미국 내에서의 다다운동을 주도했다.
피카비아는 1915년 7~8월에 <291>을 통해 초상화를 여러 점 발표했다. 스티글리츠의 초상을 카메라의 형태로, 아그네스 에른스트 메이어의 초상을 전기를 충전시키는 플러그로 묘사했으며, 자화상을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내는 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291>의 창간에 참여한 데 자야는 피카비아의 작품에 관한 글을 비평지에 기고하면서 모더니즘의 정신을 찬양했다. 그는 <291>의 기능이 “자유, 개인주의, 자아표현”임을 홍보했다. 데 자야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고 드로잉하기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소유한 신문 두 곳과 멕시코시티의 주요 신문에 만화를 기고했다. 멕시코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에 빠지자 데 자야 가족은 1907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데 자야는 <이브닝 월드>에 취직되어 미술계와 관련된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는 일을 했고, 스티글리츠는 신문에서 그의 드로잉을 보고 291 화랑에서 1909년과 1910년에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피카비아는 1916년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다다 비평지 <391> 제1호를 발간했고, 1918년 이것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취리히 다다에 합류했다.그는 파리로 돌아간 후에는 선동적인 다다 시위에 참여했으며, 기계주의 작품을 전시했고, 당혹스럽고 풍자적인 논문 다수를 발표했다. 1919년 가을전을 위한 카탈로그에는 조르주 리베몽 데상느의 글이 실렸다.
“만일 여러분이 그랑 팔레 미술관에 가게 되면 계단 아래 그늘진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살아 있는 괴물처럼 생긴 것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괴물이란 피카비아가 기계주의 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의미했다. 피카비아는 가을전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임의로 작품을 그곳에 걸 수 있었다. 그의 기계회화가 파리에서 소개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가을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914년 이후 처음 개최된 파리 미술계의 대대적인 첫 잔치였는데 그의 작품이 추문을 야기했다. 페르낭 레제가 튜브처럼 생긴 그림을 그렸지만 완전히 기계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파리의 다다는 시인 차라가 1920년 1월 17일 취리히로부터 파리에 도착하고 난 후 더욱 극성스럽기 시작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차라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차라와 피카비아는 브르통과 함께 다다 그룹을 리드했으며 다다 선언문을 1월 23일에 발표했다. 다다 예술가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웠고, 매사에 충동적이었으며, 어떤 구속에서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거리에서 가톨릭 신부를 만나면 조롱했고, 분수를 보면 벌거벗고 들어가 놀았으며, 극장에 몰려가 소란을 피워대며 무대를 향해 계란, 야채, 심지어 소고기까지 던졌는데, 요즘 말로 불랑배들 같았다. 1921년 6월 파리를 방문한 뒤샹을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피카비아는 뒤샹의 <로즈 셀라비>를 비평지 <391>에 소개하면서 여장으로 분장한 그를 <성녀> 혹은 다른 말로 <다다 그림>이라고 했다.
파리 다다운동이 붕괴된 뒤 초현실주의에 가담했으며 이전에 비해 활동이 줄었지만 1930년대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1924년에 에릭 사티와 함께 발레 <휴식>을 제작했고, 이듬해에는 르네 클레르와 함께 영화 <막간>을 제작했다.
피카비아는 20세기의 가장 다재다능한 예술가였고, 잇따라 나타난 새로운 양식들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부조리와 비인습적인 것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늘 새로운 사고의 중심에 있었으며, 당혹스런 경향이 있기는 하나 끊임없이 신선한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1949년 파리의 드루앵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이때 논문집 <491>이 발간되었다. 피카비아의 후기 작품들은 조악한 것이 많으며 대표작은 대부분 사라졌다. 따라서 그의 명성은 쇠퇴했으며, 재능은 있지만 발빠른 추종자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개최된 대규모 회고전은 이런 시각을 완전히 바로잡았다. 피카비아는 현대미술의 커다란 특징인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었고 새로움 자체를 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