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인상주의 화가로 활약하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피사로는 고갱에게 대상을 한 장소에서만 관망하지 말고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옆에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그리라고 권유했다.
그런 식의 구성은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에도江戶 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회화 양식인 우키요에浮世繪의 대표적인 인물들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와 안도 히로시게(1797~1858)의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당시 많은 프랑스 화가들이 판화 복사본을 통해 일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인물이 부차적으로 중요한 풍경화와 역사화를 주로 그린 호쿠사이는 1826~33년에 <후지 산 36경>을 완성했는데, 이 역작 판화는 후지 산을 배경으로 다양한 삶의 현장을 묘사한 것들이다.
소방대 감독관의 아들로 태어난 히로시게는 호쿠사이만큼 뚜렷한 개성으로 주목받은 화가는 아니지만 차분한 방식으로 그에 버금가는 걸작을 남겼다.
그는 일본 통속화의 전통을 좇아 온화하고 시적인 독특한 풍경화를 창안해냈다.
마네, 모네, 드가, 반 고흐를 포함하여 아주 많은 화가들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모네의 대성당, 포플러, 건초더미, 수련 연작은 호쿠사이의 연작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879년은 고갱에게 화가로서 운명을 시험받는 중요한 해였다.
피사로가 인상주의 화가들을 고갱에게 소개하면서 1879년 4월에 열릴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라고 권했다.
고갱은 흥분했다.
프랑스 화단에 입지를 이미 마련한 화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시회에 자신이 포함되는 건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업화가들이고 자신은 아마추어 화가이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과 자신의 것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벽에 걸리는 건 전업화가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걸 의미한다.
고갱은 작품을 출품하면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피사로의 작품 세 점을 피사로의 요청으로 함께 출품했다.
전시회에 세잔, 르누아르, 시슬레는 불참했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으며 고갱은 매우 고무되었다.

그해 여름 고갱은 퐁투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면서 사과나무를 여러 점 그렸다.
<사과나무 Apple Trees>를 4년 전에 그린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가는 그림과 비교하면 양식에 변화가 생긴 걸 볼 수 있는데 피사로의 영향이다.
피사로가 1877년에 그린 <퐁투아즈 근처 에르미타주의 황소언덕 The Cote des Boeufs at L'Hermotage, near Pontoise>은 고갱의 주제와는 전혀 다르지만 붓질을 비교하면 고갱이 피사로의 영향을 받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붓질이 짧아지고 순색이 사용되었다. 피사로의 붓질이 더 정교하며,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도 복잡하고 공간에 대한 깊이감이 있으며 명암이 현저하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스승의 작품이 우수한 건 당연하다.
주제로 말하면 고갱의 작품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사과나무 세 그루로 화면에 가득 채웠는데 특별한 형태를 지닌 나무도 아니고 원근이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으며 실루엣의 효과는 충분히 나타나지 못했다.
피사로의 작품에서는 곧게 뻗은 여러 그루 나무가 자연에 커튼을 친 듯한 가운데 뒤로 붉은색 지붕을 한 가옥들이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여 삶과 자연의 조화가 적절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원근은 물론 명암이 미세한 곳에까지 두드러지게 묘사되었다.
과연 풍경화의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고갱은 피사로와 함께 야외로 나가 풍경을 그리면서 그의 영향 하에 사물을 오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관찰하며 빛의 반사에 의해 대상이 다양한 색으로 발하는 걸 보고 색을 섞어 사용하는 색채분할법을 익혔다.
피사로의 둘째 아들 조르주 만자나 피사로가 1881년경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피크닉 Impressionists' Picnic>이란 제목으로 그린 드로잉을 보면 앉아 있는 피사로 왼편에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1841~1927)이 있고, 그 옆에 고갱이 서있으며, 오른편에는 세잔이 이젤 앞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고, 세잔의 아내가 어린 만자나를 보살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자나가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갱이 피사로 외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야외에서 작업했음을 알게 해준다.
기요맹은 상업에 종사하다가 아카데미 쉬스에서 회화를 배웠고, 피사로, 세잔 등과 함께 회화에 전념했다.
1863년 낙선전이 처음 개최될 때 출품했으며,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한 뒤 인상주의 화가로 활약했다.
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원과 바다 풍경을 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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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갑작스런 죽음>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클림트는 1917년 빈 미술아카데미의 명예멤버로 받아들여졌지만 교수직에 임명되는 것은 교육부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그는 끝내 자신이 원했던 가르치는 일을 해보지 못한 채 그의 나이 56세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1918년 흑사병과도 같이 무서운 속도로 전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독감이 빈에도 번져서 많은 분리파 미술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해 1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클림트도 결국 스페인독감에 걸려 에밀리 플뢰게의 품에 안겨 2월 6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 비엔나 공방 창설자인 콜로만 모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림트의 임종>을 그린 실레와 그의 아내도 이 지독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림트의 시신은 히칭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클림트가 사망한 1918년 미술품 중개상 구스타브 네베헤이가 그의 유작들을 전시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이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건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1984년에 와서야 3천 점의 드로잉이 알리스 스트로블에 의해 세 권의 책으로 엮어져 한꺼번에 소개되었습니다.
그가 유작으로 남긴 드로잉은 5~6천 점으로 어림되며, 미완성도 있었고 대부분 에로틱 드로잉이었습니다.
그가 동일한 제목으로 습작한 드로잉들을 보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거의 완성한 <아담과 이브>와 <신부>를 위한 습작을 보면 주제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의 대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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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최후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이 1902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 가운데 <해변의 승마자들 Horsemen on the Beach>은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두 점이다.
동물과 사람의 친근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수평선으로 캔버스를 나누었으며 말들의 자유로운 동작으로 사람과 동물,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해변의 승마자들>은 마르키즈의 남자와 여자들이 말을 타고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드가가 경마장에서 그린 그림을 상기하게 하는데 고갱은 드가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갱은 <해변의 승마자들>을 그리고 몇 달 후 쓴 편지에서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리지만 드가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드가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전혀 색을 달리 사용하여 새로운 그림으로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안해냈다.
웃통을 벗은 세 명의 현대 폴리네시아인이 관람자를 향해 등진 모습으로 핑크색 모래사장을 나아가 다른 장소에서 달려온 두 기사와 만나는 장면이다.
백마를 탄 두 사람의 의상은 독특한데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모자가 달렸고 바지는 아주 짧다.
폴리네시아인의 의상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의상을 개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런 의상의 승마자를 1901~02년 변형드로잉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이든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든 응용함으로써 창작에 있어 과거로 거슬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섬에서 제작한 많은 작은 그림에서 초기에 사용했던 모티프를 발견하기란 쉽다.
이는 팔기 쉬운 작품을 볼라르에게 많이 보내려고 한 데서 생긴 일이라고 짐작된다.
1902년 3월 볼라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곧 작품을 배편으로 보내겠다면서 몇 점은 약간 중요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이용한 소품들이라고 했다.
아파트 공간이 좁아서 소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한 것들이라면서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볼라르는 그에게 캔버스, 접착제, 화선지 등을 보냈고 고갱은 그것들이 사용할 만하다고 답장하면서 특정한 물감이 떨어졌으니 속히 보내라고 했다.
볼라르에게 스무 점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붉은 망토를 두른 마르키즈 남자 Marquesien a la cape rouge>와 <일광욕하는 사람들>은 약간 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를 주제로 한 것들이다.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신부 하아푸아니로 알려졌다.
1902년 8월 25일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라르에게 보낸 큰 캔버스를 언급하면서 “매우 공을 들여 제작했다”고 적었는데 그 해에 제작한 큰 캔버스는 두 점이다.
그중 중 하나가 <부름 The Call>(고갱 902)이다. 강가에 벗은 몸으로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여인은 미역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걸어가는데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왼팔을 올려 손가락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시하는데 누군가를 보고 오라고 부르는 모습이다.
걷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은 그의 변형드로잉에서도 발견된다.
<옛날 옛적 이야기 Barbarous Tales>는 고갱이 마르키즈 섬에서 그린 것들 가운데 걸작으로 꼽을 만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앉아 있는데 오른쪽 빨간 머리의 여인은 <부채를 든 소녀>의 모델 토호타우아이다.
그녀 옆에 부처의 자세로 가부좌를 튼 여인은 실제 여인이 아니라 고갱이 갖고 있던 보로부두르 릴리프 사진의 인물을 삽입한 것이며, 뒤로 맹수의 발톱과 여우의 붉은 머리와 수염, 신부 복장에 초록색 눈을 한 그로테스크한 합성물의 존재는 1895년에 사망한 친구 화가 메이어 드 한이다.
1903년 2월 몽프레에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에 보았던 것, 들었던 것, 생각했던 것들을 머리에 떠올린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애착이 보인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술을 마셨고 타계하기 몇 달 전부터 아편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계한 후 집 옆 우물에서 모르핀이 든 유리병, 주사기, 편두통 치료제가 든 병, 설사와 구토 또는 배앓이를 진정시켜주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생산한 ‘뱀 기름’이 든 병 등이 발견되었다.
타계하기 전 몇 달 동안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화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시신은 가톨릭 공동묘지 십자가 아래에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미술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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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파리에 둥지를 틀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코펜하겐에서 미술잡지를 통해 파리 화단을 지속적으로 관망하며 앵그르와 그의 위대한 적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았다.
당시 화단에는 두 대가를 축으로 평행을 달리는 두 화파가 있었다.
앵그르 파는 회화에 있어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들라크루아 파는 선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색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선은 색과 색의 만남에서 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이 우선이다 색이 우선이다 하는 두 화파의 대립을 평론가들은 이상주의 대 사실주의의 대립으로 간주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강렬한 감정 표현의 화풍을 따랐고 보수적 성향의 드가와 르누아르는 화면을 단정하게 하고 화가의 감정을 자제하는 앵그르를 좇아 프랑스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다.
드가와 르누아르의 회화는 부분적으로만 인상주의에 속할 뿐 인상주의 회화는 들라크루아의 과격한 색의 사용에서 진전된 경향이다.
고갱은 중간 입장을 취하지만 성격상 들라크루아의 회화에 기울어져 있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들라크루아의 <돈 주앙의 난파선 Shipwreck of Don Juan>(고갱 67)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들라크루아를 프랑스 화가 가운데 최고 화가라고 극찬했다.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 색의 명도와 심도의 강렬한 효과를 추구한 들라크루아는 세부 묘사나 극적인 표현의 문학적 서술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내면을 고양시켜주는 원천인 실재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렬한 색채와 풍속에서 감동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동방 취향의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들라크루아의 표현적인 색채를 찬양하면서 극적으로 묘사하는 회화방법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상상력에 탄복하며, 색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실재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는 기교에 감동했다.
슈페네커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들라크루아를 가리켜서 “그분에게는 야수의 기질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거라네. 그분의 필치는 늘 힘 있고 유연한 호랑이의 동작을 연상하게 하네”라며 감탄의 톤을 높였다.
캔버스 제조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도록 처가에서 직장을 마련해주었지만 괴팍한 성격 때문에 고갱은 처가와 불화했다.
처가 사람들은 그가 너무 거만하다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코펜하겐에서 지낸 기간은 고갱에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최악이었다.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사로 선생님,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까?”라고 적었으며, 1885년 5월에 다시 보낸 편지에서는 “저는 용기도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 고갱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밧줄에 목을 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건 오직 회화뿐입니다”라고 적었다.
“오직 회화뿐”이란 말에서 그가 순교자와도 같은 비장한 각오로 회화에 임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남은 생애가 그런 태도로 일관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미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물질적·정신적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고갱은 1885년 6월 메테와 네 자녀를 처가에 두고 여섯 살 난 클로비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메테에게 자신이 수집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팔아 생활비에 보태더라도 세잔의 작품만큼은 팔지 말라고 당부했다.
파리로 와서 클로비를 누이 마리에게 맡기고 그는 디에페에 있는 슈페네커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마리는 칠레인 상인 후안 우리베와 결혼했는데 고갱은 매형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석 달을 머물면서 그와 함께 작업하며, 노르망디 해변에 위치한 디에페로 가서 보트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바닷가 장면을 그렸다.
슈페네커는 실직한 뒤 학교에서 회화를 지도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지만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고갱이 그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갱은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1885년 8월에 런던으로 갔으며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고 10월 초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소장품 몇 점을 뒤랑 뤼엘에게 팔아 그 돈으로 카이 가 10번지에 작은 방을 세 얻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해 겨울에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다.
두창 혹은 마마라고도 하는 천연두는 공식적으로 1977년에야 퇴치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인이 가장 두려워한 전염병 중 하나였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5세(기원전 1156년에 사망)의 미라 머리에서 천연두에 걸린 증거가 발견된 걸 보면 이 질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를 위협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고갱은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서 하루에 5프랑을 벌었다.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자 건강이 나빠졌으며 클로비를 양육할 능력이 없어 어린 것을 메테에게 보내야 했다.
클로비는 매우 병약해 스물한 살 때 관절수술을 받은 뒤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메테가 클로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고갱은 죽을 때까지 아들의 죽음을 모르게 된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고갱은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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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비아와 기계주의 미학

 

프랑시스 피카비아(1879~1953)는 1879년 1월 22일 파리에서 쿠바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1953년 타계했다. 에콜 데 보자르와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피사로의 지도를 받았고, 1903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했고 1905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09~11년 입체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으며 퓌토 그룹에 가담하여 자크와 레이몽, 마르셀 뒤샹 형제를 알게 되었다. 퓌토에 살던 자크의 집에 주로 모인 퓌토 그룹의 중추적 역할은 자크와 레이몽이 했고, 이 그룹에 시인 아폴리네르, 리브몽-드세뉴, 글레이즈, 메쳉제, 레제 등이 모였다. 이 그룹에서 마르셀 뒤샹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메쳉제가 소개한 아마추어 수학자 모리스 프린스를 통해 퓌토 그룹 예술가들은 사차원에 관심을 기울였고 삼차원보다 수준 높은 사차원의 세계가 가까운 장래에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뒤샹이 8살 많은 피카비아를 만난 것은 1911년 10월에 열린 가을전을 통해서였다. 뒤샹은 그에 대해 훗날 술회했다. “놀랄 만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회의주의자였다. 항상 ‘그래, 하지만 ...’이라고 말하거나 ‘아냐, 그러나 ...’라고 했다.” 성적으로 조숙한 피카비아는 18살 때 학교를 자퇴하고 파리에 익히 알려진 언론인의 애인을 데리고 스위스로 달아났다. 그는 바람둥이였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방탕했고 거의 매일 밤 술을 지독히 마셨으며 아편을 피웠는데 당시 아편은 아주 귀했다. 자동차를 여러 대 가지고 있었고 돈을 물 쓰듯 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던 가브리엘 뷔페와 1909년에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의 첫 번째 아내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입체주의 양식을 선호했고, 들로네의 오르피즘 방법으로 작업했으며, 육안으로 분별할 수 있는 사물의 색보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간성적인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하늘을 빨간색으로 땅을 파란색으로 칠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다. 그의 그림은 만화경 같았다.
그는 말했다.
“나의 작품에서 주관적인 표현은 제목에 있으며, 시각적 묘사는 객체일 뿐이다. 하지만 객체는 객체임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기도 한 이유는 제목을 나타내는 판토마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체가 인간의 심장과도 같은 잠재적 요소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제시해준다.”
피카비아는 1913년 아모리 쇼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나 그와 자신이 1915년에 창간한 비평지 <291>에 글을 기고했다. 이 비평지는 1913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아폴리네르의 책임 하에 발간된 비평지 <스와레 드 파리>를 모델로 했다. <291>은 나중에 <카메라 워크>로 명칭이 바뀌었다. 창간호에는 피카비아의 상상에 의한 기계를 모티프로 한 독창적인 데생들을 여러 점 소개했으며, 아폴리네르의 표의문자, 데 자야의 인쇄적인 구성작품, 스티글리츠의 시를 소개했다. <291>은 맨해튼 5번가 291번지에 소재한 스티글리츠의 화랑에서 딴 것으로 그의 화랑 명칭은 291 화랑이었다. 291 호랑은 모더니즘의 황무지와도 같았던 미국 미술계에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불리는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을 처음 뉴욕에 소개한 곳도 이 화랑이었으며, 다양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여 미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피카비아는 291 화랑을 중심으로 뉴욕에서 뒤샹과 함께 미국 내에서의 다다운동을 주도했다.
피카비아는 1915년 7~8월에 <291>을 통해 초상화를 여러 점 발표했다. 스티글리츠의 초상을 카메라의 형태로, 아그네스 에른스트 메이어의 초상을 전기를 충전시키는 플러그로 묘사했으며, 자화상을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내는 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291>의 창간에 참여한 데 자야는 피카비아의 작품에 관한 글을 비평지에 기고하면서 모더니즘의 정신을 찬양했다. 그는 <291>의 기능이 “자유, 개인주의, 자아표현”임을 홍보했다. 데 자야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고 드로잉하기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소유한 신문 두 곳과 멕시코시티의 주요 신문에 만화를 기고했다. 멕시코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에 빠지자 데 자야 가족은 1907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데 자야는 <이브닝 월드>에 취직되어 미술계와 관련된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는 일을 했고, 스티글리츠는 신문에서 그의 드로잉을 보고 291 화랑에서 1909년과 1910년에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피카비아는 1916년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다다 비평지 <391> 제1호를 발간했고, 1918년 이것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취리히 다다에 합류했다.그는 파리로 돌아간 후에는 선동적인 다다 시위에 참여했으며, 기계주의 작품을 전시했고, 당혹스럽고 풍자적인 논문 다수를 발표했다. 1919년 가을전을 위한 카탈로그에는 조르주 리베몽 데상느의 글이 실렸다.
“만일 여러분이 그랑 팔레 미술관에 가게 되면 계단 아래 그늘진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살아 있는 괴물처럼 생긴 것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괴물이란 피카비아가 기계주의 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의미했다. 피카비아는 가을전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임의로 작품을 그곳에 걸 수 있었다. 그의 기계회화가 파리에서 소개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가을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914년 이후 처음 개최된 파리 미술계의 대대적인 첫 잔치였는데 그의 작품이 추문을 야기했다. 페르낭 레제가 튜브처럼 생긴 그림을 그렸지만 완전히 기계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파리의 다다는 시인 차라가 1920년 1월 17일 취리히로부터 파리에 도착하고 난 후 더욱 극성스럽기 시작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차라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차라와 피카비아는 브르통과 함께 다다 그룹을 리드했으며 다다 선언문을 1월 23일에 발표했다. 다다 예술가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웠고, 매사에 충동적이었으며, 어떤 구속에서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거리에서 가톨릭 신부를 만나면 조롱했고, 분수를 보면 벌거벗고 들어가 놀았으며, 극장에 몰려가 소란을 피워대며 무대를 향해 계란, 야채, 심지어 소고기까지 던졌는데, 요즘 말로 불랑배들 같았다. 1921년 6월 파리를 방문한 뒤샹을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피카비아는 뒤샹의 <로즈 셀라비>를 비평지 <391>에 소개하면서 여장으로 분장한 그를 <성녀> 혹은 다른 말로 <다다 그림>이라고 했다.
파리 다다운동이 붕괴된 뒤 초현실주의에 가담했으며 이전에 비해 활동이 줄었지만 1930년대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1924년에 에릭 사티와 함께 발레 <휴식>을 제작했고, 이듬해에는 르네 클레르와 함께 영화 <막간>을 제작했다.
피카비아는 20세기의 가장 다재다능한 예술가였고, 잇따라 나타난 새로운 양식들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부조리와 비인습적인 것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늘 새로운 사고의 중심에 있었으며, 당혹스런 경향이 있기는 하나 끊임없이 신선한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1949년 파리의 드루앵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이때 논문집 <491>이 발간되었다. 피카비아의 후기 작품들은 조악한 것이 많으며 대표작은 대부분 사라졌다. 따라서 그의 명성은 쇠퇴했으며, 재능은 있지만 발빠른 추종자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개최된 대규모 회고전은 이런 시각을 완전히 바로잡았다. 피카비아는 현대미술의 커다란 특징인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었고 새로움 자체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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