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파리에 둥지를 틀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코펜하겐에서 미술잡지를 통해 파리 화단을 지속적으로 관망하며 앵그르와 그의 위대한 적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았다.
당시 화단에는 두 대가를 축으로 평행을 달리는 두 화파가 있었다.
앵그르 파는 회화에 있어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들라크루아 파는 선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색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선은 색과 색의 만남에서 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이 우선이다 색이 우선이다 하는 두 화파의 대립을 평론가들은 이상주의 대 사실주의의 대립으로 간주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강렬한 감정 표현의 화풍을 따랐고 보수적 성향의 드가와 르누아르는 화면을 단정하게 하고 화가의 감정을 자제하는 앵그르를 좇아 프랑스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다.
드가와 르누아르의 회화는 부분적으로만 인상주의에 속할 뿐 인상주의 회화는 들라크루아의 과격한 색의 사용에서 진전된 경향이다.
고갱은 중간 입장을 취하지만 성격상 들라크루아의 회화에 기울어져 있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들라크루아의 <돈 주앙의 난파선 Shipwreck of Don Juan>(고갱 67)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들라크루아를 프랑스 화가 가운데 최고 화가라고 극찬했다.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 색의 명도와 심도의 강렬한 효과를 추구한 들라크루아는 세부 묘사나 극적인 표현의 문학적 서술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내면을 고양시켜주는 원천인 실재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렬한 색채와 풍속에서 감동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동방 취향의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들라크루아의 표현적인 색채를 찬양하면서 극적으로 묘사하는 회화방법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상상력에 탄복하며, 색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실재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는 기교에 감동했다.
슈페네커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들라크루아를 가리켜서 “그분에게는 야수의 기질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거라네. 그분의 필치는 늘 힘 있고 유연한 호랑이의 동작을 연상하게 하네”라며 감탄의 톤을 높였다.
캔버스 제조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도록 처가에서 직장을 마련해주었지만 괴팍한 성격 때문에 고갱은 처가와 불화했다.
처가 사람들은 그가 너무 거만하다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코펜하겐에서 지낸 기간은 고갱에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최악이었다.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사로 선생님,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까?”라고 적었으며, 1885년 5월에 다시 보낸 편지에서는 “저는 용기도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 고갱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밧줄에 목을 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건 오직 회화뿐입니다”라고 적었다.
“오직 회화뿐”이란 말에서 그가 순교자와도 같은 비장한 각오로 회화에 임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남은 생애가 그런 태도로 일관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미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물질적·정신적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고갱은 1885년 6월 메테와 네 자녀를 처가에 두고 여섯 살 난 클로비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메테에게 자신이 수집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팔아 생활비에 보태더라도 세잔의 작품만큼은 팔지 말라고 당부했다.
파리로 와서 클로비를 누이 마리에게 맡기고 그는 디에페에 있는 슈페네커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마리는 칠레인 상인 후안 우리베와 결혼했는데 고갱은 매형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석 달을 머물면서 그와 함께 작업하며, 노르망디 해변에 위치한 디에페로 가서 보트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바닷가 장면을 그렸다.
슈페네커는 실직한 뒤 학교에서 회화를 지도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지만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고갱이 그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갱은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1885년 8월에 런던으로 갔으며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고 10월 초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소장품 몇 점을 뒤랑 뤼엘에게 팔아 그 돈으로 카이 가 10번지에 작은 방을 세 얻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해 겨울에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다.
두창 혹은 마마라고도 하는 천연두는 공식적으로 1977년에야 퇴치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인이 가장 두려워한 전염병 중 하나였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5세(기원전 1156년에 사망)의 미라 머리에서 천연두에 걸린 증거가 발견된 걸 보면 이 질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를 위협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고갱은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서 하루에 5프랑을 벌었다.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자 건강이 나빠졌으며 클로비를 양육할 능력이 없어 어린 것을 메테에게 보내야 했다.
클로비는 매우 병약해 스물한 살 때 관절수술을 받은 뒤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메테가 클로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고갱은 죽을 때까지 아들의 죽음을 모르게 된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고갱은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