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의 갑작스런 죽음>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클림트는 1917년 빈 미술아카데미의 명예멤버로 받아들여졌지만 교수직에 임명되는 것은 교육부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그는 끝내 자신이 원했던 가르치는 일을 해보지 못한 채 그의 나이 56세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1918년 흑사병과도 같이 무서운 속도로 전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독감이 빈에도 번져서 많은 분리파 미술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해 1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클림트도 결국 스페인독감에 걸려 에밀리 플뢰게의 품에 안겨 2월 6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 비엔나 공방 창설자인 콜로만 모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림트의 임종>을 그린 실레와 그의 아내도 이 지독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림트의 시신은 히칭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클림트가 사망한 1918년 미술품 중개상 구스타브 네베헤이가 그의 유작들을 전시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이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건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1984년에 와서야 3천 점의 드로잉이 알리스 스트로블에 의해 세 권의 책으로 엮어져 한꺼번에 소개되었습니다.
그가 유작으로 남긴 드로잉은 5~6천 점으로 어림되며, 미완성도 있었고 대부분 에로틱 드로잉이었습니다.
그가 동일한 제목으로 습작한 드로잉들을 보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거의 완성한 <아담과 이브>와 <신부>를 위한 습작을 보면 주제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의 대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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