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유럽은 19세기 말 정치적·사회적으로


유럽은 19세기 말 정치적·사회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산업혁명과 경제 시스템이 현대화를 촉진하면서 중산층이 확산되었고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 전반은 소수의 귀족 중심으로 형성되어 이들에 의해 수립된 가치체계가 중산층에게도 강요되었다.
중산층 지식인들은 이 같은 봉건적 문화의 세습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새로운 문화를 추구하며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요구했다.
20세기로 넘어가는 유럽의 길목에는 이와 같이 선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부르주아와 중산층의 첨예한 갈등은 문화 전반에 걸쳐 변혁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새로운 문화 창출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을 밟게 된다.

고루한 사회에 대한 문인·철학자·예술가들의 날카로운 비판이 대중으로 하여금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으며, 문학과 철학에서 일어난 사상 혁명은 미술에서도 변혁의 물꼬를 텄다.
미술에서의 변혁은 파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1874년 모더니즘을 알리는 인상주의전은 전통과 단절하고 새 시대를 여는 분기점이 되었다.
모든 모던 아트 책이 인상주의에서 시작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모더니즘에는 많은 미술운동이 발생했다.
여러 예술가 그룹에서는 선언문을 만들어 새 패러다임이 될 만한 미술을 자신들이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모더니즘을 선언문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더니즘에서 상징주의·야수주의·표현주의·미래주의·신객관주의·다다주의·초현실주의·조형주의·신고전주의·추상표현주의·팝아트·미니멀리즘·개념주의 등이 특히 두드러졌다.

모네를 중심으로 전개된 인상주의는 기계적 기술에 반발하여 미적 기술을 표방한 운동으로, 카메라 발명 이후 회화의 개념을 다시 규정하려는 화가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은 빛에 의한 대상의 시각적 변화에 집착해 색을 잘게 토막 내서 사용했다.
선을 추구한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인상주의는 빛의 반사법칙에 따라 대상을 분열시키는 착색으로 혁명을 꾀했지만, 이는 과학에 근거한 사실주의 그 이상이 못 되었으며, 선에 의한 모방을 색에 의한 모방으로 탈바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진을 찍으면 인상주의 회화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제기된 이래 이천 몇 백 년 동안 ‘예술은 모방 mimesis’이라는 관념을 모범답안으로 여겨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에서 사람의 본성은 자연을 모방하고, 자기가 모방한 것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고, 흉칙한 모습을 그렸더라도 그것을 보고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란 그의 견해는 유럽 예술의 축을 이루는 전통으로 확고해졌다.

아트(Art)라는 말이 단지 모방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순수미술 Fine Arts (Beaux-arts)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와서였다.
19세기 중반 카메라의 발명으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을 따지는 문제가 더욱 시급하게 제기되었다.
한 치도 틀림없이 대상을 모사하는 회화의 기술적 모방이 카메라의 발명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회화의 존속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의가 요구되었다.
회화는 자신의 역할을 사진에 내주고 종말을 고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화가가 카메라의 눈처럼 대상을 정확하게 모사해야만 한다면, 이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말한 기계적 기술일 뿐 미적 기술은 아니다.

반 고흐는 편지에서 친구의 초상을 어떤 식으로 그리려고 했는지 설명했다.
최초의 단계에서는 닮게 그리지만 일단 ‘정확한’ 초상을 그린 뒤에는 색채와 배경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고 썼다.

나는 아름다운 금발을 과장한다. 오렌지색·크롬 옐로·레몬옐로를 칠하고 머리 뒤쪽으로는 평범한 방의 벽이 아니라 무한의 공간을 그려 놓는다.
팔레트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선명한 파란색으로만 단순한 배경을 만든다.
이 선명한 파란색을 배경으로 금발의 빛나는 머리는 창공의 별처럼 신비스럽게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아아,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과장됨을 만화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되랴?

반 고흐는 표현이란 말 대신 과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런 가능성을 더욱 깊게 탐구한 화가가 바로 뭉크였다.

‘회화는 표현이다’라고 말할 때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오래된 예술의 정의가 부정될 수 있다.
표현이 하나의 사조 ism가 된 것이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특별히 ‘표현’을 예술의 본질로 탐구하게 된 것은 예술을 단지 모방으로 본 서양미술의 편협한 사고를 부정한 혁명적 성과라 하겠다.
표현주의는 20세기에 피어나 예술 전반에 걸쳐 가장 혁명적 이념으로 부상했으며 오늘날에도 미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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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의 고치고 또 고친 <여인> 

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윌렘 드 쿠닝은 무nothing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출발점을 찾았다.
대가들의 그림들에서 그리고 상업용 포스터에서조차도 이미지를 빌려올 수 있었고 담배 광고에 나오는 여인의 립스틱 바른 입술도 빌려왔는데 이런 이미지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고쳤다.
그는 1950년부터 <여인 I Woman I>을 출발로 계속해서 여인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특허와도 같은 주제로 삼았다.
그는 1950년 6월부터 <여인 I>을 최소한 50번이나 고치고 또 고쳤다.
그가 더이상 고칠 수 없었던 것은 그 그림이 트럭에 실려 화랑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여인에 대한 주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유화물감보다는 잘 흐르는 아크릴릭을 선호했으며 유화물감에 물이나 솔벤트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마르는 시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폴록과 완전추상을 추구한 친구 화가들은 그가 인물을 그림으로써 추상표현주의를 버리고 신인간주의를 조장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여인>에 관해 드 쿠닝의 아내 일레인은 “그가 그린 흉포한 여인은 그와 동거중인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 살 때부터 그에게 생긴 이미지였다”고 말해 드 쿠닝이 어머니를 그림에서 사나운 여인으로 묘사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여인>은 네덜란드 여인이라기보다는 미국 여인처럼 보인다.
여인이 신고 있는 구두, 드레스, 립스틱, 메니큐어를 칠한 손톱들이 미국 여인임을 시사한다.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여인>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시끄러운 파티에서 소녀처럼 … 그저 앉아 있거나 그냥 그곳에 있거나 또는 웃는 모습인데 이는 미국에서 흔한 일이다.”

드 쿠닝은 “나는 단지 내 생각대로 그렸을 뿐이다”라고 했는데 <여인>은 일레인의 말대로 그의 무의식 세계에 있던 어머니의 이미지가 돌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드 쿠닝은 아내 일레인과 처제를 모델로 그리거나 신문·잡지에 소개된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운동경기에서 응원하는 소녀들이 점프로 몸을 허공에 띄우는 모습을 이그러진 형태로 그리기도 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면서 평평하고 넓게 칠했는데 이는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Chaim Soutine의 영향이었다.
그는 1950년에 모마에서 수틴의 그림을 보고 감동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수틴을 선택할 것이며 … 늘 그의 모든 그림에 매료되었다.
수틴은 그림의 표면을 재료처럼 그리며 물질처럼 보이게 구성한다.
그의 그림에는 피부 같고 변모하는 것들이 있다.”

그가 “수틴의 모든 그림”이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붉은 옷을 입은 여인 Woman in a Red Dress>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드 쿠닝이 그린 여인의 초상화에는 수틴의 화법이 다분히 응용되었을 것이다.
그는 다양한 색을 사용했는데 색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긴 것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하워드 존스 레스토랑에 갔을 때였다.
그는 스물여덟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이 물감처럼 보였다고 했다.


드 쿠닝은 1963년 BBC에 방영할 목적으로 대비드 실베스터David Sylvester가 제안한 인터뷰에 응하면서 말했다.

일부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내가 <여인>을 그렸다고 공격하지만 이는 그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완전추상 화가가 전혀 아닌 것 같다.
오늘날 일부 예술가들은 인물화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인물화’라는 말이 웃기는 징조의 뜻이 되고 있다.
네가 붓으로 색을 찍어 어떤 사람의 코를 그린다면 생각해 봐라 이는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웃기는 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이미지같은 걸 물감으로 그린다는 건 웃기는 일이 되는 건 인물화를 그려야 하느냐 안 그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화를 안 그리는 건 더 웃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욕망을 따라야 한다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여인>은 모든 시대에 그려진 여인과 관련이 있고 난 아마 그런 데서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난 과거와 같은 식으로 여인을 그릴 수는 없었다.
내가 생각한 건 말할 가치도 없는 선, 색, 형상들에 대한 구성, 배열, 관련성, 명암을 제거하는 가운데 그려야 하겠다는 것이다.
난 여인의 모습을 캔버스 중앙에 그렸는데 약간 옆으로 그려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난 두 눈, 코, 입 그리고 목이 있는 여인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부학적 구조를 생각하니 거의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점차 버리게 되었다.
난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았으며 이제 생각해보니 멋진 아이디어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예술가들이 특별히 멋진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마티스의 <붉은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 Woman in a Red Blouse>을 생각해 봐라.
그게 어디 멋진 아이디어냐!
또는 입체주의자들의 그림을 생각해 봐라.
이제와서 생각하면 한 오브제를 많은 각도에서 바라본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구성주의자들의 그림도 마찬가지로 웃긴다.
그들이 그런 아이디어를 가진 것이 좋았던 건 그런 그림들이 그들을 대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상·비너스·누드로서의 여인은 그려지고 또 그려져왔다.
렘브란트는 주름이 있는 늙은 남자를 그리기를 원했고 그 늙은이가 그에게는 그림이었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유로 그림을 그린다.
그들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꽉 쥐기를 원한다.
몬드리안을 보자.
그는 대단한 예술가이지만 그의 아이디어들과 순수 조형적인 신조형주의에 관한 이론을 보면 일종의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미래의 인생과 미래의 도시를 볼 수 있었다.
난 미래의 도시를 보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난 현재 살아 있는 데에 완전히 만족스럽기 만하다.


내용은 플래쉬 라잇에 직면하듯 흘끗 보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은 매우 엷은, 엷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인의 모습을 그릴 때 나는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을 생각했는데 거트루드 스타인의 저서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날 어떻게 좋아하죠?”라고 묻는 그 여인을 생각했다.
난 이런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그림이 어떻게 달라질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자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라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은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나는 특별한 느낌을 나타내려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와서 그림들을 보니 요란스럽고 사나워보인다.
그림이 우상에 대한 아이디어와 신탁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떠 떠들어대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그런 식으로 인생을 관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그리는 걸 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나는 입을 많이 잘라냈다.
첫째, 나는 모든 여인에게서 입이 나타나야 만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건 동음이어의 익살 같았을 것이다.
아마 그건 성적이었을 것이다.
여인의 모습을 그리면서 난 입 부분을 많이 잘라내면서 입이 있어야 할 곳에 입을 그렸다.
입은 항상 아주 아름답게 그려졌고 내가 그리려는 대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왜 입을 그런 식으로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메소포타미아의 우상들처럼 늘 뻗뻗하게 선 채로 자연의 힘에 놀라워하여 사람들과의 문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입을 드러내고 히죽 웃는 그런 여인을 내가 생각했을런지 모른다.

난 의식적으로 웃는 입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손이라던가 제스처 등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지 못했고 여러 번 실패했다.
어떤 식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니까 나중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성공할 것이란 자세로 그렸으며 그것이 그저 환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어떻게 훌륭한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난 훌륭한 그림 만들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이건 정말로 훌륭한 그림이다” 혹은 “완전한 작품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난 훌륭한 그림 만들기에 관해 전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건 내 성질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완전함이란 생각으로 작업하지는 않았지만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관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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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들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유해는 그곳 가톨릭 공동묘지로 옮겨졌으며 십자가 아래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912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였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들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박물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고갱의 타계소식이 파리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임을 알아본 볼라르는 그동안 구입해온 약 100점의 작품과 드로잉을 1903년 자신의 화랑에서 소개했다.
그는 투자면에서 고갱의 작품을 사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몇 년 전부터 다른 화상들이 소유한 고갱의 작품을 구입해왔다.
볼라르는 1906년 그해 창설된 가을전 Salon d’Automne을 통해 고갱을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무려 227점을 소개했다.
1906~7년에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회고전이 개최되었고 1908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고갱은 먼저 타계한 반 고흐와 함께 후기인상주의의 대가 한 쌍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고갱이 대중은 자기에게 빚이 없지만 화가들이 자기에게 빚이 있다고 주장한 이유는 창작을 위한 예술가의 자유를 자신이 한껏 확장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순진한 표현, 유연한 선의 사용, 밝은 색의 사용, 색들의 대비, 이차원적 화법, 추상에 대한 탐험 등은 그가 확장시킨 예술가의 자유에 대한 구체적인 것들이었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불리는 마티스와 피카소는 자신들이 원시주의를 20세기 미술에 소개했다고 내세웠지만 원시주의를 먼저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고갱이었다.
훗날 『태고의 존재』, 『묘석』, 『르네레』 등의 저서를 남긴 빅토르 세갈렌은 스물다섯 살 때 해군 군의관의 신분으로 고갱이 사망한 이듬해 아투오나에 찾아가 고갱의 ‘쾌락의 집’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글을 통해서 고갱이 마르키즈 군도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장-폴 고갱은 괴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인간을 묘사하는 데 충분한 그 어떤 도덕적·지적·사회적 범주에도 끼워 넣을 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범속한 무리에게는 판단이 곧 규정을 의미한다.
당신은 존경받는 사업가이거나, 청렴결백한 공직자이거나, 재능 있는 화가이거나, 가난하지만 정직한 보통 사람이거나, 양가집 규수다. 당신은 ‘예술가’일 수도, 심지어는 ‘위대한 예술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까다롭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범주화에 필요한 상투적 문구가 바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갱은 괴물이었다.
철저하고 오만한 괴물이었다.
한 가지 면에서만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신체 에너지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맴돈다.
일상의 나머지 부분(집안 일, 의례적인 방문, 의무감)에서 그들은 전통적이며 평범하다.
이는 기질의 문제, 육체적인 타성의 문제다.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격정적인 작가가 왜소한 교회 관리인처럼 생겼을 수 있다.
천재가 반드시 빈틈없고 정확한 사람처럼 보이라는 법은 없다.
고갱은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말년의 그는 야심에 차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으로 보였다.
그의 가슴은 올바름을 좇았지만 아무런 보답이 없었다.
그는 본인들이 마다하는데도 약자를 도우려고 했다.
도도했지만 남들의 의견과 판단에 어린애처럼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원시적이었으며 거칠었다.
매사에 변덕스러웠으며 극단적이었다. …
고갱은 문둥병으로 죽지 않았다.
여하튼 그가 걸린 수많은 병명을 일일이 거론한다는 건 부질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는 단순히 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병은 내면의 갈등과 패배감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어린애 같은 갈등은 사소한 분쟁에 휘말린 이 숭고한 투사를 갉아먹었으며, 소송에서의 패배는 영광으로부터의 추락처럼 이 순수한 예술가가 감내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이제 섬의 황량한 심장부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곡은 저승사자의 길처럼 보인다.
부서진 축대 위의 키 작은 판잣집들은 자신들의 토착신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이제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서늘한 아침, 고갱도 그곳에서 죽었다.
고갱과 가까웠던 티오카라는 친구가 향기로운 꽃송이를 고갱의 머리에 두른 후 관습을 따라 고인의 몸을 모노이 기름으로 닦아낸 다음 구슬프게 뇌까렸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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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에서

윌렘 드 쿠닝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윌렘 드 쿠닝(1904~97)은 뉴욕에서 발흥한 추상표현주의 1세대에 속한다. 추상표현주의는 뉴욕화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이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유럽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도움이 컸다.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뛰어난다. 추상은 사물을 덜 모방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형태와 색채가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려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의 표현적 목적을 갖는 미술을 일컬어 추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장식미술도 추상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서구의 전통적인 미술 개념을 탈피한 20세기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추상표현주의는 동일한 양식을 취한 예술가들 그룹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기에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을 지칭하며, 이들 가운데는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인 작품을 제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하나로 묶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뉴욕화파 - 1940년대와 1950년대의 1세대 회화전’에는 뉴욕화파로 알려진 예술가 15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양식적인 일관성은 전혀 없었다. 활동 시기와 장소가 우연히 일치한 사실을 제외하면, 바넷 뉴먼, 라인하트, 로스코의 모노크롬과 클라인과 머더웰의 충동적이며 거의 서체에 가까운 작품, 잭슨 폴록의 물감뿌리기 작품, 드 쿠닝의 인물화, 상형문자와 같은 고틀립의 작품과 한스 호프만의 추상화를 하나의 화파로 묶은 것은 억지였다. 특히 드 쿠닝은 줄곧 형상을 추구했다.
드 쿠닝은 1904년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916~20년 상업장식회사에서 견습생활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조형예술 및 기술과학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갔을 당시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했지만 아슐리 고르키 및 추상표현주의 운동에서 활발히 활동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그룹에 가세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말기 입체주의로부터 유래한 보다 진전된 추상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드 쿠닝은 여러 기법으로 그렸다. 그의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알베르트 자코메티의 후기 이미지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는 1970년대까지 작품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자코메티와는 다르게 그리고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모습을 그렸고 특히 여인의 이미지를 기분 내키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그는 동시대 화가들 중 유일하게 인물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며 처음에는 남성을 나중에는 여성을 그렸다.
또한 고르키와 다른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유기적이고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들쭉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1948년까지 전시회를 열지는 못했지만 드 쿠닝의 곡선 형태를 담은 차분한 회색 색조의 추상과 모호하게 암시된 생물 형상적 형태는 1940년대 초 뉴욕화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뉴욕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 하에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속에 내재하는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자동주의 기법을 주로 이어받았다. 뉴욕 화가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가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으며,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1940년대 말경 뉴욕화파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하나는 드 쿠닝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여기에 속한 예술가들은 유럽의 제스처 회화에 해당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작품을 완성작이라기보다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과정 중에 있는 예술가의 내적 정신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여겼다. 뉴먼과 라인하트를 주축으로 한 또 다른 그룹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는 표현적이지 않았다.
드 쿠닝의 작품에는 피카소가 1930년대 말에 환상적인 분위기로 그린 작품들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기법을 개인적인 의도로 합성하면서 분석입체주의 방법으로 색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검정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폴록 62) 검정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당시 잭슨 폴록과 몇몇 화가들이 실험하고 있었다. 친구화가 존 그래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드 쿠닝의 작품을 보면 그의 말이 실감난다. 드 쿠닝은 입체주의의 영향에 관해 말했다.
“나는 모든 회화 경향 중에서 입체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재현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시적 구조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작가는 직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과거의 미술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보태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회화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요소들은 입체로부터 온 것이다. 입체주의는 흐름이었으나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드 쿠닝에게는 그림을 그릴 때 계속해서 고치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실존주의 조각가 자코메티가 사물을 그리고서 자꾸만 고치는 습관으로 인해 결국 실재보다 작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 말을 상기시킨다. 계속해서 고치는 드 쿠닝의 습관은 자코메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유한 방법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확고하게 단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확고한 형태는 적다. 난 밤새 바꿀 수가 있다. ... 나는 커다란 그림을 몇 주 동안 그리며 물감을 늘 젖어 있게 하는데 그래야 그림을 바꾸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같은 것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뜻이다.”
그는 대가들의 작품에서 그리고 상업용 포스터에서조차도 이미지를 빌려왔으며 담배광고에 나오는 여인의 립스틱 바른 입술도 빌려왔고, 그런 이미지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모호함은 그가 일부러 남기는 중요한 회화적 요소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그런 판단은 그의 작품에 깔린 미학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임을 알게 된다. 그는 “나는 우연히 취사선택하는 화가이다”라고 했다.
드 쿠닝은 사람을 주제로 그렸다. 그는 “한때 나는 사람의 모습을 붉은색이나 파란색으로 그리면서 그런 그림들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사람을 살색으로 칠할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1950년부터 <여인 I>(폴록 92, 91)을 출발로 여인의 이미지를 연속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 6월부터 <여인 I>을 최소한 50번이나 고치고 또 고쳤다. 그가 더 이상 고칠 수 없었던 것은 그 작품이 트럭에 실려 화랑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여인에 대한 주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는 유화물감보다는 잘 흐르는 아크릴릭을 선호했으며, 유화물감에 물이나 솔벤트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마르는 시간을 더디게 하여 고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드 쿠닝의 아내 일레인은 <여인>에 관해 “그가 그린 흉포한 여인은 그와 동거중인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 살 때부터 그에게 생긴 이미지였다”면서 드 쿠닝이 어머니를 그림에서 사나운 여인으로 묘사했음을 시사했다. 일레인의 말이 사실이라 하도라도 드 쿠닝의 여인들은 네덜란드인이기보다는 미국인처럼 보였다. 여인이 신고 있는 구두, 드레스, 립스틱, 그리고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 이 점을 암시했다.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여인>에 관해 적었다. “시끄러운 파티에서의 소녀처럼 ... 그저 앉아 있거나 그냥 그곳에 있거나 또는 웃는 모습인데 이는 미국에서 흔한 일이다.” 여인은 드 쿠닝의 잠재의식 속에 있던 이미지가 돌출한 것이다.
그는 다양한 색을 사용했는데 색채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긴 것은 아이스크림을 제조하는 하워드 존슨즈 레스토랑에서였다. 그는 스물여덟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이 물감처럼 보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자신의 미학을 쉽게 납득할 있도록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화가들이 특별히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몬드리안은 대단한 예술가이다. 그의 신조형주의적 착상을 보면서 너는 순수조형성을 보겠지만 난 그것들이 웃긴다고 생각한다. ... 나는 마음속에 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그리지는 않는다. 나는 나를 매료시키는 어떠한 것들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그림에서 나의 내용이 된다.”
드 쿠닝은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해 추상표현주의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비록 순수추상만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전 생애를 통해 표현주의에서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었다. 1980년 에두아르도 치이다와 함께 피츠버그 국제전에서 앤드류 W. 멜론 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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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에서

일본화의 영향

일본화는 1800년대 중반의 유럽 예술가들에게 폭넓게 영향을 주었다. 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때 항구를 통해 들어온 일본 공예품, 의상, 판화 사본들은 유럽인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1891년 평론가 로저 막스는 일본 미술은 모더니즘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으며, “일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었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일본 미술은 유럽인에게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마치 일본이 미술의 폭탄을 파리에 떨어뜨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모노를 입는 여인들의 수가 늘었고, 판화 사본을 벽에 장식하는 살롱과 카페가 늘었으며, 일본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인에게 우키요에 화파의 대가들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의 목판화는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들의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가 프린트의 발달로 대량생산되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구입해 수집했다. 빈센트 반 고흐(1853~90)도 일본 판화를 모사하며 일본 화가들의 화풍과 구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판화 사본을 구입했으며 그것들이 수백 점에 달해 얼마나 일본화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 벽은 일본 판화들로 장식되었으며 그것들을 그림 배경에 사용하기도 했다.
반 고흐는 히로시게의 <꽃이 핀 오얏나무>와 <비 오는 날의 다리>를 모사했다. 그가 1888년 4월에 그린 <꽃이 만개한 배나무>는 <꽃이 핀 오얏나무>를 응용하여 그린 것이며, 한 해 전에 그린 수채화 <람파르 근처 거리>는 <비 오는 날의 다리>를 응용하여 대각선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가 1890년에 그린 <꽃핀 아몬드나무>도 일본화의 영향 하에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1888년 8월 말에 <이탈리아 여인>을 그렸는데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경쾌한 작품이다. 모델은 카페 탬버렝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로 보이며, 여인의 넓적한 코와 큰 입술, 그리고 카네이션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일본화의 영향으로 여인의 성격을 나타내기보다는 장식적으로 그리면서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색들을 사용했다. 그림이 평편하게 나타난 것과 화면 위와 오른편 장식은 일본화의 영향이다.
1888년 여름 반 고흐가 아를에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의 모든 작품은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일본 미술은 본토에서는 쇠퇴하고 있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1887년 2~3월 카페 탬버렝에서 일본 화가들의 판화 전시회가 열렸을 때 반 고흐도 관람했다. 이 카페는 1885년 4월에 개점했다. 클리시 대로에 있는 이 카페의 여주인은 과거 모델을 한 적이 있는 아고스티나로 반 고흐의 애인이 되었다. 친구들의 말로는 반 고흐가 이 카페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작품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반 고흐는 예술가들이 주로 출입하는 이 카페를 자신이 모사한 일본 판화들로 장식했다. 그는 아고스티나의 초상을 <카페 탬버렝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여인>(고흐 244)이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오른편 가장자리 벽에 일본화가 걸려 있다. 그가 1887~88년에 그린 <페레 탕기의 초상>(고흐 225, 226)의 배경에도 일본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두 점의 초상화는 반 고흐가 탕기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린 것들다. 탕기는 클로젤에 미술품 재료를 파는 상점을 갖고 있었고 그곳은 화가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1841~1926)도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1876년에 <일본 소녀>를 그렸다. 실재 사람의 크기로 그린 이 작품의 모델은 카미유로 화려한 일본 의상 기모노에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 가발을 쓰고 관람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일본화를 모방한 것이다. 모네는 열일곱 살 때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했다. 카미유가 입고 있는 기모노와 둥근 부채는 일본 제품이며 포즈 또한 일본 여인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모네가 인물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하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린 것이다. 반 고흐가 1887년에 모사한 <고급매춘부(기생)>(열린미술관 174)의 포즈가 방향만 다를 뿐 모네의 <일본 소녀>와 유사하다.
모네는 이 작품을 포함하여 18점을 제2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다. 전시회는 1876년 4월 파리의 플레티에 가에 위치한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에 모네를 비롯하여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그리고 홍일점 여류화가 베르테가 주요 작가로 참여했다.
에두아르 마네(1832~83)가 1868년에 그려 그해 살롱전에 출품한 <에밀 졸라의 초상>(마네 131)은 자신의 작품에 호평해준 졸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에 걸려 있는 일본 씨름선수, <올랭피아>,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시선이 모두 졸라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름선수 판화는 쿠니아키의 것으로 <아와 지방의 씨름선수 오나루 토 나다에만>이다. 졸라는 그것들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벽을 장식한 그림들과 책상 위의 잡다한 의도적으로 올려놓은 오브제들을 통해 마네의 회화적 의도를 파악한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은 <라 지롱드>(1868.6.9)에 살롱전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이 작품은 인간에 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정물화에나 속한다”고 평했다. 르동은 마네가 사실적 화법을 사용했을 뿐 작품의 내용은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오브제들을 의도에 합당하게 연출하여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보수주의를 옹호한 후퀴에르는 잡지 <르 나시오날>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를 두둔하면서 조형주의를 창조한 마네의 지나친 자유를 비난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관망적이 아니며, 졸라가 입고 있는 바지는 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졸라에게 주었을 때 졸라는 그다지 흡족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화의 영향은 마네에게도 두드러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에서도 일본화의 영향이 엿보인다. 마네를 포함하여 유럽 화가들은 일본 판화를 연구하면서 독특한 요소들을 그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일본 대가들의 판화에 나타난 광택 있는 평면과 힘 있는 색,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가파르면서 날카롭게 각진 형태, 평면적인 디자인, 대담한 칼자국 등은 유럽 화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마네가 <거리의 가수>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거리의 가수>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 여가수를 묘사한 작품으로 살롱전에 받아들여졌다. 마네는 화실 근처 프티트폴로뉴 동네를 거닐다가 여가수가 카페 밖으로 한 발 내딛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림의 모델은 그가 선호한 빅토린 뫼랑이다. 빅토린은 마네의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는 가난한 여가수의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빅토린은 기타를 든 손으로 땅까지 닿는 기다란 드레스를 살짝 들어올렸고 버찌를 입가에 대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는데 입가의 붉은 버찌가 왼손에 들고 있는 노란 종이, 갈색, 회색, 초록색의 드레스와 대조가 되었다. 배경을 어둡게 하여 빅토린의 환한 얼굴이 뚜렷이 나타나게 했는데 이런 점은 마네 작품에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로서 그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연출이다.
당시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특히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유럽 화가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작품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작품의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화의 영향은 고갱의 작품에서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고 대각선으로 구성하는 데서도 발견되며,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한 데서 그가 일본 화가들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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