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에서

윌렘 드 쿠닝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윌렘 드 쿠닝(1904~97)은 뉴욕에서 발흥한 추상표현주의 1세대에 속한다. 추상표현주의는 뉴욕화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이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유럽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도움이 컸다.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뛰어난다. 추상은 사물을 덜 모방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형태와 색채가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려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의 표현적 목적을 갖는 미술을 일컬어 추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장식미술도 추상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서구의 전통적인 미술 개념을 탈피한 20세기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추상표현주의는 동일한 양식을 취한 예술가들 그룹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기에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을 지칭하며, 이들 가운데는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인 작품을 제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하나로 묶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뉴욕화파 - 1940년대와 1950년대의 1세대 회화전’에는 뉴욕화파로 알려진 예술가 15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양식적인 일관성은 전혀 없었다. 활동 시기와 장소가 우연히 일치한 사실을 제외하면, 바넷 뉴먼, 라인하트, 로스코의 모노크롬과 클라인과 머더웰의 충동적이며 거의 서체에 가까운 작품, 잭슨 폴록의 물감뿌리기 작품, 드 쿠닝의 인물화, 상형문자와 같은 고틀립의 작품과 한스 호프만의 추상화를 하나의 화파로 묶은 것은 억지였다. 특히 드 쿠닝은 줄곧 형상을 추구했다.
드 쿠닝은 1904년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916~20년 상업장식회사에서 견습생활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조형예술 및 기술과학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갔을 당시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했지만 아슐리 고르키 및 추상표현주의 운동에서 활발히 활동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그룹에 가세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말기 입체주의로부터 유래한 보다 진전된 추상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드 쿠닝은 여러 기법으로 그렸다. 그의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알베르트 자코메티의 후기 이미지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는 1970년대까지 작품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자코메티와는 다르게 그리고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모습을 그렸고 특히 여인의 이미지를 기분 내키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그는 동시대 화가들 중 유일하게 인물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며 처음에는 남성을 나중에는 여성을 그렸다.
또한 고르키와 다른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유기적이고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들쭉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1948년까지 전시회를 열지는 못했지만 드 쿠닝의 곡선 형태를 담은 차분한 회색 색조의 추상과 모호하게 암시된 생물 형상적 형태는 1940년대 초 뉴욕화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뉴욕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 하에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속에 내재하는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자동주의 기법을 주로 이어받았다. 뉴욕 화가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가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으며,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1940년대 말경 뉴욕화파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하나는 드 쿠닝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여기에 속한 예술가들은 유럽의 제스처 회화에 해당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작품을 완성작이라기보다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과정 중에 있는 예술가의 내적 정신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여겼다. 뉴먼과 라인하트를 주축으로 한 또 다른 그룹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는 표현적이지 않았다.
드 쿠닝의 작품에는 피카소가 1930년대 말에 환상적인 분위기로 그린 작품들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기법을 개인적인 의도로 합성하면서 분석입체주의 방법으로 색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검정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폴록 62) 검정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당시 잭슨 폴록과 몇몇 화가들이 실험하고 있었다. 친구화가 존 그래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드 쿠닝의 작품을 보면 그의 말이 실감난다. 드 쿠닝은 입체주의의 영향에 관해 말했다.
“나는 모든 회화 경향 중에서 입체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재현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시적 구조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작가는 직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과거의 미술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보태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회화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요소들은 입체로부터 온 것이다. 입체주의는 흐름이었으나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드 쿠닝에게는 그림을 그릴 때 계속해서 고치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실존주의 조각가 자코메티가 사물을 그리고서 자꾸만 고치는 습관으로 인해 결국 실재보다 작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 말을 상기시킨다. 계속해서 고치는 드 쿠닝의 습관은 자코메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유한 방법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확고하게 단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확고한 형태는 적다. 난 밤새 바꿀 수가 있다. ... 나는 커다란 그림을 몇 주 동안 그리며 물감을 늘 젖어 있게 하는데 그래야 그림을 바꾸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같은 것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뜻이다.”
그는 대가들의 작품에서 그리고 상업용 포스터에서조차도 이미지를 빌려왔으며 담배광고에 나오는 여인의 립스틱 바른 입술도 빌려왔고, 그런 이미지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모호함은 그가 일부러 남기는 중요한 회화적 요소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그런 판단은 그의 작품에 깔린 미학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임을 알게 된다. 그는 “나는 우연히 취사선택하는 화가이다”라고 했다.
드 쿠닝은 사람을 주제로 그렸다. 그는 “한때 나는 사람의 모습을 붉은색이나 파란색으로 그리면서 그런 그림들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사람을 살색으로 칠할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1950년부터 <여인 I>(폴록 92, 91)을 출발로 여인의 이미지를 연속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 6월부터 <여인 I>을 최소한 50번이나 고치고 또 고쳤다. 그가 더 이상 고칠 수 없었던 것은 그 작품이 트럭에 실려 화랑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여인에 대한 주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는 유화물감보다는 잘 흐르는 아크릴릭을 선호했으며, 유화물감에 물이나 솔벤트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마르는 시간을 더디게 하여 고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드 쿠닝의 아내 일레인은 <여인>에 관해 “그가 그린 흉포한 여인은 그와 동거중인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 살 때부터 그에게 생긴 이미지였다”면서 드 쿠닝이 어머니를 그림에서 사나운 여인으로 묘사했음을 시사했다. 일레인의 말이 사실이라 하도라도 드 쿠닝의 여인들은 네덜란드인이기보다는 미국인처럼 보였다. 여인이 신고 있는 구두, 드레스, 립스틱, 그리고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 이 점을 암시했다.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여인>에 관해 적었다. “시끄러운 파티에서의 소녀처럼 ... 그저 앉아 있거나 그냥 그곳에 있거나 또는 웃는 모습인데 이는 미국에서 흔한 일이다.” 여인은 드 쿠닝의 잠재의식 속에 있던 이미지가 돌출한 것이다.
그는 다양한 색을 사용했는데 색채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긴 것은 아이스크림을 제조하는 하워드 존슨즈 레스토랑에서였다. 그는 스물여덟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이 물감처럼 보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자신의 미학을 쉽게 납득할 있도록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화가들이 특별히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몬드리안은 대단한 예술가이다. 그의 신조형주의적 착상을 보면서 너는 순수조형성을 보겠지만 난 그것들이 웃긴다고 생각한다. ... 나는 마음속에 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그리지는 않는다. 나는 나를 매료시키는 어떠한 것들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그림에서 나의 내용이 된다.”
드 쿠닝은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해 추상표현주의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비록 순수추상만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전 생애를 통해 표현주의에서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었다. 1980년 에두아르도 치이다와 함께 피츠버그 국제전에서 앤드류 W. 멜론 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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