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잭슨 폴록의 정신과 물감 흘리기 기법


잭슨 폴록(1912~56)은 1912년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고, 1925년부터 남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는 동안 잠시 조각에 관심을 가졌지만 1930년 가을 열여덟 살 때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미국인의 삶의 특색을 그린 토머스 하트 벤턴으로부터 수학하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0년대 초 미국 예술가들에게 멕시코의 벽화예술가들의 영향이 대단했으며 폴록은 1936년 형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1896~1974)의 조수가 되어 드로잉 없이 물감을 직접 칠하며 그리는 대담한 기법을 영향 받았다.
시케이로스는 여러 각도를 고려하여 개선한 복합 원근법과 왜곡의 방법을 이용하여 환영적인 장치들을 만들고, 이를 포토몽타주 기법과 함께 벽화에 응용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메시지가 주는 충격을 확대했다.
서른아홉 살의 시케이로스는 1935년과 이듬해에 뉴욕에 실험 공방을 열고 새로운 합성 재료와 공업 재료들, 포토몽타주 및 물감 뿌리기 기법을 선보였다. 폴록은 자진해서 이 실험 공방에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회화방법을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시케이로스는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연히 나타나는 이미지를 창조했으며 이런 방법이 폴록을 감동시켰다.
그해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시케이로스의 방법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법을 실험했다.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단계에 불과했던 폴록의 물감 흘리기 기법은 이런 기법으로 폴록이 유명해진 후 평론가들로 하여금 언제, 그리고 누가 먼저 사용했느냐 하는 문제를 삼아 다투어 글을 발표하게 했다.
폴록이 정확하게 이 기법을 언제 누구로부터 발견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겠지만 부분적으로 시케이로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폴록은 피카소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폴록 19, 20)를 보고 입체주의의 효과를 알았다.
폴록은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리기 시작했으며 <게르니카>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 <남자, 황소, 새>(폴록 21)이다.
황소는 조국 스페인에서 투우 관람을 즐긴 피카소가 선호한 주제였다.
폴록은 피카소가 스물여섯 살 때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고 “내게 지독하게 중요한 그림이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에서 예술과 무의식세계의 직접적인 관계를 보았다.
폴록에게는 정신분열 증세가 있었으므로 더욱 그런 점에 매료되었다.

1938년 폴록의 정신분열이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폭음했으므로 증세는 돌발적이었으며 위험했다.
학문적 성과를 위해 폴록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려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었는데 조셉 헨더슨으로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였다.
9년 동안 유럽에서 유학하고 1938년에 귀국한 그는 1939년 5월부터 폴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폴록을 만난 후 헨더슨은 폴록이 네 가지 개성인 직관, 느낌, 감각, 사고의 기능이 통합적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그의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을 보고 그의 무의식세계를 탐험했다.(폴록 28)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보았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헨더슨은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하여 그의 드로잉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무의식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기간은 18개월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로 그린 그림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작품들은 훗날 ‘정신분석적 드로잉’으로 불리면서 학자들 사이에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대 중반까지 폴록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세 점을 그렸는데 <속기술적 모습>, <달 여인>, <남성과 여성>이었다.이것들은 좀더 복잡하고 고유한 작품이다.
<속기술적 모습>은 반추상의 이미지로 비스듬히 기댄 누드화였다.
몇몇 평론가들은 그 작품이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두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견해에도 타당성이 있었다.
이것은 피카소와 미로의 영향과 생리적 현상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작품이다.
폴록의 작품은 나중에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들었다.
원래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모마의 관장 알프레드 바가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화에 붙인 말이었고 이 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반부터였다.

폴록은 1943년에 <암이리>를 그렸다.
암이리는 로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로마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이리이다.
<암이리>는 이런 신화를 참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두 동물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 동물은 황소로서 피카소의 황소 그림을 연상하게 하며, 오른쪽의 것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미국의 5센트짜리 동전에 그려져 있는 들소처럼 보인다.
두 동물은 두툼한 붉은 화살로 황소의 심장으로부터 들소의 머리까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화살은 인디언 회화에서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암이리>는 유럽의 황소와 미국 들소의 만남이었고 두 놈은 인디언의 화살 같은 것에 맞아 폴록의 전리품이 되었다. 
폴록을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물감 흘리기 기법은 1946년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1946년에 여러 가지 물감을 실험했다.
유채 외에도 상업용 에나멜 페인트, 배관공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페인트, 그리고 가정용 페인트도 사용했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마치 무대에서 행위를 하듯 그렸으므로 그의 그림을 액션 페인팅이란 명칭으로 부른 것은 잘 어울렸다.
그는 유채물감을 묽게 타서 깡통에 담고 막대기로 물감을 젓다가 허공에 휘휘 저으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했다.
그러면 캔버스에는 아주 가는 선들이 나타났으며 물감이 막대기에서 거의 흘러내렸을 때는 더욱 가는 선들이 나타났다.
이런 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소개하자 평론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94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폴록은 말했다.
“난 회화기법에 관해 어떤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법은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절로 생기지만 기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폴록 작품의 특징은 올오버 회화이다.
이는 전체 화면 내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을 두지 않으며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전통적 의미의 구성을 포기한 양식이다.
폴록의 그림은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려져 있다.
이후 이런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또한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를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들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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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에서 발췌

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레디메이드, 그리고 개념미술


개념미술은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뒤샹의 익살, 우연의 선택, 레디메이드의 선정에서 개념미술이 예견되었다.

뒤샹은 1911년 10월에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그리기 시작했다.이는 그의 자화상으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부터 루엥으로 가는 기차를 탄 모습이다.
뒤샹은 이 작품에서 젊은이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고 슬픔 또한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채 입체주의의 영향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했다.
제목을 슬픈 젊은이라고 한 것은 사랑하는 수잔이 8월에 결혼한 후 처음 가족을 만나기 위해 12월에 루엥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슬픈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뒤샹은 재담가였다. 그에게는 지성적인 익살이 있었으며, 삽화를 그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학적인 요소를 그림에 삽입할 줄 알았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런 요소가 발견된다.
그는 말했다.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에서 이미 유머를 그림에 삽입하려는 나의 의도가 드러났다.
아폴리네르가 그것을 ‘기차에 있는 우울함’이라고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이가 슬픈 이유는 기차가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뒤샹은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렸는데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작품이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순수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뒤샹은 코믹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유머를 순수미술에 도입하며 이런 점이 문제를 야기했다.
그가 1912년에 그린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훗날 <큰 유리>로 완성시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 관한 드로잉도 유머를 삽입한 것들이다.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에서 ‘조차’란 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뒤샹은 훗날 응답했다.
“나는 제목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그 시기에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단어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콤마를 찍은 후 ‘조차 even’라고 적었는데 부사 ‘조차’는 의미가 없으며, 제목 또한 무관하다.”
그는 ‘반감각적 antisense’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적인 문장이 되게 한 것이며 특별히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뒤샹은 1914년에 <정지들의 네트워크>를 그렸다.
그는 많은 사람이 우연을 좀더 조직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가 우연을 사용했음을 본다.
그는 우연을 개인적인 것으로 말했다. “너의 우연은 나의 우연과 같지 않지 않느냐? 내가 던진 주사위와 네가 던진 주사위는 같지 않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는 너의 잠재의식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 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개념미술을 가능하게 했다.
레디메이드ready-made는 뒤샹이 대량생산된 기성품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미술품으로 소개한 데서 비롯한 명칭이다.
기성품은 그의 선정에 의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격리되고 동일한 종류의 대량생산품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그 기능을 박탈당함으로써 일종의 실존적 개성과 물신 숭배적 특질, 그리고 혼란스러운 위엄을 얻게 된다.
뒤샹이 처음 선정한 레디메이드는 1913년과 이듬해 제작된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이다.
그가 선정한 오브제는 놀랍게도 불안한 위엄, 대담한 고독을 지니게 되어 관람자는 두려움과 분노 혹은 웃음으로 반응하게 된다.


몇몇 팝아트 예술가와 누보 레알리즘 예술가들이 훗날 아상블라주에 사용한 기계 생산물과 폐기된 기계의 일부를 사용했는데, 이는 뒤샹의 레디메이드와는 그 미학이 다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갖는 충격 효과는 그것들이 격리되었다는 점과 기능적으로 제작된 오브제에서 완벽하게 그 기능을 박탈했다는 점에서 생긴 것이다.

뒤샹 자신도 레디메이드와 발견된 오브제를 구별하면서, 발견된 오브제가 미적 특질이나 아름다움, 독특함으로 인해 선택되거나 발견된 데 비해 레디메이드는 개성이나 독특함이 없는 대량생산품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예술가의 취향이 개입되지만 레디메이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뒤샹의 지성적인 익살, 의도적인 우연, 그리고 레디메이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개념미술의 예견했다.
사상이나 개념을 미술품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하며 눈에 보이는 미술품이 아닌 기록의 형태를 우선적으로 완성품으로 보는 개념미술의 가능성은 뒤샹이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소변기 <샘>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는 작품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기록으로서 남겼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 소변기는 그의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변용되었다.
작품에 자기 지시성이 있어 평론가의 식견이 이를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삼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샘>은 개념적인 작품이었다.
과거에는 작품을 성립하는 판단기준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미리 존재했지만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작품을 규정하는 기준을 예술가 스스로 제시할 수 있음을 시위했다.
<샘>은 최초의 개념미술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로베르타 스미스는 1974년에 발간된 <현대미술의 개념>에 기고한 ‘개념미술’에 관한 글에서 적었다.

“뒤샹은 창조적인 행위를 여러 가지 오브제나 활동에 ‘미술’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극히 기본적인 행위로 바꾸어놓았다.
그에게 있어 창작은 단순하고 지적이며 많은 부분 임의적인 ‘결정’의 결과이다.
뒤샹은 다양한 방식의 언어적, 시각적 장난과 의도적인 우연, 평범하고 하찮은 사물, 타인과 자신의 미술을 겨냥한 도발적인 제스처,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작품의 수단과 주제로 사용했다.”

인습 타파의 태도로 활약한 뒤샹을 따른 예술가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그들은 자신의 배설물을 담은 양철통을 미술품으로 전환시킨 피에로 만초니, 1958년 파리의 화랑에서 텅 빈 전시장을 소개한 이브 클랭 등이 있다.
그러나 개념미술이 인식 가능한 운동이 되어 그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61년 반예술을 표방한 미국인 헨리 플린트(1940~)가 개념미술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이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아트포럼>에 솔 르윗의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이 발표된 후부터였다.
르윗은 적었다.

“개념미술에서 아이디어나 개념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
모든 계획과 결정이 사전에 행해지며 작품의 제작은 형식적인 것이다.
아이디어는 미술을 제작하는 기계가 된다.”

개념미술의 첫 주요 전시회는 1969~70년 런던, 뉴욕 등지에서 열렸고, 1970년대 초에 당시 유행하던 아르테 포베라, 신체미술, 대지미술, 퍼포먼스 등의 미술운동과 종종 부분적으로 겹치면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경향들은 모두 미니멀아트의 형식주의와 상업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일부로서 등장한 것이다.
미국인 로버트 배리(1936~)의 <텔레파시에 의한 작품>(1969)은 “전시하는 동안 나는 언어 혹은 이미지로는 불가능한 일련의 사고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을 텔레파시에 의해 전달하려고 한다”는 진술로 이루어졌다.
배리는 적었다.

“세계는 흥미로운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오브제를 추가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순히 시간이나 공간에 의한 사물의 존재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떤 개념미술은 독일인 한스 하케(1936~)의 작품처럼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많은 경우 개념미술작품은 언어에 대한 난해한 분석이나 로버트 배리의 작품처럼 예술가의 사적인 기이한 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개념미술의 대표자와 찬미자들은 이런 행위를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시와 그 경계를 도발적으로 확장하려는 것으로 간주한다.
로버트 모리스는 1970년에 “지루한 오브제 생산기술로부터 미술의 힘을 분리하는 것은 ...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서의 미술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키스 본은 1972년에 이런 인식에 반발하며 말했다.

“개념미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단지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현실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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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에서 발췌

초콜릿 분쇄기와 아홉 개의 능금 주물


뒤샹은 루엥 대성당 북쪽에 있는 보봐시느 거리를 걷다가 가멜링의 다과점 진열장에 있는 초콜릿 분쇄기를 보았다.
어렸을 적에도 그는 그 기계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북처럼 생긴 둥근 것이 세 개 달린 초콜릿 분쇄기는 천천히 회전하면서 코코아와 식물성 기름, 설탕을 갈고 섞어서 브라운색으로 반죽하는데 기계 아래에서 지피는 불로 그것들을 용해시킨다.
뒤샹은 말했다.
“나는 늘 회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생을 통해서 알았다.
회전 ... 그것은 일종의 자아도취이며, 자아만족, 또는 자위행위이다.
기계는 원을 그리며 회전하면서 놀랍게도 초콜릿을 생산해낸다.
난 그 기계에 매료되었다.”

뒤샹은 1913년 2월에 <초콜릿 분쇄기 No. 1>란 제목으로 그 기계를 유화로 그렸는데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위한 습작이기도 했다.
초콜릿 분쇄기를 떠받치는 테이블의 다리 모양을 루이 15세의 양식으로 하고 상업용 프린트 전문가로 하여금 금색으로 제목과 제작일자를 가죽에 프린트하게 해서 그림 오른쪽 구석에 풀로 부착했다.
그는 그것을 “새로운 기교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그것은 <커피 분쇄기>보다 더욱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기계를 실제로 드로잉하면서 뒤샹은 “문제는 어떻게 드로잉하느냐 하는 것이며, 동시에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큰 유리>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는 “과학의 정밀하고 정확함”을 미술에 투입시키려고 했으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은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기가 말한 방법으로 “유쾌한” 작품 <큰 유리>를 그린 것이다.

이 시기에 뒤샹은 프랑스 수학자인 앙리 포잉카레와 파스칼 에스프리 주프르의 저서들을 읽었으며, 수학에 관심이 많아 수학을 통해서 사차원을 이해하려고 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르네상스 화가들은 삼차원의 환상을 이차원으로 표현했다면서 현대 예술가들은 실재의 모방이 실재 자체를 나타내려 한다고 주장했으며 뒤샹이 그의 주장에 동감을 표했다. 

뒤샹은 1913년 2월에 <초콜릿 분쇄기 No. 1>란 제목으로 그 기계를 유화로 그렸는데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위한 습작이기도 했다.
초콜릿 분쇄기를 떠받치는 테이블의 다리 모양을 루이 15세의 양식으로 하고 상업용 프린트 전문가로 하여금 금색으로 제목과 제작일자를 가죽에 프린트하게 해서 그림 오른쪽 구석에 풀로 부착했다.
그는 그것을 “새로운 기교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그것은 <커피 분쇄기>보다 더욱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기계를 실제로 드로잉하면서 뒤샹은 “문제는 어떻게 드로잉하느냐 하는 것이며, 동시에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큰 유리>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는 “과학의 정밀하고 정확함”을 미술에 투입시키려고 했으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은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기가 말한 방법으로 “유쾌한” 작품 <큰 유리>를 그린 것이다.

이 시기에 뒤샹은 프랑스 수학자인 앙리 포잉카레와 파스칼 에스프리 주프르의 저서들을 읽었으며, 수학에 관심이 많아 수학을 통해서 사차원을 이해하려고 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르네상스 화가들은 삼차원의 환상을 이차원으로 표현했다면서 현대 예술가들은 실재의 모방이 실재 자체를 나타내려 한다고 주장했으며 뒤샹이 그의 주장에 동감을 표했다. 

뒤샹은 1913년 봄 피카비아를 자주 만나며 뉠리의 작업실에서 <큰 유리>를 위한 습작에 몰두했다. 10월에는 작업실을 몽마르트르에서 멀리 떨어진 생히폴리트로 옮겼다.
그때부터 그는 미국인 작가 스타인과 교류했다.
스타인은 뉴욕에 있는 침구에게 보낸 편지에 “뒤샹은 영국 청년처럼 보이는 젊은이인데, 사차원에 관해 아주 열심히 말하더군”이라고 적었다.
이 시기에 뒤샹의 정신은 복잡했는데 1913년에 쓴 노트에는 “사람이 미술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엇이라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거기에는 기교, 훈련, 의도 등 정신적인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 그는 “미술에 있어서 전통적인 표현방법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그는 <세 기본 정지>를 제작한 후 이 작품에 대해 “나의 미래에 있어서 주요 요인이 되었다”면서 말했다.
“그것은 중요한 미술품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로 하여금 전통적인 표현방법으로부터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세 기본 정지>는 과거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한 첫 번째 행위였다.”

뒤샹은 1914년에 <정지들의 네트워크>를 그렸다.
그는 1914년 이전에 많은 사람이 우연을 좀더 조직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우연을 사용했음을 본다.
그가 우연의 요소를 사용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우연을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말했다.
“너의 우연은 나의 우연과 같지 않지 않느냐? 내가 던진 주사위와 네가 던진 주사위는 같지 않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는 너의 잠재의식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 된다.”
그의 입에서 잠재의식이란 말이 나온 것이 주목되는데,
1900년에 출간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몽>은 지성인들에게 잠재의식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잠재의식 세계의 자물쇠를 풀었으며, 그에 의해서 잠재의식의 세계는 또 다른 실제의 세계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는 1914년에 여전히 <큰 유리>에 몰두하면서 2월에 <초콜릿 분쇄기 No. 2>를 그렸는데, 한 해 전에 그린 <초콜릿 분쇄기 No. 1>에 비하면 더욱 기계적인 드로잉이다.
이것은 <초콜릿 분쇄기 No. 1>와 함께 1915년 3월 8일부터 4월 3일까지 뉴욕의 캐롤 화랑에서 개최된 제3회 동시대 프랑스 미술전에 소개되었다.
둘 다 월터 아렌스버그가 소장하다가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기증했다.

독일은 1913년 9월 7일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와 우호동맹조약을 맺었다.
이는 전쟁이 발발할 때는 삼국의 군대가 연합군을 형성하고 군사적 행동을 일치하기로 약속한 것을 뜻했다.
이 조약이 맺어진 이듬해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징집되었고 뒤샹의 형들도 징집되었다.

뒤샹은 이 시기에 여전히 <큰 유리> 제작에 몰두했다.
한 달 동안 유리에 작업한 후 <아홉 개의 능금 주물>을 제작했는데 남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것을 제작하기 전에 드로잉 두 점을 습작하면서 제목을 <유니폼과 제복들의 공동묘지>라고 붙였는데,
공동묘지라고 한 것은 드로잉할 때 주물들의 모양이 관처럼 보였기 때문인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드로잉에는 여덟 개의 주물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신부, 백화점의 배달소년, 헌병, 흉갑기병, 경찰관, 청부인, 제복을 입은 고용인, 그리고 그릇 닦는 소년이었다.
두 번째 드로잉에서 그는 <기본 정지>에서 사용한 모세관 튜브를 계속 하면서 철도역장을 보태어 아홉 개의 주물이 되도록 했다.
아홉 개의 주물은 <큰 유리>의 독신자들이기도 했다. 
 
뒤샹은 아홉 개의 주물에 관해 말했다.
“내게 아홉이란 수는 마적 숫자와 같았지만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마술이란 뜻은 아니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숫자 1은 개체를 뜻하고, 2는 한 쌍을 뜻하며, 3은 다수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2천만이란 숫자나 3이란 숫자는 내게 같은 의미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유사한 형태들의 수는 그러므로 셋을 넘을 경우 다수를 뜻했다.
특기할 점은 <정지들의 네트워크>에서 실험한 우연에 의한 드로잉이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에 보태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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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 미술>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저술을 통한 이론과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와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는 20세기 전반기의 추상 미술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들은 자연의 풍경이나 대상의 표현적 특징을 재현하지 않고 망막에 투영되는 실제 이미지에 상관하지 않은 채 회화 도구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들이다.
표현적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선, 면, 색 등과 같은 회화 요소를 과학적으로 심리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했다.
재현적 표현을 버리고 기하적 원근법을 없애며 색채와 형태의 한층 심오한 감각적 특성을 명확하게 다룸으로써 회화 공간을 창조했다.
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갑자기 떠오르는 일종의 직관을 통해 회화와 자연은 각각 원리와 목적이 다른 두 개의 분리된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회화의 자율성에 관한 믿음, 즉 회화는 외부세계와의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본래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거나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풍경화의 경우 폴 세잔과 마찬가지로 자연 앞에 서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바라본 장면을 그리는 것으로 세잔의 말대로 “개처럼” 바라본 자연, 혹은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듯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 단순히 자연의 형태와 색채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1909년 여름부터 ‘즉흥’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인물, 건물, 산 등의 형태가 불분명하다.
그것들은 기호의 기능을 한다. ‘즉흥’이란 제목은 가능한 한 자발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의식적인 제어작용을 극소화한 상태에서 형태들을 창조했음을 시사한다.
‘구성’ 연작은 ‘즉흥’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으로 확장시킨 것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기하적 추상과는 구분되며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과정이며, 특기할 점은 기하적 추상과 칸딘스키의 비정형 추상을 적대적인 양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상’ 연작을 예로 들면, 칸딘스키가 1911년 1월 2일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회에 다녀온 후에 그린 <인상 III - 콘서트>가 있는데, ‘인상’은 외부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다.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인 인상을 의미한다.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한 것으로 형태와 색채를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음악에 대한 상징으로 나타내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위해 흰색으로 보완한 것이다.
검은색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이며 왼편 여러 개의 작은 검은 곡선은 무대 가까이서 음악을 듣는 청중을 상징한 것이다.
피아노를 가운데로 양편의 흰 기둥은 실제 기둥이 아니라 소리기둥의 은유적 표현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노란색은 콘서트홀을 가득 매운 쇤베르크의 소리이다.
노란색은 소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그는 1909년에 무대 구성에 관한 글에서 <노란 소리>란 제목을 사용했다.
<인상 III - 콘서트>는 서로 영향을 주는 회화와 음악의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이런 공감각은 20세기 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칸딘스키는 악기의 소리를 색채와 연관시키면서도 음악과 회화에는 자체의 특정한 자원이 있다고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칸딘스키는 신지학과 강신술에 심취해있었으며, 인지학 사상가 루돌프 스타이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신지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소장한 시인 스테판 조지를 중심으로 한 뮌헨 서클에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는 내면의 경험 혹은 정신적 현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일에 몰두했으며 <즉흥 21a>는 이런 환경 속에서 창안된 것이다.
1911년에 제작한 작은 유리그림 <태양과 함께>를 변형시키면서 흡족했는지 아니면 더 진전시키고 싶었는지 1913년에 <단순한 기쁨>이란 제목으로 다시 유화로 제작했다.
세 작품이 약간 다른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나 유리그림의 조형 언어가 사용했으므로 추상에 대한 그의 의도와 과정을 알 수 있다.

<태양과 함께>에 나타난 가파른 이중 언덕은 그가 종종 사용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로 러시아 건축물을 올려놓기 위한 회화적 언덕이다.
왼편에 세 기사가 말을 몰고 언덕을 올라가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있으며 세 사람이 탄 배가 물결을 가르고 호수를 지나고 있다.
하단 오른편에 반은 동물로 보이는 두 형상이 화면 안으로 들어선다.
이 작품은 새로운 정신적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칸딘스키의 묵시론적 관념의 세계이다.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즉흥 21a>를 보면 이해가 수월해진다.
그는 <태양과 함께>에 나타난 섬세한 색채가 마음에 들어 약 18개월 후 동일한 주제로 큰 유화 <단순한 기쁨>을 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즉흥 21a>와 <단순한 기쁨>보다는 <태양과 함께>에서 각각의 회화적 요소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본다.
<태양과 함께>의 상단 왼편 빛을 발하는 대각선으로 흰색을 칠해진 곳이 <즉흥 21a>에서는 붉은 태양이 삽입된 곳이다.
언덕 위에는 <태양과 함께>에서와 마찬가지로 둥근 지붕을 한 러시아 교회가 있다.
말을 몰고 언덕을 올라가는 세 기사는 여기에서 그리고 <단순한 기쁨>에서는 더욱 생략되었다.
노 젓는 세 사람의 모습도 역시 흐릿한 색으로 더욱 생략되었다.
<즉흥 21a>에서는 색을 문질러 흐릿하게 한 부분들이 많으며 <태양과 함께>에서의 밝은 색상들은 회색으로 덮어졌다. 
 
칸딘스키와는 달리 클레는 재현적 이미지를 남긴 작품에서 왜곡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왜곡은 추상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이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듯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태와 색채를 비자연주의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표현수단으로 숫자, 알파벳, 느낌표, 음악부호, 정지부호, 화살표, 별, 깃발, 눈, 심장 같은 형상적 상징적 추상적 기호를 많이 사용했다.
이런 기호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연과 결부된 한계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기호와 상징은 다의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하나의 논리적인 의미로 확정지어지지 않는다.
작품에 시적인 제목을 붙였으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클레는 <창조에의 고백>(1919)에서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다.

<급강하하는 새와 화살표>에서 급강하하는 새는 비행기처럼 보이며 그는 한 해 전에 <새-비행기>를 이런 형태로 묘사한 적이 있다.
비행기를 바라보며 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직사각형들을 연결시키면서 연결되는 부분에 점을 찍고 새의 다리를 그려 넣고 새의 머리를 달아 새도 되고 비행기도 되게 했다.
드로잉에서는 하단에 작은 화살표를 두 개 그려 넣었지만 수채화에서는 큰 화살표 세 개를 그려 넣어 하강의 방향을 가리키며 강렬한 인상을 주게 했다.
<하강하는 새>는 드로잉 <하강하고 활주하는 새>를 그린 후 구성을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는 전쟁 중 독일군 비행학교에 복무하면서 1918년 3월 8일 폭격수 게오르그 슈미트의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일기에 적었다.

“이번 주 나는 세 차례에 걸친 치명적인 사건을 목격했는데 한 사람은 프로펠러에 부딪혔고 두 사람은 공중에서 충돌했다. 어제는 네 번째의 사람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지붕 위로 거꾸로 곤두박질쳤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일 년 후 클레는 그날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며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하강하는 새의 모양을 모사하면서 비행기에 13이란 숫자를 적어 넣고 오른편에 하강하는 방향을 화살표로 크게 그려 넣어 하강의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시사한다.
숫자 13은 비행기에 적힌 넘버일 수도 있고 불운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화살표는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클레는 캐리커처 회화 작품도 많이 제작했으며, <배나무 아래의 남자>는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는 우리나라 속담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배나무 아래 한 사내가 두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아서 배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위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배가 막 그의 무릎에 떨어지려고 한다.
그가 노동 없이 결실을 거두려는 운을 따르는 사람을 묘사한 것인지 더 이상 젊지 않은 사람의 성적 갈망을 조롱한 것이지 확실하지 않은데, 붉은 점이 있는 배가 여성의 젖처럼 생겨 후자의 해석도 가능해보인다. 
나무와 인물 모두 붉은색, 오렌지색, 노란색으로 골고루 칠해졌고 나무 아래의 사람이 입고 있는 의상은 다이아몬드 무늬가 있는 광대가 입는 것이다.
일부 평론가는 이 작품을 클레의 화상 한스 골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노력 없이 클레의 작품을 팔아 이익을 챙긴 것을 조롱한 작품으로 해석한 것이다.
클레는 화상 알프레드 플레트하임의 50회 생일에 선물로 주기 위해 1928년에 <무제>란 제목으로 펜과 잉크로 드로잉하면서 배 혹은 여성의 젖을 펀칭백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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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알리스 캉

폴 고갱이 반 고흐와 함께 지내기 위해 아를로 온 것은 나뭇잎이 붉게 물든 1888년 10월 28일이었다. 고갱의 반 고흐의 노란집에 짐을 풀고 반 고흐를 쳐다보니 파리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초췌해진 것이 영락없는 수도승의 몰골이었다. 노란집에는 호두나무 침대 하나, 백송 침대 하나, 매트리스 두 개, 의자 열두 개, 거울이 하나 있었다. 반 고흐는 자신의 방은 수도원의 방처럼 꾸몄지만, 고갱을 위한 방은 해바라기 작품으로 장식하고 “진정 예술성이 풍부한 여인의 방”처럼 신경을 써 꾸며두었다.
고갱은 아를로 오기 한 달 전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가 시적 모티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해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시적 모티프라고 적으면서 감각이 자신을 화가의 지성적 힘이 미치지 않는 시적 상태로 이끌어준다고 했다. 모티프와 화화에 대한 이런 고갱의 철학적, 주관적, 내성적 요소에 관해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에 온 지 닷새 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지내고 있는 브르타뉴가 놀라운 풍경의 시골이기 때문에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적었다.
아를 성벽 밖 남동쪽에는 알리스 캉 혹은 엘리시안 들판으로 불리는 고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오렐리앙 거리를 따라서 로마인들을 묻었던 곳으로 초기 크리스천들에 의해 신성화되었다. 4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많은 주요 성자들이 이곳에 묻혔고 기적이 발생하는 거룩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알리스 캉에는 두 개의 예배당이 남아 있어 19세기 말까지 크리스천들이 순례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하나는 제뉠리아드 예배당으로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아를의 첫 주교에게 나타났을 때 자신의 무릎 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생오노라 예배당으로 1880년대까지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이 예배당에는 팔각형의 종탑이 있다.
반 고흐와 고갱이 야외로 나가 처음 함께 그린 곳이 알리스 캉 공동묘지였다. 고갱이 아를로 오기 전 반 고흐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이곳의 장면을 그린 적이 없어 그도 처음 고갱과 함께 이곳을 찾은 것으로 짐작된다. 길 양편에 포플러가 길게 늘어져 있고 나무 아래에는 석관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반 고흐는 10월 31일과 11월 초 사이에 이곳에서 그가 말한 “가을 풍경화” 네 점을 그렸으며 고갱은 두 점을 그렸다.
반 고흐는 생오노라 예배당을 멀리 바라보는 위치에서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하고 석관과 포플러들이 만든 통로가 중앙이 되게 그렸다. 그는 석관과 포플러에 밝은색을 칠하면서 가장자리를 선으로 명료하게 했다. 가장자리를 선으로 틀이 되게 하는 방법을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했다. 1884년 누에넨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의 <가을의 포플러 길>을 그렸다. 이 작품 역시 일렬로 기다랗게 자란 포플러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길이 생긴 풍경을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놓고 구성한 것이며 멀리 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보인다.
또 다른 <알리스 캉>(고흐 368)은 좀더 가까이서 그린 것으로 역시 <가을의 포플러 길>과 유사한 원근의 구성이다. 애매하게 공간을 열어놓은 이 작품에서는 생오노라 예배당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의 그림에서는 사람 한 쌍에 초점을 맞추고 광경을 병렬하여 하나의 그림이 되게 했다. 왼편 나무 사이로 붉은색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하나의 광경이고 길을 따라 멀리 생오노라 예배당이 또 하나의 광경이다. 그는 동시에 두 곳을 바라본 장면으로 그리면서 왼편 나무를 각이 지게 해서 공장의 굴뚝과 PLM 철도회사 건물이 보이도록 했다. 이 철도회사는 1888년에 건립되었다. 당시 알리스 캉 묘지를 찍은 엽서를 보면 포플러들이 촘촘히 줄지어 있어 반 고흐가 고의로 나무들 사이로 공간을 두고 PLM 철도회사 건물이 보여지도록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고갱도 같은 제목으로 그리면서 캔버스를 세로로 사용했는데, 사이즈가 반 고흐의 한 쌍이 있는 작품과 거의 비슷하지만 구성과 내용은 사뭇 다르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양편으로 늘어진 포플러 사이에서 그리지 않고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리면서 복도처럼 나타나는 구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위로 솟은 나무를 굽이치고 위로 편향되게 그리면서 팔각형의 생오노라 예배당 타워가 좀더 가까이 보이도록 구성했다. 약간 경사진 길 중앙에 세 여인이 있는데, 생기가 없어 보이며 잠시 걷기를 중단하고 화가와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검정색 외투, 보닛, 희색 칼라로 봐서 한눈에 아를 여인들임을 알 수 있다. 반 고흐의 한 쌍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고갱도 세 여인의 외곽을 선으로 분명하게 하지 않았으며 얼굴과 손을 점처럼 한 번의 살색 붓질로 생략하고 다리는 가려져 드러나지 않게 했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색을 가는 선처럼 작고 세로로 칠했는데 세잔의 영향이다. 고갱은 알뜰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줄무늬처럼 사용했다. 반 고흐도 세잔의 기법을 좋아했지만 그와 고갱의 동일한 제목의 그림에서 응용방법이 아주 상이하게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고갱은 오른편 가장자리에 나무줄기를 그려넣어 옆으로 난 가지와 잎이 세 여인의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의 덮개가 나타나도록 구성했는데, 이 또한 세잔의 영향으로 그가 반 고흐보다 세잔의 영향을 더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잔은 풍경화에서 곧잘 나무의 무성한 잎이 아치 모양을 이루어 평편한 구성에 대립시켰다.
반 고흐는 세잔의 개인적 진지함에는 영향을 받았지만 고갱과는 달리 그의 기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다. 아를에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반 고흐는 세잔의 전형적인 채색법이 고향의 풍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세잔 자신이 시골의 일부분이 되어 그곳 풍물을 매우 친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를을 사랑하게 되어 세잔이 프로방스의 독특한 색채를 발견한 것처럼 아를의 풍물을 독특한 색채로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잔이 발견한 프로방스의 독특한 색채란 반 고흐에 의하면 껄껄한 면, 열에 흠뻑 젖은 하늘, 햇볕에 그을린 시골 풍경 등에 대한 적절한 묘사였다.(고흐 37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세잔의 방법이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그해 늦여름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잔의 불충분함으로 “소심하고 신중한 붓질”을 꼽았으며 이를 자신의 효과적인 양식과 비교했다. 평온한 가운데의 붓질보다는 사고의 격렬함을 나타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베르나르에게 물었고 또 무의식적으로 작업할 때 그렇게 규칙적인 붓질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세잔의 규칙적인 채색법과 반 고흐의 기분 내키는 대로의 채색법의 차이는 곧 고갱의 <알리스 캉>과 반 고흐의 <알리스 캉>의 차이이기도 하다. 행위적으로 붓질을 하느냐 규칙적으로 신중하게 붓질을 하느냐 하는 것이 함께 작업하면서 발견한 회화에 대한 반 고흐와 고갱의 상이한 견해로, 두 사람은 방법론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고갱은 밀도가 높고 두텁게 색을 칠하는 반 고흐의 방법에 격앙하여 반 고흐의 “난잡하고 단단하게 굳히는” 채색법을 비판했다. <알리스 캉>을 그린 지 몇 주 후 고갱은 베르나르에게 적었다.
“빈센트와 내가 동의하는 것은 별로 없고 회화에 관해서는 특히 동의하는 부분이 거의 없어, ... 색으로 말하면 그는 몽티첼리가 사용했듯이 두텁게 칠하는 가운데 우연히 생기는 효과를 좋아하지만 나는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또 칠하는 방법을 혐오한다.”
고갱의 <알리스 캉>을 보면 브르통에서 사용하던 채색법을 아를에 와서도 그대로 사용했음을 본다.반 고흐는 지역에 따라 적당한 채색이 있다고 본 데 비해 고갱은 한 가지 채색법으로 모든 지역의 풍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갱의 <알리스 캉>에서 즉흥적인 채색이 발견되는데, 나무줄기 외에도 하단 왼편 가장자리에 그려진 흰색 부분이다. 파란색과 푸른색 사이에 물의 흐름을 막은 제방을 흰색으로 처리했다. 이런 비자연적인 요소는 브르통에서 그린 그림에서도 이미 나타난 적이 있다. 반 고흐와 고갱의 <알리스 캉>에는 자연주의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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