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알리스 캉

폴 고갱이 반 고흐와 함께 지내기 위해 아를로 온 것은 나뭇잎이 붉게 물든 1888년 10월 28일이었다. 고갱의 반 고흐의 노란집에 짐을 풀고 반 고흐를 쳐다보니 파리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초췌해진 것이 영락없는 수도승의 몰골이었다. 노란집에는 호두나무 침대 하나, 백송 침대 하나, 매트리스 두 개, 의자 열두 개, 거울이 하나 있었다. 반 고흐는 자신의 방은 수도원의 방처럼 꾸몄지만, 고갱을 위한 방은 해바라기 작품으로 장식하고 “진정 예술성이 풍부한 여인의 방”처럼 신경을 써 꾸며두었다.
고갱은 아를로 오기 한 달 전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가 시적 모티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해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시적 모티프라고 적으면서 감각이 자신을 화가의 지성적 힘이 미치지 않는 시적 상태로 이끌어준다고 했다. 모티프와 화화에 대한 이런 고갱의 철학적, 주관적, 내성적 요소에 관해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에 온 지 닷새 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지내고 있는 브르타뉴가 놀라운 풍경의 시골이기 때문에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적었다.
아를 성벽 밖 남동쪽에는 알리스 캉 혹은 엘리시안 들판으로 불리는 고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오렐리앙 거리를 따라서 로마인들을 묻었던 곳으로 초기 크리스천들에 의해 신성화되었다. 4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많은 주요 성자들이 이곳에 묻혔고 기적이 발생하는 거룩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알리스 캉에는 두 개의 예배당이 남아 있어 19세기 말까지 크리스천들이 순례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하나는 제뉠리아드 예배당으로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아를의 첫 주교에게 나타났을 때 자신의 무릎 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생오노라 예배당으로 1880년대까지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이 예배당에는 팔각형의 종탑이 있다.
반 고흐와 고갱이 야외로 나가 처음 함께 그린 곳이 알리스 캉 공동묘지였다. 고갱이 아를로 오기 전 반 고흐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이곳의 장면을 그린 적이 없어 그도 처음 고갱과 함께 이곳을 찾은 것으로 짐작된다. 길 양편에 포플러가 길게 늘어져 있고 나무 아래에는 석관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반 고흐는 10월 31일과 11월 초 사이에 이곳에서 그가 말한 “가을 풍경화” 네 점을 그렸으며 고갱은 두 점을 그렸다.
반 고흐는 생오노라 예배당을 멀리 바라보는 위치에서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하고 석관과 포플러들이 만든 통로가 중앙이 되게 그렸다. 그는 석관과 포플러에 밝은색을 칠하면서 가장자리를 선으로 명료하게 했다. 가장자리를 선으로 틀이 되게 하는 방법을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했다. 1884년 누에넨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의 <가을의 포플러 길>을 그렸다. 이 작품 역시 일렬로 기다랗게 자란 포플러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길이 생긴 풍경을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놓고 구성한 것이며 멀리 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보인다.
또 다른 <알리스 캉>(고흐 368)은 좀더 가까이서 그린 것으로 역시 <가을의 포플러 길>과 유사한 원근의 구성이다. 애매하게 공간을 열어놓은 이 작품에서는 생오노라 예배당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의 그림에서는 사람 한 쌍에 초점을 맞추고 광경을 병렬하여 하나의 그림이 되게 했다. 왼편 나무 사이로 붉은색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하나의 광경이고 길을 따라 멀리 생오노라 예배당이 또 하나의 광경이다. 그는 동시에 두 곳을 바라본 장면으로 그리면서 왼편 나무를 각이 지게 해서 공장의 굴뚝과 PLM 철도회사 건물이 보이도록 했다. 이 철도회사는 1888년에 건립되었다. 당시 알리스 캉 묘지를 찍은 엽서를 보면 포플러들이 촘촘히 줄지어 있어 반 고흐가 고의로 나무들 사이로 공간을 두고 PLM 철도회사 건물이 보여지도록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고갱도 같은 제목으로 그리면서 캔버스를 세로로 사용했는데, 사이즈가 반 고흐의 한 쌍이 있는 작품과 거의 비슷하지만 구성과 내용은 사뭇 다르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양편으로 늘어진 포플러 사이에서 그리지 않고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리면서 복도처럼 나타나는 구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위로 솟은 나무를 굽이치고 위로 편향되게 그리면서 팔각형의 생오노라 예배당 타워가 좀더 가까이 보이도록 구성했다. 약간 경사진 길 중앙에 세 여인이 있는데, 생기가 없어 보이며 잠시 걷기를 중단하고 화가와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검정색 외투, 보닛, 희색 칼라로 봐서 한눈에 아를 여인들임을 알 수 있다. 반 고흐의 한 쌍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고갱도 세 여인의 외곽을 선으로 분명하게 하지 않았으며 얼굴과 손을 점처럼 한 번의 살색 붓질로 생략하고 다리는 가려져 드러나지 않게 했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색을 가는 선처럼 작고 세로로 칠했는데 세잔의 영향이다. 고갱은 알뜰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줄무늬처럼 사용했다. 반 고흐도 세잔의 기법을 좋아했지만 그와 고갱의 동일한 제목의 그림에서 응용방법이 아주 상이하게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고갱은 오른편 가장자리에 나무줄기를 그려넣어 옆으로 난 가지와 잎이 세 여인의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의 덮개가 나타나도록 구성했는데, 이 또한 세잔의 영향으로 그가 반 고흐보다 세잔의 영향을 더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잔은 풍경화에서 곧잘 나무의 무성한 잎이 아치 모양을 이루어 평편한 구성에 대립시켰다.
반 고흐는 세잔의 개인적 진지함에는 영향을 받았지만 고갱과는 달리 그의 기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다. 아를에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반 고흐는 세잔의 전형적인 채색법이 고향의 풍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세잔 자신이 시골의 일부분이 되어 그곳 풍물을 매우 친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를을 사랑하게 되어 세잔이 프로방스의 독특한 색채를 발견한 것처럼 아를의 풍물을 독특한 색채로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잔이 발견한 프로방스의 독특한 색채란 반 고흐에 의하면 껄껄한 면, 열에 흠뻑 젖은 하늘, 햇볕에 그을린 시골 풍경 등에 대한 적절한 묘사였다.(고흐 37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세잔의 방법이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그해 늦여름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잔의 불충분함으로 “소심하고 신중한 붓질”을 꼽았으며 이를 자신의 효과적인 양식과 비교했다. 평온한 가운데의 붓질보다는 사고의 격렬함을 나타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베르나르에게 물었고 또 무의식적으로 작업할 때 그렇게 규칙적인 붓질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세잔의 규칙적인 채색법과 반 고흐의 기분 내키는 대로의 채색법의 차이는 곧 고갱의 <알리스 캉>과 반 고흐의 <알리스 캉>의 차이이기도 하다. 행위적으로 붓질을 하느냐 규칙적으로 신중하게 붓질을 하느냐 하는 것이 함께 작업하면서 발견한 회화에 대한 반 고흐와 고갱의 상이한 견해로, 두 사람은 방법론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고갱은 밀도가 높고 두텁게 색을 칠하는 반 고흐의 방법에 격앙하여 반 고흐의 “난잡하고 단단하게 굳히는” 채색법을 비판했다. <알리스 캉>을 그린 지 몇 주 후 고갱은 베르나르에게 적었다.
“빈센트와 내가 동의하는 것은 별로 없고 회화에 관해서는 특히 동의하는 부분이 거의 없어, ... 색으로 말하면 그는 몽티첼리가 사용했듯이 두텁게 칠하는 가운데 우연히 생기는 효과를 좋아하지만 나는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또 칠하는 방법을 혐오한다.”
고갱의 <알리스 캉>을 보면 브르통에서 사용하던 채색법을 아를에 와서도 그대로 사용했음을 본다.반 고흐는 지역에 따라 적당한 채색이 있다고 본 데 비해 고갱은 한 가지 채색법으로 모든 지역의 풍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갱의 <알리스 캉>에서 즉흥적인 채색이 발견되는데, 나무줄기 외에도 하단 왼편 가장자리에 그려진 흰색 부분이다. 파란색과 푸른색 사이에 물의 흐름을 막은 제방을 흰색으로 처리했다. 이런 비자연적인 요소는 브르통에서 그린 그림에서도 이미 나타난 적이 있다. 반 고흐와 고갱의 <알리스 캉>에는 자연주의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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