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에서 발췌

초콜릿 분쇄기와 아홉 개의 능금 주물


뒤샹은 루엥 대성당 북쪽에 있는 보봐시느 거리를 걷다가 가멜링의 다과점 진열장에 있는 초콜릿 분쇄기를 보았다.
어렸을 적에도 그는 그 기계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북처럼 생긴 둥근 것이 세 개 달린 초콜릿 분쇄기는 천천히 회전하면서 코코아와 식물성 기름, 설탕을 갈고 섞어서 브라운색으로 반죽하는데 기계 아래에서 지피는 불로 그것들을 용해시킨다.
뒤샹은 말했다.
“나는 늘 회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생을 통해서 알았다.
회전 ... 그것은 일종의 자아도취이며, 자아만족, 또는 자위행위이다.
기계는 원을 그리며 회전하면서 놀랍게도 초콜릿을 생산해낸다.
난 그 기계에 매료되었다.”

뒤샹은 1913년 2월에 <초콜릿 분쇄기 No. 1>란 제목으로 그 기계를 유화로 그렸는데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위한 습작이기도 했다.
초콜릿 분쇄기를 떠받치는 테이블의 다리 모양을 루이 15세의 양식으로 하고 상업용 프린트 전문가로 하여금 금색으로 제목과 제작일자를 가죽에 프린트하게 해서 그림 오른쪽 구석에 풀로 부착했다.
그는 그것을 “새로운 기교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그것은 <커피 분쇄기>보다 더욱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기계를 실제로 드로잉하면서 뒤샹은 “문제는 어떻게 드로잉하느냐 하는 것이며, 동시에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큰 유리>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는 “과학의 정밀하고 정확함”을 미술에 투입시키려고 했으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은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기가 말한 방법으로 “유쾌한” 작품 <큰 유리>를 그린 것이다.

이 시기에 뒤샹은 프랑스 수학자인 앙리 포잉카레와 파스칼 에스프리 주프르의 저서들을 읽었으며, 수학에 관심이 많아 수학을 통해서 사차원을 이해하려고 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르네상스 화가들은 삼차원의 환상을 이차원으로 표현했다면서 현대 예술가들은 실재의 모방이 실재 자체를 나타내려 한다고 주장했으며 뒤샹이 그의 주장에 동감을 표했다. 

뒤샹은 1913년 2월에 <초콜릿 분쇄기 No. 1>란 제목으로 그 기계를 유화로 그렸는데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를 위한 습작이기도 했다.
초콜릿 분쇄기를 떠받치는 테이블의 다리 모양을 루이 15세의 양식으로 하고 상업용 프린트 전문가로 하여금 금색으로 제목과 제작일자를 가죽에 프린트하게 해서 그림 오른쪽 구석에 풀로 부착했다.
그는 그것을 “새로운 기교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그것은 <커피 분쇄기>보다 더욱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기계를 실제로 드로잉하면서 뒤샹은 “문제는 어떻게 드로잉하느냐 하는 것이며, 동시에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큰 유리>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는 “과학의 정밀하고 정확함”을 미술에 투입시키려고 했으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은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기가 말한 방법으로 “유쾌한” 작품 <큰 유리>를 그린 것이다.

이 시기에 뒤샹은 프랑스 수학자인 앙리 포잉카레와 파스칼 에스프리 주프르의 저서들을 읽었으며, 수학에 관심이 많아 수학을 통해서 사차원을 이해하려고 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르네상스 화가들은 삼차원의 환상을 이차원으로 표현했다면서 현대 예술가들은 실재의 모방이 실재 자체를 나타내려 한다고 주장했으며 뒤샹이 그의 주장에 동감을 표했다. 

뒤샹은 1913년 봄 피카비아를 자주 만나며 뉠리의 작업실에서 <큰 유리>를 위한 습작에 몰두했다. 10월에는 작업실을 몽마르트르에서 멀리 떨어진 생히폴리트로 옮겼다.
그때부터 그는 미국인 작가 스타인과 교류했다.
스타인은 뉴욕에 있는 침구에게 보낸 편지에 “뒤샹은 영국 청년처럼 보이는 젊은이인데, 사차원에 관해 아주 열심히 말하더군”이라고 적었다.
이 시기에 뒤샹의 정신은 복잡했는데 1913년에 쓴 노트에는 “사람이 미술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엇이라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거기에는 기교, 훈련, 의도 등 정신적인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 그는 “미술에 있어서 전통적인 표현방법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그는 <세 기본 정지>를 제작한 후 이 작품에 대해 “나의 미래에 있어서 주요 요인이 되었다”면서 말했다.
“그것은 중요한 미술품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로 하여금 전통적인 표현방법으로부터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세 기본 정지>는 과거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한 첫 번째 행위였다.”

뒤샹은 1914년에 <정지들의 네트워크>를 그렸다.
그는 1914년 이전에 많은 사람이 우연을 좀더 조직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우연을 사용했음을 본다.
그가 우연의 요소를 사용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우연을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말했다.
“너의 우연은 나의 우연과 같지 않지 않느냐? 내가 던진 주사위와 네가 던진 주사위는 같지 않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는 너의 잠재의식을 표현하는 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 된다.”
그의 입에서 잠재의식이란 말이 나온 것이 주목되는데,
1900년에 출간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몽>은 지성인들에게 잠재의식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잠재의식 세계의 자물쇠를 풀었으며, 그에 의해서 잠재의식의 세계는 또 다른 실제의 세계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는 1914년에 여전히 <큰 유리>에 몰두하면서 2월에 <초콜릿 분쇄기 No. 2>를 그렸는데, 한 해 전에 그린 <초콜릿 분쇄기 No. 1>에 비하면 더욱 기계적인 드로잉이다.
이것은 <초콜릿 분쇄기 No. 1>와 함께 1915년 3월 8일부터 4월 3일까지 뉴욕의 캐롤 화랑에서 개최된 제3회 동시대 프랑스 미술전에 소개되었다.
둘 다 월터 아렌스버그가 소장하다가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기증했다.

독일은 1913년 9월 7일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와 우호동맹조약을 맺었다.
이는 전쟁이 발발할 때는 삼국의 군대가 연합군을 형성하고 군사적 행동을 일치하기로 약속한 것을 뜻했다.
이 조약이 맺어진 이듬해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징집되었고 뒤샹의 형들도 징집되었다.

뒤샹은 이 시기에 여전히 <큰 유리> 제작에 몰두했다.
한 달 동안 유리에 작업한 후 <아홉 개의 능금 주물>을 제작했는데 남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것을 제작하기 전에 드로잉 두 점을 습작하면서 제목을 <유니폼과 제복들의 공동묘지>라고 붙였는데,
공동묘지라고 한 것은 드로잉할 때 주물들의 모양이 관처럼 보였기 때문인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드로잉에는 여덟 개의 주물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신부, 백화점의 배달소년, 헌병, 흉갑기병, 경찰관, 청부인, 제복을 입은 고용인, 그리고 그릇 닦는 소년이었다.
두 번째 드로잉에서 그는 <기본 정지>에서 사용한 모세관 튜브를 계속 하면서 철도역장을 보태어 아홉 개의 주물이 되도록 했다.
아홉 개의 주물은 <큰 유리>의 독신자들이기도 했다. 
 
뒤샹은 아홉 개의 주물에 관해 말했다.
“내게 아홉이란 수는 마적 숫자와 같았지만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마술이란 뜻은 아니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숫자 1은 개체를 뜻하고, 2는 한 쌍을 뜻하며, 3은 다수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2천만이란 숫자나 3이란 숫자는 내게 같은 의미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유사한 형태들의 수는 그러므로 셋을 넘을 경우 다수를 뜻했다.
특기할 점은 <정지들의 네트워크>에서 실험한 우연에 의한 드로잉이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에 보태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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