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잭슨 폴록의 정신과 물감 흘리기 기법


잭슨 폴록(1912~56)은 1912년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고, 1925년부터 남부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는 동안 잠시 조각에 관심을 가졌지만 1930년 가을 열여덟 살 때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미국인의 삶의 특색을 그린 토머스 하트 벤턴으로부터 수학하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0년대 초 미국 예술가들에게 멕시코의 벽화예술가들의 영향이 대단했으며 폴록은 1936년 형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1896~1974)의 조수가 되어 드로잉 없이 물감을 직접 칠하며 그리는 대담한 기법을 영향 받았다.
시케이로스는 여러 각도를 고려하여 개선한 복합 원근법과 왜곡의 방법을 이용하여 환영적인 장치들을 만들고, 이를 포토몽타주 기법과 함께 벽화에 응용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메시지가 주는 충격을 확대했다.
서른아홉 살의 시케이로스는 1935년과 이듬해에 뉴욕에 실험 공방을 열고 새로운 합성 재료와 공업 재료들, 포토몽타주 및 물감 뿌리기 기법을 선보였다. 폴록은 자진해서 이 실험 공방에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회화방법을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시케이로스는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연히 나타나는 이미지를 창조했으며 이런 방법이 폴록을 감동시켰다.
그해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시케이로스의 방법으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법을 실험했다.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단계에 불과했던 폴록의 물감 흘리기 기법은 이런 기법으로 폴록이 유명해진 후 평론가들로 하여금 언제, 그리고 누가 먼저 사용했느냐 하는 문제를 삼아 다투어 글을 발표하게 했다.
폴록이 정확하게 이 기법을 언제 누구로부터 발견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겠지만 부분적으로 시케이로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폴록은 피카소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는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폴록 19, 20)를 보고 입체주의의 효과를 알았다.
폴록은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리기 시작했으며 <게르니카>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 <남자, 황소, 새>(폴록 21)이다.
황소는 조국 스페인에서 투우 관람을 즐긴 피카소가 선호한 주제였다.
폴록은 피카소가 스물여섯 살 때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고 “내게 지독하게 중요한 그림이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에서 예술과 무의식세계의 직접적인 관계를 보았다.
폴록에게는 정신분열 증세가 있었으므로 더욱 그런 점에 매료되었다.

1938년 폴록의 정신분열이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폭음했으므로 증세는 돌발적이었으며 위험했다.
학문적 성과를 위해 폴록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려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었는데 조셉 헨더슨으로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였다.
9년 동안 유럽에서 유학하고 1938년에 귀국한 그는 1939년 5월부터 폴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폴록을 만난 후 헨더슨은 폴록이 네 가지 개성인 직관, 느낌, 감각, 사고의 기능이 통합적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그의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을 보고 그의 무의식세계를 탐험했다.(폴록 28)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는 장면이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보았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헨더슨은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하여 그의 드로잉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무의식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기간은 18개월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로 그린 그림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작품들은 훗날 ‘정신분석적 드로잉’으로 불리면서 학자들 사이에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대 중반까지 폴록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세 점을 그렸는데 <속기술적 모습>, <달 여인>, <남성과 여성>이었다.이것들은 좀더 복잡하고 고유한 작품이다.
<속기술적 모습>은 반추상의 이미지로 비스듬히 기댄 누드화였다.
몇몇 평론가들은 그 작품이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두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견해에도 타당성이 있었다.
이것은 피카소와 미로의 영향과 생리적 현상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작품이다.
폴록의 작품은 나중에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들었다.
원래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모마의 관장 알프레드 바가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화에 붙인 말이었고 이 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반부터였다.

폴록은 1943년에 <암이리>를 그렸다.
암이리는 로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로마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이리이다.
<암이리>는 이런 신화를 참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두 동물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 동물은 황소로서 피카소의 황소 그림을 연상하게 하며, 오른쪽의 것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미국의 5센트짜리 동전에 그려져 있는 들소처럼 보인다.
두 동물은 두툼한 붉은 화살로 황소의 심장으로부터 들소의 머리까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화살은 인디언 회화에서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암이리>는 유럽의 황소와 미국 들소의 만남이었고 두 놈은 인디언의 화살 같은 것에 맞아 폴록의 전리품이 되었다. 
폴록을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물감 흘리기 기법은 1946년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1946년에 여러 가지 물감을 실험했다.
유채 외에도 상업용 에나멜 페인트, 배관공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페인트, 그리고 가정용 페인트도 사용했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마치 무대에서 행위를 하듯 그렸으므로 그의 그림을 액션 페인팅이란 명칭으로 부른 것은 잘 어울렸다.
그는 유채물감을 묽게 타서 깡통에 담고 막대기로 물감을 젓다가 허공에 휘휘 저으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했다.
그러면 캔버스에는 아주 가는 선들이 나타났으며 물감이 막대기에서 거의 흘러내렸을 때는 더욱 가는 선들이 나타났다.
이런 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소개하자 평론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94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폴록은 말했다.
“난 회화기법에 관해 어떤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법은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절로 생기지만 기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폴록 작품의 특징은 올오버 회화이다.
이는 전체 화면 내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을 두지 않으며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전통적 의미의 구성을 포기한 양식이다.
폴록의 그림은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려져 있다.
이후 이런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또한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를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들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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