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풀밭에서의 점심>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1865년 봄 마네와 나란히 작품을 선보인 살롱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모네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에 버금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다시 샤이로 갔습니다.
그곳을 <풀밭에서의 점심>을 위한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예비 스케치에 들어갔습니다.
습작에 1866년이라고 적었지만 186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샤이에서 한 예비 스케치를 가을에 파리의 화실에서 채색했습니다.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사진을 참조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12명이 등장하는 피크닉 장면입니다.
모네는 사람 하나하나를 습작으로 연구하면서 그림 전체에 대한 구성을 시도했는데 중앙에 왼팔을 내밀어 접시를 권하는 여인의 모습만이 예외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시선을 주고 받는 것도 아닙니다.
피크닉을 위해 마련한 점심이 화면 중앙에 펼쳐진 것이 전부입니다.

그림에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화면 전체에 나타났습니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데 있었습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 색과 금빛으로 아롱졌습니다.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걸 그는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그쳤습니다.

쿠르베가 그림을 비평하고 돌아간 뒤 모네는 1866년 살롱전에 출품하기로 한 계획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쿠르베는 너무 크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라서 야외풍경화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림의 남자들 대부분은 바지유를 모델로 한 것이며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난 남자는 쿠르베로 보입니다.
<풀밭에서의 점심>에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하지만 이는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18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입니다.
훗날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개개인의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족했던 것입니다.
부분 습작들을 보면 바지유의 수염난 모습과 수염을 깎은 모습 모두를 볼 수 있어 그가 일정한 기간을 두고 작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 모네의 화실을 찍은 사진을 보면 <풀밭에서의 점심>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그 부분들을 잘라내야 했습니다.
1920년 8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을 방문한 사람에게 모네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마네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다네.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러했듯 야외에서 그림을 구성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어.
난 이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데 미완성이며 많이 상해 있어.
세 얻은 방의 보증금 대신 이 그림을 집주인에게 맡긴 적이 있었는데 집주인은 캔버스를 둘둘 말아 지하실에 쳐박아 두었지 뭐야.
돈이 생겼을 때 그 그림을 도로 찾아 왔지만 그림이 조금 상한 상태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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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나는 날


오늘은 신나는 날이다.
홍대 대학원생 스무 명이 단체로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를 읽고 담당교수에게 나의 강의를 듣고 싶다고 해서 6시에 홍대에 가기로 했다.
교수가 일방적으로 날 초청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초청했기 때문에 신나는 날이다.
내 책을 사서 읽었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

사람은 관심받기를 원한다.
책을 쓰는 사람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신의 책을 읽고 대화를 원하는 것이다.
책이 팔리니 좋고 관심을 받으니 좋다.

Julie의 글을 읽으니 또한 신난다.
내 글을 읽고 느낀 바를 전해주니 좋고 미비한 부분을 지적하여 보충해주니 좋다.

줄리님,
줄리님의 다음의 글에서 배운 바가 있습니다.

직사각 형태는 이후 발달한 상형문자에서 람세스 2세니, 클레오 파트라니 하는 왕의 이름을 써넣는 칸, 일명 이름틀이라는 세레크(serekh)의 초기 형태이며, 그 이름틀 안에 있는 기역자(ㄱ) 형태의 뱀은 바로 4대 왕의 이름 제트(djrt)를 표현한 것으로서 기념비에 조각된 입면과 평면의 상징적인 것들이 모두 그의 왕국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 제가 영국에서 사 온 이집트 상형문자 화보를 보니 뱀으로 나타낸 상형문자 중 미꾸라지 같은 한 일(一)자 모양의 뿔 달린 뱀은 영어 알파벳의 F에 해당하고, 지금 논의되고 있는 기역(ㄱ)자 모양의 뱀은 Dj에 해당한다고 나와 있는 걸로 보아 이를 근거로 제트(djrt)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에 책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되지만 생생하게 남아 있지 않아 분명치 않고, 줄리님의 글을 읽으니 매우 타당하게 생각됩니다.

이집트에는 뱀의 문화가 있었지요.
정확하게 뱀의 문화가 전래되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뱀의 상징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뱀의 형상이 문자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줄리님의 글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나의 글을 절반 진실로 판정해주니 고마워요.

그동안 7인의 문화읽기에 일방적으로 글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아 재미가 별로 없었는데 글에 대한 느낌을 적어주니 이제 재미가 납니다.

오늘은 신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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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으로 피어난 모네


물 위의 정원

클로드 모네가 55세이던 해인 1895년은 ‘모네의 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획득한 생애 최고의 해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우리 속담이 바로 모네에게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회화라는 밭을 약 30년 동안 정성들여 경작하고 가꿔서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입니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대성당의 모습을 색을 달리 하여 시리즈로 그린 작품들이 미국의 보스톤과 시카고, 런던에서 소개되었으며, 파리의 오르세이 미술관에서도 5점이 소개되었습니다.
1876년에 2백 프랑이던 그림가격이 1890년대 초에 3천 프랑, 1895년에는 다섯 배로 뛰어 1만 5천 프랑, 1921년에는 무려 20만 프랑으로 껑충 뛰었답니다.
1천 프랑이 오늘날 우리 돈으로 약 백만 원에 해당하므로 20만 프랑이면 2억 원에 해당합니다.
모네의 경제사정은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재벌의 호화스러운 삶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는 지베르니 큰 저택에 딸린 과수원을 5명의 정원사를 고용하여 연못으로 개조한 후 수련을 심고 연못 중앙에는 일본식 둥근 다리를 놓아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련은 파리에서 미술품을 사고 파는 사업을 하는 일본인으로부터 구한 것들입니다.

흔히 재능을 타고난다고 말하지만 모네의 생애를 돋보기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을 뿐입니다.
타고난 재능 혹은 우수한 지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역사에 업적을 남긴 훌륭한 인물들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더 노력하는 자세로 끝내 신념을 실현시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역사에 모범이 되는 인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량의 지능을 갖고 태어난 행운아들 중에는 나태하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신념을 버리고 포기하여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처지로 뒤쳐진 인물도 상당수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은 오로지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교훈을 알게 됩니다.

모네의 어머니는 모네가 16살 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모네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모습을 노트북에 만화처럼 과장해서 그리기 좋아했고 장차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하여 모네는 고모의 집에서 살았는데 고모는 아마추어 화가였기 때문에 물감을 사주면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해주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내고 회화를 배울 수 없는 처지라서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기 위해 야외로 나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이 스승이었습니다.
자연은 같은 나무 같은 바다도 늘 같은 색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해가 뜰 때,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또는 해가 질 때 나무와 바다는 다른 색이 됩니다.
모네는 이런 자연의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그때 그때 본 대로 캔버스에 재현하는 작업을 지속한 끝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당대의 사람들은 조각하면 오귀스트 로댕을 꼽았고 회화에서는 모네를 제1인자로 꼽았습니다.


구름다리가 모네의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1899년부터였습니다.
연못을 그는 “물 위의 정원”이라고 불렀습니다.
1901년에는 근처에 있는 가로세로 4km나 되는 땅을 더 구입하여 정원을 확장하면서 연못도 더욱 크게 해서 물 위의 정원은 네 배로 커졌습니다.
연못가에는 대나무와 일본 사과나무 그리고 체리나무도 심었습니다.

회갑을 넘긴 그는 외출할 기력도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갖가지 꽃으로 가꾼 정원에서 마지막 대작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정원사들에게 온실을 만들게 하고 꽃의 종류를 늘렸으며 잡지와 백과사전을 통해 꽃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스케치한 꽃의 종류와 원예가들에게 주문한 목록을 보면 꽃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예잡지를 열렬히 애독했고 친구들이 요청하면 원예가의 주소를 알려 줄 정도로 이 분야에 박식해졌습니다.
당시 파리에는 외국과의 교역이 자유로웠으므로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각종 희귀한 꽃이 많았답니다.

모네는 일본 회화에 관심이 많아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우타마로와 히로시게의 판화를 수년 동안 구입해왔습니다.
1893년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한 일본 다색판화전을 보고 그는 감동했습니다.
그는 1899년부터 수련을 중점적으로 그리기 시작해 1900년에 최소 20점 그렸으며 2년 후부터는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캔버스의 사이즈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흡족할 때까지 치밀하게 파고드는 성격이라서 그는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련과 꽃을 수없이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1900년 말 그의 최근작 25점이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소개되었는데 절반 가량이 연못에 있는 수련 그림이었답니다.
같은 장소에서 일기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수련을 그렸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유사한 것이 많습니다.
아침에도 그리고 저녁에도 그리고 또 계절따라 그리기 때문에 언듯 보면 같아보이지만 색이 다른데 바로 이 점이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 자연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자연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안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 아주 가까이 가서 그가 무엇에 열중하고 그렸는지 알 수 있으며 율동적인 색을 통해 그가 어떤 회화적 의도로 화면을 구성했는지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가의 작품 앞에 오래 서서 바라보는 건 예술적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달리 했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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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연을 탐험한 다 빈치와 영혼을 새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는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유물론자이며 미래가 밝다고 전망한 낙천주의자인 반면 이상주의자 미켈란젤로는 물질을 하찮게 여기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상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정신만을 고귀하게 여겼으므로 진지하며 고독한 사람이었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했다.
미켈란젤로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 순수하고 영원한 영혼의 형상을 보여주기를 바란 데 반해 레오나르도는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사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레오나르도는 멋진 옷을 입고 오늘날 고급 스포츠카에 해당하는 값비싼 말을 탔으며, 손수 악기를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랐고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그와 달리 중세 도덕관이 몸에 벤 미켈란젤로는 명성이 드높아지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을 탐닉하는 것을 죄로 알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는 상류사회에 접근하여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현세의 안락보다는 내세의 영생을 소망했기에 일찍이 자신이 속한 상류사회를 벗어났고,
거의 아흔 해를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요인으로 보고 스스로 염세주의의 짐을 졌다.
그의 삶은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과 같았다.

레오나르도의 언행에는 경박함이 있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고 비관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인체를 기계에 비유하며 사용하지 않을 경우 녹이 슨다고 생각했으므로 늙어서도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반면 과거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사상에 심취한 미켈란젤로는 언행에 신중을 기했으며 많은 작품을 피하고 자신이 맡은 작품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고상한 생각을 정해놓고 작업했으므로 그는 늘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었다.
따라서 근심이 많고 우울했으며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을 신뢰한 그가 나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동성애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폭넓게 이뤄졌다.
발랄한 성격의 레오나르도는 동성애로 기소당한 적이 있고 잘생긴 젊은이들이 주변에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여행하기를 즐겨했다.
행동에 앞서 생각하는 기질의 미켈란젤로도 동성애자로 알려졌지만 확증될 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그의 삶은 닫혀 있었고 가문과 자신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며 열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많은 편지와 시를 남겼어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라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데는 훌륭한 자료가 되지만 구체적 생활상은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 사람들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환영에 사로잡힌 현실도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었던 데 비해 철학과 문학의 요람에서 교육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당시에도 난해한 단테의 『신곡』을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박식했지만,
오늘날의 지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학문에 치우친 협소한 시각을 가졌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친구 화가와 함께 스피니 궁전 앞 산타 트리니타 광장을 걷고 있었다.
벤치에서 잡담하던 사람들이 레로나르도를 불러 세우고는 단테의 글에서 난해한 부분을 지적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마침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광장에 나타나자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여기 미켈란젤로가 오고 있군. 그가 자네들에게 말해줄 걸세.”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벌컥 화를 내면서 레오나르도에게 말했다.
“선생님 스스로 대답하세요. 선생님은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
미켈란젤로는 발걸음을 돌렸고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뒤돌아 선 채 다시 말했다.
“밀라노인은 어리석었기 때문에 선생님을 믿었던 거에요.”

이 에피소드를 통해 23살 연하의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업신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풍을 비교하면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상당히 닮아 내면에서는 그에게 존경을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포기했다는 걸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핀잔했지만,
미켈란젤로도 해낼 수 없었음을 그 자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통치자 루도비코가 공화국을 건설한 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하는 기마상을 레오나르도에게 의뢰한 것을 꼬집은 말인데, 막강한 부를 가진 루도비코는 실재 말보다 서너 배 크고 장려한 형상으로 제작하기를 원했고 레오나르도는 앞다리를 든 말을 청동으로 제작하려고 했다.
수 톤에 이르는 말의 무게를 뒷다리로만 지탱하게 하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는 가능하지 않았으며 앞다리가 하나 더 있어야 가능했다.
기마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과연 레오나르도에게 제작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미켈란젤로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사람들은 제작되지 못한 책임을 레오나르도에게 돌렸다.
그러나 작품의 미완성은 당시의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는데, 나폴리,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 속에서 그만한 청동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200년이 지난 후 프랑스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이 루이 14세의 동상을 높이 6,82미터로 제작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청동뜨는 법과 거의 유사한 방법으로 했다.
이 동상은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에는 레오나르도가 실험한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위급한 상황으로 인해 청동을 구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네브라 데 벤치 vs. 바쿠스

레오나르도가 1476년경에 나무패널에 그린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은 <모나리자>를 예고하는 작품이다.
여인의 이름이 지네브라임을 배경의 로덴나무 숲에서 알 수 있는데, 로뎀나무가 이탈리아어로 지네브라이기 때문이다.
로뎀나무는 야인의 고상한 인격을 나타내는 데 적절했다.
레오나르도는 인격을 시각화하는 데 충실하면서 말했다.

“인물을 그릴 때는 성격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칭찬받을 수 없다.”

지네브라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17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당시 시인들이 그녀의 미모에 매료되어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이 초상화는 회화의 언어로 찬양한 레오나르도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초상화가 낯설게 보이는 까닭은 젖가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체가 짧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처럼 원작의 상체가 배꼽까지 묘사되었지만 아랫부분이 상해 12~15센티미터나 잘라냈다.
작품 뒤에 “아름다움이 덕을 꾸민다”고 적혀 있다.
지네브라의 눈썹이 조금밖에 없고 이마가 아주 넓은 것은 당시의 유행을 따른 것으로 미의 규준이었다.
나중에 그린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고 이마가 넓은데, 눈썹을 밀어버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모나리자>가 그려진 이후 곧 유행이 달라져 이마가 도로 내려왔고 얼굴을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답게 여겨졌다.
이 초상화를 워싱턴 갤러리가 1967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주고 구입했으며, 미국 내에 유일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13살 때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조각다운 조각을 처음 제작한 건 22살 때 완성한 <바쿠스>이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술에 취해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쿠스를 묘사하면서 뒤에 반인반수이면서 호색가인 사티로스가 포도를 훔쳐 먹으며 관람자를 향해 미소짓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이 떨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사티로스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사티로스가 훔쳐 먹는 포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에게는 포도가 얼마든지 있고 그의 머리조차 포도송이로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통통한 사티로스를 모델로 삼아 개인적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또한 환상적인 효과를 위해 드릴을 사용해 사티로스 발 아래의 사자 생가죽과 포도송이를 제작했다.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기가 없는 바쿠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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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비행기구를 고안하다


레오나르도는 1496년 1월 2일 ꡒ내일 아침 나는 쇠로 띠를 만들겠다ꡓ고 적었는데, 나르는 기구를 처음 고안하려고 했다.
그가 나르는 기구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건 피렌체에서부터였으며 아마 사춘기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는 드로잉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그릴 시기에 그가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82년 롬바르디에서 그는 사람이 새처럼 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노트북에 적었다.
그는 1490년대에 새를 관찰했으며 일종의 비행원리를 정립하면서 몇 가지 나르는 기구를 스케치북에 디자인했다.
그는 적었다.

“새는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며 인간에게는 이와 같은 모든 운동을 하는 기구를 재생할 능력이 있다."

1495년 혹은 이듬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물리적으로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새와 같은 날개를 달고 싶어 한 건 고대로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는 일찍이 선각자들이 불투명하게나마 생각한 나르는 운동에 대한 자료를 두루 살펴보았다.
중세에 빌라드 데 오네쿠르트가 새가 나르듯 인간이 부착할 수 있는 날개를 고안했는데,
낙하산처럼 생긴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고안과 유사하며 레오나르도가 그의 드로잉을 알고 있었을 듯하다.
레오나르도는 헬리콥터처럼 프로펠라를 빠르게 회전하여 상승하며 날개의 원리로 비상하고 낙하산의 원리로 땅에 무사히 내리는 것에 관해 연구했다.
그가 생각한 프로펠라의 지름은 10미터였으며 날개의 길이는 12미터였다.

문제는 프로펠라를 돌릴 수 있는 장치였다.
그는 새에 있어 날개의 무게와 면적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한 후 절대적인 원리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사다새pelican 같은 일부 커다란 새의 경우 날개가 아주 짧은 데 반해 박쥐의 경우 몸체에 비해 아주 커다란 날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보면 그는 실재 사이즈로 고안하면서 지레를 이용해 박쥐와 같은 커다란 날개를 사용했는데, 나무로 된 날개의 무게가 200 파운드나 되었다.
당시 1파운드는 450 그램이 아니라 380 그램이었으므로 76kg에 해당한다.
그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또 다른 재료와 더불어 다른 형태의 날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볍고 가장 강한 재료로 날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기구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석회를 바른 강질의 소나무, 반수를 먹인 실크, 털을 덮은 캔버스, 기름이나 명반을 바른 가죽, 밑판에 갈대나 욋가지를 엮은 어린 소나무를 생각했고 탄력을 위한 스틸과 각질을 생각했다.

이 기구를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앉아서 할 것인지, 누워서 할 것인지, 아니면 서서 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그는 여러 형태의 기구를 그렸는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카누와 같이 생긴 것으로 노를 젓듯이 운전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나비 모양으로 페달, 키rudder, 등삭stirrup, 돛, 핸들, 멜빵, 조선gondola, 플랫트폼, 조종 케이블, 완충물과 발판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착륙장치 등을 갖추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발명에 신념을 갖고 임하면서 아주 많은 시간을 연구에 정진했다.
그는 높은 데서 이 비행물체를 실험했다.
그는 자신 있게 노트북에 적었다.

"기다란 포도주용 (구명대의 역할을 하는) 가죽부대를 허리띠에 부착하고 이 기구를 탄 채 호수 위를 나를 경우 호수에 빠지더라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비행실험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기구에는 날개를 움직이는 엔진이 부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의 친구 파지오 카르다노Fazio Cardano의 아들 지롤라모 카르다노Girolamo Cardano의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몇 차례 실험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는 비행물체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못해 나르는 데 실패했고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명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년 후 그는 피렌체에서 다시금 연구에 착수했다.

1496년 매우 중요한 인물이 밀라노로 왔는데,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승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로서 토스카니의 보르고 상 세폴크로Borgo San Sepolcro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알베르티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수학했다.
레오나르도보다 서너 살 많은 그는 수학을 가르치는 일로 생활했다.
그가 밀라노에 온 것은 통치자 루도비코의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바사리에 의하면 파치올리는 고전에 능통했으며 유클리드로부터 레지몬타누스Regimontanus에 이르기까지 수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겸비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논문을 연구했다.
그의 논문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적으면서 그를 "마스터 루카"라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갖가지 수학적 부호를 적으면서 "수학자가 아니면 나의 기록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당시 화가, 건축가, 공학가가 아는 정도의 실질적 기하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수학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결여하고 있었다.
그는 대수학algebra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파치올리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
그의 노트북에는 제곱근square root, 곱하기, 나누기, 복잡한 공식, 공준postulate, 등식, 기하적 형상들인 정삼각형, 정사각형, 육각형, 동그라미, 자른 구면 등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파치올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매료되었다.
파치올리는 그에게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설명했고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발명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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