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뮤지엄 루브르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최대의 국립 뮤지엄으로 사용되는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말 필리프 2세가 외적으로부터 파리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성채를 기원으로 한다.
14세기 후반 샤를 5세가 성채를 확장 정비하여 왕궁으로 개조했지만 그의 사후 백년전쟁으로 파리는 황폐해졌으며 루브르는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자극을 받은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에 의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건축물로 개축했다.
1563년 앙리 2세의 왕비가 왕궁의 서쪽에 튈르리 궁전을 세웠고, 앙리 4세 시대에 걸쳐 센 강 연변에 ‘물가의 장랑’을 증축하여 루브르와 튈르리 두 궁전을 연결시켰다.
그 후에도 개수는 틈틈이 계속되었으며 17세기 루이 14세 시대에는 클로드 페로에 의해서 콜로네이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168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 후 루브르의 중축 공사는 중단되었고 내부에는 여러 아카데미와 국가 기관이 배치되었으며, 예술가 및 기술자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18세기 들어서 그곳을 공공 뮤지엄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지비에 백작297이 그랑드 갤러리(대전시장)301의 건축과 설계를 지원하고 중요한 예술작품들을 계속해서 모아들였고, 1793년 혁명정부가 그랑드 갤러리에 국립 중앙 뮤지엄을 설치·공개했다.
나폴레옹 통치 하에서는 카레 궁과 리볼리 가를 끼고 북쪽 파빌리온(건물의 별관, 별채)에 잇댄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하면서 19세기에 서쪽으로 뻗은 전시장들과 파빌리온들을 거느린 두 개의 주요 윙wing(건물의 옆으로 뻗은 부분)이 완성되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그것들을 전시장으로 개관했다.
완성된 루브르는 두 개의 사각형 본관과 그 주위를 둘러싼 두 개의 커다란 정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 복합체이다.

7월 왕정(1830-48) 때 한층 더 늘려 안의 정원과 아폴론 회랑이 정비되었다.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한때 중단되었던 증축공사는 나폴레옹 3세 시대에 더욱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870년대에는 다른 부분의 증축도 완성되어 총면적 약 2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로 완성되었는데, 약 4세기가 걸려서 완성되었다.

루브르 뮤지엄의 소장품은 역대 왕의 컬렉션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기원은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프랑수아 1세가 동시대의 이탈리아 회화를 퐁텐블로 궁전에 수집했던 ‘회화실 Cabinet des tableaux’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 13세 시대에는 이미 200점의 회화가 수집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회화실이 루브르 궁전으로 옮겨졌고 총리 콜베르의 예술진흥정책에 의해서 왕실 컬렉션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때부터 루브르 궁전을 뮤지엄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8세기에 프랑스 궁정에서 수집한 스페인 작품은 콜란테스의 <불타는 덤불>과 벨라스케스 작업장에서 제작된 스무 점의 합스부르크 가 사람들의 작은 초상화가 전부였다.
초상화들은 루이 13세의 왕비 안이 주문한 것들로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201도 포함되었다.
이 작품들은 루브르 궁전 내의 안 아파트에 프리즈처럼 장식되었으므로 일반인에게는 관람이 허락되지 않았다.

루이 14세가 거처를 베르사유로 옮긴 후 콜베르는 루브르 궁전의 방 몇 개를 정비하여 공개했다.
계속해서 루이 15세 시대에는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설치되어 그 회원들의 작품이 루브르 궁전 내의 살롱 카레에서 전시되었다.296
또한 총리 마리니는 왕실 컬렉션 가운데 100여 점을 뤽상부르 궁전에 모아서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당시의 예술가, 아카데미 출신, 그리고 미술품 감식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지비에도 스페인 회화는 불과 몇 점 밖에 알지 못했으며 그것들을 파리의 30~40명의 개인 화상들을 통해 구입했다.
이때만 해도 스페인 대가들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구하기 어려웠고, 그나마 옛 대가들의 주요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은 루아얄 궁전으로 오를레앙 공의 컬렉션이었다.
루아얄 궁전은 후원자 리슐리외 추기경을 위해 르메르시에가 지은 궁전이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로 다섯 살 난 루이 15세를 대신해 군주로 군림했는데, 예술을 사랑한 그는 많은 미술품을 수집했다.
1733년 오를레앙 컬렉션 목록에는 스페인 작품이 아홉 점으로 적혀 있으며 그것들 중 한 점이 벨라스케스의 <모세의 발견>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훗날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화가 혼토르스트(1590-1656)의 원작으로 판명되었다.
7점은 리베라의 작품이고 나머지 한 점은 루이스 데 바르가스의 작품이다.
루이-필리프-조제프 오를레앙(1747-93)은 정치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소장품을 투기꾼에게 팔았고 투기꾼은 1793년과 1800년 사이 런던에서 전시한 후 팔았다.
1790년대에 이 작품들이 화상들에게 소개되면서부터 옛 대가들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겼으며 영국의 젊은 화가들이 이들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당지비에는 1779년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외교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티치아노·벨라스케스·무리요 등의 작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면 궁정 컬렉션으로 하고 싶으니 알아보고 그 밖에도 흥미로운 작품이 있다면 연락하라”고 적었다.
당지비에는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인데, 스페인의 총리는 미술품을 국외로 수출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공포했다.
당지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직접 미술품을 구입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파리의 화상들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구입했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 속에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당지비에는 더 이상 그랑드 갤러리 내의 루아얄 뮤지엄을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왕실 소장품을 루브르에 수용한다는 국민의회의 결의에 기초하여 1793년 8월 10일 루브르가 정식으로 뮤지엄으로서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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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벨라스케스는 1651년 여름 마드리드로 돌아가 펠리페 4세의 환대를 받았다.
펠리페 4세는 1652년 왕의 방들을 정리하고 왕의 여행을 준비하는 직책인 궁정의 시종에 그를 임명했다.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아내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딸 엘리자베스(스페인어로는 이사벨라)202였다.
1644년 그녀가 죽은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3세의 딸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벨라스케스가 돌아오자 펠리페 4세는 그에게 왕비 마리아나와 그녀의 자녀들의 새로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벨라스케스는 왕비의 초상화203와 왕의 맏딸인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204에서 유사한 구도법을 사용했으며, 많은 화실에서 이 작품들의 복제가 이루어졌다.
왕가의 여인들은 커다란 머리장식을 하고 버팀살대로 장식한 치마를 입고 있어 마치 인형같이 묘사되어 있다.
마소도 1644~45년 <어린 왕녀 마리아 테레사>205를 그렸는데 시기적으로는 벨라스케스보다 앞서지만 구성에서는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마소가 이런 구성을 먼저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색채를 밝게 사용한 벨라스케스의 작품과는 인물의 개성과 생동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벨라스케스의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201와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206는 구도와 양식이 서로 비슷하고 그의 작품들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꼽히는데, 오른손을 의자에 올려놓은 것은 벨라스케스의 회화적 의도로 어리지만 왕녀의 의젓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델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매우 섬세하게 정면에 왕가의 위엄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면에는 모델들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화가 지망생이던 드가와 마네는 루브르의 스페인 전시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다양한 양식을 익혔는데, 벨라스케스의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모사하면서 스페인 화풍의 장점을 받아들였다.207, 208
르누아르가 1864년에 그린 <로마인 라코>209도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고, 장-자크 에네도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앙리에테 제르맹>210을 그렸다.
휘슬러의 <회색과 초록색의 조화: 미스 시셀리 알렉산더>211도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미국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도 1899년에 <어린 왕녀, 벨라스케스의 유물>212를 그려 벨라스케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이들의 작품과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를 나란히 놓고 보면 200년 전에 그린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명암의 대비와 은은하면서도 밝은 색상에 의해 더욱 생동감 있으며 붓질이 자유롭고 활기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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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코에 관하여


그렇잖아도 뉴욕에 가기 한 달 전 마로니에 출판사에서 도어 애쉬턴의 <로스코에 관하여>를 번역해달라고 의뢰가 왔었드랬습니다.
그때 출판사 측에서 로스코의 전시회가 있을 것을 말해주면서 가능하면 전시회가 열릴 즈음 책을 내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번역을 마치고 뉴욕으로 떠나기 이틀 전 원고를 넘겨주었습니다.
그 책은 7월 중순경에 나올 것으로 봅니다.
지금 편집중입니다.

로스코 전시회를 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내가 쓴 '역자 서문'과 '저자 서문'을 여기에 싣습니다.


역자 서문
마크 로스코와 절친한 친교가 있었고 그와 더불어서 뉴욕 화파의 손가락을 꼽을 만한 지성적이며 또한 감성적인 화가 로버트 머더웰이 매우 적절하게 언급한 대로, 이 책이 로스코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자 도어 애쉬턴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로스코의 그림자가 되어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불가사의한 화가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쉽게 간파되지 않는 내면에서 갈등을 통해 끓어오르는 심리적, 지성적, 그리고 미학적 추이를 확대경에 눈을 가까이 대고 경이로울 정도로 면밀히 살폈으며, 그런 추이의 요인들을 추적하고 규명하기 위해 로스코에게 영향을 끼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상황들을 상세하게 분석 서술함과 동시에 그의 정신세계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준 개별적인 예술가, 시인, 작곡가, 철학자들의 사상까지도 고찰하고 분석하는 놀라운 결과물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그녀는 로스코의 고대 비극적 신화에 대한 관심을 추적하다가 아이스킬로스로부터 니체, 그리고 니체에게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로 이어지는, 또한 구약성서와 키르케고르의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체험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문화적 연결고리를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고대와 근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방대한 연구와 실적을 기술했다.
따라서 그리스 고전, 기독교, 철학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 책은 난해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이 역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화가 로스코와 인간 로스코를 동전의 양면으로 치우침 없이 동등하게 다룬 이 훌륭한 저술을 독자들의 감동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방안을 모색했는데, 난해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애쉬턴은 위대한 비극작가, 시인, 철학자들의 말을 여러 차례 인용했는데, 영어로 되어 있어 그것들을 번역하더라도 그리스어와 독일어 전공자로서 그들을 개별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이 읽을 때는 미흡할 것이 틀림없다.
번역하면서 그런 인용문들을 접할 때마다 좌절감을 느꼈는데, 영어에 대한 직역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특히 시를 번역하는 것은 그 시를 쓴 시인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내용들이 전후 문맥에서 반드시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절충안으로 내용의 흐름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용들 가운데 일부와 인용에 대한 저자의 해석 일부를 번역에서 제외시키면서 문맥의 일관성과 저자의 의도가 손상되지 않게 했으며, 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역주를 많이 달아 제외된 일부의 본문으로 해서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감소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번역에서 제외한 분량이 전체의 5퍼센트 미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그 내용은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바라본 시각에서의 그녀에 맞춤형이 되는 인용이기 때문에 화가와 인간 로스코의 참모습을 아는 데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역자의 판단에 의해서였다.
그렇게 하고나니 읽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역주는 주로 인명, 작품, 단체의 성격에 치중되었고 더러 상세하게 기술했는데, 주변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애쉬턴이 조명하는 로스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노파심에서였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관한 책을 썼고 이 분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했지만 번역을 마치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음을 도어 애쉬턴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성실한 태도로 한 예술가의 전모를 드러내기 위해 사소해 보이는 것,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도 설명하기 위해 그에 해당되는 자료를 찾아 고대와 근대의 사상가들을 탐문하여 뒷받침하는 기술의 노력은 역자를 포함하여 예술가의 전기를 쓰는 작가들에게 귀감이 된다.
로스코와 같이 지성적이며 내성적인 화가의 정신세계를 훤히 꿰뚫어본다는 것은 그에 걸 맞는 지성과 예민한 감성을 가진 사람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로스코에 대한 저자의 존경심은 대단히 커서 그를 거의 불가사의한 존재로까지 끌어올려놓고, 그의 심연 깊은 어두운 곳으로까지 내려가서 예술가 자신도 스스로 의식의 세계로 끌어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하느라, 그리고 여기에 더 보태어 로스코가 받은 영향 전반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영향에 대한 화가의 반응 내지는 대응을 구체적으로 파헤치기 위해 여간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 화가의 생애가 분석적으로 그리고 파노라마로 적나라하게 독자들에게 열린 것이다.
이 책을 로스코에 관한 완벽한 전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저자가 그와 18년 동안 교류하면서 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제는 고인이 되어 그를 직접 바라볼 수 없게 된 오늘날 어느 누구도 이 책의 저자처럼 1950년대와 60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로스코의 말을 십분 이해하고 그의 예리한 감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서 마크 로스코는 물론 경제공황, 러시아 혁명,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미술에 헌신한 다수의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한층 증폭되기를 바란다.

저자 서문
책의 제목을 ‘로스코에 관하여’라고 한 것은 전반적, 대략적 두 가지 이유에서 회화에 관한 기술이란 늘 무엇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예술가에 관한 기술이란 늘 대략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적, 전기적 세부사항을 넉넉하게 충원하더라도 상세한 인물묘사를 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 개성의 반응이 맹렬할 정도로 각양각색이라는 점을 잘 안다.
로스코의 복잡한 개성이 일반적이지 않고 드물다는 나의 견해는 그의 친구와 면식 있는 사람들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인증 받는 절차를 통과했다.
로스코의 성격은 친구들에게조차 불분명하게 나타나서 친구들이 종종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일이 있었다.
내가 비교적 다양한 각도에서 로스코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부터 타계한 1970년까지 약 18년에 걸쳐서 그와 친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로스코와의 대화는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와 함께 점심식사를 할 때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6번가에 있는 식료품점에서 주로 구운 소고기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지만, 그의 말년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내로 가서 근사한 중국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다.
대화의 내용은 거의 동일했고 우리는 일종의 철학적 야유를 즐겼다.
우리는 옛 러시아 문학에서 서술되어온 그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인생에 관하여 오래 이야기를 나누면서 윤리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미술에 대한 변죽을 울리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런 큰 틀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창기에 익히 알려진 모습으로서의 로스코의 위트와 넘치는 활기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인사할 때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예사였으며 때로는 부드러움이 넘쳐흘렀다.
많은 친구들이 그의 반기는 미소와 두꺼운 렌즈를 낀 안경 뒤로 보이는 부드러운 눈이 풍기는 온화함을 회상한다.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심란해할 때가 있었다.
로스코는 불안정했으며 종종 침착성을 잃었다.
종종 나의 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곤 했는데, 순서대로 요리가 나오는 동안 그는 담배를 손에 쥔 채 일어서서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활기 있게 말하고 열심히 경청했다.
마음이 산란해질 때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걸었고 시선이 모호해져서 그가 대화를 계속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 로스코에게는 분노가 있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 대부분이 이 점을 인정하고 더러는 판에 박힌 작업실에서의 생활이 가져다준 외로움 때문으로 이해했으며, 더러는 원인을 회의적인 그의 태도로 꼽았다.
로스코의 가까운 친구들 가운데 K모씨는 로스코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말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불명료함으로 해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종종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조심성스럽고 수줍은 성격이 낭만적이고 때로는 감상적인 정신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고 고립을 자초하게 했다.
그는 아주 많은 감성적 에너지를 소비하여 자기 자신을 주제넘게 나서지 못하도록 했으며, 일생 사업에서의 과열된 반응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회화가 초자연력에 의한 변형에서 변용으로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이 일종의 환희로서 그를 대변한다는 데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열정의 깊이를 감지하고 자신의 언명이 어떤 면에서 의식주의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로스코는 1970년 2월 25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후 그는 예술가로서 선정적인 이름을 남기는 전에 없던 가장 복잡한 법정투쟁을 동반한 재판을 통해 부동산을 하나 남겼다.
나는 로스코가 말한 “인간의 일생 사업의 의미”에 관해 쓰는 것이기 때문에 악명 높았던 재판에 관해 쓸 여분의 페이지는 마련하지 않았다.

뉴욕에서 도어 애쉬턴
198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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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의 <총살형>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총살형이 회화의 주제가 된 것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고발하려는 화가의 의도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가공할 만한 불의한 사건에 대한 화가의 분노와 그러한 사건을 자행한 자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다.
총살형을 그린 화가로 고야, 마네, 피카소가 있고, 마네가 고야의 전례를, 피카소가 마네의 전례를 따라 그렸다.
세 사람에 의해서 구도와 형식이 확고해진 것이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1746~1828)는 프랑스의 에스파냐 점령기인 1810~14년에 <전쟁의 참화>란 제목으로 에칭 연작을 65점 제작했다.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극적이면서 잔인하고 섬뜩하며 다양한 장면으로 묘사했다.
그것들은 잔혹함과 공포에 대해 인간의 상상력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맹렬한 저항의 장면들이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다비드 274, 275)은 1814년에 그린 것들로 <1808년 5월 3일>은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마드리드 주민이 프랑스군에 대항해 봉기했고 프랑스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군 150명, 스페인인 400명이 죽었다.
1808년 5월 2일 성난 군중이 성으로 몰려가 프랑스군에 의해 왕과 공주들이 강제로 성을 떠나는 데 항거했다.
프랑스군이 궁정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군중이 군인 몇몇을 찢어 죽였다고 한다.
프랑스군 사령관은 군대를 풀어 군중을 향해 발포하게 했다.
고야는 1814년 그날을 상기하여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렸다.
이것들을 제작한 것은 나폴레옹 형 요제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어 통치할 때였고, 고야는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된 이래 계속해서 궁정화가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고야는 1792년에 급성 중이염을 앓았고 2년 후 병에서 회복되었을 때는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것이 이후 작품 활동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지만, 정서적 변화의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놀라운 공상과 상상력을 한껏 표현한 드로잉, 에칭, 유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해가 갈수록 특정한 풍속적 주제와 공상적인 장면에 몰두했는데, 여기에는 기분 나쁜 환상적인 요소와 공포, 위협 등 어두운 요소가 두드러졌다.
그가 1799년에 80점의 동판화를 묶어 발간한 <로스 카프리초스>는 1793~98년에 제작한 것들로 유머러스한 표현에 악몽과 같은 불길한 요소가 드리워진 작품들이다.
작품의 주제는 사회적 관습과 교회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 같은 요소들도 있다.
이런 작품을 제작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전쟁의 참화와 외국의 군사적 지배를 증오하여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주민의 봉기를 그리게 했다.

나폴레옹이 형을 시켜 스페인을 통치하게 한 것은 유럽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한 대륙봉쇄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부르봉 왕가의 후손인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가 국정을 제대로 관리도 개발도 하지 못해 그동안 해군력과 경제적 측면의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3세가 1788년에 죽자 60세의 아들 카를로스 4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지성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못했다.
그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정부인 마누엘 드 고도이의 도움을 받아 마드리드를 통치하고 있었다.
왕비는 왕위대에 속한 고도이를 일약 총리로 만들었다.
1804년 이래 스페인이 프랑스와 불편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도이의 야심 때문이었다.
고도이는 왕자 페르디난드가 왕위를 계승하면 자신이 포르투갈을 차지하려는 야심으로 프랑스와의 동맹관계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페인에 대륙봉쇄에 동참할 것과 하노버 점령에 필요한 군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고도이는 왕의 측근들에게 미움을 샀고 페르디난드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페르디난드는 부왕이 죽으면 고도이가 왕위를 탈취할 것이 염려되어 비밀리에 나폴레옹의 지지를 구하고 있었다.
스페인 원정군 사령관 뮈라가 1808년 3월 마드리드로 진격할 때 아란후에즈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고도이가 실각하고 카를로스 4세가 하야했다.
이 폭동으로 페르디난드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로 등극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족들을 베이욘느로 모이게 했다.
베이욘느 회의에서 왕과 페르디난드 모두 서로 헐뜯기에 여념이 없자 나폴레옹은 두 사람 모두 퇴위시킨 후 탈레랑의 성에 붙잡아두었다.
이 조치는 스페인 국민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스페인 국민이 잠잠했던 건 나폴레옹이 미운 고도이 대신 페르디난드를 지원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1867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고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희곡 작가 루도빅 알레비는 적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종료되었다.”

공화주의자인 에두아르 마네(1832~83)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마네 146, 147, 미술사 메트로 246, 244, 245-2)이란 제목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는데 이런 구성방법은 고야의 영향이었다.
그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편에 그리고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왼편에 구성했다.

고야의 작품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표현된 데 비해 마네의 작품에는 그런 점이 없어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그림이 되었다.
고야는 집행자들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마네는 총에서 불이 뿜는 좀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당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의 얼굴은 무덤덤하다.
마네 작품의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도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했는데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에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친구들이 나폴레옹 3세의 위신을 손상시키므로 발표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그는 충고를 받아들여 이듬해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물의를 염려한 때문이다.
이 작품은 1879년 뉴욕의 호텔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마네는 1867년 9월 늦게 막시밀리안의 처형장면을 다시 그렸는데 그림을 구성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습작한 4점은 현재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두 장군 사이에 선 채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실재 처형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네의 의도대로 구성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마네는 고야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는 사람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평행으로 구성했다.
이 작품에 관해 르누아르는 훗날 화상 볼라르에게 말했다.

“이 작품은 완전히 고야다. 하지만 마네는 마네가 아닌 적이 없었다.”

마네가 대가들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마네는 1년 반 동안이나 유화와 석판화로 이 비극적인 사건을 폭로했다.

요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1832~67)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이다.
나폴레옹 3세의 강요로 1864년 4월에 합스부르크(1276~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왕가)의 왕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즉위했다.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믹시밀리안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구출하지 않았으므로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베니토 후아레즈가 주도하는 과격한 멕시코 게릴라들이 막시밀리안과 휘하의 장군들 미구엘 미라몽, 토마스 메지아를 체포했다.
후아레즈는 1867년 6월 19일에 멕시코 시티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쿠에레타로 근처에서 그들 모두 처형했다.

인디언 고아 출신의 후아레즈는 동란 후 1861년부터 대통령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1867년 3월 모든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내를 파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5월 15일 쿠에레타로가 점령당하자 항복했다.
후아레즈는 집권 당시 법을 제정했는데 외국 군대를 멕시코로 끌어들이는 어떤 행위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총살형 집행장에서 여섯 명의 군인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충분한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를 멕시코로 추방한 결과 벌어진 사건이었다.

훗날 피카소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20세기 486)을 그렸다.
피카소는 1937년에 조국 스페인의 동란을 <게르니카>란 제목으로 그림으로 기소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렸는데 한국에서 동란이 일어나자 고야와 마네의 전례를 따라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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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를 그려서 살롱전에 출품할까 하네."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모네는 졸라의 도움으로 1868년 봄을 파리 서쪽 베네쿠르에 있는 오베르그드 글로탱(센 강 북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카미유와 장과 더불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5월에 그곳에 도착해서 카미유를 모델로 <베네쿠르의 강>을 그렸는데 이 작품을 간단하게 <강>이라고도 합니다.
그가 붓질을 빠르게 대충 칠했음을 보는데 일부 미술사학자들 중에는 이런 점을 지적하여 최초의 인상주의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6월 29일 바지유에게 쓴 편지에서 애호가가 그림을 주문하려는지 알아보기 위해 르 아브르로 간다고 했습니다.
모네가 말한 ‘애호가’란 사업가인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를 말합니다.
르 아브르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열린 국제해상전에 모네는 5점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회에 부댕, 쿠르베, 코로 등도 참여했습니다.
은메달을 수상한 모네는 은메달의 가치가 겨우 15프랑 우리돈으로 만오천 원에 해당한다고 불평했습니다.
전시회를 관람한 고디베르는 모네의 바닷가 장면 2점을 구입하면서 자신과 아내 마그리트의 초상을 그려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마담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의 초상>은 모네가 평생 그린 그림들에 비하면 매우 독특한 작품입니다.
처음 의뢰받은 인물화여서인지 주문자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쓴 듯 보입니다.
그는 고디베르의 아내를 여왕과도 같은 고귀한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이들 부부의 인물화를 그려주고 당장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시회의 성공을 알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고생스러웠던 점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8월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페캉의 노르망디 항구 동네로 오게 했고 그녀와 아들을 모네의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는데 가족이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데리고 르 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에트레타의 해안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바지유에게 쓴 편지를 보면 경제적 형편이 매우 절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고모가 도우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어제 몹시 절망감을 느껴 어리석게도 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는 생각까지 했다네. … 내 입장을 상상해 보게. 아이가 병이 났는데도 돈 한푼 없으니 …” (1868. 8. 6)

그해 10월과 11월에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거의 좌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작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이젠 명성을 기대하지 않겠네.

모든 것이 암담한 지경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전히 빈털털이일세. 좌절과 치욕, 기대, 그리고 더 큰 좌절.
자네만 믿겠네, 친구여.“

그러나 이내 옛날의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12월에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는 즐거운 비명이 적혀 있습니다.

“현재 나는 사랑하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네.
저녁이 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따뜻한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는 작은 집으로 돌아간다네.
자네가 자네의 대자(代子)를 한 번 보면 좋을 텐데.
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어린 애가 커가는 걸 지켜보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군.
그 애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네.
그 애를 그려서 살롱전에 출품할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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