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를 그려서 살롱전에 출품할까 하네."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모네는 졸라의 도움으로 1868년 봄을 파리 서쪽 베네쿠르에 있는 오베르그드 글로탱(센 강 북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카미유와 장과 더불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5월에 그곳에 도착해서 카미유를 모델로 <베네쿠르의 강>을 그렸는데 이 작품을 간단하게 <강>이라고도 합니다.
그가 붓질을 빠르게 대충 칠했음을 보는데 일부 미술사학자들 중에는 이런 점을 지적하여 최초의 인상주의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6월 29일 바지유에게 쓴 편지에서 애호가가 그림을 주문하려는지 알아보기 위해 르 아브르로 간다고 했습니다.
모네가 말한 ‘애호가’란 사업가인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를 말합니다.
르 아브르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열린 국제해상전에 모네는 5점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회에 부댕, 쿠르베, 코로 등도 참여했습니다.
은메달을 수상한 모네는 은메달의 가치가 겨우 15프랑 우리돈으로 만오천 원에 해당한다고 불평했습니다.
전시회를 관람한 고디베르는 모네의 바닷가 장면 2점을 구입하면서 자신과 아내 마그리트의 초상을 그려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마담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의 초상>은 모네가 평생 그린 그림들에 비하면 매우 독특한 작품입니다.
처음 의뢰받은 인물화여서인지 주문자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쓴 듯 보입니다.
그는 고디베르의 아내를 여왕과도 같은 고귀한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이들 부부의 인물화를 그려주고 당장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시회의 성공을 알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고생스러웠던 점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8월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페캉의 노르망디 항구 동네로 오게 했고 그녀와 아들을 모네의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는데 가족이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데리고 르 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에트레타의 해안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바지유에게 쓴 편지를 보면 경제적 형편이 매우 절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고모가 도우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어제 몹시 절망감을 느껴 어리석게도 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는 생각까지 했다네. … 내 입장을 상상해 보게. 아이가 병이 났는데도 돈 한푼 없으니 …” (1868. 8. 6)
그해 10월과 11월에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거의 좌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작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이젠 명성을 기대하지 않겠네.
…
모든 것이 암담한 지경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전히 빈털털이일세. 좌절과 치욕, 기대, 그리고 더 큰 좌절.
자네만 믿겠네, 친구여.“
그러나 이내 옛날의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12월에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는 즐거운 비명이 적혀 있습니다.
“현재 나는 사랑하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네.
저녁이 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따뜻한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는 작은 집으로 돌아간다네.
자네가 자네의 대자(代子)를 한 번 보면 좋을 텐데.
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어린 애가 커가는 걸 지켜보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군.
그 애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네.
그 애를 그려서 살롱전에 출품할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