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뮤지엄 루브르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최대의 국립 뮤지엄으로 사용되는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말 필리프 2세가 외적으로부터 파리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성채를 기원으로 한다.
14세기 후반 샤를 5세가 성채를 확장 정비하여 왕궁으로 개조했지만 그의 사후 백년전쟁으로 파리는 황폐해졌으며 루브르는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자극을 받은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에 의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건축물로 개축했다.
1563년 앙리 2세의 왕비가 왕궁의 서쪽에 튈르리 궁전을 세웠고, 앙리 4세 시대에 걸쳐 센 강 연변에 ‘물가의 장랑’을 증축하여 루브르와 튈르리 두 궁전을 연결시켰다.
그 후에도 개수는 틈틈이 계속되었으며 17세기 루이 14세 시대에는 클로드 페로에 의해서 콜로네이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168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 후 루브르의 중축 공사는 중단되었고 내부에는 여러 아카데미와 국가 기관이 배치되었으며, 예술가 및 기술자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18세기 들어서 그곳을 공공 뮤지엄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지비에 백작297이 그랑드 갤러리(대전시장)301의 건축과 설계를 지원하고 중요한 예술작품들을 계속해서 모아들였고, 1793년 혁명정부가 그랑드 갤러리에 국립 중앙 뮤지엄을 설치·공개했다.
나폴레옹 통치 하에서는 카레 궁과 리볼리 가를 끼고 북쪽 파빌리온(건물의 별관, 별채)에 잇댄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하면서 19세기에 서쪽으로 뻗은 전시장들과 파빌리온들을 거느린 두 개의 주요 윙wing(건물의 옆으로 뻗은 부분)이 완성되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그것들을 전시장으로 개관했다.
완성된 루브르는 두 개의 사각형 본관과 그 주위를 둘러싼 두 개의 커다란 정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 복합체이다.

7월 왕정(1830-48) 때 한층 더 늘려 안의 정원과 아폴론 회랑이 정비되었다.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한때 중단되었던 증축공사는 나폴레옹 3세 시대에 더욱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870년대에는 다른 부분의 증축도 완성되어 총면적 약 2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로 완성되었는데, 약 4세기가 걸려서 완성되었다.

루브르 뮤지엄의 소장품은 역대 왕의 컬렉션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기원은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프랑수아 1세가 동시대의 이탈리아 회화를 퐁텐블로 궁전에 수집했던 ‘회화실 Cabinet des tableaux’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 13세 시대에는 이미 200점의 회화가 수집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회화실이 루브르 궁전으로 옮겨졌고 총리 콜베르의 예술진흥정책에 의해서 왕실 컬렉션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때부터 루브르 궁전을 뮤지엄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8세기에 프랑스 궁정에서 수집한 스페인 작품은 콜란테스의 <불타는 덤불>과 벨라스케스 작업장에서 제작된 스무 점의 합스부르크 가 사람들의 작은 초상화가 전부였다.
초상화들은 루이 13세의 왕비 안이 주문한 것들로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201도 포함되었다.
이 작품들은 루브르 궁전 내의 안 아파트에 프리즈처럼 장식되었으므로 일반인에게는 관람이 허락되지 않았다.

루이 14세가 거처를 베르사유로 옮긴 후 콜베르는 루브르 궁전의 방 몇 개를 정비하여 공개했다.
계속해서 루이 15세 시대에는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설치되어 그 회원들의 작품이 루브르 궁전 내의 살롱 카레에서 전시되었다.296
또한 총리 마리니는 왕실 컬렉션 가운데 100여 점을 뤽상부르 궁전에 모아서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당시의 예술가, 아카데미 출신, 그리고 미술품 감식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지비에도 스페인 회화는 불과 몇 점 밖에 알지 못했으며 그것들을 파리의 30~40명의 개인 화상들을 통해 구입했다.
이때만 해도 스페인 대가들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구하기 어려웠고, 그나마 옛 대가들의 주요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은 루아얄 궁전으로 오를레앙 공의 컬렉션이었다.
루아얄 궁전은 후원자 리슐리외 추기경을 위해 르메르시에가 지은 궁전이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로 다섯 살 난 루이 15세를 대신해 군주로 군림했는데, 예술을 사랑한 그는 많은 미술품을 수집했다.
1733년 오를레앙 컬렉션 목록에는 스페인 작품이 아홉 점으로 적혀 있으며 그것들 중 한 점이 벨라스케스의 <모세의 발견>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훗날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화가 혼토르스트(1590-1656)의 원작으로 판명되었다.
7점은 리베라의 작품이고 나머지 한 점은 루이스 데 바르가스의 작품이다.
루이-필리프-조제프 오를레앙(1747-93)은 정치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소장품을 투기꾼에게 팔았고 투기꾼은 1793년과 1800년 사이 런던에서 전시한 후 팔았다.
1790년대에 이 작품들이 화상들에게 소개되면서부터 옛 대가들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겼으며 영국의 젊은 화가들이 이들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당지비에는 1779년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외교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티치아노·벨라스케스·무리요 등의 작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면 궁정 컬렉션으로 하고 싶으니 알아보고 그 밖에도 흥미로운 작품이 있다면 연락하라”고 적었다.
당지비에는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인데, 스페인의 총리는 미술품을 국외로 수출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공포했다.
당지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직접 미술품을 구입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파리의 화상들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구입했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 속에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당지비에는 더 이상 그랑드 갤러리 내의 루아얄 뮤지엄을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왕실 소장품을 루브르에 수용한다는 국민의회의 결의에 기초하여 1793년 8월 10일 루브르가 정식으로 뮤지엄으로서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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