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와의 대화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칸딘스키는 1934년 파리의 카이에르다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그해 여름을 노르망디에서 보냈다.
그는 1935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블랙 마운틴 컬리지에 상주하는 예술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초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리와 뉴욕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고 그해 여름을 프랑스령 리비에라에서 보냈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모던아트와 문화 연감 Kronick van Hedendaagse Kunst en Kultuur』에 「추상미술」을 기고했는데, 다음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추상미술’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당연한데, 추상미술이란 말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적으며 기껏해야 혼동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추상 화가와 조각가들은 새로운 명칭을 만들려고 했으며 결국 ‘비형체적 미술 Art Nonfiguratif’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독일어 ‘비대상적 미술 Gegenstandslose Kunst’과 동의어이다.
두 명칭에서 부정적 의미인 ‘아닌 non’이나 ‘결여된 los’이 적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대상을 제거한 후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우지 않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추상’을 ‘절대’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나 역시 전쟁 전에 이를 시도했다. 알고 보면 ‘절대’라는 표현은 조금도 나은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명칭은 ‘실재적 미술’이다.
왜냐하면 이 미술은 외부세계 외에도 정신적 성격의 새로운 미술세계를 세우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바로 미술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실재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이미 ‘추상미술’이라는 오래된 표기가 정착되었다.

1935년 테네리파에서 『예술지 Gaceta de Arte』의 발행자 에도아르도 베스테르달이 칸딘스키와 인터뷰했다.

베르테르달 미술가의 대상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대상으로의 회귀라는 극단적인 두 경향 사이에 매개 역할을 하는 노선이 모던아트에 존재합니까?

칸딘스키 “대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자연 일반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진지한 모든 미술은 미술의 법칙 아래에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연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의 자연이란 일반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 자연 전체와 연관을 맺는다면 특정한 자연의 매개를 배제할 수도 있습니다.
추상미술도 동일한 법칙 아래에 있습니다.
한 작품 속에 자연과의 이런 불가피한 연관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미술작품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를 인식하는 데 20년이나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형태의 문제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확언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칸딘스키는 1912년에 발표한 논문 「형태 문제에 관하여」를 상기시킨 것이다.)

베르테르달 오늘날의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혹은 도덕적·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예술가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칸딘스키 초월적입니다.
미술 작업은 한 인간 전체를 필요로 하며 미술 세계에 전적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을 요구합니다.

베르테르달 미술가의 참여와 영향은 당연한 것입니까?

칸딘스키 미술가는 시대의 자연적 구성원입니다.
시대의 정신이 미술가를 끌어들여 이용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곧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나는 정치적·사회적·마르크스주의적 혹은 파시즘적 회화를 그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확실하게 실행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모스크바로 왔을 때 동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국가적 의미에서 그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전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

베르테르달 광고 미술은 가능합니까?

칸딘스키 국가적 의미에서 그리는 것이 일종의 광고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세계 최고의 초콜릿이나 브래지어 그리고 ‘발토’란 이름의 담배를 선전하는 광고 미술이 있습니다.

베르테르달 미술이 기여하는 바가 있습니까?

칸딘스키 미술이 기여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당면한 삶’에 기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수레에서 다섯 번째 바퀴처럼 정신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받는 현재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훗날 사람들은 이 다섯 번째 바퀴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베르테르달 모던아트가 위기에 처했다고 보십니까?

칸딘스키 현재 경제 위기 외에 더 끔찍한 위기가 존재하는데, 바로 정신의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고도로 편협한 물질주의적 이념들의 선전에서 비롯합니다.
이 선전의 가장 위험한 결과 중 하나는 정신의 표출이 점차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술에 대해 늘어가는 관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썩어빠진 현실에 대한 해명이 존재합니다.
미술은 삶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미술을 “당면한 삶에 기여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미술을 구출하려는 시도에 대한 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나는 미술의 위기를 봅니다. 그러나 미술은 승자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베르테르달 예견되거나 지속되는 창조를 통해 우리 내면세계로부터 생성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의 직접적 실재성, 그것이 우리를 새로운 인간 해석과 새로운 문화의 상승기로 인도할까요?
아니면 새로운 퇴폐기로 인도할까요?

칸딘스키 미술의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문명국가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양식과 충분한 생활조건들을 보장해줄 필연성과 과제는 자명합니다.
하지만 삶의 이런 측면에서는 충족이 보장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문화를 박탈당한 인간의 존재는 이미 하나의 소화기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끔찍한 표면 아래에는 위기와 퇴폐에 종지부를 찍을 아직은 불가사의한 정신적 운동이 존재합니다.
이런 부활을 준비하는 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 미술입니다.

1936년 런던에서 열린 ‘추상과 구체전 Abstract and Concrete’과 뉴욕에서 열린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전 Cubism and Abstract Art’에 칸딘스키도 출품했다.
칸딘스키의 개인전이 그해 12월에는 파리에 있는 잔느 부셰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렸고 1937년에는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은 1948년 뉴욕에서 타계한 화상 칼 니렌도르프가 1937년 칸딘스키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니렌도르프 처음 추상화를 그린 것이 언제입니까?

칸딘스키 1911년, 그러니까 26년 전입니다.
추상 수채화는 1910년부터 그렸습니다.

니렌도르프 어떻게 해서 ‘추상적’ 사고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칸딘스키 말하기 어렵군요.
아주 어렸을 적 색의 엄청난 표현을 느꼈습니다.
무엇인가 ‘실재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예술을 만들 수 있는 음악가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색도 소리와 마찬가지로 표현력이 강한 듯이 보였습니다.
약 20년 전 모스크바 대학의 학문 기관이 법률학과 인류학 탐구를 위해 나를 볼로그다로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내부가 완전히 비대상적으로 칠해진 농가들을 보았습니다.
문양, 가구, 식기 그 모두가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회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몇 년 뒤 화가가 ‘대상을 소흘히 다뤘다’는 이유로 매우 심하게 공격받았던 모스크바의 인상주의 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전시회에서 회화 자체가 우선시된다는 인상을 받고 혹시 이런 길로 훨씬 더 멀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자문했습니다.
그 뒤 러시아의 우상 회화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런 회화 속에서 ‘추상적’인 것에 대한 안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06년 처음으로 마티스의 초기 작품을 보았는데, 그것도 모스크바의 인상주의 작품과 동일한 이유로 거세게 거부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주 대담하게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대상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표현주의를 거쳐 추상화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무한히 많은 시도, 절망, 희망, 발견을 거쳐서 천천히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입체주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은 선생도 알고 있을 줄 압니다.
입체주의자인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 것은 1912년으로 최초의 추상화를 그린 뒤였습니다.

니렌도르프 추상미술은 자연과 무관하다고 이따금 주장되는데,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칸딘스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추상화는 자연의 ‘겉옷’을 버리기는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적 법칙입니다.
미술은 우주적 법칙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 아래 종속될 때만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법칙들은 우리가 자연을 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내적으로 접근할 때, 즉 자연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선생도 알다시피 그것은 대상의 사용과는 무관합니다.
절대로 한 치의 연관도 없어요! 이에 대해서 나는 체르보 씨의 청탁으로 「미술」지에 글을 기고했습니다.
예술가가 자연에 대해 외적인 동시에 내적인 안목을 가진다면 그것은 영감을 통해서입니다.

니렌도르프 배타적인 의미로 추상화가는 머리로만 작업한다는 주장도 제기되는 데 맞습니까?

칸딘스키 그런 일이 종종 있기도 하나 그것은 대상적·사실주의 화가에게서 더 자주 일어납니다.
머리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며 중요한 신체의 부분이지만 그것은 가슴 혹은 감정과 유기적인 연관이 있을 때에 한해서입니다.
이런 연관이 없다면 머리는 모든 위험과 부패의 근원이 됩니다.
모든 영역에서 그러하며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술에서는 오히려 더 합니다. 머리 없는 대가는 있었지만 가슴 없는 대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위대한 시대와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늘 머리와 가슴 혹은 감정의 유기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오늘 날과 같은 대혼란기에나 미술이 머리만으로도 달성되리라는 빈약한 사고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빈약한 사고는 이미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앙리 루소는 그의 최고 작품들이 죽은 부인의 명령을 좇아 완성된 것들로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여하튼 미술은 내적 명령 없이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즉 직관이 필요합니다.

니렌도르프 선생님의 최초 추상화 작품들은 공식적으로 어떤 반응을 얻었습니까?

칸딘스키 당시 나의 회화가 아주 광적으로 거부되었으므로 나는 완전히 홀로 서 있었습니다.
내가 들은 욕설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재능 없는 사기꾼’은 그들이 즐겨 쓴 말입니다. 나중에 베를린 화상이 된 헤르바르트 발덴은 백치주의라는 이름의 새 미술사조의 창시자라고 칭한 독일 평론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추상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 평론가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널려 있습니다.
이런 사고를 평론가들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건 선생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견해로 추상미술에 대한 끈질긴 타도, 25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투쟁이 추상미술의 필수성과 위대한 힘에 대한 최선의 증거입니다.
매끈하고 빠르게 진척되는 것은 늘 무가치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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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구입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이제 미술품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통로로 수입해야 했다.
프랑스 왕 루이-필리프는 스페인 미술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1835년 말 바롱 타일러를 스페인으로 보냈다.
타일러는 1837년까지 스페인에 머물면서 중세로부터 동시대 화가 고야에 이르기까지 약 85명의 작품 412점을 구입하는 데 132만 7천 프랑을 지불했다.
이에 대해 알렉산더 뒤마는 1837년 『라 프레스』에 “왕은 프랑스 국민에게 스페인 회화가 있는 대규모의 전시관을 선물로 주고 싶어 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가들의 것이지만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로 채웠다”라고 썼다.
타일러는 자신이 구입한 미술품들이 마르세유로 떠나는 프랑스 배에 선적되는 것을 본 후 런던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을 더 구입했으며 무리요의 <돈 안드레스 데 안드라데 이 라 칼>316은 이때 구입한 것이다.
타일러가 구입한 작품들은 1837년 소수의 이탈리아와 북유럽 화가들의 작품들과 함께 루브르에 전시되었으며 루이-필리프는 1838년 자신의 소장품을 정부에 기증하여 1838년 1월 7일 루브르의 스페인 전시관을 통해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게 했으며, 스페인 전시관은 프랑스 미술 발전에 괄목할 만한 기여를 했다.

1842년 영국의 컬렉터 스탠디시 경이 루이-필리프에게 자신의 컬렉션 220점을 유증했으므로 숫자에 있어서 루브르는 프라도가 소장한 작품보다 많게 되었다.
이 시기에 파리뿐 아니라 베를린·부다페스트·드레스덴·런던·뮌헨·상트페테르스부르크·빈 등에 국립 컬렉션이 생겨났는데, 루브르 뮤지엄의 전신인 나폴레옹 뮤지엄의 설립과 내셔널리즘의 대두에 자극을 받아 유럽 각지에 생겼다.
미술품의 소장은 그 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지표가 되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루이-필리프의 스페인 전시관을 스페인 뮤지엄이라고 불렀다.
루이-필리프는 1848년 2월 혁명에 의해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했고 1850년에 타계했다.

이 시기에 작품에 대한 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이-필리프의 스페인 전시관은 열아홉 점의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전시했지만, 훗날 열아홉 점 모두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수르바란의 작품은 <소틸로에서의 크리스천과 무어인의 전투>303, 현재 그레노블 뮤지엄에 소장된 <동방박사의 경배>, <성녀 루시>317와 <성녀 카실다>를 포함하여 성녀 시리즈, <명상하는 성 프란체스코>154를 포함하여 무려 80점이나 소장했으므로 루브르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두 기증자>318와 ‘엘 그레코 딸의 초상’으로 불리기도 하는 <모피를 두른 숙녀>319를 포함하여 8점을 소장했는데, 파리의 뮤지엄으로는 최초로 그의 작품을 소장하는 것이었다.

고야의 작품은 타일러가 직·간접적으로 고야의 아들 야비에르를 통해 구입했으며 <발코니에 있는 마하들>269, <대장간>268, <늙은 여인들(시간)>320등이 포함되었다.
고야를 위해서는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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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뮤지엄의 설립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스페인으로 반환된 모든 작품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종교기관에서 약탈한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궁정 소장품들은 궁정으로 되돌려지지 않았다.
많은 작품이 1630대에 건설된 부엔 레티로 궁전 근처 프라도 거리에 있는 레알 뮤지엄에 소장되었는데, ‘왕립 회화·조각 뮤지엄’으로서의 이곳은 과거에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후앙 데 빌라누에바가 1787년에 새롭게 디자인하여 1819년 11월에 개관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띤 이 건물은 1819년 페르디난도 7세 통치 때 완성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왕궁 및 에스코리알에 있는 회화 작품들을 모아 이 미술관의 소장품을 확장시킨 이사벨라 2세가 추방된 뒤 1868년 국립 프라도 뮤지엄309이 되었다.
이제 프랑스 화가들은 스페인 화풍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가서 프라도 뮤지엄을 찾아야 했다.
이 뮤지엄에는 프랑스에서 돌려받은 무리요와 수르바란의 작품들이 있었고, 스페인 내의 교회, 수도원, 수녀단에 소장되었던 작품들이 수거되어 이곳에 소장되었다.
무엇보다도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과거 스페인의 여러 궁전에 장식되어 일반인은 볼 수 없었던 작품들이 소장되었다.
이 뮤지엄이 개관하기 전까지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주로 빈의 궁정 컬렉션에 많았지만 개관 이후부터는 이곳에서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루브르에서 볼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201뿐이었다.
페르디난도 7세가 왕위를 회복한 시기에는 프라도 뮤지엄을 찾는 프랑스 화가들이 드물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프랑스 화가들이 찾는 미술의 성지가 되었다.

소장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와 부르봉 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다.
펠리페 2세(1556-98년 재위)는 카를로스 1세(1516-56년 재위)의 소장품을 확장했는데, 이 두 왕은 모두 티치아노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펠리페 4세는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를 시켜 이탈리아에서 회화작품을 구입해옴으로써 왕궁의 소장품들을 더욱 늘렸다.
펠리페 5세(1700-24년 재위)는 여기에 프랑스의 바로크 작품들을 덧붙였으며 페르디난도 7세는 새로 지은 뮤지엄의 건물에 여러 왕의 수집품들(에스코리알에 있는 것들은 제외) 중에서 회화만을 한데 모았다.

프라도 뮤지엄은 개관하는 날부터 스페인 화파를 알리는 곳을 목적으로 했으며 중앙의 화랑 하나를 당시의 화가들, 예를 들면 고야·루이스 파레트·마리아노 살바도르 마엘라 등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꾸몄다.
뮤지엄은 얼마 후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들을 전시했는데, 티치아노의 작품이 많았다.
티치아노는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이자 곧 스페인 화파에 영향을 끼친 화가였다.

프라도 뮤지엄은 1872년 1830년대의 자유주의 개혁 때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미술품들을 모아놓은 마드리드의 트리니다드 미술관을 흡수 합병했다.
따라서 17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종교화가 대량 확보되고 폭넓은 컬렉션이 이루어짐으로써 대규모 뮤지엄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서 부속건물들이 건립되었고 컬렉션도 더욱 늘었다.
소장품은 대부분 유화로 약 3만 점에 달한다. 역대 스페인 국왕들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취향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교육적 목적으로 계통을 좇아 수집한 뮤지엄들과는 사뭇 다르다.

스페인 회화 부문에서는 로마네스크 시기의 프레스코 벽화 약간을 제외하면 고딕부터 19세기 말까지의 대표적인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걸출한 것들로는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리베라, 수르바란, 무리요 등 16세기 말에 시작된 ‘황금 세기’의 화가들과 고야의 컬렉션이다.
스페인 회화에 정통한 학자로서 『스페인 화파 화가들의 역사』(1869)와 『모든 화파의 화가들의 역사』(1861-76)의 저자 스터링-맥스웰은 벨라스케스와 무리요를 가리켜 “스페인 화파의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라고 했다.
벨라스케스와 고야는 궁정 화가였기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유례없는 수집을 자랑하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는 <브레다의 항복>177과 <시녀들>213을 포함하여 약 50점이 있으며, 고야의 작품으로는 <카를로스 4세의 가족>263, <옷을 걸친 마하>266, <벌거벗은 마하>196 등 약 110점이 소장되어 있다.
20세기 초에 재평가된 엘 그레코의 작품은 유럽 각지에 산재해 있었는데, <목자들의 경배> 등 30점 이상을 갖추어 세계 최대의 수집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프라도 뮤지엄은 예술가들과 일반 모두에게 스페인 회화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명소였으며 많은 화가들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쿠르베·드가·마네·모네가 방문했고 미국 화가들로는 체이스와 사전트가 방문했다.

프라도 뮤지엄의 설립은 페르디난도 7세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기꺼이 내놓았다.
기록에 의하면 뮤지엄 설립에 페르디난도 7세의 배우자 이사벨라의 공이 컸다.
베르나르도 로페스가 그린 <브라간자의 이사벨라>311에는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벽에 걸린 뮤지엄 건물 그림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옆에 놓인 탁자 위의 뮤지엄 내부화랑 도면을 가리키고 있다.
이 뮤지엄이 1819년 개관했을 때만 해도 소장품의 수가 311점 미만이었고 모두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그 후 20년에 걸쳐서 궁정 컬렉션이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국립 화랑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이때에는 이탈리아 화파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 따로 전시되었고 뮤지엄 카탈로그는 스페인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카탈로그를 만든 데서 이 뮤지엄이 소장품을 국외에 널리 알리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뮤지엄 측은 외국인이 와서 작품을 모사하는 데 호의를 보였다.

페르디난도 7세는 뮤지엄의 소장품을 늘이는 데도 한 몫을 했다. 그는 1820년에 화가 아구스틴 에스베로부터 리베라의 걸작 중 하나인 <삼위일체>313를 구입했다.
웅장한 형태와 다양한 표현력과 더불어 세부 묘사가 뛰어난 이 작품은 작품 속 인물의 인간성과 내면성의 강조가 두드러진다.
리베라는 이 작품을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312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훗날 사전트가 엘 그레코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양식을 익혔다.314

페르디난도 7세는 1821년에 세비야의 유명 컬렉터 마뉴엘 로페즈 세페로와 거래를 했는데 궁정 소장품 여러 점을 주고 수르바란의 <십자가에 매달린 성 베드로에 대한 성 피터 놀라스코의 환영>315 및 <성 피터 놀라스코의 천상 예루살렘에 대한 환영>과 교환했다.
1827년에는 조각가 발레리아노 살바티에르라로부터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312를 구입했다.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74는 페르디난도 7세가 선물로 받은 것으로 1829년에 이 뮤지엄에 소장되었다.

19세기의 대부분 작가들은 프라도 뮤지엄이 곧 스페인 회화사라고 말했다.
세계 어느 곳도 스페인 회화사를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하고 많은 스페인 회화작품을 갖고 있지 못하다.
벨라스케스의 양식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 뮤지엄으로 가야 한다.
여기에는 스페인 미술품 외에도 플랑드르, 이탈리아, 프랑스의 다양한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합스부르크 가와 부르봉 가 궁정이 수집한 것들이다.
여기 소장되어 있는 벨라스케스의 <아라크네 우화>158는 서양 미술 전통의 근본적인 관점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재능뿐 아니라 그가 존경을 표하고 인용한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재능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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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반환요구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814년 3월 30일 파리는 오스트리아·영국·프러시아·러시아·스웨덴으로 결성된 동맹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의 목적은 나폴레옹 제국을 멸망시키고 프랑스의 왕권을 부르봉 왕가로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나라는 왕정을 원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위협을 받았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 대혁명은 종료되었고, 유럽과의 전쟁으로 2백만 명 이상의 프랑스 젊은이가 희생되었다.
웰링턴의 후원을 받은 탈레랑이 4월 1일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틀 후 상원 잔류파를 설득해 나폴레옹의 폐위를 결정지었다.
탈레랑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4월 6일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고 루이 18세의 복위를 결의했다.
루이 18세는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이다.

루이 18세는 1814년 5월 14일 스페인으로부터 강제로 가져온 미술품과 루브르에 소장된 탈취한 미술품들을 동맹군의 압력으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법령에 서명했다.
그는 프러시아 국민에게 프러시아에서 약탈한 모든 것을 돌려주겠다고 언약했다.
그러나 그는 6월 4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프랑스군의 영광은 아직도 건재한다. 훌륭한 미술품들은 이제 우리의 승리에 대한 권리로 우리의 것이다.”

드농은 루브르에 있는 무리요의 작품들은 세비야 시가 프랑스 집행관 장 드 디유 술트에게 기증한 것이므로 반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대사는 “그것들은 시에 속한 것이 아니며 시에 속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세비야 시가 집행관에게 기증할 수가 없었다”고 맞섰다.
술트는 스페인에서 약탈해온 작품들을 파리에 있는 자기 집에 가져다 놓았는데 법령에 의하면 정부 기관에 있는 것들만 돌려주기로 했고 개인이 소장한 것들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농이 지방 뮤지엄에 보낸 것들에 대해서는 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세비야 시는 유럽에서 미국과의 교역을 독점적으로 하던 곳이었기에 경제 붐이 일어났고 수많은 외국 상인들이 이 도시를 찾아왔다.
이러한 부의 축적은 예술가들을 불러들였으며, 개인의 저택을 비롯해 수도원, 교회들은 유명한 미술품들로 장식되었다.306
이 도시에서는 유명한 스페인 화가뿐 아니라 유명한 유럽 화가들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있었고, 특히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이 흔했다.

다양한 화파의 스페인 회화 284점이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반환된 것들 중에는 리베라의 <어머니 돌로로사>와 마소의 <예술가 가족>214이 포함되었는데, 당시 <예술가 가족>은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술가 가족>은 나폴레옹이 1809년 빈을 침공하고 그곳에서 가져와 루브르의 나폴레옹 뮤지엄에 걸었던 작품으로 1815년 9월 9일 빈 갤러리로 반환되었다.
<어머니 돌로로사>와 <예술가 가족>은 반환되기 전, 1809년과 1815년 사이에 제리코가 모사했다.
프랑스인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작품들 가운데 한 점인 무리요의 <병든 자를 돌보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307도 반환되었다.
드농의 장례식에서 바롱 그로는 드농이 늘 하던 말을 상기시켰다.

그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가져가게 하라.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프랑스인은 예술에 있어서의 우수함을 늘 증명해낼 수 있으며 걸작들은 그 어느 곳보다도 여기에 있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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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품이 된 미술품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나폴레옹의 동생 루시앵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어 1801년 아란후에즈 조약을 체결한 날 루시앵은 형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 조약을 체결한 대가로 레티로의 화랑으로부터 훌륭한 그림 20점을 받았다면서, 이것들이 자신에게는 십만 개의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하다고 적었다.
미술품 수집을 즐긴 루시앵은 자신의 고문이자 화가인 기욤 르티에르에게 스페인 화가의 작품 70점을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루시앵이 받은 20점과 구입한 70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중에는 무리요의 작품이 3점, 모로의 작품이 1점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부채를 든 여인>302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시앵은 1801년 11월 파리로 돌아왔고 작품들은 루시앵이 새로 장만한 거처인 브리엔 호텔에 장식되었다.
루시앵은 신분이 낮은 여인과 결혼한 것 때문에 형의 노여움을 사 로마에 정착하여 평민으로 살았다.
소장품은 모두 1803년 말에 로마로 우송되어 루시앵 저택에 장식되었다가 1816년 런던에서 팔렸다.

1808년 5월 9일 나폴레옹은 나폴리의 왕으로 있던 형 조제프를 스페인의 새 국왕으로 세우고 나폴리 왕국은 자신의 처남인 뮈라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조제프의 즉위가 알려지면서 스페인은 전면적인 봉기에 휩싸였으며, 주동자들의 요청으로 영국 총리 캐닝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5월 말 1개 사단을 거느린 뒤퐁 장군에게 장 안도쉬 쥐노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의 지원을 받아 안달루시아를 거쳐 카디스를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1808년 6월 10일 조제프가 새 국왕으로 마드리드에 입성했지만 이튿날 뒤퐁 장군은 바일렌에서 스페인군을 맞아 치욕적인 항복을 했으며 나폴레옹 대군이 무적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조제프는 나폴리를 버리고 스페인으로 온 것을 후회했다.
몇 주 만에 스페인은 불에 타고 피로 물들었다.
마드리드에서의 소요는 1808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은 12월 4일 몸소 마드리드로 가서 형 조제프를 왕위에 앉혔다.
3주 후 나폴레옹 뮤지엄의 디렉터, 도미니크-비방 드농이 마드리드로 와서 파리의 뮤지엄으로 가지고 갈 회화작품 20점을 선정했다.
그는 과거의 궁정 소장품, 고야의 <옷을 걸친 마하>266와 <벌거벗은 마하>196가 포함된 고도이의 소장품, 귀족의 소장품들 가운데서 선정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농이 회화작품을 가져갈 것이라면서 형이 포획한 작품들이 많은 줄 알며 그것들 중 파리의 뮤지엄에는 없는 걸작들로 50점을 자신에게 선물로 보내주면 이에 상당하는 것들을 나중에 보상하겠다고 적었다.
조제프가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회화작품들은 1812년에야 파리로 운반되었다.
조제프는 50점 외에 250점을 더 보냈는데, 이것들을 본 드농은 매우 실망하면서 나폴레옹 뮤지엄에 전시할 만한 것은 여섯 점에 불과하다며 조제프가 형편없는 것들만 보냈다고 투덜거렸다.
나폴레옹 뮤지엄에 전시할 만한 것들에는 수르바란의 <소틸로에서의 크리스천과 무어인의 전투>303와 무리요의 <로마 제국 지방 집정관의 꿈>304이 포함되었다.

나폴레옹에게 300점의 회화작품을 보낸 지 몇 주 후 조제프는 아주 많은 짐을 꾸리고 1813년 6월 마드리드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그의 짐 속에는 165점의 회화작품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무리요와 리베라의 훌륭한 작품들과 벨라스케스의 <세비야의 물장수>164도 있었다.
이 작품들은 조제프가 그의 아내와 살던 마드리드의 레알 궁전을 장식했던 것들로 나폴레옹에게도 주지 않고 그가 아꼈던 것들이다.
조제프의 행렬은 장군 위고(빅토르 위고의 아버지)의 인솔로 파리로 향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영국의 명장 아서 웰레슬리 웰링턴 장군의 군대를 만나 회화작품들을 포획 당했다.
페르디난도 7세는 자신의 왕위를 복위시켜준 웰링턴에게 그것들을 선물로 주었고, 이 작품들은 현재까지 웰링턴의 저택에 소장되어 있다.

회화작품에 대한 조제프의 집착은 아주 컸으며 걸작을 수집하려고 노력하는 나폴레옹과 드농의 눈을 속이고 은밀히 보관하다가 파리로 운반한 것들이 몇 점 있다.
그가 특별히 아끼던 것들로 이것들에는 당시에는 딴 화가의 작품으로 인식되었으나 훗날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확인된 3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들 중 일부는 스페인에 남겨두었지만 일부는 그가 미국의 필라델피아로 망명할 때 가지고 갔으며 이 작품들을 전시에 종종 빌려주었다.
1841년 그는 미국을 떠나 피렌체로 가서 1844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갖고 있던 작품들 중에는 무리요와 벨라스케스의 걸작들이 있었고,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묘사한 <생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305와, 이것을 작은 크기로 모사한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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