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뮤지엄의 설립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스페인으로 반환된 모든 작품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종교기관에서 약탈한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궁정 소장품들은 궁정으로 되돌려지지 않았다.
많은 작품이 1630대에 건설된 부엔 레티로 궁전 근처 프라도 거리에 있는 레알 뮤지엄에 소장되었는데, ‘왕립 회화·조각 뮤지엄’으로서의 이곳은 과거에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후앙 데 빌라누에바가 1787년에 새롭게 디자인하여 1819년 11월에 개관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띤 이 건물은 1819년 페르디난도 7세 통치 때 완성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왕궁 및 에스코리알에 있는 회화 작품들을 모아 이 미술관의 소장품을 확장시킨 이사벨라 2세가 추방된 뒤 1868년 국립 프라도 뮤지엄309이 되었다.
이제 프랑스 화가들은 스페인 화풍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가서 프라도 뮤지엄을 찾아야 했다.
이 뮤지엄에는 프랑스에서 돌려받은 무리요와 수르바란의 작품들이 있었고, 스페인 내의 교회, 수도원, 수녀단에 소장되었던 작품들이 수거되어 이곳에 소장되었다.
무엇보다도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과거 스페인의 여러 궁전에 장식되어 일반인은 볼 수 없었던 작품들이 소장되었다.
이 뮤지엄이 개관하기 전까지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주로 빈의 궁정 컬렉션에 많았지만 개관 이후부터는 이곳에서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루브르에서 볼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201뿐이었다.
페르디난도 7세가 왕위를 회복한 시기에는 프라도 뮤지엄을 찾는 프랑스 화가들이 드물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프랑스 화가들이 찾는 미술의 성지가 되었다.
소장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와 부르봉 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다.
펠리페 2세(1556-98년 재위)는 카를로스 1세(1516-56년 재위)의 소장품을 확장했는데, 이 두 왕은 모두 티치아노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펠리페 4세는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를 시켜 이탈리아에서 회화작품을 구입해옴으로써 왕궁의 소장품들을 더욱 늘렸다.
펠리페 5세(1700-24년 재위)는 여기에 프랑스의 바로크 작품들을 덧붙였으며 페르디난도 7세는 새로 지은 뮤지엄의 건물에 여러 왕의 수집품들(에스코리알에 있는 것들은 제외) 중에서 회화만을 한데 모았다.
프라도 뮤지엄은 개관하는 날부터 스페인 화파를 알리는 곳을 목적으로 했으며 중앙의 화랑 하나를 당시의 화가들, 예를 들면 고야·루이스 파레트·마리아노 살바도르 마엘라 등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꾸몄다.
뮤지엄은 얼마 후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들을 전시했는데, 티치아노의 작품이 많았다.
티치아노는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이자 곧 스페인 화파에 영향을 끼친 화가였다.
프라도 뮤지엄은 1872년 1830년대의 자유주의 개혁 때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미술품들을 모아놓은 마드리드의 트리니다드 미술관을 흡수 합병했다.
따라서 17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종교화가 대량 확보되고 폭넓은 컬렉션이 이루어짐으로써 대규모 뮤지엄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서 부속건물들이 건립되었고 컬렉션도 더욱 늘었다.
소장품은 대부분 유화로 약 3만 점에 달한다. 역대 스페인 국왕들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취향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교육적 목적으로 계통을 좇아 수집한 뮤지엄들과는 사뭇 다르다.
스페인 회화 부문에서는 로마네스크 시기의 프레스코 벽화 약간을 제외하면 고딕부터 19세기 말까지의 대표적인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걸출한 것들로는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리베라, 수르바란, 무리요 등 16세기 말에 시작된 ‘황금 세기’의 화가들과 고야의 컬렉션이다.
스페인 회화에 정통한 학자로서 『스페인 화파 화가들의 역사』(1869)와 『모든 화파의 화가들의 역사』(1861-76)의 저자 스터링-맥스웰은 벨라스케스와 무리요를 가리켜 “스페인 화파의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라고 했다.
벨라스케스와 고야는 궁정 화가였기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유례없는 수집을 자랑하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는 <브레다의 항복>177과 <시녀들>213을 포함하여 약 50점이 있으며, 고야의 작품으로는 <카를로스 4세의 가족>263, <옷을 걸친 마하>266, <벌거벗은 마하>196 등 약 110점이 소장되어 있다.
20세기 초에 재평가된 엘 그레코의 작품은 유럽 각지에 산재해 있었는데, <목자들의 경배> 등 30점 이상을 갖추어 세계 최대의 수집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프라도 뮤지엄은 예술가들과 일반 모두에게 스페인 회화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명소였으며 많은 화가들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쿠르베·드가·마네·모네가 방문했고 미국 화가들로는 체이스와 사전트가 방문했다.
프라도 뮤지엄의 설립은 페르디난도 7세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기꺼이 내놓았다.
기록에 의하면 뮤지엄 설립에 페르디난도 7세의 배우자 이사벨라의 공이 컸다.
베르나르도 로페스가 그린 <브라간자의 이사벨라>311에는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벽에 걸린 뮤지엄 건물 그림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옆에 놓인 탁자 위의 뮤지엄 내부화랑 도면을 가리키고 있다.
이 뮤지엄이 1819년 개관했을 때만 해도 소장품의 수가 311점 미만이었고 모두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그 후 20년에 걸쳐서 궁정 컬렉션이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국립 화랑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이때에는 이탈리아 화파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 따로 전시되었고 뮤지엄 카탈로그는 스페인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카탈로그를 만든 데서 이 뮤지엄이 소장품을 국외에 널리 알리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뮤지엄 측은 외국인이 와서 작품을 모사하는 데 호의를 보였다.
페르디난도 7세는 뮤지엄의 소장품을 늘이는 데도 한 몫을 했다. 그는 1820년에 화가 아구스틴 에스베로부터 리베라의 걸작 중 하나인 <삼위일체>313를 구입했다.
웅장한 형태와 다양한 표현력과 더불어 세부 묘사가 뛰어난 이 작품은 작품 속 인물의 인간성과 내면성의 강조가 두드러진다.
리베라는 이 작품을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312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훗날 사전트가 엘 그레코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양식을 익혔다.314
페르디난도 7세는 1821년에 세비야의 유명 컬렉터 마뉴엘 로페즈 세페로와 거래를 했는데 궁정 소장품 여러 점을 주고 수르바란의 <십자가에 매달린 성 베드로에 대한 성 피터 놀라스코의 환영>315 및 <성 피터 놀라스코의 천상 예루살렘에 대한 환영>과 교환했다.
1827년에는 조각가 발레리아노 살바티에르라로부터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312를 구입했다.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74는 페르디난도 7세가 선물로 받은 것으로 1829년에 이 뮤지엄에 소장되었다.
19세기의 대부분 작가들은 프라도 뮤지엄이 곧 스페인 회화사라고 말했다.
세계 어느 곳도 스페인 회화사를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하고 많은 스페인 회화작품을 갖고 있지 못하다.
벨라스케스의 양식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 뮤지엄으로 가야 한다.
여기에는 스페인 미술품 외에도 플랑드르, 이탈리아, 프랑스의 다양한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합스부르크 가와 부르봉 가 궁정이 수집한 것들이다.
여기 소장되어 있는 벨라스케스의 <아라크네 우화>158는 서양 미술 전통의 근본적인 관점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재능뿐 아니라 그가 존경을 표하고 인용한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재능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