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반환요구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1814년 3월 30일 파리는 오스트리아·영국·프러시아·러시아·스웨덴으로 결성된 동맹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의 목적은 나폴레옹 제국을 멸망시키고 프랑스의 왕권을 부르봉 왕가로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나라는 왕정을 원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위협을 받았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 대혁명은 종료되었고, 유럽과의 전쟁으로 2백만 명 이상의 프랑스 젊은이가 희생되었다.
웰링턴의 후원을 받은 탈레랑이 4월 1일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틀 후 상원 잔류파를 설득해 나폴레옹의 폐위를 결정지었다.
탈레랑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4월 6일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고 루이 18세의 복위를 결의했다.
루이 18세는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이다.

루이 18세는 1814년 5월 14일 스페인으로부터 강제로 가져온 미술품과 루브르에 소장된 탈취한 미술품들을 동맹군의 압력으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법령에 서명했다.
그는 프러시아 국민에게 프러시아에서 약탈한 모든 것을 돌려주겠다고 언약했다.
그러나 그는 6월 4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프랑스군의 영광은 아직도 건재한다. 훌륭한 미술품들은 이제 우리의 승리에 대한 권리로 우리의 것이다.”

드농은 루브르에 있는 무리요의 작품들은 세비야 시가 프랑스 집행관 장 드 디유 술트에게 기증한 것이므로 반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대사는 “그것들은 시에 속한 것이 아니며 시에 속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세비야 시가 집행관에게 기증할 수가 없었다”고 맞섰다.
술트는 스페인에서 약탈해온 작품들을 파리에 있는 자기 집에 가져다 놓았는데 법령에 의하면 정부 기관에 있는 것들만 돌려주기로 했고 개인이 소장한 것들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농이 지방 뮤지엄에 보낸 것들에 대해서는 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세비야 시는 유럽에서 미국과의 교역을 독점적으로 하던 곳이었기에 경제 붐이 일어났고 수많은 외국 상인들이 이 도시를 찾아왔다.
이러한 부의 축적은 예술가들을 불러들였으며, 개인의 저택을 비롯해 수도원, 교회들은 유명한 미술품들로 장식되었다.306
이 도시에서는 유명한 스페인 화가뿐 아니라 유명한 유럽 화가들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있었고, 특히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이 흔했다.

다양한 화파의 스페인 회화 284점이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반환된 것들 중에는 리베라의 <어머니 돌로로사>와 마소의 <예술가 가족>214이 포함되었는데, 당시 <예술가 가족>은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술가 가족>은 나폴레옹이 1809년 빈을 침공하고 그곳에서 가져와 루브르의 나폴레옹 뮤지엄에 걸었던 작품으로 1815년 9월 9일 빈 갤러리로 반환되었다.
<어머니 돌로로사>와 <예술가 가족>은 반환되기 전, 1809년과 1815년 사이에 제리코가 모사했다.
프랑스인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작품들 가운데 한 점인 무리요의 <병든 자를 돌보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307도 반환되었다.
드농의 장례식에서 바롱 그로는 드농이 늘 하던 말을 상기시켰다.

그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가져가게 하라.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프랑스인은 예술에 있어서의 우수함을 늘 증명해낼 수 있으며 걸작들은 그 어느 곳보다도 여기에 있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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