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와의 대화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칸딘스키는 1934년 파리의 카이에르다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그해 여름을 노르망디에서 보냈다.
그는 1935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블랙 마운틴 컬리지에 상주하는 예술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초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리와 뉴욕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고 그해 여름을 프랑스령 리비에라에서 보냈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모던아트와 문화 연감 Kronick van Hedendaagse Kunst en Kultuur』에 「추상미술」을 기고했는데, 다음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추상미술’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당연한데, 추상미술이란 말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적으며 기껏해야 혼동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추상 화가와 조각가들은 새로운 명칭을 만들려고 했으며 결국 ‘비형체적 미술 Art Nonfiguratif’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독일어 ‘비대상적 미술 Gegenstandslose Kunst’과 동의어이다.
두 명칭에서 부정적 의미인 ‘아닌 non’이나 ‘결여된 los’이 적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대상을 제거한 후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우지 않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추상’을 ‘절대’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나 역시 전쟁 전에 이를 시도했다. 알고 보면 ‘절대’라는 표현은 조금도 나은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명칭은 ‘실재적 미술’이다.
왜냐하면 이 미술은 외부세계 외에도 정신적 성격의 새로운 미술세계를 세우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바로 미술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실재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이미 ‘추상미술’이라는 오래된 표기가 정착되었다.

1935년 테네리파에서 『예술지 Gaceta de Arte』의 발행자 에도아르도 베스테르달이 칸딘스키와 인터뷰했다.

베르테르달 미술가의 대상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대상으로의 회귀라는 극단적인 두 경향 사이에 매개 역할을 하는 노선이 모던아트에 존재합니까?

칸딘스키 “대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자연 일반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진지한 모든 미술은 미술의 법칙 아래에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연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의 자연이란 일반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 자연 전체와 연관을 맺는다면 특정한 자연의 매개를 배제할 수도 있습니다.
추상미술도 동일한 법칙 아래에 있습니다.
한 작품 속에 자연과의 이런 불가피한 연관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미술작품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를 인식하는 데 20년이나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형태의 문제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확언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칸딘스키는 1912년에 발표한 논문 「형태 문제에 관하여」를 상기시킨 것이다.)

베르테르달 오늘날의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혹은 도덕적·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예술가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칸딘스키 초월적입니다.
미술 작업은 한 인간 전체를 필요로 하며 미술 세계에 전적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을 요구합니다.

베르테르달 미술가의 참여와 영향은 당연한 것입니까?

칸딘스키 미술가는 시대의 자연적 구성원입니다.
시대의 정신이 미술가를 끌어들여 이용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곧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나는 정치적·사회적·마르크스주의적 혹은 파시즘적 회화를 그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확실하게 실행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모스크바로 왔을 때 동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국가적 의미에서 그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전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

베르테르달 광고 미술은 가능합니까?

칸딘스키 국가적 의미에서 그리는 것이 일종의 광고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세계 최고의 초콜릿이나 브래지어 그리고 ‘발토’란 이름의 담배를 선전하는 광고 미술이 있습니다.

베르테르달 미술이 기여하는 바가 있습니까?

칸딘스키 미술이 기여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당면한 삶’에 기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수레에서 다섯 번째 바퀴처럼 정신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받는 현재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훗날 사람들은 이 다섯 번째 바퀴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베르테르달 모던아트가 위기에 처했다고 보십니까?

칸딘스키 현재 경제 위기 외에 더 끔찍한 위기가 존재하는데, 바로 정신의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고도로 편협한 물질주의적 이념들의 선전에서 비롯합니다.
이 선전의 가장 위험한 결과 중 하나는 정신의 표출이 점차 더욱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술에 대해 늘어가는 관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썩어빠진 현실에 대한 해명이 존재합니다.
미술은 삶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미술을 “당면한 삶에 기여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미술을 구출하려는 시도에 대한 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나는 미술의 위기를 봅니다. 그러나 미술은 승자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베르테르달 예견되거나 지속되는 창조를 통해 우리 내면세계로부터 생성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의 직접적 실재성, 그것이 우리를 새로운 인간 해석과 새로운 문화의 상승기로 인도할까요?
아니면 새로운 퇴폐기로 인도할까요?

칸딘스키 미술의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문명국가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양식과 충분한 생활조건들을 보장해줄 필연성과 과제는 자명합니다.
하지만 삶의 이런 측면에서는 충족이 보장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문화를 박탈당한 인간의 존재는 이미 하나의 소화기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끔찍한 표면 아래에는 위기와 퇴폐에 종지부를 찍을 아직은 불가사의한 정신적 운동이 존재합니다.
이런 부활을 준비하는 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 미술입니다.

1936년 런던에서 열린 ‘추상과 구체전 Abstract and Concrete’과 뉴욕에서 열린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전 Cubism and Abstract Art’에 칸딘스키도 출품했다.
칸딘스키의 개인전이 그해 12월에는 파리에 있는 잔느 부셰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렸고 1937년에는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은 1948년 뉴욕에서 타계한 화상 칼 니렌도르프가 1937년 칸딘스키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니렌도르프 처음 추상화를 그린 것이 언제입니까?

칸딘스키 1911년, 그러니까 26년 전입니다.
추상 수채화는 1910년부터 그렸습니다.

니렌도르프 어떻게 해서 ‘추상적’ 사고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칸딘스키 말하기 어렵군요.
아주 어렸을 적 색의 엄청난 표현을 느꼈습니다.
무엇인가 ‘실재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예술을 만들 수 있는 음악가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색도 소리와 마찬가지로 표현력이 강한 듯이 보였습니다.
약 20년 전 모스크바 대학의 학문 기관이 법률학과 인류학 탐구를 위해 나를 볼로그다로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내부가 완전히 비대상적으로 칠해진 농가들을 보았습니다.
문양, 가구, 식기 그 모두가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회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몇 년 뒤 화가가 ‘대상을 소흘히 다뤘다’는 이유로 매우 심하게 공격받았던 모스크바의 인상주의 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전시회에서 회화 자체가 우선시된다는 인상을 받고 혹시 이런 길로 훨씬 더 멀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자문했습니다.
그 뒤 러시아의 우상 회화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런 회화 속에서 ‘추상적’인 것에 대한 안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06년 처음으로 마티스의 초기 작품을 보았는데, 그것도 모스크바의 인상주의 작품과 동일한 이유로 거세게 거부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주 대담하게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대상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표현주의를 거쳐 추상화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무한히 많은 시도, 절망, 희망, 발견을 거쳐서 천천히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입체주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은 선생도 알고 있을 줄 압니다.
입체주의자인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 것은 1912년으로 최초의 추상화를 그린 뒤였습니다.

니렌도르프 추상미술은 자연과 무관하다고 이따금 주장되는데,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칸딘스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추상화는 자연의 ‘겉옷’을 버리기는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적 법칙입니다.
미술은 우주적 법칙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 아래 종속될 때만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법칙들은 우리가 자연을 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내적으로 접근할 때, 즉 자연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선생도 알다시피 그것은 대상의 사용과는 무관합니다.
절대로 한 치의 연관도 없어요! 이에 대해서 나는 체르보 씨의 청탁으로 「미술」지에 글을 기고했습니다.
예술가가 자연에 대해 외적인 동시에 내적인 안목을 가진다면 그것은 영감을 통해서입니다.

니렌도르프 배타적인 의미로 추상화가는 머리로만 작업한다는 주장도 제기되는 데 맞습니까?

칸딘스키 그런 일이 종종 있기도 하나 그것은 대상적·사실주의 화가에게서 더 자주 일어납니다.
머리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며 중요한 신체의 부분이지만 그것은 가슴 혹은 감정과 유기적인 연관이 있을 때에 한해서입니다.
이런 연관이 없다면 머리는 모든 위험과 부패의 근원이 됩니다.
모든 영역에서 그러하며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술에서는 오히려 더 합니다. 머리 없는 대가는 있었지만 가슴 없는 대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위대한 시대와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늘 머리와 가슴 혹은 감정의 유기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오늘 날과 같은 대혼란기에나 미술이 머리만으로도 달성되리라는 빈약한 사고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빈약한 사고는 이미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앙리 루소는 그의 최고 작품들이 죽은 부인의 명령을 좇아 완성된 것들로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여하튼 미술은 내적 명령 없이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즉 직관이 필요합니다.

니렌도르프 선생님의 최초 추상화 작품들은 공식적으로 어떤 반응을 얻었습니까?

칸딘스키 당시 나의 회화가 아주 광적으로 거부되었으므로 나는 완전히 홀로 서 있었습니다.
내가 들은 욕설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재능 없는 사기꾼’은 그들이 즐겨 쓴 말입니다. 나중에 베를린 화상이 된 헤르바르트 발덴은 백치주의라는 이름의 새 미술사조의 창시자라고 칭한 독일 평론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추상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 평론가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널려 있습니다.
이런 사고를 평론가들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건 선생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견해로 추상미술에 대한 끈질긴 타도, 25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투쟁이 추상미술의 필수성과 위대한 힘에 대한 최선의 증거입니다.
매끈하고 빠르게 진척되는 것은 늘 무가치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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