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창의적인 예술가 클레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의 아버지가 1940년 1월 10일 91살로 베른에서 타계했다.
2월 16일부터 3월 25일까지 취리히 미술관에서는 클레의 60회 생일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에 그가 1933~40년에 제작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클레는 그해 5월에 오르셀리나 로카르노에 있는 요양소로 갔고 6월 8일 무랄토 로카르노 병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6월 29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클레의 시신은 로카르노에서 화장되었고 릴리가 죽은 1946년에야 베른의 묘지로 옮겨졌다.
<정물>492은 클레가 사망 당시 그의 이젤 위에 있던 작품이다.
클레는 그의 마지막 생일에 이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493
어두운 배경에 다양한 사물들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이전의 양식과는 매우 다른데, 이미 완성된 이 그림에 클레가 왜 서명을 하지 않고 이젤 위에 올려두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베른에서 보낸 말년동안 클레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나타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매우 열심히 작품을 제작했으나 마지막 7년 동안의 회화는 어두운 색채가 주조를 이루었으며, 악하고 무자비한 힘과 파괴에 관한 주제가 많았고, 초기의 명랑함 대신 신랄한 풍자가 나타났다.
유명한 자화상 <명단에서 삭제되다>452와 <정물>과 같은 작품들에서 보이는 것은 모두 그가 이 시기에 겪은 정신적 고통을 입증한다.
그러나 탁월한 능력과 형태 감각은 전혀 침해되지 않고 있었으며, 몇몇 평론가들은 이런 말년의 작품들을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로 간주한다.
영국 예술진흥회가 기획하고 클레의 아들 펠릭스가 소장하고 있던 회화들로 구성된 ‘파울 클레, 말년의 작품전’이 1974년과 1975년 스코틀랜드 국립 현대미술관과 헤이워드 화랑에서 열렸다.
전시 카탈로그에서 더글러스 홀은 “클레의 후기 작품은 심리학적인 흥미로움은 논외로 하더라도 모던 아트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그의 이질적인 구성법, 그림의 한 점이나 하나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 않는 태도는 입체주의 이래로 회화에서 매우 드문 새로운 창안의 하나로 보인다”고 했다.
미술교육자 칸딘스키 예술가의 경험과 통찰로 가르치다.
칸딘스키는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린 ‘추상미술전 Abstract Art’ 에 참가하고 이 전시 카탈로그에 「구상의 추상」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귈티에리 디 산 라차로가 1938년 파리에서 창간한 잡지 『20세기 XXe Si뢢le』 창간호에 논문 「구체 미술 Concr뢶e Art」을 기고했다.
모든 미술은 한 뿌리에서 나온다.
따라서 모든 미술은 동일하다.
그러나 비밀스럽고 값진 것은 한 가지에서 맺은 열매들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각각의 표현 수단에 의해서 미술작품 간에 차이가 생긴다.
매우 간단하다.
음악은 음으로, 회화는 색으로 표현된다.
이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차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음악은 자신의 수단인 음향을 위해 시간을, 회화는 자신의 수단인 색을 위해 평면을 필요로 한다.
시간과 평면은 정확하게 재어져야 하며 음향과 색은 정확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이런 조절은 균형, 즉 구성의 토대가 된다.
…
내가 이 문제를 다룬 작은 책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발간한 지도 벌써 30년이 된다.
예를 들면 노란색은 ‘음의 높이를 올리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으며 점점 더 높아져서 귀와 정신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높이에까지 도달한다.
트럼펫의 음이 점점 더 높이 연주되어 점점 더 ‘뾰족해져서는’ 귀와 정신을 아플 정도로 찌른다.
이에 반해 파란색은 아득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대립적인 능력을 지녔으며 파란색이 밝을 때는 플루트의 음을 연상시키며, 파란색이 어두워지고 ‘아래로 내려갈 때’ 첼로의 음을 연상시키고, 더욱 어두워질 때에는 콘트라베이스의 장대한 깊은 음을 연상시키며, 끝으로 여러분은 가장 낮은 오르간 음에서 진한 파란색을 보게 된다.
잘 균형 잡힌 초록색은 바이올린의 중간 영역인 폭넓은 음들에 상응한다.
아주 짙게 칠한 빨간색(진홍색)은 강한 북소리의 인상을 줄 수 있다.
공기(음)와 빛(색)의 진동은 확실히 이런 물리적인 친분관계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토대가 되지 못한다.
또 다른 것, 즉 심리적인 토대가 있다.
그것이 ‘정신’의 문제이다.
…
정신 속에서 몇몇 음향 및 색깔의 무리 속을 거닐 때 갑자기 손가락이 가시에 찔린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를 여러분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여러분의 손가락이 회화와 음악 속을 우단이나 비단 위를 지나가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주색은 노란색과는 다른 향기가 나지 않는가?
그리고 오렌지색은?
밝은 녹청색은?
이 색들은 맛이 서로 다르지 않는가?
얼마나 맛이 풍부한 회화인가! 혀가 회화작품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의 알려진 오관 모두를 돌아본 셈이다.
회화를 눈으로만 파악한다고 착각하거나 믿지 말라.
그렇지 않다.
여러분은 회화를 무의식중에 여러분의 오관을 통해 파악하게 된다.
칸딘스키 부부는 1939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프랑스 정부는 <구성 9>495를 구입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세한 유기적 형태와 기묘한 상형문자 형태를 구성하는 마지막 구성작품을 완성했다.496-500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함에 있어 소련의 개입을 미연에 방지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팽창과 침략을 방치해둘 수 없었다.
평화에 대한 호소가 교황청, 벨기에, 미국 등지에서 일어났지만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선전포고 없이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었고 전쟁개시 이튿날인 9월 3일 아침 영국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영국의 선전포고에 이어 프랑스도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지 21년 만에 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칸딘스키는 두 달 동안 피레네 산맥의 코트르트에 머물며 작업했다.
<스카이 블루>501는 우주를 의미하는 뽀얀 파란색 바탕에 과거 그가 만든 이미지들이 둥둥 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좀더 장식적으로 바뀌었으며 ‘인상’, ‘즉흥’ 연작들에 비해 환상적으로 달라졌다.
<가지각색의 패거리>502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그는 과거에 즐겨 사용하던 기호와 같은 도안적 창조물들을 서로 어울리게 배열하고 때로는 구성을 위해 따로따로 그룹을 만들었다.
1933년부터 파리에 체류하면서 그는 프랑스 화단을 이끄는 많은 화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작품을 보아 알고 있었다.
독일에서와는 달리 파리에서 그는 이러한 다양성에 영향을 받아 창작의 영역이 더욱 확대되었다.
<가지각색의 패거리>에는 아시아인들이 사용하는 색들을 사용하여 동양의 정신도 표현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1년 칸딘스키는 미국 방문 초청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프랑스에 체류했다.
1942년 파리의 잔느 부셰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고, 마지막 전시회가 1944년 파리의 레스키스 화랑에서 열렸다.
그는 1944년 3월에 발병했지만 7월 말까지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가 적어놓은 리스트에 의하면 마지막 작품은 <유연해진 엘란>511이다.
칸딘스키는 1944년 12월 13일 뇌이쉬르센에서 78해의 생애를 마감했다.
칸딘스키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미술에 크게 기여했다.
1902년 뮌헨에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설립하면서부터 교육이 이미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러시아로 돌아가 1918~21년 모스크바에서 벌인 활동은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민족 교육을 위한 민족위원회 예술분과회원, 미술 아카데미 교수, 회화 문화를 위한 미술관 운영자로서의 역할, 러시아 아카데미 창립 등을 통해 사회에 대한 예술가의 책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교육에 헌신한 것은 1922년 바우하우스에 초빙되면서부터였다.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데사우에서 베를린으로 바우하우스와 함께 옮겨 다니면서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충실하게 교육에 임했다.
거의 11년 동안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교사로, 학장 대리로 그리고 작품 활동을 통해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비 과정의 첫 학기에 학생들에게 모던 아트의 문제에 관한 입문을 강의하면서 조형 분야로서의 회화 전개의 의미를 비인습적이며 비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개성적인 방식으로, 또한 예술가의 경험과 통찰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