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사가 된 워홀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1965년 5월 워홀은 소나벤드 화랑에서 열릴 전시회를 위해 파리로 갔다.
소나벤드가 워홀의 일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사서 보냈다.
소나벤드 화랑은 2차 세계대전 기간 피카소가 살던 집 근처에 있었고 워홀은 피카소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피카소를 좋아하면서 “피카소의 모습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가 마티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고 피카소에 관해 말할 때도 그저 “좋다” 또는 “대단하다”라고만 말했는데 과연 그가 대가들의 미학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워홀은 자신이 회화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 미쳐 있었고,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어 “미국 영화가 최고다.
미국 영화는 분명하고 실제 같으며 영상이 놀랍도록 훌륭하다.
미국 영화는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말을 적게 할수록 더 완벽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할리우드로 가서 제작자들을 만났지만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은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워홀이 파리에서 돌아오자 친구들이 공장에서 ‘가장 훌륭한 50인 Fifty Most Beautiful People’ 깜짝 파티를 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워홀은 누가 들어오는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았는데, 유명가수 주디 갈란드,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차례로 들어왔다.
모두 워홀이 우상처럼 여기던 스타들인데 그들이 워홀의 파티에 참석한 걸 보면 워홀이 유명인사가 된 것이 분명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에디가 뉴욕의 가장 이상적인 연인으로 알려졌다.
워홀의 영화 <음탕한 계집>(1965), <레스토랑>(1965), <부엌>(1965) 등에 출연한 에디는 <부엌>에 관해 “아주 비논리적인 영화로 성격과 동기가 없는 완전히 웃기는 영화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쓴 타벨은 “내가 할 일은 무의미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으며, 의미 없는 말을 쓰는 것이었다.
...
앤디가 ‘줄거리를 없애라!’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성격 없는 배역들을 등장시켜야 했다”고 했다.
워홀과 에디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았고 함께 파티에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T셔츠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고 파티에 간 적도 있었다.
워홀은 말했다.
“사람들은 에디가 나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바랬던 것이 아니라 에디가 바랬던 것으로 내게도 놀라운 일이다.”
잡지 <에스콰이어>가 워홀에게 인생의 동반자로 누굴 꼽겠느냐고 묻자 워홀은 “에디다. 그녀는 나보다 더 내게 잘 해준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1965년 9월 에디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워홀이 스타로 알려진 만큼 자신은 유명하지 못하다면서 투덜거렸고 워홀과 헤어져야겠다고 말했다.
에디의 친구들은 워홀과 헤어지면 배우로서의 인기가 하락할 것이라면서 워홀 옆에 바짝 붙어있으라고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워홀은 에디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는데, 에디는 자신이 워홀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워홀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에디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워홀의 다음 영화에 에디의 역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주일에 5-6백 달러를 지불하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워홀은 아직 본전을 못 건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에디를 주인공으로 쓰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영화에 몰두하면서도 틈이 나면 워홀은 그림을 제작했다.
캠벨 수프통조림도 다시 수십 점 제작했는데, 그중 한 점은 캠벨사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전기의자도 여러 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지만 밝은 색을 사용한 것 외에는 새로운 시도가 없었다.
1965년 10월 펜실베이니아 대학 현대미술관 관장 그린이 주최한 자신의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워홀은 친구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갔다.
에디와 워홀은 주로 밤에 다투었고 낮에는 태연하게 연인처럼 행동했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중적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전시회 하루 전 날 많은 사람들이 워홀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TV 카메라맨이 라이트를 들이댔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리는 바람에 그림에 부딪치기도 했다. 관장 그린은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림을 망치든지 도난이라도 당할 것 같아 관리인에게 벽에 걸린 작품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워홀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구했고 워홀은 두어 시간 사인을 해주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
워홀은 나중에 술회했다. “별난 전시회였다.
미술관에 그림은 없고 사람들만 있었다. 1960년대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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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영화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워홀의 작업실 ‘소방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
어빙 블럼도 와서 영화배우들의 초상화는 뉴욕보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시하는 게 낫다면서 페러스 화랑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자고 제의했다.
워홀은 블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1963년 9월 마지막 주 페러스 화랑에서의 전시를 위해 워홀은 캠코더를 메고 친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전시에서 엘비스와 리즈의 초상화를 소개했다. <붉은 엘비스>란 제목으로 수십 점을 제작한 워홀은 이번에는 로큰롤의 왕 엘비스를 기타를 든 모습 대신에 권총을 들고 막 쏠 태세인 카우보이의 모습으로 제작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실제 사람의 크기보다 확대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영웅으로 보이도록 했다.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미남배우 말론 브란도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있는 모습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권총과 모터사이클은 남성을 상징하는 오브제들로 여성들에게 엘비스와 브란도를 성적 우상으로 인식시키기에 적절했다.
블럼은 워홀이 엘비스를 한 상자 보냈다면서 모두 합하니까 198cm 높이에 폭이 457cm에 달하더라고 말했다.
리즈의 초상은 1m 정사각형으로 모두 12점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주 머무는 동안 워홀은 2시간짜리 흑백유성영화 <타잔과 제인>을 제작했다.
깡마른 메드가 정글의 왕자 타잔 역을 맡았고 곱슬머리 나오미 레빈이 제인 역을 맡았다.
<보편적인 사랑>에서 괴물 거미 역을 맡았던 레빈은 워홀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제인 역을 맡겠다고 자청했다.
말랑가의 말로는 레빈은 워홀에게 홀딱 빠진 많은 여자들 중에 하나라고 했다.
워홀은 자신이 묵고 있는 베버리힐스 호텔 목욕통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레빈이 옷을 홀랑 벗고 수영장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도 필름에 담았다.
올덴버그 부부도 단역을 맡아 열연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뒤 워홀은 계속해서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들과 어울렸는데 그들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태생의 조나스 메커스가 주도한 영화제작자협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레빈으로부터 메커스를 소개받은 워홀은 <키스>를 그에게 보여주었고 <키스>를 본 뒤 메커스는 워홀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키스>는 워홀이 로스앤젤레스로 떠나기 전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50분짜리 흑백무성영화였다.
한 쌍의 남녀가 다른 동작 없이 키스하기에 여념이 없는 장면을 가까이서 찍은 필름이다.
촬영 장소는 레빈의 아파트였으며 레빈이 말랑가, 시인 에드 샌더스, 배우 러퍼스 콜린스와 50분 동안 키스하는 장면이 전부였다.

1963년 말 소방서를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좀 더 큰 장소를 물색하던 워홀은 47번가 이스트 231번지의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전에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에는 엘리베이터와 공중전화도 있었다.
워홀은 그곳을 부르기 좋게 공장이라고 했다.
그는 공장을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면서 벽에 은색 스프레이를 뿌렸고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아치 세 곡에 알루미늄 호일을 부착했다.
책상, 의자, 복사기, 화장실, 마네킹, 공중전화까지도 은색으로 통일하고 바닥도 은색으로 칠했다.

워홀이 공장으로 이주하고 처음 제작한 영화는 33분짜리 흑백무성영화 <이발>이다.
이것 도한 독특한 영화로 디자이너 존 다드의 머리 깎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워홀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선택하여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행위에 역점을 두었다.
반복이라지만 똑같은 행위는 있을 수 없어 유사한 행위들의 집합 안에서 매 행위가 새롭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다음에 제작한 영화는 <식사>였다.
출연자는 스테이블 화랑에서 알게 된 로버트 인디애나였다.
<식사>는 1964년 2월 2일 일요일 아침 맨해튼 남쪽에 있는 인디애나의 화실에서 촬영되었다.
인디애나에 의하면 워홀이 그에게 준 지침은 단 한 마디 “이 버섯을 먹어라”였다고 한다.
3분짜리 필름 9통을 찍었으니 인디애나는 27분 동안 버섯을 먹었던 것이다.
<잠>과 <식사> 모두 사람의 기본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64년 한 해에 그가 제작한 영화가 많았고 제목을 붙이지 않은 영화도 많았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사람들의 동작은 극히 제한되었고, 클로즈업된 얼굴은 오랫동안 무표정한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장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따라서 배우가 눈이라도 깜빡할라치면 클라이맥스에 이른 것처럼 부각되었다.
워홀은 10분 동안 눈을 세 번밖에 깜빡거리지 않은 배우를 가리켜서 최고의 배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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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오르피즘에 기초한 클레의 추상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는 재현적인 이미지를 남긴 작품에서 왜곡의 방법을 사용했다.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듯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형태와 색채 모두를 왜곡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추상은 인식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비해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실제로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왜곡은 사실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끌며 표현적 특징을 부각시키므로 시각적 은유로 나타난다.
특히 환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왜곡은 관람자에게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클레는 1914년 튀니지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현하는 순색들을 보고나서 색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그 후 그는 자신감을 갖고 좀 더 진전된 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년 동안 노력했다.
따라서 1914년 이전까지 그의 소묘작품은 훌륭하지만 색을 사용한 작품에는 걸작이 없고 튀니지를 다녀온 후부터 그의 화면은 표현적인 색채로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클레의 창작에 원천적인 영감을 준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이다.
들로네는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신인상주의와 미셸-외젠 슈브뢸의 논문 「색의 동시대비 법칙에 관하여」(1839)를 연구했다.
슈브뢸은 프리즘으로 분해한 보색을 시각적으로 분석하여 병치된 색채가 인접한 색을 강조하거나 혹은 위치에 따라서 상이한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두운 청색은 인접한 노랑을 초록에 가깝게 만드는 반면, 밝은 청색은 동일한 노랑을 주황색에 가깝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슈브뢸의 색채의 동시대비 법칙을 받아들인 들로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색채가 형태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을 위한 색채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들로네의 작업을 클레가 받아들였다.
들로네는 1912년 봄부터 빛의 유희에 관심을 두고 ‘창문’ 연작을 그렸는데, 클레는 <창문>89을 보고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미묘한 색조의 변화가 리드미컬한 효과를 냈다.
들로네와 만남은 선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온 클레로 하여금 색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색채 형태 회화로 들어서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빛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을 안 클레는 색채와 명암이 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색채를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숱한 농담의 위계로 보고 색조를 무게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암의 증감을 통해 무게를 조절하여 화면의 통일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10년 이전에 쓴 일기에서 색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명암의 증감을 다루는 현명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화가가 될 능력이 없다고 자탄한 것을 보면 색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고 또한 많은 실험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들로네의 영향은 1914년 초에 그린 그림들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무제>209, 210가 그 예이다.
색면을 격자 모양으로 배열하는 구성이 그에게 창작의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색면의 격자 모양을 입체주의자들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들로네가 사용했는데, 그들은 공간과 오브제를 부순 후 회화적 목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런 양식을 사용한 것이지만 클레는 시각적 대상인 오브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편한 구성을 위해 사용한 점이 다르다.
평편한 정사각형 색면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이 시기에 몇몇 유럽 화가들이 구사하고 있었다.

클레는 현대의 거장들 가운데서 가장 창의적이고 대단히 많은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완성작은 8천여 점에 달한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주요 공공 컬렉션에 속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베른 미술관의 파울 클레 재단의 컬렉션이다.
그는 수많은 다양한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각각의 양식들을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어 그의 붓질이 닿은 작품은 어떠한 양식으로 제작되었어도 다른 작품과 혼동할 우려가 없다.
비할 데 없는 타고난 상상력과, 최고의 솜씨, 탁월한 형태 감각을 겸비한 클레는 강의와 지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금세기의 혁신적인 미술에 어떤 예술가도 능가하지 못할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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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원리에 기초한 칸딘스키의 추상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1910년경 몇몇 화가들이 색채에 의한 완전추상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화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오래된 규정을 무시하지 못해 재현적 요소를 완전히 버리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추상은 결국 두 가지 방향으로 진전되었는데, 재현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입체주의 화가들은 폴 세잔의 말년 작품에서 형태의 극단적인 단편화에서 새로운 조형회화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칸딘스키, 로베르 들로네, 프란티섹 쿠프카(1871-1957) 등은 색채이론을 통해 색채가 재현적 기능에서 벗어났을 때 색채의 힘만으로도 역동적인 운동감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완전추상에 도달한 칸딘스키는 괴테의 『색채이론』(1810)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괴테는 색채의 도덕적 효과, 즉 색채의 형이상학적 혹은 암시적인 잠재성을 위해 색채를 더하거나 감소시키는 도표와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색채감각을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에 괴테처럼 서로 반대되는 색채표를 실었는데,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경험적 느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노랑과 파랑, 흰색과 검정색, 빨강과 초록, 주황과 보라를 반대되는 색채로 규정했다.
이런 도식에 따라 전형적으로 세속적인 색으로서의 노랑은 능동적인 따뜻함과 함께 외향적이며 진보적인 성격을 지니는 반면, 전형적으로 성스러운 색인 파랑은 능동적인 냉정함과 함께 은둔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는 색이 비재현적인 문맥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의 회화적 태도는 낭만적이고 정신적인 신념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칸딘스키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완전추상 작품을 제작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제작한 작품에서도 대상을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가 전혀 없는 그림을 그렸다.
1910년의 작품으로 알려진 최초의 완전추상 수채화 <무제(첫 추상 수채화)>181는 오로지 색채로서만 구성된 작품이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의 연대가 잘못 기입된 것으로 보고 1913년에 그린 <구성 7>을 위한 습작으로 보지만 칸딘스키의 미망인은 1910년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의 연대가 잘못 기입되었더라도 초기의 다른 작품에서도 대상에 대한 이미지가 거의 없는 유동성의 형태와 색채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빌헬름 보링거를 만난 뒤 칸딘스키는 완전추상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1908)에서 미술사에서 명백히 지각되는 두 가지 경향으로, 하나는 추상에 경도된 것, 다른 하나는 감정이입 혹은 자연주의적인 자연 묘사에 경도된 것을 말했다.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전환되고 있던 1900년대의 경향이 그의 논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상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의 징조로 본 보링거와 「추상과 감정이입」에 관해 대화하면서 칸딘스키는 보링거가 추상을 인간과 세계와의 단절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양자 사이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걸 알고 그가 새로운 회화의 정신적 선두자라고 생각했다.
보링거는 “순수한 추상은 복잡하고 어렴풋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휴식을 주는 유일한 가능성”으로까지 보았으며,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가 “필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기하학적 추상”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는 바로 칸딘스키가 열망하던 추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추상과 감정이입」이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전개된 청기사 그룹의 취지와 일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저술을 통한 이론과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완전추상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사물의 특징을 재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물감이 지닌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색채의 감정적 연상 작용에 민감했으며 그 공감적 효과를 심도 있게 발전시켰다.
자신을 깊이 감동시킨 색채를 회화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갑자기 떠오르는 일종의 직관을 통해 미술과 자연은 각각의 원리와 목적이 다른 분리된 두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미술의 자율성에 관한 믿음, 즉 미술작품은 외적 세계와의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본래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거나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칸딘스키는 비재현적 회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당화한 최초의 예술가로 이 분야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천적인 면에서는 몇몇 화가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재현적 회화를 성취했지만 ‘추상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호칭은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미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한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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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창의적인 예술가 클레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의 아버지가 1940년 1월 10일 91살로 베른에서 타계했다.
2월 16일부터 3월 25일까지 취리히 미술관에서는 클레의 60회 생일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에 그가 1933~40년에 제작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클레는 그해 5월에 오르셀리나 로카르노에 있는 요양소로 갔고 6월 8일 무랄토 로카르노 병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6월 29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클레의 시신은 로카르노에서 화장되었고 릴리가 죽은 1946년에야 베른의 묘지로 옮겨졌다.

<정물>492은 클레가 사망 당시 그의 이젤 위에 있던 작품이다.
클레는 그의 마지막 생일에 이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493
어두운 배경에 다양한 사물들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이전의 양식과는 매우 다른데, 이미 완성된 이 그림에 클레가 왜 서명을 하지 않고 이젤 위에 올려두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베른에서 보낸 말년동안 클레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나타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매우 열심히 작품을 제작했으나 마지막 7년 동안의 회화는 어두운 색채가 주조를 이루었으며, 악하고 무자비한 힘과 파괴에 관한 주제가 많았고, 초기의 명랑함 대신 신랄한 풍자가 나타났다.
유명한 자화상 <명단에서 삭제되다>452와 <정물>과 같은 작품들에서 보이는 것은 모두 그가 이 시기에 겪은 정신적 고통을 입증한다.
그러나 탁월한 능력과 형태 감각은 전혀 침해되지 않고 있었으며, 몇몇 평론가들은 이런 말년의 작품들을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로 간주한다.
영국 예술진흥회가 기획하고 클레의 아들 펠릭스가 소장하고 있던 회화들로 구성된 ‘파울 클레, 말년의 작품전’이 1974년과 1975년 스코틀랜드 국립 현대미술관과 헤이워드 화랑에서 열렸다.
전시 카탈로그에서 더글러스 홀은 “클레의 후기 작품은 심리학적인 흥미로움은 논외로 하더라도 모던 아트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그의 이질적인 구성법, 그림의 한 점이나 하나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 않는 태도는 입체주의 이래로 회화에서 매우 드문 새로운 창안의 하나로 보인다”고 했다.

미술교육자 칸딘스키 예술가의 경험과 통찰로 가르치다.

칸딘스키는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린 ‘추상미술전 Abstract Art’ 에 참가하고 이 전시 카탈로그에 「구상의 추상」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귈티에리 디 산 라차로가 1938년 파리에서 창간한 잡지 『20세기 XXe Si&#47266;le』 창간호에 논문 「구체 미술 Concr&#47286;e Art」을 기고했다.

모든 미술은 한 뿌리에서 나온다.
따라서 모든 미술은 동일하다.
그러나 비밀스럽고 값진 것은 한 가지에서 맺은 열매들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각각의 표현 수단에 의해서 미술작품 간에 차이가 생긴다.
매우 간단하다.
음악은 음으로, 회화는 색으로 표현된다.
이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차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음악은 자신의 수단인 음향을 위해 시간을, 회화는 자신의 수단인 색을 위해 평면을 필요로 한다.
시간과 평면은 정확하게 재어져야 하며 음향과 색은 정확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이런 조절은 균형, 즉 구성의 토대가 된다.

내가 이 문제를 다룬 작은 책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발간한 지도 벌써 30년이 된다.
예를 들면 노란색은 ‘음의 높이를 올리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으며 점점 더 높아져서 귀와 정신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높이에까지 도달한다.
트럼펫의 음이 점점 더 높이 연주되어 점점 더 ‘뾰족해져서는’ 귀와 정신을 아플 정도로 찌른다.
이에 반해 파란색은 아득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대립적인 능력을 지녔으며 파란색이 밝을 때는 플루트의 음을 연상시키며, 파란색이 어두워지고 ‘아래로 내려갈 때’ 첼로의 음을 연상시키고, 더욱 어두워질 때에는 콘트라베이스의 장대한 깊은 음을 연상시키며, 끝으로 여러분은 가장 낮은 오르간 음에서 진한 파란색을 보게 된다.
잘 균형 잡힌 초록색은 바이올린의 중간 영역인 폭넓은 음들에 상응한다.
아주 짙게 칠한 빨간색(진홍색)은 강한 북소리의 인상을 줄 수 있다.
공기(음)와 빛(색)의 진동은 확실히 이런 물리적인 친분관계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토대가 되지 못한다.
또 다른 것, 즉 심리적인 토대가 있다.
그것이 ‘정신’의 문제이다.

정신 속에서 몇몇 음향 및 색깔의 무리 속을 거닐 때 갑자기 손가락이 가시에 찔린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를 여러분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여러분의 손가락이 회화와 음악 속을 우단이나 비단 위를 지나가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주색은 노란색과는 다른 향기가 나지 않는가?
그리고 오렌지색은?
밝은 녹청색은?
이 색들은 맛이 서로 다르지 않는가?
얼마나 맛이 풍부한 회화인가! 혀가 회화작품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의 알려진 오관 모두를 돌아본 셈이다.
회화를 눈으로만 파악한다고 착각하거나 믿지 말라.
그렇지 않다.
여러분은 회화를 무의식중에 여러분의 오관을 통해 파악하게 된다.

칸딘스키 부부는 1939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프랑스 정부는 <구성 9>495를 구입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세한 유기적 형태와 기묘한 상형문자 형태를 구성하는 마지막 구성작품을 완성했다.496-500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함에 있어 소련의 개입을 미연에 방지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팽창과 침략을 방치해둘 수 없었다.
평화에 대한 호소가 교황청, 벨기에, 미국 등지에서 일어났지만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선전포고 없이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었고 전쟁개시 이튿날인 9월 3일 아침 영국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영국의 선전포고에 이어 프랑스도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지 21년 만에 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칸딘스키는 두 달 동안 피레네 산맥의 코트르트에 머물며 작업했다.
<스카이 블루>501는 우주를 의미하는 뽀얀 파란색 바탕에 과거 그가 만든 이미지들이 둥둥 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좀더 장식적으로 바뀌었으며 ‘인상’, ‘즉흥’ 연작들에 비해 환상적으로 달라졌다.
<가지각색의 패거리>502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그는 과거에 즐겨 사용하던 기호와 같은 도안적 창조물들을 서로 어울리게 배열하고 때로는 구성을 위해 따로따로 그룹을 만들었다.
1933년부터 파리에 체류하면서 그는 프랑스 화단을 이끄는 많은 화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작품을 보아 알고 있었다.
독일에서와는 달리 파리에서 그는 이러한 다양성에 영향을 받아 창작의 영역이 더욱 확대되었다.
<가지각색의 패거리>에는 아시아인들이 사용하는 색들을 사용하여 동양의 정신도 표현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1년 칸딘스키는 미국 방문 초청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프랑스에 체류했다.
1942년 파리의 잔느 부셰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고, 마지막 전시회가 1944년 파리의 레스키스 화랑에서 열렸다.

그는 1944년 3월에 발병했지만 7월 말까지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가 적어놓은 리스트에 의하면 마지막 작품은 <유연해진 엘란>511이다.
칸딘스키는 1944년 12월 13일 뇌이쉬르센에서 78해의 생애를 마감했다.

칸딘스키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미술에 크게 기여했다.
1902년 뮌헨에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설립하면서부터 교육이 이미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러시아로 돌아가 1918~21년 모스크바에서 벌인 활동은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민족 교육을 위한 민족위원회 예술분과회원, 미술 아카데미 교수, 회화 문화를 위한 미술관 운영자로서의 역할, 러시아 아카데미 창립 등을 통해 사회에 대한 예술가의 책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교육에 헌신한 것은 1922년 바우하우스에 초빙되면서부터였다.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데사우에서 베를린으로 바우하우스와 함께 옮겨 다니면서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충실하게 교육에 임했다.
거의 11년 동안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교사로, 학장 대리로 그리고 작품 활동을 통해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비 과정의 첫 학기에 학생들에게 모던 아트의 문제에 관한 입문을 강의하면서 조형 분야로서의 회화 전개의 의미를 비인습적이며 비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개성적인 방식으로, 또한 예술가의 경험과 통찰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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