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원리에 기초한 칸딘스키의 추상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1910년경 몇몇 화가들이 색채에 의한 완전추상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화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오래된 규정을 무시하지 못해 재현적 요소를 완전히 버리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추상은 결국 두 가지 방향으로 진전되었는데, 재현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입체주의 화가들은 폴 세잔의 말년 작품에서 형태의 극단적인 단편화에서 새로운 조형회화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칸딘스키, 로베르 들로네, 프란티섹 쿠프카(1871-1957) 등은 색채이론을 통해 색채가 재현적 기능에서 벗어났을 때 색채의 힘만으로도 역동적인 운동감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완전추상에 도달한 칸딘스키는 괴테의 『색채이론』(1810)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괴테는 색채의 도덕적 효과, 즉 색채의 형이상학적 혹은 암시적인 잠재성을 위해 색채를 더하거나 감소시키는 도표와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색채감각을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다.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에 괴테처럼 서로 반대되는 색채표를 실었는데,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경험적 느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노랑과 파랑, 흰색과 검정색, 빨강과 초록, 주황과 보라를 반대되는 색채로 규정했다.
이런 도식에 따라 전형적으로 세속적인 색으로서의 노랑은 능동적인 따뜻함과 함께 외향적이며 진보적인 성격을 지니는 반면, 전형적으로 성스러운 색인 파랑은 능동적인 냉정함과 함께 은둔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는 색이 비재현적인 문맥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의 회화적 태도는 낭만적이고 정신적인 신념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칸딘스키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완전추상 작품을 제작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제작한 작품에서도 대상을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가 전혀 없는 그림을 그렸다.
1910년의 작품으로 알려진 최초의 완전추상 수채화 <무제(첫 추상 수채화)>181는 오로지 색채로서만 구성된 작품이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의 연대가 잘못 기입된 것으로 보고 1913년에 그린 <구성 7>을 위한 습작으로 보지만 칸딘스키의 미망인은 1910년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의 연대가 잘못 기입되었더라도 초기의 다른 작품에서도 대상에 대한 이미지가 거의 없는 유동성의 형태와 색채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빌헬름 보링거를 만난 뒤 칸딘스키는 완전추상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1908)에서 미술사에서 명백히 지각되는 두 가지 경향으로, 하나는 추상에 경도된 것, 다른 하나는 감정이입 혹은 자연주의적인 자연 묘사에 경도된 것을 말했다.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전환되고 있던 1900년대의 경향이 그의 논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추상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의 징조로 본 보링거와 「추상과 감정이입」에 관해 대화하면서 칸딘스키는 보링거가 추상을 인간과 세계와의 단절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양자 사이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걸 알고 그가 새로운 회화의 정신적 선두자라고 생각했다.
보링거는 “순수한 추상은 복잡하고 어렴풋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휴식을 주는 유일한 가능성”으로까지 보았으며, 복잡한 이미지의 세계가 “필연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기하학적 추상”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는 바로 칸딘스키가 열망하던 추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추상과 감정이입」이 칸딘스키를 중심으로 전개된 청기사 그룹의 취지와 일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다.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저술을 통한 이론과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완전추상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사물의 특징을 재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물감이 지닌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색채의 감정적 연상 작용에 민감했으며 그 공감적 효과를 심도 있게 발전시켰다.
자신을 깊이 감동시킨 색채를 회화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갑자기 떠오르는 일종의 직관을 통해 미술과 자연은 각각의 원리와 목적이 다른 분리된 두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미술의 자율성에 관한 믿음, 즉 미술작품은 외적 세계와의 어떤 유사성이 아니라 본래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거나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칸딘스키는 비재현적 회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당화한 최초의 예술가로 이 분야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천적인 면에서는 몇몇 화가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재현적 회화를 성취했지만 ‘추상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호칭은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미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한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