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존 케이지는 음악이란 소리예술이므로

케이지와 뒤샹의 우정은 1941년부터 시작되었다. 많은 미국예술가들이 뒤샹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케이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케이지는 뒤샹의 미학을 받아들여 매일매일 자신의 주변에서 발견되는 것들에서 음악의 재료를 구했는데 그것들에는 자연히 아이러니컬한 요소들이 들어있었으며 작품에서 심리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당시 영웅처럼 대우받던 뉴욕 스쿨 1세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는 케이지의 미학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무기처럼 생각되었다.
케이지는 단호하게 “예술에 감성이 있을 자리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선불교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뒤샹의 지성에 대한 무관심과 대조되었다.
케이지가 ‘우연’을 음악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였다.
우연을 자연의 근원적인 원리로 인식한 그는 예술가들의 작위적인 이기심을 경멸했으며 예술과 우리들이 매일매일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사이에 구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사람들에게 역설처럼 들렸다.

1950년대 맨해튼 남쪽에 있는 케이지의 아파트에는 음악과 춤에 관심 있는 예술가들의 방문이 잦았다.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크리스천 볼프는 어느 날 판테온(Pantheon) 출판사가 막 시판한 《주역 周易》을 케이지에게 주었다.
케이지는 주역을 읽고 감동했고 주역은 그가 1951년에 작곡한 〈변하는 음악 Music of Changes〉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동전 세 개를 여섯 번 던져 우연히 일어난 변화들을 자신의 음악에 이용했는데 영리한 그가 주역에서 말하는 점괘를 작곡에 적용하여 실험한 것이었다.
케이지는 주역의 점괘처럼 동전을 던져 음의 고저와 장단을 우연에 따라 작곡하면서 의도적으로 작곡하려는 작곡가의 이기심을 버렸다.
〈변하는 음악〉은 45분이나 되는 긴 음악이므로 그 곡을 작곡하기 위해서 아마 수없이 동전을 던지고 또 던졌을 것이다.

케이지는 음악이란 소리예술이므로 어떠한 소리도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에 사람들이 음악으로 간주하지 않던 소리들을 과감하게 재료로 사용했다.
이는 비미학적 물질을 사용하여 예술품을 제작함으로써 전통미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던 뒤샹의 행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소리에는 네 가지 요소들, 즉 음의 고저(pitch), 음색(timbre), 큰 소리(loudness), 지속(duration)이 있으며 오히려 정적(silence)이 유일한 지속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4분 33초〉는 단지 지속만이 있는 작품이다. 그는 무대에 올라 정확하게 4분 33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 퇴장했던 것이다.
그는 위의 세 가지 요소들을 배제한 후 환경에서 생기는 우연한 소리만을 지속의 요소로 받아들여 작곡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라우센버그가 1951년에 소개한 〈하얀 그림들〉은 케이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인데 두 개의 캔버스를 손도 안댄 채 고스란히 벽에 걸었던 작품으로 지금 솔로몬 구겐하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 작품은 침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케이지의 미학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 가운데는 미니멀리즘, 후기 컬러필드 예술가들이 있고, 1960년대 초 독일에서 활동한 플럭서스 그룹이 있으며 그의 제자이면서 평생친구인 백남준도 그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케이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예술행위를 한 예술가들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해프닝의 선구자 앨런 캐프로를 꼽을 수 있고, 뒤샹과 비슷한 청각적 재담과 역설 그리고 익살을 수용한 개념미술 예술가들도 케이지의 미학에 반발했다.

팝아트는 케이지의 미학에 보다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케이지는 워홀의 연속적인 초상 그림들을 반기면서 “워홀은 반복하면서 같은 반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케이지를 스승처럼 따르면서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라우센버그와 존스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한 뉴욕 스쿨의 1.5세 예술가들로 두 사람을 따로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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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성적 파트너를 선택하는 모소족
 

  무료할 때 나는 케이블 TV에서 두 채널을 즐겨 본다.
바둑 채널과 Discovery chanel이다.
Discovery chanel은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을 시각적인 사실과 더불어 심어주기 때문에 늘 보고나면 유쾌하다.
예를 들면 클레오파트라를 그저 이집트 여인이려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리스 여인인 줄 이 채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채널을 통해 왜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그리스인 네 장군들에 영토가 분배된 걸 생각하지 못했던가 하는 역사에 대한 태만했던 태도를 배우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티벳과 중국 경계 리지앙이란 지역에 아직도 잔존하는 모소족에 관한 프로그램을 봤다.
지역적으로 티벳과 가까워서 종교적으로는 티벳의 영향을 받는 족속이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내왔는데 일종의 모계사회였다.
남자들은 거의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여자들이 생계를 이끌어간다.
밭일을 할 때 남자가 도와주지만 여자가 가장으로 생활을 책임진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남자보다 여자의 권위가 더 높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성행위를 했다.
인터뷔에 응한 사람의 말로는 50여 명을 섹스의 상대로 삼았고 어떤 사람은 100여 명을 섹스의 상대로 삼았다고 한다.
방법은 남자가 여자를 방문하는 것으로 두 사람은 성적으로 결합하는데 남자는 언제든지 여자를 떠난다.
여자는 또 다른 남자의 방문을 받으면 그와 하룻밤을 지낸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경우 남자는 그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지 않는다.
아이의 실질적 아버지의 역할은 여자의 오빠나 남동생이 한다.
실재로 누이의 아이, 즉 조카를 자식처럼 기르는 남자에게 물었다.

"너와 상대한 여자가 너의 자식을 낳으면 조카와 자식 중 누구를 기르겠느냐?"
"내 자식은 여자의 집안에서 해결할 문제다. 옷이나 필요한 것 몇 가지는 사주겠지만 난 조카를 기르겠다."
이 남동생은 그 지역의 관습대로 누나가 낳은 아이를 자식처럼 기른다.
일반 아버지의 역할을 이 남동생이 하지만 누나와 동침하는 것은 금기이다.
남매가 성관계를 갖게 되면 동네 사람들에 의해서 자살이란 벌을 받게 되고 만약 자살하지 않으면 데려다 동굴 속에 넣고 동굴을 막아 굶어 죽게 만든다.

이 지역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명을 애인으로 둔다.
이런 일에 시기하는 사람은 없다.
눈이 맞으면 배가 맞는다는 식이다.
이 지역의 생활을 필름으로 기록하는 시기에 한 여자가 죽었다.
여자의 친지들이 슬퍼해 하면 그녀의 시신을 관에 넣고 화장했다.
이웃 티벳의 중들이 와서 염불했다.
그러나 그 여자의 30년된 애인은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남자 애인이 여자의 장례식에 가는 것은 실례라는 것이다.
가고 싶어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오래된 관습이 유지되어 온 이 지역에도 문명의 바람이 불었다.
중국 당국은 일부일처제의 당위성을 홍보했고 강제적으로 결혼을 집행했다.
처음에는 이 지역 사람들의 반발이 컸다.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와 결혼해서 평생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산으로 가서 집단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일부일처제가 거의 실시되었지만, 어느 여자에게 이곳의 누군가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남자와 동침을 했다면 비난받을 일이냐고 묻자, 그 여자와 주변의 여러 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했다.
관습이 아직도 존중되고 있다.
그리고 실재로도 이런 일이 일부일처제 속에서도 은밀히 유지되고 있다.

오래된 관습이란 금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예증이다.

이 해발 고지에 있는 마을에도 문명이 닿았다.
장이 섰고 한 달에 한 번 버스가 운행된다.
그곳 사람들도 기성복을 사고 부엌 도구들을 사서 쓰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이 지역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문명의 파도는 더 크게 이 지역을 강타했다.
라디오가 들어왔고 북경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직접 듣게 되었다.
그리고 술집이 하나 생겼다.
사람들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블루스를 추게 되었다.
남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포커를 하게 되었다.
문명이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이 지역을 예로 보게 된다.

아직도 리지앙에는 모소족이 천오백여 명 가량 살고 있다.
문명과 관습 사이에서 자의적으로 선택하며 살고 있는데, 모계 중심의 사회는 아직도 오래 존속할 것으로 보인다.
가축 우리의 지붕을 덮기 위해 산으로 가서 나무가지와 잎을 가져오는 일도 여자가 하고 그 시간에 남자들은 모여서 담배 피우며 무료하게 지낸다.
가장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노력을 남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
관습이 남자들을 무력하게 만든 것이다.
시간이 남아돌아가니까 그들은 술집에서 취하고 도박을 한다.
아마 여자들이 남자들을 몹시 혼내줄 것이다.

원시적 사회는 나름대로 아름답다.
그곳에는 법이 없지만 평화스럽다.
문명이 법을 앞세우고 강타하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폴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는 원시사회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우리가 나무래서는 안 된다.
그들은 법이 아닌 관습만으로도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온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사회가 커지자 질서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지 인간에게 어울리는 문명의 새로운 관습은 아닌 것이다.

자유롭게 자신의 성적 파트너를 선택하는 것은 모소족만의 관습이 아니라 모든 원시사회의 관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관습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오랫동안 존중되어 유지되었다.
문명이 이 관습을 배척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문명의 강요를 물리칠 수 있는 지역이나 사람은 없다.
언젠가는 리지앙도 중국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관습이 평준화될 것이다.
웬지 원시사회의 관습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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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존 케이지는 행위예술을 먼저 시작했으며


1952년에 발표한 〈4분 33초〉는 이제 전설적인 작품이 되었다.
케이지가 작품을 발표한다고 하자 사람들은 기대하면서 그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무대에 오른 케이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이따금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정확히 4분 33초가 경과하자 무대에서 퇴장했다.
4분 33초 동안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자신의 작품처럼 소개한 것이다.
이 작품은 라우센버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케이지는 행위예술을 먼저 시작했으며 그것은 곧 나타날 해프닝의 시작이기도 했다.
케이지는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35분 동안 강의하면서 자주 침묵하는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가 강의하는 동안 찰스 올슨과 매리 리처즈가 다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시를 낭독했으며 데이비드 튜더는 피아노를 연주했고 라우센버그는 춘화를 그렸으며 안무가 머스 커닝햄은 다른 댄서들과 함께 즉흥적으로 춤을 추었다.
이러한 이벤트는 해프닝과도 유사했는데 이벤트와 해프닝의 다른 점은 대충 다음과 같다.
이벤트는 사전에 계획한 대로 행위 하는 것을 말하고 해프닝은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행위 하면서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행위를 창작하기도 하는 것이다.
케이지의 이벤트에는 즉흥적인 요소가 많았으므로 그를 이벤트의 선구자면서 동시에 해프닝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선불교에 매료되고부터 그에게 변화가 왔다.

“나는 소리를 조절하려는 욕망을 버렸으며 음악에 대한 분명한 사고가 생겼다.
이제 소리를 감상에 대한 표현이나 인위적인 이론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고 소리 자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무작위(無作爲)가 작위(作爲)라는 노자(老子)의 생각과도 일치하며 인위적인 요소들을 배제하여 구름 따라 강물 따라 자연의 이치대로 소리가 자연스럽게 구성되는 것을 작곡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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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와 지나간 미래
 

  <예술의 종말 이후> 제7장 앞부분에 2차세계대전 전후의 미국 미술 계보가 나온다.
특히 토마스 이킨스, 로버트 헨리, 에드워드 호퍼의 이름이 나온다.
헨리는 이킨스의 제자였고, 호퍼는 헨리의 제자로서 미국 미술의 직선적 계보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부의 미술과 뉴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동부의 미술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 미술의 주류는 주로 동부에서 이루어졌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부에서 볼 때 서부의 미술은 비주류로 보인다.
앞에 언급한 세 화가들은 미국 전통회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피카소와 마티스를 앞세우고 몰려드는 유럽의 현대 회화로부터 자신들의 고유한 지역 회화를 지키고 미국식 회화의 장점을 알리려고 했다.

파리 아카데미 보자르에 유학했던 이킨스, Ash Can School을 창설한 헨리, 호퍼 모두 유럽 화가들이 여자의 누드를 그릴 때 프리네스, 비너스, 님프, 헤르마프로디테, 하우리 등으로 불릴 만한 이상화된 누드의 모습을 그린 것에 반대하면서 평범한 여인이 지금 막 옷을 벗었을 때의 실재 모습을 그렸다.
화가가 연출한 에로틱한 상황에서 몽상에 잠긴 여인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옷을 벗은 여인을 그렸다.
미국 화가들의 그림이 모던하게 보이지 않고 19세기 후반의 그림으로 보였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단토는 1933년경의 미국의 모더니즘 회화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0년경에 발표한 <모더니스트 회화>와는 크게 달랐던 점을 지적했는데 그 당시 모더니즘이 거의 종료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1933년 당시의 시각에서 본 '모던'은 다양한 미술을 용인했는데,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여기에 앙리 루소의 환상의 세계, 초현실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도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추상과 절대주의, 비구성도 포함되었다.
주지할 점은 호퍼를 비롯한 미국 주류 화가들은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면서 모더니티가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그는 예쁜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마치 영화 연출가가 배우에게 주문하듯 자신이 원하는 그림에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의 그림은 주로 소외된 인간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야의 주유소에서 차에 개스를 넣는 늙은 주유소 주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리를 이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 등이다.
이런 사실주의 그림은 그 자체 훌륭했지만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하자 추상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는 협소하게 정의된 모더니즘 이론에 의해 궁지에 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 전통주의 화가의 입지가 갑자기 좁아진 것이다.
호퍼를 비롯한 그들은 추상을 "딱딱한 표현 gobbledegook"이라고 부르면서 모마MoMA가 추상을 선호하는 데 반발했다.
그들은 1959~60년 휘트니 연감에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사실에 경악해 했다.
구상과 비구상의 반목이 매우 심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단토는 당시의 추상과 사실주의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양측이 얼마만큼의 도덕적 에너지를 갖고 관여했는지 의구심을 표한다.
당시의 상황은 거의 신학적 강도였으며 문명의 다른 단계였더라면 분명히 화형감이었을 정도로 심했었음을 지적한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거의 이단적 행위로 보일 정도였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보다 더욱 더 심했다고 보면 된다.
대학의 교수들은 사실주의에 관한 강의계획서를 제출했다간 강의가 배정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미국 미술계에서 그린버그의 영향을 컸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추상의 우월주의는 그에 의해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그린버그는 1939년에 추상을 일종의 역사적 불가피성으로 보았다.
에세이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주장했듯이 그에게 추상은 "역사로부터 나오는 명령"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추상미술의 옹호'에서 그린버그는 재현이란 부적합하다며 "티치아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추상적 형식적 통일성이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특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의 불공평한 특질 부여를 단토는 문제 삼는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회화를 역사적 진화의 낮은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분통을 터뜨린다.
그린버그의 독선은 그 수위를 넘었는데,
1961년에는 추상마저도 역사적 운명의 분위기를 상실했다고 추상표현주의의 조각적 분위기를 비판했으며, 추상표현주의는 1962년 거의 종결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상과 추상의 차이는 없다.
둘 다 회화의 양식에 속하는 것이지 그린버그가 말한 대로 좋고 나쁜 것의 차이도 아니며 역사적 진화와는 무관하다.
제7장의 제목에서 말하는 '지나간 미래'란 호퍼를 비롯한 미국 전통 미술이 그린버그에 의한 모더니즘론의 등장과 모마를 비롯한 뮤지엄들의 추상 전시회 선호로 인해 지나간 미래가 되었음을 지적한 말이다.
미국 회화의 미래는 모마에 의해 정의된 모더니즘의 초기에 추상이 차지했던 자리에다 온갖 회화를 죄다 쑤셔넣은 그런 꼴의 미래였다.
추상을 수많은 예술적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역사적 진보의 개념으로 본 것은 그린버그의 큰 오류였다.
게다가 조각 및 그 밖의 장르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과 회화를 사실상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과오였다.


단토는 이런 미국 미술의 상황에서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팝아트를 꼽는다.
그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본다.
팝아트는 1960년대 초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는데, 그가 부지불식이라고 말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나타난 물감흘리기와 떨어뜨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가 이런 충동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때가 1964년이었다.

한편 1964년 휘트니 뮤지엄이 호퍼의 회고전을 개최했다.
이는 사실주의 화가들이 그동안 자신들의 회화를 옹호하고 추상에 대해 끈질지게 투쟁한 노력의 댓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뮤지엄 앞에서 피켓을 들고 뮤지엄이 추상만을 선호하는 데 반대시위를 했고 일간신문 뉴욕타임즈에 추상표현주의를 공격하는 글을 쓰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해 왔었다.
호퍼의 회고전은 이런 의미에서 사실주의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
그때 막 성행하기 시작한 포토리얼리즘 운동도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옹호에 일익을 담당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추상표현주의자들 중에도 호퍼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 사람이 있었는데 폴록과 단짝이었던 드 쿠닝이 호감을 나타냈다.
드 쿠닝은 사람과 사물의 형상을 그렸다는 이유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폴록은 드 쿠닝에게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었다.

"너 구상을 하고 있잖아. 아직도 똑같이 빌어먹을 짓을 하고 있다니. 너는 구상화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드 쿠닝이 회화에 있어서 추상적 혁명의 배신자로 몰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나의 저서 <폴록과 친구들>에 소상히 나와 있다.

단토는 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를 좀더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다.
단토의 내러티브 혹은 그의 논리적 이야기에 근거하면,
팝아트는 미술의 철학적 진리를 자의식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서양 미술의 위대한 내러티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이런 고견을 갖고 있었던 그가 파리로부터 뉴욕으로 올아와 1964년 4월 스테이블 화랑에 가서 엔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았을 때 큰 자극을 받은 건 당연했다.
그 작품을 보는 순간 뉴욕 미술의 장면을 정의하고 있던 논쟁의 전체 구조가 적응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호퍼와 그 밖의 주류 사실주의, 추상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이론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마침 그때 단토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철학회에서 미학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고, 그는 <예술계 The Art World>란 제목으로 발표했고 이는 미술을 다루는 최초의 철학적 노력이었다.
그의 논문은 예술계와 철학계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 왔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단토는 팝아트가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 엎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 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는데 이것이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예술가들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훌륭한 목공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술과 실재 사이의 차이를 이제 더 이상 순수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시각예술이 시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또한 '예술작품'의 의미를 실례들을 보여주면서 가르친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워홀과 팝아트 예술가들은 철학자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 모두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국지적인 중요성만을 갖는 것으로 만들었다.
단토는 팝을 통해 비로소 미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물음이란 다름 아닌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어떤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토는 미술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미술사 내부로부터 해명되었으며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단토가 말하는 종말이란 미술이 죽었다거나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는 같은 시기에 독일인 한스 벨팅이 주장한 바와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적이란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역사관 혹은 두 사람에 의한 미술사 구성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팝아트란 말은 단토 이전에 미술잡지 <네이션>의 미술비평을 담당했던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단토는 팝이란 말이 썩 좋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사용되고 있고, 앨러웨이가 그러한 말을 사용하게 된 동기를 이해한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구분을 첨가하고자 했는데 다음과 같다.

"고급 미술 속의 팝, 즉 고급 미술로서의 팝과 팝 미술 자체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팝의 선구자들을 추적하고자 할 때에는 특히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더웰이 자신의 몇몇 콜라주에 골와즈Gauloise 담배갑을 이용했을 때, 혹은 호퍼와 호크니가 팝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에다 광고계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이용했을 때, 이런 것이 바로 고급 미술 속의 팝에 해당한다. 대중적인 미술들을 진지한 미술로 취급하자는 것이 앨러웨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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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해프닝을 연 존 케이지


워홀에게 미학적 도움을 주었던 디는 뉴욕 근교 포모나에 살았는데 이웃에는 작곡가 존 케이지가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두터웠으며 케이지의 음악회를 디가 주선해준 적도 있었다.

뒤샹이 ‘이미 만들어진(Ready Made)’ 물질들을 콜라주했듯이 케이지도 주변의 소리들을 수집하여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실존적 영웅심의 과시와, 예술이란 고상하고 지성적 사고의 결정체라는 주장에 반발했다.
뒤샹과 마찬가지로 그도 예술을 유머스러운 재담쯤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을 웃겼으며, 예술을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조소하려고 했다.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의 주관적인 느낌과 창조적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물리적 환경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 케이지는 예술의 목적은 “예술과 인생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웃는 사람들에게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더 웃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면서 “인생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창조 안에서 진전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인생 그대로를 단순히 깨어있는 것으로 자각할 수만 있다면 최선이다”라고 말했다.

케이지는 뒤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뒤샹과는 달리, 개념을 파괴하는 데서 예술의 목적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을 확고하게 함으로써 목적에 도달하려 했다.
우연을 중요한 방법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선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했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그의 행위는 영락없이 네오다다이즘에 속했다.
우연과 단절을 선호하긴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였지만, 예술가들이 과거의 대가들처럼 심원한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 자신들의 잠재의식에만 의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의 이러한 미학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데, 많은 뉴욕 스쿨 1.5세와 2세 예술가들이 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곧 살펴볼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는 전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케이지의 영향은 독일에서 벌어진 플럭서스(Fluxus) 그룹 예술가들의 해프닝에도 미쳤는데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대부분 케이지의 제자들이었다.
음악은 소리예술이므로 음식을 씹어 먹는 소리나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도 악기 소리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플럭서스 그룹의 생각은 주변의 소리들을 콜라주하는 케이지의 작곡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우연을 자연적인 형태의 원리로 인식한 그는 예술가들이 형태를 이성적으로 창조하는 것에 반발했고 예술품에서 클라이막스와 단계가 나타나는 것을 배척해 반복을 선호했다.
그는 예술과 인생 사이의 간격을 없애버리기 위해 예술가 자신을 배제하는 방법에 도달했는데 여기에는 자아와 타아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선불교의 방법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잘 이해했던 백남준에 의하면, 케이지에게 “당신은 왜 예술 행위를 하느냐? 미술사에 케이지가 살았다는 기록만 남기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건 너무 드라마틱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을 배제하는 작품을 제작하는 케이지에게 “아예 작품조차 제작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온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백남준의 짖궂은 질문에 대한 케이지의 대답이었다.
나르시즘 미학을 가진 백남준은 자아와 타아의 구별을 무시하는 케이지의 미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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