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팝아트
팝아트는 미국에서 성행했지만, 이 미술운동이 먼저 발발한 것은 영국에서였다.
1952년 말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에서 젊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 평론가들이 만나 인디펜던트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에는 건축가 레너 배넘,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 예술가 리처드 해밀턴,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윌리엄 턴불 등이 있었다.
이 그룹은 대중문화와 반미학적이라고 생각되는 근래의 예술행위들에 공통된 관심을 보였다.
이중 몇몇 예술가들이 대중문화를 찬양하는 작품을 제작한 것이 팝아트의 시작이었다.
팝Pop이란 용어는 이런 대중문화와 이미지를 지칭하기 위해 앨러웨이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용어는 후에 이런 관심에서 발전된 새로운 형태의 구성미술에 적용되었다.
1956년 런던의 화이트 채플에서 열린 전시회 ‘이것이 내일이다’는 이 운동이 선택하게 될 노선을 예시했으며, 관람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전시회 기획을 전시회 기획에 참여한 리처드 해밀턴(1922~)은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두드러지게 하는가?>라는 제목의 흥미 있는 작품을 출품했다.
영국 팝아트의 대표적인 이 작품에서 해밀턴은 현대인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내부를 소개하면서 오만한 여인의 누드와 활력을 과시하는 남자의 누드를 함께 보여주었고,
아파트에 널려 있는 근래의 대량생산품인 TV, 축음기, 만화 포스터, 포드사 로고, 전기청소기 광고문, 햄 통조림 등으로 현대인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나타냈다.
해밀턴은 왕립아카데미에 입학했다가 학교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1946년에 퇴학당했고,
1948~51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2~53년 센트럴 미술공예학교에서 가르쳤고,
1953~56년 뉴캐슬어폰타인에 있는 더럼 대학의 킹스 칼리지에서 가르쳤다.
해밀턴은 영국에서 팝아트와 네오-리얼리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몽타주 작품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들은 광고 및 현대생활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대문명과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경향을 비판적으로 들춰내어 간파할 수 있도록 치밀하면서도 신중하게 짜여졌다.
영국 팝아트의 주요 예술가들은 매우 개성적인 태도와 양식을 추구했지만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달랐다.
초기 팝아트 예술가들은 미국 대중문화의 통속적인 이미지들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번영과 기술적 진보에 대한 낭만적이고 향수 어린 찬미의 상징이었다.
이 새로운 미술이 추구한 것은 전통 미술과 기존의 미술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른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이의 장벽을 허물려는 욕구의 분출이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저급문화의 이미지가 지닌 평범함과 진부함을 무시하거나 공인된 미적 기준에 따라 쓰레기로 취급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기존 미술에 대한 거부는 할리우드 영화, 공상과학소설, 연재만화, 영국의 반항적인 청소년 문화 등으로 대변되는 청년 세대의 반항과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 팝아트의 중요한 화가이면서 영국 미술의 신동으로 불리는 데이브드 호크니(1937~)는 1961년에 <환상주의 스타일로 그린 차 그림>은 그가 팝아트와 연계되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시대에 뒤진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회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제인 인간의 모습을 주로 그리면서 장 뒤비페로부터 영향을 받아 거칠고 초보적인 회화방법을 구사했다.
호크니는 사람을 힘 있게 그리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방법에 매료되기도 했다.
<3월 24일 이른 시간에 춘 차차차>에는 베이컨의 영향이 나타났고 동시에 추상도 보이는데 추상에서는 잭슨 폴록과 입체주의의 영향이었다.
그는 정보의 손실을 줄이고 명료하고 단순한 해석을 위해 동의어 반복을 도입했고, 현실과 환영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1961년 뉴욕을 방문한 호크니는 자유로운 미국 사회로부터 자극을 받아 머리카락을 하얗게 표백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호가스의 <레이크의 진전>의 현대판 그림을 연속해서 그렸는데 미국에 체류할 때의 경험이 나타났다.
1962년 <첫 결혼>을 그린 후 말했다.
“나는 모호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을 삽입시켰다.
두 사람은 하얀 모래와 야자수가 있는 섬의 사막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난 배경을 일부러 흐리게 했다.
두 사람이 신랑 신부처럼 보였으므로 제목을 <첫 결혼>이라고 했다.”
1963년 말 호크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로스앤젤레스의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훌륭한 팝아트 작품을 낳았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는 동안 수영장에 매료되어 그림에 수영장이 등장했으며 사람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호크니는 빠른 속도로 성공해 1966년에는 유럽에서 다섯 번 이상 개인전을 열었다.
1966년 500파운드에 팔린 회화작품이 1974년 소더비 경매에서는 25,000파운드에 팔렸다.
1973년 ICA 화랑에서 열린 ‘4인의 젊은 예술가전’에 대해 <더 타임스> 지의 평론가는 적었다.
“호크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것과 캐리커처를 결합하는 등 매력적이며 독창적인 상상력을 지닌 몽상가이다.
그는 외부세계보다는 내부세계를 반영하며,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기법으로 비딱한 시를 보여준다.
그러나 호크니의 행보는 외줄 타기만큼이나 위태롭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허세와 변덕이 양극단에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타고난 소묘가인 호크니는 매우 다채로운 양식을 구사했다.
구상적인 표현에 언어적인 암시와 기하적인 패턴을 결합하기도 하고 종종 유행을 작품의 주제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회화에 환영적인 실재감을 표현하기를 의도적으로 피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심오함과는 대조적으로 회화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를 반복적으로 결합하면서까지 최대한 쉽게 이해되도록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팝아트 외에 초현실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은 평면적이며 인위적으로 정지한 상태여서 거의 동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티스의 밝은색과 피카소의 입체주의 회화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회화방법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