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작품


1960년 앤디 워홀은 뉴욕화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화랑들을 자주 방문해 첩보원처럼 최근 예술가들의 동태를 살폈으며, 무엇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늘 궁리했다.
함께 화랑을 방문하곤 하던 친구 테드 캐리가 어느 날 오후 워홀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전에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 갔다가 만화 같은 작품을 보았는데 네가 요즘 그리고 있는 작품과 비슷하니 그 화랑에 가봐” 하고 일러주었다.
캐리와 함께 소호에 있는 카스텔리 화랑으로 갔더니 전시장 구석에 캐리가 말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만화를 주제로 한 작품인데 로케트에 사내가 타 있고 배경에 소녀가 있다.

그날 워홀은 화랑의 책임자 이반 캅에게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반은 워홀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날 오후 워홀의 화실을 방문하여 작품을 직접 보기로 약속했다.
집에 돌아온 워홀은 널려 있는 상업용 작품들을 치우느라 분주했는데 이반에 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상업미술가라는 사실을 알렸다가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대로 오후 늦게 이반이 워홀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는 15분 동안 워홀의 작품을 둘러보더니 “이 작품들은 퉁명스럽고 직선적이며 어떤 결론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것들은 추상표현주의 작품과 비슷하고 결론이 없는 작품들이다”라고 말하고는 웃으면서 “내가 건방지게 말하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반은 이때 워홀의 비개성적인 작품을 보고 그것이 미래의 미국회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워홀은 경쟁심이 대단했으므로 최근 예술가들의 동향에 관해 궁금한 점을 이반에게 물으면서 특히 리히텐슈타인에 관해 물었다.
그가 리히텐수타인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도 카스텔리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리히텐슈타인이 어느 날 작품을 몇 점 들고 화랑으로 왔는데 아주 부그러워했다.
난 그의 작품을 본 후 두 점을 두고 가라고 하면서 카스텔리가 오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리히텐슈타인은 현재 럿거스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둥 그에 관해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이반은 카스텔리에게 워홀에 관해 이야기했고 어느 날 카스텔리를 대동하고 워홀의 화실에 나타났다.
카스텔리는 화실 안을 죽 둘러보다가 벽에 걸려 있는 <딕 트레이시>와 <성형수술>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며,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당시 인기 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이고 그에게는 단짝 샘 케쳄이 늘 옆에 따라다닌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케쳄의 턱은 둥글게 했다.
만화와 달리 자신이 바라지 않는 부분은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려버렸다.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작품에는 익살이 있는 반면 워홀의 작품에는 익살이 없고 오히려 관람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궤변과도 같았다.
카스텔리는 그날 워홀의 작품 한 점을 샀다. 카스텔리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궤변을 워홀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은 뒤샹의 의도와도 같은 것으로 워홀의 작품에는 아이러니와 함께 미학적 등급에 혼란을 주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대중적 이미지와 만화에 관심이 많은 워홀은 1961년에 <슈퍼맨>을 그렸는데 원래 만화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순수회화처럼 보이도록 그림 상단에 크레용을 쓱쓱 칠하고 말풍선의 글자를 추상표현주의 방법으로 일부러 흐리게 했다.
그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약간 변형함으로써 인생과 예술의 폭을 좁히려고 했는데 이는 팝아트의 미학이기도 했다.
워홀의 술수적인 기교는 놀라웠다. 그는 비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렸으며 이런 방법은 평생 답습되었다.
모두 세 점을 그린 <전과 후>의 주제는 성형수술 광고인데, 왼편 여인은 매부리코에 못생긴 모습이고 오른편은 코를 교정하여 매력적인 코로 달라진 모습이다.
워홀은 이런 작품을 통해 뉴욕화파 예술가들의 물리적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공허하게 만들었으며 예술의 높고 낮음은 단지 예술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다.
풍자적인 요소가 배제된 그의 작품을 관람자들은 만화를 볼 때처럼 코믹하게 여기지 않고 예술품을 관람하는 듯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뉴저지 주 럿거스 주립대학 부교수직을 사직하고 뉴욕으로 와서 회화에만 전념하고 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도 워홀과 마찬가지로 비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 비개성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나는 추상표현주의 시대에 성장했다.
난 여전히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만드는 형태와 그것들의 상호작용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그림을 단순하게 그리고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회화에 관심이 생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재즈를 좋아했고 피카소의 청색-장미시대 작품을 좋아하여 그것들을 모방하곤 했다.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오하이오 주 주립대학 미술과에 진학했다.
그가 1958년에 입체주의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린 10달러짜리 지폐 그림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57년과 1960년 사이에 그린 그림들은 넓은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에 속했고 입체주의의 기하적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부터 그의 작품은 우아했지만 야단스러웠다.
평론가들은 그가 모더니즘 미학을 수용하여 몬드리안과 1930년대에 두드러졌던 조형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비록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그의 작품은 순수회화의 요소들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간지 <뉴욕 타인즈>는 한때 리히텐슈타인을 “미국에서 가장 형편없는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혹평한 적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농담과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 멘켄은 “나는 미국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대부분을 웃으면서 지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유머는 미국사람들의 인생의 요소이자 팝아트의 요소이기도 하다.

리히텐슈타인이 회화적으로 자극을 받은 것은 친구 예술가들이 아니라 집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리히텐슈타인의 아들은 미키 마우스 동화를 읽다가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아빠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수 없을 거야!”라고 했다.
아들의 말에 자극을 받은 리히텐슈타인은 곧 만화 여섯 점을 그렸는데 원래 만화의 형태와 색을 조금만 달리 한 것들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이봐 미키>는 커다란 물고기를 낚았다고 낚시줄을 끌어올리는 미키 마우스에게 도날드 덕이 자신의 옷이 낚시에 걸린 것이라고 말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이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이런 방법으로 일관되었다.
그의 유머스러운 작품에는 글자가 있고 말풍선 안에는 대화내용이 들어 있다.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이 만화작품들이 소개되자 당시 카스텔리 화랑에 소속되어 있던 라우센버그와 존스는 형편없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라우센버그는 곧 그의 작품을 이해하게 되었고 존스가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다.
1962년 2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전시회가 다시 열렸을 때는 평론가들의 호평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이었다.
평론가 존 코플런스는 그가 “본래의 형태와 색을 조금만 변경시켰다”고 적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보는 많은 장면들 가운데 단지 한 장면뿐임을 강조했다.

리히텐슈타인의 비속하고 괴짜스러운 작품에서 존스의 아이러니컬한 초연함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요소는 워홀의 작품에도 나타났다.
워홀은 이런 점을 예술가 자신이나 이미지에 귀결시키는 위험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 때문에 워홀의 작품은 주제가 늘 개인적이고 모호했는데 그는 1968년에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네가 만일 앤디 워홀에 관해 자세히 알기를 바란다면 내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겉모습을 보면 된다.
그것들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는 겉보기와 달리 궤변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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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재스퍼 존스의 〈국기>는

 

라우센버그와 한 쌍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재스퍼 존스는 라우센버그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라우센버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이미지를 주로 창조했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관람자들을 경악시켰던 존스가 미국미술에 준 영향은 라우센버그에 비해 더욱 컸다.
1997년 1월 뉴욕의 모마(MOMA)에서 개최된 존스 회고전에는 1955년부터 95년까지 40년 동안 제작된 작품들이 3층에 마련된 여러 개의 방에 가득했다.
필자는 그 방들을 둘러보면서 그의 일생을 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으며 미국미술에서 그가 라우센버그에 비해 훨씬 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5세 때 전설을 창조한 〈국기〉(1954-55)와 〈과녁판〉(그림 26)은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존스는 25세가 되던 1954년 어느 날 국기를 그리는 꿈을 꾸고 난 후 국기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기, 과녁판, 지도는 우리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존스는 그것들을 새로운 형태들로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미학을 제시했다.
그는 환상과 실제의 구분을 파괴한 후 그것들을 재정립하면서 창조 과정 자체를 설명하려고 했으며 관람자들이 그러한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세계로 유도했다.
그의 작품들은 최면술 같았고 냉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가 그린 숫자판과 색비교판의 미학 역시 과녁판이나 국기와 마찬가지로 개념이란 개별적인 사물들의 이미지에 대한 통칭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곧 나타날 개념미술의 선구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아무런 내용도 없는 국기와 과녁판에서 상징적 이미지들은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녹색 과녁판〉(그림 32)이 소개된 것은 유태인 뮤지엄에서 개최된 ‘뉴욕 스쿨 예술가 2세들’전에서였다.
그때 작품을 선정했던 사람은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였다.
샤피로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던 유능한 교수로서 1995년에 타계했는데 그의 평론은 유명했다.

1957년 라우센버그의 초대로 레오 카스텔리 부부가 존스와 라우센버그의 화실을 방문하고는 두 사람의 재능을 발견했다.
라우센버그가 카스텔리를 데리고 아래층에 있는 존스의 화실로 갔을 때 카스텔리는 “대단한 천재의 증거를 보았다”면서 “다른 어떤 것들과도 무관한 완전한 신선함이었다”고 술회했다.
카스텔리의 아내는 그날 존스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다.

존스는 “나는 사물 그 자체보다는 사물로 되는 과정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사물들은 나로 하여금 각기 다른 차원에서 작업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1958년에 〈네 얼굴이 있는 과녁판〉(그림 34)을 제작한 존스는 과녁판 위에 코와 입만 있는 가면 네 개를 병렬시켰다.
평론가 알로웨이는 존스의 가면이 좌우대칭으로 힘 있게 나타났다고 기술하면서 같은 가면을 네 개 병렬한 것은 가면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형에 대한 감각을 제거해주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1958년 1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두 사람의 개인전이 각각 열렸는데 존스의 개인전이 더 성공적이었다.
모마는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의 의견을 받아들여 존스의 그림 세 점을 구입했으며 모마의 직원들도 존스의 그림이 투자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그림을 구입했다.
팔리지 않은 그림은 오직 두 점뿐이었다.
이듬해 모마의 책임자 도로시 밀러가 모마에서 ‘16명의 미국 예술가들 Sixteen Americans’전을 개최하면서 존스의 〈국기〉, 〈과녁판〉, 〈숫자〉, 콜라주 작품 〈테니슨〉을 포함시켰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뉴욕 스쿨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며 1958년 10월에는 그의 그림 세 점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다.
같은 해 12월 카네기재단이 피츠버그에서 개최한 비엔날레에서 그는 국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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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에의 호평에 대한 빈센트 반 고흐의 반응
 

  시인이자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는 1890년 1월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첫 번재 호에 '소외된 사람, 빈센트 반 고흐'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으므로 빈센트의 이름은 이제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빈센트가 이 글을 읽고 동생에게 피력한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순진하고 진정한 화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소개한다.

다음은 오리에의 평이다.

빈센트 작품의 특성은 대체로 넘쳐나는 힘, 넘쳐나는 신경과민, 과도한 표현 등으로 정의된다.
사물에 대한 맹목적 단정, 종종 발견되는 과감하게 단순화한 형태,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는 오만함, 스케치와 채색에 나타나는 격정적 열정, 가장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강렬한 형상, 이런 것들은 남성적이며 과감하고 거의 야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섬세하다.
이처럼 자연주의자의 예술 저변에 베어있는 진정 이상적인 경향을 부정해버린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작품의 큰 부분은 도저히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경우 농부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처럼 당당하고 수선스러우며 야성적일 정도로 빛나는 이마를 가진 사람들로 묘사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늘 그들의 외모, 몸짓, 노동에 매혹되어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석양 무렵의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서, 때론 활활 타오르는 정오의 황금빛 대지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모습을 쉬지 않고 그리게 한 것이다.
우둔하고 산업지상주의에 젖은 우리의 속성이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고정관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씨 뿌리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섬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태양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그의 집착을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둥그런 태양, 그가 쉴새없이 반복해서 편집광적으로 그려낸 화려한 해바라기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오리에의 호평을 읽고 소감을 테오에게 적었다.

네가 보내준 오리에가 쓴 평론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 작품이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글을 통해 앞으로 내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평론은 정정해야 할 결함을 아주 잘 지적했다.
그래서 필자가 나뿐 아니라 모든 인상파 화가들이 올바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썼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공동의 이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토록 불완전한 내 작품 여기저기에서도 장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격려하는 말이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기회가 되면 사의를 꼭 ㅍㅅ허고 싶구나.
하지만 그 과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내 등이 넓지 않다는 걸 확실히 밝혀두어야겠다.
그가 내 그림을 중심으로 썼으므로 감언이설을 듣는 것 같더구나.
(1890년 2월 2일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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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팝아트


팝아트는 미국에서 성행했지만, 이 미술운동이 먼저 발발한 것은 영국에서였다.
1952년 말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에서 젊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 평론가들이 만나 인디펜던트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에는 건축가 레너 배넘,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 예술가 리처드 해밀턴,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윌리엄 턴불 등이 있었다.
이 그룹은 대중문화와 반미학적이라고 생각되는 근래의 예술행위들에 공통된 관심을 보였다.
이중 몇몇 예술가들이 대중문화를 찬양하는 작품을 제작한 것이 팝아트의 시작이었다.
팝Pop이란 용어는 이런 대중문화와 이미지를 지칭하기 위해 앨러웨이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용어는 후에 이런 관심에서 발전된 새로운 형태의 구성미술에 적용되었다.

1956년 런던의 화이트 채플에서 열린 전시회 ‘이것이 내일이다’는 이 운동이 선택하게 될 노선을 예시했으며, 관람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전시회 기획을 전시회 기획에 참여한 리처드 해밀턴(1922~)은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두드러지게 하는가?>라는 제목의 흥미 있는 작품을 출품했다.
영국 팝아트의 대표적인 이 작품에서 해밀턴은 현대인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내부를 소개하면서 오만한 여인의 누드와 활력을 과시하는 남자의 누드를 함께 보여주었고,
아파트에 널려 있는 근래의 대량생산품인 TV, 축음기, 만화 포스터, 포드사 로고, 전기청소기 광고문, 햄 통조림 등으로 현대인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나타냈다.

해밀턴은 왕립아카데미에 입학했다가 학교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1946년에 퇴학당했고,
1948~51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2~53년 센트럴 미술공예학교에서 가르쳤고,
1953~56년 뉴캐슬어폰타인에 있는 더럼 대학의 킹스 칼리지에서 가르쳤다.
해밀턴은 영국에서 팝아트와 네오-리얼리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몽타주 작품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들은 광고 및 현대생활에서 포착한 장면들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대문명과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경향을 비판적으로 들춰내어 간파할 수 있도록 치밀하면서도 신중하게 짜여졌다.

영국 팝아트의 주요 예술가들은 매우 개성적인 태도와 양식을 추구했지만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달랐다.
초기 팝아트 예술가들은 미국 대중문화의 통속적인 이미지들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번영과 기술적 진보에 대한 낭만적이고 향수 어린 찬미의 상징이었다.
이 새로운 미술이 추구한 것은 전통 미술과 기존의 미술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른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사이의 장벽을 허물려는 욕구의 분출이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저급문화의 이미지가 지닌 평범함과 진부함을 무시하거나 공인된 미적 기준에 따라 쓰레기로 취급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기존 미술에 대한 거부는 할리우드 영화, 공상과학소설, 연재만화, 영국의 반항적인 청소년 문화 등으로 대변되는 청년 세대의 반항과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 팝아트의 중요한 화가이면서 영국 미술의 신동으로 불리는 데이브드 호크니(1937~)는 1961년에 <환상주의 스타일로 그린 차 그림>은 그가 팝아트와 연계되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시대에 뒤진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회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제인 인간의 모습을 주로 그리면서 장 뒤비페로부터 영향을 받아 거칠고 초보적인 회화방법을 구사했다.
호크니는 사람을 힘 있게 그리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방법에 매료되기도 했다.
<3월 24일 이른 시간에 춘 차차차>에는 베이컨의 영향이 나타났고 동시에 추상도 보이는데 추상에서는 잭슨 폴록과 입체주의의 영향이었다.
그는 정보의 손실을 줄이고 명료하고 단순한 해석을 위해 동의어 반복을 도입했고, 현실과 환영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1961년 뉴욕을 방문한 호크니는 자유로운 미국 사회로부터 자극을 받아 머리카락을 하얗게 표백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호가스의 <레이크의 진전>의 현대판 그림을 연속해서 그렸는데 미국에 체류할 때의 경험이 나타났다.
1962년 <첫 결혼>을 그린 후 말했다.

“나는 모호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을 삽입시켰다.
두 사람은 하얀 모래와 야자수가 있는 섬의 사막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난 배경을 일부러 흐리게 했다.
두 사람이 신랑 신부처럼 보였으므로 제목을 <첫 결혼>이라고 했다.”

1963년 말 호크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로스앤젤레스의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훌륭한 팝아트 작품을 낳았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는 동안 수영장에 매료되어 그림에 수영장이 등장했으며 사람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호크니는 빠른 속도로 성공해 1966년에는 유럽에서 다섯 번 이상 개인전을 열었다.
1966년 500파운드에 팔린 회화작품이 1974년 소더비 경매에서는 25,000파운드에 팔렸다.
1973년 ICA 화랑에서 열린 ‘4인의 젊은 예술가전’에 대해 <더 타임스> 지의 평론가는 적었다.

“호크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것과 캐리커처를 결합하는 등 매력적이며 독창적인 상상력을 지닌 몽상가이다.
그는 외부세계보다는 내부세계를 반영하며,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기법으로 비딱한 시를 보여준다.
그러나 호크니의 행보는 외줄 타기만큼이나 위태롭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허세와 변덕이 양극단에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타고난 소묘가인 호크니는 매우 다채로운 양식을 구사했다.
구상적인 표현에 언어적인 암시와 기하적인 패턴을 결합하기도 하고 종종 유행을 작품의 주제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회화에 환영적인 실재감을 표현하기를 의도적으로 피했으며, 추상표현주의의 심오함과는 대조적으로 회화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를 반복적으로 결합하면서까지 최대한 쉽게 이해되도록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팝아트 외에 초현실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은 평면적이며 인위적으로 정지한 상태여서 거의 동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티스의 밝은색과 피카소의 입체주의 회화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회화방법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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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라우센버그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되는


라우센버그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되는 물질들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낯익은 물질들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것은 팝아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술가들의 제스처를 비인간적이라 보았고 예술 감각과 일상적인 실제 환경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일찌감치 팝아트의 우수함을 보여주었다.

1959년 그는 좀더 진지한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플로리다 주에 있는 어느 모텔 근처 창고에 틀어박혀 신문지와 잡지를 사용하여 단테의 지옥(Inferno)을 제작했다.
당시 단테의 모습은 잡지의 골프 클럽 광고에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는 존스와 연락을 끊고 6개월 동안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작품제작에 전념했다.
쓰레기를 주로 사용하면서 거기에 미학적 내용을 담아 쓰레기들이 소비사회로부터 격리당한 상징으로서 작품에서 아이러니로 나타나도록 했으며 코카콜라 병, 동물인형, 자동차 타이어를 비롯해 버려진 물질들을 닥치는 대로 재료로 사용했는데 이것들은 팝 물질들이었다.
또한 쓰레기를 조립하면서 그것이 과거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초현실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요즈음 삶의 대중적인 이미지로 부각되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조립된 쓰레기들이 환상을 연출하여 물질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콜라주 구성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시인이며 미술가인 독일사람 쿠르트 슈비터즈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작업을 한 적이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피카소가 버려진 나무 조각에 색을 칠하고 철사 줄과 깡통을 달아 〈기타〉(그림 51)라는 제목의 작품을 제작한 적이 있다.
라우센버그는 염소의 몸통에 타이어를 끼운 후 바닥에는 버려진 물질들을 콜라주하고 그 위에 추상표현주의의 빠른 붓질을 가해 〈모노그램〉(그림 31)이라는 제목을 붙여 1959년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소개하여 다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1960년대에는 실크스크린을 사용하여 만화경 같은 이미지를 창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 진보적인 방법에 속했고 그와 유사한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추구하던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라우센버그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소원대로 커다란 화실을 장만하고 과학자 빌리 클루버와 함께 〈아홉 밤 Nine Evening: Theater and Engineerings〉을 준비했다.
기술부족으로 그 작품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예술가와 과학자가 협력했다는 의의를 남겼다.
곧이어 1960년대 후반에는 과학기술을 예술에 응용하는 방법을 실험했다.
1969년 그는 나사(NASA)의 초청을 받아 케네디 스페이스 센터로 가서 아폴로 우주선이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을 태우고 달에 착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암스트롱이 달에서 골프를 치는 장면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그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감동하여 〈돌로 된 달〉이라는 제목으로 34점의 석판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 무렵 그의 화실이 화재로 전소되어 많은 드로잉과 그림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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