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재스퍼 존스의 〈국기>는
라우센버그와 한 쌍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재스퍼 존스는 라우센버그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라우센버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이미지를 주로 창조했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관람자들을 경악시켰던 존스가 미국미술에 준 영향은 라우센버그에 비해 더욱 컸다.
1997년 1월 뉴욕의 모마(MOMA)에서 개최된 존스 회고전에는 1955년부터 95년까지 40년 동안 제작된 작품들이 3층에 마련된 여러 개의 방에 가득했다.
필자는 그 방들을 둘러보면서 그의 일생을 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으며 미국미술에서 그가 라우센버그에 비해 훨씬 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5세 때 전설을 창조한 〈국기〉(1954-55)와 〈과녁판〉(그림 26)은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존스는 25세가 되던 1954년 어느 날 국기를 그리는 꿈을 꾸고 난 후 국기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기, 과녁판, 지도는 우리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존스는 그것들을 새로운 형태들로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미학을 제시했다.
그는 환상과 실제의 구분을 파괴한 후 그것들을 재정립하면서 창조 과정 자체를 설명하려고 했으며 관람자들이 그러한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세계로 유도했다.
그의 작품들은 최면술 같았고 냉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가 그린 숫자판과 색비교판의 미학 역시 과녁판이나 국기와 마찬가지로 개념이란 개별적인 사물들의 이미지에 대한 통칭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곧 나타날 개념미술의 선구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아무런 내용도 없는 국기와 과녁판에서 상징적 이미지들은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녹색 과녁판〉(그림 32)이 소개된 것은 유태인 뮤지엄에서 개최된 ‘뉴욕 스쿨 예술가 2세들’전에서였다.
그때 작품을 선정했던 사람은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였다.
샤피로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던 유능한 교수로서 1995년에 타계했는데 그의 평론은 유명했다.
1957년 라우센버그의 초대로 레오 카스텔리 부부가 존스와 라우센버그의 화실을 방문하고는 두 사람의 재능을 발견했다.
라우센버그가 카스텔리를 데리고 아래층에 있는 존스의 화실로 갔을 때 카스텔리는 “대단한 천재의 증거를 보았다”면서 “다른 어떤 것들과도 무관한 완전한 신선함이었다”고 술회했다.
카스텔리의 아내는 그날 존스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다.
존스는 “나는 사물 그 자체보다는 사물로 되는 과정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사물들은 나로 하여금 각기 다른 차원에서 작업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1958년에 〈네 얼굴이 있는 과녁판〉(그림 34)을 제작한 존스는 과녁판 위에 코와 입만 있는 가면 네 개를 병렬시켰다.
평론가 알로웨이는 존스의 가면이 좌우대칭으로 힘 있게 나타났다고 기술하면서 같은 가면을 네 개 병렬한 것은 가면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형에 대한 감각을 제거해주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1958년 1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두 사람의 개인전이 각각 열렸는데 존스의 개인전이 더 성공적이었다.
모마는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의 의견을 받아들여 존스의 그림 세 점을 구입했으며 모마의 직원들도 존스의 그림이 투자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그림을 구입했다.
팔리지 않은 그림은 오직 두 점뿐이었다.
이듬해 모마의 책임자 도로시 밀러가 모마에서 ‘16명의 미국 예술가들 Sixteen Americans’전을 개최하면서 존스의 〈국기〉, 〈과녁판〉, 〈숫자〉, 콜라주 작품 〈테니슨〉을 포함시켰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뉴욕 스쿨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며 1958년 10월에는 그의 그림 세 점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다.
같은 해 12월 카네기재단이 피츠버그에서 개최한 비엔날레에서 그는 국제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