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작품
1960년 앤디 워홀은 뉴욕화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화랑들을 자주 방문해 첩보원처럼 최근 예술가들의 동태를 살폈으며, 무엇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늘 궁리했다.
함께 화랑을 방문하곤 하던 친구 테드 캐리가 어느 날 오후 워홀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전에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 갔다가 만화 같은 작품을 보았는데 네가 요즘 그리고 있는 작품과 비슷하니 그 화랑에 가봐” 하고 일러주었다.
캐리와 함께 소호에 있는 카스텔리 화랑으로 갔더니 전시장 구석에 캐리가 말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만화를 주제로 한 작품인데 로케트에 사내가 타 있고 배경에 소녀가 있다.
그날 워홀은 화랑의 책임자 이반 캅에게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반은 워홀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날 오후 워홀의 화실을 방문하여 작품을 직접 보기로 약속했다.
집에 돌아온 워홀은 널려 있는 상업용 작품들을 치우느라 분주했는데 이반에 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상업미술가라는 사실을 알렸다가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대로 오후 늦게 이반이 워홀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는 15분 동안 워홀의 작품을 둘러보더니 “이 작품들은 퉁명스럽고 직선적이며 어떤 결론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것들은 추상표현주의 작품과 비슷하고 결론이 없는 작품들이다”라고 말하고는 웃으면서 “내가 건방지게 말하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반은 이때 워홀의 비개성적인 작품을 보고 그것이 미래의 미국회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워홀은 경쟁심이 대단했으므로 최근 예술가들의 동향에 관해 궁금한 점을 이반에게 물으면서 특히 리히텐슈타인에 관해 물었다.
그가 리히텐수타인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도 카스텔리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리히텐슈타인이 어느 날 작품을 몇 점 들고 화랑으로 왔는데 아주 부그러워했다.
난 그의 작품을 본 후 두 점을 두고 가라고 하면서 카스텔리가 오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리히텐슈타인은 현재 럿거스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둥 그에 관해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이반은 카스텔리에게 워홀에 관해 이야기했고 어느 날 카스텔리를 대동하고 워홀의 화실에 나타났다.
카스텔리는 화실 안을 죽 둘러보다가 벽에 걸려 있는 <딕 트레이시>와 <성형수술>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며,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당시 인기 있는 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유능한 형사이고 그에게는 단짝 샘 케쳄이 늘 옆에 따라다닌다.
워홀은 딕 트레이시의 턱을 90도 각도로 묘사하고 케쳄의 턱은 둥글게 했다.
만화와 달리 자신이 바라지 않는 부분은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려버렸다.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작품에는 익살이 있는 반면 워홀의 작품에는 익살이 없고 오히려 관람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궤변과도 같았다.
카스텔리는 그날 워홀의 작품 한 점을 샀다. 카스텔리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궤변을 워홀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은 뒤샹의 의도와도 같은 것으로 워홀의 작품에는 아이러니와 함께 미학적 등급에 혼란을 주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대중적 이미지와 만화에 관심이 많은 워홀은 1961년에 <슈퍼맨>을 그렸는데 원래 만화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순수회화처럼 보이도록 그림 상단에 크레용을 쓱쓱 칠하고 말풍선의 글자를 추상표현주의 방법으로 일부러 흐리게 했다.
그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약간 변형함으로써 인생과 예술의 폭을 좁히려고 했는데 이는 팝아트의 미학이기도 했다.
워홀의 술수적인 기교는 놀라웠다. 그는 비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렸으며 이런 방법은 평생 답습되었다.
모두 세 점을 그린 <전과 후>의 주제는 성형수술 광고인데, 왼편 여인은 매부리코에 못생긴 모습이고 오른편은 코를 교정하여 매력적인 코로 달라진 모습이다.
워홀은 이런 작품을 통해 뉴욕화파 예술가들의 물리적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공허하게 만들었으며 예술의 높고 낮음은 단지 예술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다.
풍자적인 요소가 배제된 그의 작품을 관람자들은 만화를 볼 때처럼 코믹하게 여기지 않고 예술품을 관람하는 듯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뉴저지 주 럿거스 주립대학 부교수직을 사직하고 뉴욕으로 와서 회화에만 전념하고 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도 워홀과 마찬가지로 비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 비개성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나는 추상표현주의 시대에 성장했다.
난 여전히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만드는 형태와 그것들의 상호작용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그림을 단순하게 그리고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회화에 관심이 생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재즈를 좋아했고 피카소의 청색-장미시대 작품을 좋아하여 그것들을 모방하곤 했다.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오하이오 주 주립대학 미술과에 진학했다.
그가 1958년에 입체주의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린 10달러짜리 지폐 그림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57년과 1960년 사이에 그린 그림들은 넓은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에 속했고 입체주의의 기하적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부터 그의 작품은 우아했지만 야단스러웠다.
평론가들은 그가 모더니즘 미학을 수용하여 몬드리안과 1930년대에 두드러졌던 조형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비록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그의 작품은 순수회화의 요소들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간지 <뉴욕 타인즈>는 한때 리히텐슈타인을 “미국에서 가장 형편없는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혹평한 적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농담과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 멘켄은 “나는 미국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대부분을 웃으면서 지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유머는 미국사람들의 인생의 요소이자 팝아트의 요소이기도 하다.
리히텐슈타인이 회화적으로 자극을 받은 것은 친구 예술가들이 아니라 집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리히텐슈타인의 아들은 미키 마우스 동화를 읽다가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아빠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수 없을 거야!”라고 했다.
아들의 말에 자극을 받은 리히텐슈타인은 곧 만화 여섯 점을 그렸는데 원래 만화의 형태와 색을 조금만 달리 한 것들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이봐 미키>는 커다란 물고기를 낚았다고 낚시줄을 끌어올리는 미키 마우스에게 도날드 덕이 자신의 옷이 낚시에 걸린 것이라고 말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이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이런 방법으로 일관되었다.
그의 유머스러운 작품에는 글자가 있고 말풍선 안에는 대화내용이 들어 있다.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이 만화작품들이 소개되자 당시 카스텔리 화랑에 소속되어 있던 라우센버그와 존스는 형편없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라우센버그는 곧 그의 작품을 이해하게 되었고 존스가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다.
1962년 2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전시회가 다시 열렸을 때는 평론가들의 호평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이었다.
평론가 존 코플런스는 그가 “본래의 형태와 색을 조금만 변경시켰다”고 적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보는 많은 장면들 가운데 단지 한 장면뿐임을 강조했다.
리히텐슈타인의 비속하고 괴짜스러운 작품에서 존스의 아이러니컬한 초연함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요소는 워홀의 작품에도 나타났다.
워홀은 이런 점을 예술가 자신이나 이미지에 귀결시키는 위험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그 때문에 워홀의 작품은 주제가 늘 개인적이고 모호했는데 그는 1968년에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네가 만일 앤디 워홀에 관해 자세히 알기를 바란다면 내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겉모습을 보면 된다.
그것들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는 겉보기와 달리 궤변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