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니멀리즘을 연 프랭크 스텔라


1960년대 후반 최소한의 조형 수단을 써서 제작한 그림이나 조각을 가리켜 미니멀 아트(Minimal Art)라고 한다.
이 말은 영국의 평론가 리처드 볼하임이 1965년 《아트 매거진》에 발표한 글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미국에서는 프랭크 스텔라의 아내이자 평론가 바바라 로즈가 ABC 아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간결하고 엄밀한 구성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그림에서 이미 나타났다.
스텔라의 선물 포장지 같은 그림은 미니멀 아트의 선구적인 그림으로 인정받았다.
엘스워스 켈리, 도널드 저드, 케네스 놀런드, 모리스 루이스 등을 미니멀 아트 예술가로 분류하는데 놀런드와 루이스는 하드 에지(Hard Edge)에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텔라도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추상표현주의에 심취했으며 대학을 졸업하기 얼마 전까지 그린 그림들에는 드 쿠닝, 헬렌 프랑켄탈러, 프란츠 클라인의 영향이 나타났고 더러 가트립과 마더웰의 영향도 엿보였다.
그러나 그가 몬드리안의 조형주의를 이해한 후부터는 그림에 사각모양과 줄무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졸업할 무렵에는 줄무늬 그림에만 전념했다.

스텔라가 존스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1958년 존스의 개인전에서였는데 스텔라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그린 그림들은 존스의 〈국기〉, 〈과녁판〉(그림 26), 〈숫자〉와 비교할 만했다.
스텔라는 “주제를 다루는 존스의 솜씨에 놀랐으며…… 줄무늬의 리듬과 음정 그리고 반복되는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난 반복에 대해 한동안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스텔라가 화실을 비운 사이 그곳을 방문한 스테펀 그린은 그가 줄무늬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스텔라는 존스의 1950년대 그림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단색을 사용해 반복의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진전시켰다.
그가 존스로부터 받은 영향은 주제와 구성들 사이의 독특한 상관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스텔라의 첫 알루미늄 시리즈는 이러한 구성의 그림들이었으며 그가 막 대학을 졸업할 때 그린 그림들은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온 스텔라는 사각과 줄무늬를 더욱 커다란 크기로 그리기 시작했다.
1958년에는 좀 더 단순한 디자인으로 색들을 제한했으며 검정색을 연한 색과 혼용하여 사용했다.
색에 문제가 생기면 그 위에 검정색을 덮었는데 이렇게 해서 그의 첫 검정 단색그림이 창조되었다(그림 50).
이것은 그가 이듬해에 그릴 〈터키 사람들의 맘보〉(1959)를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그해 말부터 검정색을 사용하여 단색그림들을 잇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줄무늬는 안에서 밖으로 향해 나아가는 대각선 다이아몬드 주제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평행 주제로 나눌 수 있다.
모마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는 1959년에 스텔라의 그림을 보고 “확고함이 대단히 인상적이며 신비함이 있다”면서 그림들이 “고집스러우며 인내가 있고 제대로 제어되어 있다”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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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다.
오른의 탱세브레 태생의 브르통은 정신 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상상력과 감정적인 힘은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 왔다고 믿었으므로 그느 제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과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비평지 <문학>의 편집인이 되었다.
당시 브르통은 마르셀 뒤샹을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1924년 친구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선언문은 주로 초현실주의 문학과 관련 있었지만,
회화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5년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회 ‘초현실주의 회화전’의 기획을 도왔다.


‘초현실적 surrealiste’이라는 용어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1917년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백과서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왔던 연상 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실재를 믿으며, 꿈의 편재성과 무관심한 사고 작용을 믿는다.
이는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 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미술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며 철학적 견해의 표현으로 진전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시스템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동주의는 브르통에 의해서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1920년 친구 필립 수포와 함께 자유 연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창작한 글을 실은 <자장 Les Champs magnetiques>을 출간했으며, 이것은 자동주의 방법의 첫 예가 되었다.
회화가 초현실주의에서 타당한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자 브르통은 말했다.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므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하는 능력은 초현실주의가 회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총체적으로 초현실주의 회화 또한 다른 초현실주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의식 속에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회화를 혁명을 수행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목적보다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들의 첫 전시회가 1925년 피에르 화랑에서 열렸는데,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아르프, 데 키리코, 에른스트, 클레, 만 레이, 마송, 미로, 피카소, 그리고 피에르 로이였다.
이브 탕기가 이들 그룹에 가세한 것은 전시회가 끝난 후였으며,
르네 마그리트가 그해 늦게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했고,
24살의 달 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위한 첫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작성했는데,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통탄할 만한 임기응변”이라면서 초현실주의의 목적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막스 에른스트의 <오이디푸스 왕>은 프로이트가 쓴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정신분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하면서 1929년에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장담했다.
이쯤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그들은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마그리트, 미로, 그리고 달리였다.
특히 달리의 활약이 현저하게 눈에 띄였다.
달리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기괴한 행위, 옷차림, 코믹한 콧수염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파리에서 탄생한 초현실주의는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38년 파리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된 국제전들은 초현실주의의 국제적인 확장을 말해준다.
미국의 초현실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발생했다.
그들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화랑과 줄리언 레비 화랑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그들 가운데는 탕기, 에른스트, 마타, 샤갈, 브르통, 마송, 첼리체프, 쿠르트 젤리히만 등이 있었다.
그들이 접촉한 미국 예술가들 대부분은 이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얼마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때때로 중앙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의 미국 인디언 미술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런 화가들 중에 아슐리 고르키, 한스 호프만, 애돌프 고틀리브, 윌리엄 배지오티스 등이 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변형한 것은 자동주의의 원리, 즉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계획되지 않고 즉흥적인 구성이었다.
로버트 머더웰은 추상표현주의 흐름 가운데 서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즉흥적인 구성의 원리를 가장 완전하게 확대시킨 작품에 ‘추상적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을 붙였다.


영국에서는 1936년 런던에서 ‘국제 초현실주의전’이 개최되어 1930년대의 정체기에 충격적인 돌팔구를 제공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독일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시각예술 모두에서 중요한 운동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조직된 운동이 해체되고,
그 추진력이 고갈되었을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방법은 계속 발전하여 많은 나라들의 개개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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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솔로몬이 말한 도전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에서


재스퍼 존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보는 것이 서로 대조되도록 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예술가 르네 마그리트가 담배 파이프를 그리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듯이 그러한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그리트는 “사물은 사물이 가진 이름이나 이미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그림에서 글자는 이미지와 같은 물질이다”라고 말했는데, 존스가 그림에 사용한 글자는 마그리트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1964년에 제작한 〈뭔가에 의해〉(그림 48)에는 의자에 앉은 반쪽 하반신 모양의 물질이 캔버스에 거꾸로 부착되었다.
1959년 모마에서 개최된 ‘16명의 미국사람들 Sixteen Americans’전의 카달로그에서 존스는 “자연의 어떤 관점에서도 볼 것은 있다. 내 작품은 시선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적었다.
이러한 견해는 그가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뒤샹을 상기하게 했다.
또한 “나는 단순한 개념들에 관한 그림에 반대한다. 내게는 볼 것들이 너무 많다”고 적었는데,
그는 우리가 늘 세상의 부분만 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물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는 점을 알리려고 했다.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보지만 그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이래서 사물은 이해하기 어렵고 아주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1964년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전람회가 런던의 화이트 채플 화랑에서 각각 열렸을 때 평론가 앨런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다다에 의해 제기된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의 신세대 예술가들은 그러한 감각을 환기시키면서 객관적 실제의 의미를 재실험하고 우리들의 기본적인 미학적 경험에 도전하려고 한다.


솔로몬이 말한 도전은 라우센버그의 작품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알로웨이는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무대 배경과도 같았다”고 표현했다.
케이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라우센버그는 케이지의 말대로 “예술과 인생 사이에서” 행위하면서 캔버스에 물질을 부착하여 인생과 예술이 하나가 되도록 화해시켰다.
이 전시는 라우센버그의 이름을 유럽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화이테트는 1964년에 발표한 《스튜디오 인터내셔널》에서 “라우센버그는 산뜻하고 적절한 인생을 보여주었으며 우리 자신을 위해 인생에서 예술을 발견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라우센버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자신과 도시 그리고 문명사회와의 관계를 나타냈는데 이러한 점은 유럽 예술가들과 미국 예술가들의 차이점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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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구를 고안하다
 

 

 

레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오나르도는 1496년 1월 2일 ꡒ내일 아침 나는 쇠로 띠를 만들겠다ꡓ고 적었는데, 나르는 기구를 처음 고안하려고 했다.
그가 나르는 기구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건 피렌체에서부터였으며 아마 사춘기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피치에 소장되어 있는 드로잉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그릴 시기에 그가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82년 롬바르디에서 그는 사람이 새처럼 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노트북에 적었다.
그는 1490년대에 새를 관찰했으며 일종의 비행원리를 정립하면서 몇 가지 나르는 기구를 스케치북에 디자인했다.
그는 적었다.

“새는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며 인간에게는 이와 같은 모든 운동을 하는 기구를 재생할 능력이 있다."

1495년 혹은 이듬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물리적으로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새와 같은 날개를 달고 싶어 한 건 고대로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는 일찍이 선각자들이 불투명하게나마 생각한 나르는 운동에 대한 자료를 두루 살펴보았다.
중세에 빌라드 데 오네쿠르트가 새가 나르듯 인간이 부착할 수 있는 날개를 고안했는데,
낙하산처럼 생긴 것으로 레오나르도의 고안과 유사하며 레오나르도가 그의 드로잉을 알고 있었을 듯하다.
레오나르도는 헬리콥터처럼 프로펠라를 빠르게 회전하여 상승하며 날개의 원리로 비상하고 낙하산의 원리로 땅에 무사히 내리는 것에 관해 연구했다.
그가 생각한 프로펠라의 지름은 10미터였으며 날개의 길이는 12미터였다.

문제는 프로펠라를 돌릴 수 있는 장치였다.
그는 새에 있어 날개의 무게와 면적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한 후 절대적인 원리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사다새pelican 같은 일부 커다란 새의 경우 날개가 아주 짧은 데 반해 박쥐의 경우 몸체에 비해 아주 커다란 날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보면 그는 실재 사이즈로 고안하면서 지레를 이용해 박쥐와 같은 커다란 날개를 사용했는데, 나무로 된 날개의 무게가 200 파운드나 되었다.
당시 1파운드는 450 그램이 아니라 380 그램이었으므로 76kg에 해당한다.
그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또 다른 재료와 더불어 다른 형태의 날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볍고 가장 강한 재료로 날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기구에 관해 연구했다.
그는 석회를 바른 강질의 소나무, 반수를 먹인 실크, 털을 덮은 캔버스, 기름이나 명반을 바른 가죽, 밑판에 갈대나 욋가지를 엮은 어린 소나무를 생각했고 탄력을 위한 스틸과 각질을 생각했다.

이 기구를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앉아서 할 것인지, 누워서 할 것인지, 아니면 서서 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그는 여러 형태의 기구를 그렸는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카누와 같이 생긴 것으로 노를 젓듯이 운전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나비 모양으로 페달, 키rudder, 등삭stirrup, 돛, 핸들, 멜빵, 조선gondola, 플랫트폼, 조종 케이블, 완충물과 발판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착륙장치 등을 갖추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발명에 신념을 갖고 임하면서 아주 많은 시간을 연구에 정진했다.
그는 높은 데서 이 비행물체를 실험했다.
그는 자신 있게 노트북에 적었다.

"기다란 포도주용 (구명대의 역할을 하는) 가죽부대를 허리띠에 부착하고 이 기구를 탄 채 호수 위를 나를 경우 호수에 빠지더라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비행실험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기구에는 날개를 움직이는 엔진이 부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의 친구 파지오 카르다노Fazio Cardano의 아들 지롤라모 카르다노Girolamo Cardano의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몇 차례 실험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는 비행물체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못해 나르는 데 실패했고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명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년 후 그는 피렌체에서 다시금 연구에 착수했다.

1496년 매우 중요한 인물이 밀라노로 왔는데,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승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로서 토스카니의 보르고 상 세폴크로Borgo San Sepolcro에서 태어난 그는 한때 알베르티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수학했다.
레오나르도보다 서너 살 많은 그는 수학을 가르치는 일로 생활했다.
그가 밀라노에 온 것은 통치자 루도비코의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바사리에 의하면 파치올리는 고전에 능통했으며 유클리드로부터 레지몬타누스Regimontanus에 이르기까지 수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겸비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논문을 연구했다.
그의 논문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적으면서 그를 "마스터 루카"라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갖가지 수학적 부호를 적으면서 "수학자가 아니면 나의 기록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당시 화가, 건축가, 공학가가 아는 정도의 실질적 기하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수학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결여하고 있었다.
그는 대수학algebra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파치올리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
그의 노트북에는 제곱근square root, 곱하기, 나누기, 복잡한 공식, 공준postulate, 등식, 기하적 형상들인 정삼각형, 정사각형, 육각형, 동그라미, 자른 구면 등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파치올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매료되었다.
파치올리는 그에게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설명했고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발명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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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가 타계하다
 

  미켈란젤로가 <계단의 마돈나>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제작하면서 조각가로서의 길을 한 발 내디딜 때 피렌체의 통치자이며 은행가, 거상 로렌초가 타계했다.
로렌초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았는데 특별히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격려했으며 일찍이 로렌초의 보호 아래 들어온 미켈란젤로는 정신적으로 그를 의지했다.
로렌초는 늙어가면서 관절염과 팔 다리에 염증으로 인한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열서너 차례에 걸쳐 다양한 치료를 받았지만 고통을 더는 데 따뜻한 광천수에 목욕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아내는 1488년에 세상을 떠났고 평소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한 그는 아내가 타계하자 몹시 슬퍼해 했다.
그녀는 로렌초의 자식을 많아 낳았고 7명이 생존했다.
로렌초는 정성을 다해 자녀들을 교육시켰으며 결혼을 통해 피렌체의 번영을 초래했다.
큰아들 피에로를 오르시니 여자와 결혼시켜 로마에 친구들을 만들어두었고, 막내아들 줄리아노를 사보이 공작 딸과 결혼시켜 프랑수아 1세로부터 네무르의 공작 칭호를 받게 했으며 프랑스와 피렌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이루어지게 했다.
둘째 아들 조반니는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성격이 좋았고 몸가짐에 있어 예를 갖추었으며 라틴어에 능통했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로렌초는 이노켄티우스 8세로 하여금 조반니가 14살 때 추기경이 되도록 했으며 이는 교황으로서는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

로렌초는 피렌체를 통치하는 일에서 점차 손을 떼고 공적인 일과 사업을 큰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평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잠시였고 그가 1492년 3월 21일 카레지에 있는 별장에 당도했을 때 복부의 통증이 매우 심해졌다.
전문의들이 달려갔으며 의사가 그에게 보석을 갈아 마시게 했다.
그러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로렌초는 피코와 폴리지아노에게 자신이 더이상 고대 사본을 수집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사제를 오게 해서 무릎을 꿇고 성사고백을 했다.
로렌초가 자유를 파괴하고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만들었으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사제가 완강한 태도를 취하자 로렌초는 서둘러 친구를 사보나롤라에게 보내 자신의 임종에 오도록 청했다.
사보나롤라는 와서 로렌초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진심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구할 것, 만약 더 살게 되면 생활태도를 바꾸겠다고 약속할 것,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 등이었다.
사보나롤라는 나중에 따로 언급하겠지만 교황에 의해 이단자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지만 개신교 입장에서는 종교개혁가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당시의 부패를 힐난했고 금욕주의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 것을 피렌체인에게 촉구했다.
로렌초는 1492년 4월 9일 4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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