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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계단의 마돈나>와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제작하면서 조각가로서의 길을 한 발 내디딜 때 피렌체의 통치자이며 은행가, 거상 로렌초가 타계했다.
로렌초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았는데 특별히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격려했으며 일찍이 로렌초의 보호 아래 들어온 미켈란젤로는 정신적으로 그를 의지했다.
로렌초는 늙어가면서 관절염과 팔 다리에 염증으로 인한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열서너 차례에 걸쳐 다양한 치료를 받았지만 고통을 더는 데 따뜻한 광천수에 목욕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아내는 1488년에 세상을 떠났고 평소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한 그는 아내가 타계하자 몹시 슬퍼해 했다.
그녀는 로렌초의 자식을 많아 낳았고 7명이 생존했다.
로렌초는 정성을 다해 자녀들을 교육시켰으며 결혼을 통해 피렌체의 번영을 초래했다.
큰아들 피에로를 오르시니 여자와 결혼시켜 로마에 친구들을 만들어두었고, 막내아들 줄리아노를 사보이 공작 딸과 결혼시켜 프랑수아 1세로부터 네무르의 공작 칭호를 받게 했으며 프랑스와 피렌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이루어지게 했다.
둘째 아들 조반니는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성격이 좋았고 몸가짐에 있어 예를 갖추었으며 라틴어에 능통했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로렌초는 이노켄티우스 8세로 하여금 조반니가 14살 때 추기경이 되도록 했으며 이는 교황으로서는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
로렌초는 피렌체를 통치하는 일에서 점차 손을 떼고 공적인 일과 사업을 큰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평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잠시였고 그가 1492년 3월 21일 카레지에 있는 별장에 당도했을 때 복부의 통증이 매우 심해졌다.
전문의들이 달려갔으며 의사가 그에게 보석을 갈아 마시게 했다.
그러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로렌초는 피코와 폴리지아노에게 자신이 더이상 고대 사본을 수집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사제를 오게 해서 무릎을 꿇고 성사고백을 했다.
로렌초가 자유를 파괴하고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만들었으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사제가 완강한 태도를 취하자 로렌초는 서둘러 친구를 사보나롤라에게 보내 자신의 임종에 오도록 청했다.
사보나롤라는 와서 로렌초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진심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구할 것, 만약 더 살게 되면 생활태도를 바꾸겠다고 약속할 것,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 등이었다.
사보나롤라는 나중에 따로 언급하겠지만 교황에 의해 이단자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지만 개신교 입장에서는 종교개혁가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당시의 부패를 힐난했고 금욕주의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 것을 피렌체인에게 촉구했다.
로렌초는 1492년 4월 9일 4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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