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존 챔벌레인과 마크 디 수베로

1960년대에 활약한 존 챔벌레인과 마크 디 수베로도 주요한 쓰레기 예술가이다.
두 사람 모두 산업용 재료를 사용했던 입체주의 조각가 앤소니 카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존 챔벌레인은 원색 에나멜을 칠한 자동차의 몸체를 일그러뜨려서 추상 조립조각을 제작했다(그림 55).
일그러진 자동차 몸체는 얼어붙은 동력주의를 보여주었는데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네오다다 미학과 다르지 않았다.
챔벌레인의 조각은 마치 회화에서 드 쿠닝의 충돌하는 붓질 같았고 불안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정연함을 통해 에너지가 분출하도록 했다.
쓰레기 예술에 있어 도시와 관련된 주제는 드 쿠닝의 대중적인 이미지와 현대사회의 대량생산품에 대한 관심에서 그 가능성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마크 디 수베로는 쇠막대기, 자동차 타이어, 쇠끈, 의자, 그리고 건축재료 등과 쓰레기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질들을 혼용하여 커다란 규모로 환경 조립조각을 제작했다.
디 수베로는 추상표현주의의 웅대한 에너지와 조형주의의 공학적인 원리를 반기하학적 균형으로 나타냈다(그림 56).
1997년 3월 26일부터 7월 6일까지 퀸즈 뮤지엄은 개관 25주년 기념전을 성대하게 개최하면서 디 수베로의 작품을 포함시켰으며 쓰레기 조립에서 그의 위치는 늘 당당했다.

한편 쓰레기 예술가라고 할 수 없는 다른 예술가들도 이 시기에 쓰레기 조각품을 선보였다.
해프닝에 관심이 많은 짐 다인도 목수들이 사용하는 연장들을 캔버스에 매달았는데(그림 57) 그에게 연장은 ‘우리의 손’과 같았다.
일반적인 물질들을 주제로 사용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물질들을 사용할 때 나는 그것들을 느낌의 단어들처럼 여긴다 … 나의 작품은 자서전적이다.”
그에게 연장이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이유는 할아버지가 목수였기 때문에 어릴 때 할아버지의 연장들을 가지고 놀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며, 연장이 자서전적인 의미를 갖는 것 역시 그의 아버지가 고향 신시내티에서 철물점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리스계 미국사람 루카스 사마라스도 평범하지 않은 어지러운 쓰레기들을 나무상자 안에 조립하여 고전주의 감각에 일치하는 형태들로 제작했다(그림 58).
사마라스는 상자 안에 물질을 채워 넣기를 즐겨했다.
어려서부터 금지된 물질과 에로틱한 물질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상자들은 변태성욕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예술이란 고요한 느낌을 깨뜨리는 것이며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작품에는 다다이즘의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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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는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장-폴 마라Jean-Paul Marat(1743~93)는 스위스 태생의 외과의사, 언론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가장 과격하고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는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소크라테스에 비유할 정도였습니다.
즉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에 비할 수 있을 겁니다.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총에 유명을 달리하신 것처럼 마라는 그를 반대하는 반혁명 지지자 처녀에 의해 칼로 살해당했습니다.
우리나라 화가가 김구 선생님의 돌아가신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면 <김구의 죽음 Kin Gu Breathing His Last>이란 제목을 붙이고 두고두고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남았을 겁니다.

마라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1770년대에 런던에서 의사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과학과 철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는데, <예속의 연속 The Chains of Slavery>(1774)도 그중 한 권입니다.

마라는 1777년 프랑스로 돌아왔고, 루이 16세의 동생(훗날 샤를 10세) 다르투아 백작의 경호원들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과학자로 성공하기를 바라며 불, 전기, 빛에 관한 실험의 결과를 논문으로 썼습니다.
전기에 관해 쓴 논문은 1783년 루앙의 로열아카데미에 받아들여졌으며 의사로서도 성공하여 환자들 대부분이 중산층과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는 1783년 의사직을 그만두고 과학적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780년에 <범죄 입법을 위한 계획 Plan for Criminal Legislation>을 출간했는데, 정부가 발매를 금지했고 그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이때부터 마라는 현존하는 정치체제에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으며 몽테스키와 장-자크 루소의 앙시앙 레짐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동화되었습니다.
게다가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정치체제에 더욱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1789년 9월 마라는 신문 <시민의 친구 The Friend of the People>의 편집자였고 과격한 혁명분자들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는 왕실의 적자를 세금으로 충당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1790년 초 왕의 재무장관 자크 넥커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글을 쓴 후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석 달 만에 돌아왔는데, 혁명세력이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마라는 1792년 9월 공화정이 확립되자 1790년부터 생각해왔던 군주제 폐지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는 1792년 9월부터 국민공회의 의원이 되었습니다.
마라는 반혁명분자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반혁명적인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침공의 위험에 처하게 되자 긴급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독재정치를 펴는 것에 대해 찬성했습니다.
마라는 국민공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793년 4월 지롱드당은 그를 혁명재판에 세워 죄를 묻기로 했지만 지롱드당은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7월 13일 지롱드당을 지지하는 샤로트 코르데이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샤로트 코르데이는 24살난 처녀로 드라마 작가 피에르 코르네유의 후손이며 보수적 왕당파 집안 출신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유딧Judith(아시리아 장군 홀로 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에 비견해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수녀단에서 교육을 받고 2년 동안 수녀로 헌신한 적도 있는 그녀는 플루타르크, 루소, 볼테르의 저서를 읽었고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민주혁명 세력과 왕당파 간의 불화는 매우 심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사실 폭군도 아니었고 매우 유약한 사람이었으며 나름대로 과거 군주가 하지 못한 개혁을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왕은 하늘이 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왕을 시민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으니 왕정을 지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했겠습니까?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유럽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으며 결국 유럽을 제패하려는 야심으로 나타났고,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평민으로 나폴레옹이 황제에까지 오르고 귀족 작위를 평민도 국가에 공을 세우면 부여하는 등 민주정체를 확립한 건 프랑스 혁명의 결실입니다.
아무튼 당시만 해도 왕당파의 반발이 심했으며 마라는 이런 역사의 전환기에서 타살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가 쓴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에 의해 궁정 최고 화가였으며 그의 별명은 '화단의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운명이 나폴레옹과 함께 하는 걸 의미했고,
나폴레옹이 실각하여 귀양을 가 섬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 했듯이 다비드로 이웃나라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민필름이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적었는데,
그렇습니다.
다비드가 노린 것이 바로 그런 점이었습니다.
다비드는 아직 몸에 온기가 남아 있는 마라의 시신을 스케치하여 작업실에서 이렇게 완성했는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렇게 그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고한 마라의 죽음을 보고 연민을 느끼게 만듬으로써 혁명을 지지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요즘 시세말로 마라는 두 번 죽은 것입니다.
다비드가 한 번 더 죽인 것이지요.

왜 목욕통에서 죽었느냐구요?
목욕할 때 24살난 처녀가 서시미를 뜨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파리로 와서 생선을 다루는 예리한 칼을 사서 그것으로 죽였습니다.
물론 그녀는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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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뢰겔의 보스풍 판화
 

  브뢰겔이 1556년에 드로잉한 것을 코크가 이듬해 발간한 판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다 Big Fish Eat Little Fish>를 보면
코크가 브뢰겔에게 보스풍의 판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드로잉 오른편 손가락으로 큰 물고기를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과 상단 왼편의 바위 위의 구조물은 보스의 요소임을 이내 알 수 있다.
현존하지 않지만 보스의 작품을 보고 모사한 것이 분명해보이는데,
피테르 반 데르 헤이덴Pieter van der Heyden이 엔그레이빙으로 제작한 판화 하단 왼편에 보스가 디자인한 것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에는 브뢰겔의 서명이 있지만 판화에서는 브뢰겔의 서명 대신 보스가 디자인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코크의 의도로 보인다.
브뢰겔의 이름이 판화에서 의도적으로 빠진 예는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Temptation of Saint Anthony>에서도 발견된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다> 하단 오른편에 코크가 1557년에 발간했다고 적혀 있다.
아래에 대문자로 GRANDIBVS EXIGVI SVNT PISCES PISCIBVS ESCA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 필기체로 Siet sone dit hebbe ick zeer langhe gheweten/ dat die groote vissen de cleyne eten이라고 적혀 있는데,
대문자는 ‘작은 물고기는 큰 물고기의 밥이다’라는 뜻이고,
필기체는 ‘자 아들아,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는 바는 큰 물고기가 작은 것을 먹는다는 것이란다’라는 뜻이다.

뭍으로 끌어올려진 큰 물고기 입 밖으로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작은 사람이 대단히 큰 칼로 물고기의 배를 가르니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뱃속에서 또한 쏟아져 나온다.
뒤로 두 다리가 달린 물고기가 입에 작은 물고기를 물고 걸어간다.
화면 앞 보트에는 아버지가 이 장면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들더러 보라고 말한다.
하단에 필기체로 ‘자 아들아, 내가 오랫동안 아는 바는 큰 물고기가 작은 것을 먹는다는 것이란다’라고 적혀 있어 두 사람이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물고기의 등을 보면 브뢰겔이 다양한 펜놀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브뢰겔의 현존하는 드로잉은 모두 61점에 불과하고 6점은 원작은 사라진 채 모사품으로만 전해온다.
그가 몇 점을 드로잉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드로잉은 16세기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 화가들에게 기본적인 행위였다.
화가로서 훈련을 받을 때 그리고 화가로 활동할 때도 드로잉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였다.
브뢰겔은 초크를 사용한 적이 없지만
화가들은 주로 펜, 초크, 수채, 색종이를 사용했으며 다른 화가들의 판화, 드로잉, 그림을 모사하는 건 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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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바넷 뉴먼과 숭고


바넷 뉴먼의 부모는 미국으로 이민온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1905년 맨해튼에서 태어나 1922~26년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수학했고, 1927년 뉴욕 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2년 동안 자신과 함께 의류사업에 종사한다면 동업자로 대우해주며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뉴욕에 와 의류공장을 경영하는 성공한 인물이었다.
뉴먼은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했는데 불행하게도 1929년 10월 말에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제공황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의 사업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뉴먼은 1937년까지 어렵게 경영을 계속했다.
1930년대에는 임시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대화하기를 즐겼고 정치학, 조류학, 지질학, 어학 등에 많은 지식이 있었다.

뉴먼은 1933년에 탁월한 행정가 라 구아르디아에 대적하여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
뉴먼이 선거유세에서 언급한 공약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했는데, 그의 네 가지 공약은 대중을 위한 화랑과 카페를 늘이는 것, 뉴욕 시를 위한 오페라단을 구성하는 것, 어른을 위한 놀이터를 만드는 것, 대기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부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뉴먼은 낙선했고 라 구아르디아는 능력 있는 3선 시장으로 오늘날까지 뉴욕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신념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새롭게 출발한 뉴먼은 1940년대 후반 점차 신비적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찾아갔는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붉은색 화면에 밝은 오렌지색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합일>을 제작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했다.
그가 화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합일>을 발표하고부터였다.
사람들은 웃기는 그림이라고 했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그의 작품을 ‘낭만적 고상함’이라고 했으며, 붉은색은 ‘바다’로서 우리를 이기심의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오게 만든다고 기술했다.로젠브럼이 설명한 작품이 관람자에게 제공하는 미학적 경험은 동시에 지성적으로 도전하게 했는데, 예를 들면 그의 커다랗고 평편한 붉은색은 조절하는 힘이 없이 치솟는데 집zip이 그것을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수직선들은 기하학적 조직으로서 관람자에게 심리적으로 작용하여 화면 전체에 안정감을 주었다.

뉴먼이 붙인 제목은 독특했는데 1950~51년에 그린 그림을 <숭고한 영웅>이라고 했고, 1960년대 초 처음 조각품을 세 점 제작한 후 제목을 <여기 I>, <여기 II>, <여기 III>이라고 했다.
이 조각은 가늘고 수직으로 긴 집zip이었다.
그가 그림에 붙인 제목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 <지금>, <존재> 등이었다.
뉴먼은 화가라기보다는 이론가였는데 1948년 12월에 에세이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를 발표했고, 이듬해 말에는 <새로운 미학을 위한 서설>이라는 미완성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자신은 그림을 그릴 때 “공간의 조작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감각”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다.
이때 그는 향수의 감정, 각본, 연상, 역사에 의해 부담을 느끼는 시간 그리고 통상적인 회화의 주제가 된 그런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뉴먼이 염두에 둔 시간은 과연 어떤 것이며 ‘지금 now’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뉴먼의 친구이자 미술평론가 헤스는 뉴먼의 시간을 히브리 전통에서의 그곳, 그 위치, 그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마콤 makom’ 혹은 ‘하마콤 hamakom’이며, 그래서 그것은 신성한 모세의 율법, 즉 명명될 수 없는 것에 부여하는 명칭 중 하나로 보았다.
뉴먼이 말하는 ‘지금’이란 미래와 과거 속으로 흡수되는 ‘바로 지금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지시인의 종언>(1984)에서 뉴먼의 ‘지금’을 ‘현재 Jetzt’로 보고 시간성의 ‘무아경’ 중 하나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후설 이후 의식에 의해 시간을 구성하려는 사유전통으로부터 분석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뉴먼의 ‘지금’을 발생occurence으로 보았다. 의식으로 구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을 분해시켜 즉위해제시키는 것으로 의식이 정립할 수 없고 의식이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잊어버려야 하는 우리가 정립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혹은 ‘단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큰 사건도 작은 사건도 아닌 단순한 ‘발생’으로 보았다.
‘무엇 quid’ 이전에 우선 일어나고 있는 ‘사태 quod’를 말한다.

뉴먼은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에서 미학적, 철학적 의미로서의 숭고를 사유했다.
리오타르는 뉴먼이 말하는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는 ‘지금, 이것이 숭고한 것이다’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숭고는 갑자기 다가와서 흔들어놓고 느끼게 하는 어떤 경이로운 것이다.
뉴먼의 숭고의 효과는 관람자의 시야를 압도하는 커다란 화면의 사용으로 한층 더 했는데 그는 화면 크기의 질적 중요성을 부여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의 영향을 레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를 비롯하여 추상표현주의 이후에 출현한 여러 새로운 양식을 창안한 젊은 예술가들이 받았다.
그가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것은 모노크롬의 컬러필드의 선구적인 행위였고, 재스퍼 존스의 전체적인 회화 혹은 비관계적인 회화의 선구적인 모범이기도 했다.

1950년과 1951년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열린 뉴먼의 첫 개인전은 적대감과 몰이해만 불러일으켰으며, 그는 1952년 모마에서 열린 ‘15인의 미국인전’에도 초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로스코, 라인하르트, 스틸 등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1958년 모마에서 열린 ‘새로운 미국 회화전’에 네 점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는 2년 동안 유럽을 순회했다.
1955년 초 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뉴먼의 작품을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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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루이즈 네벨슨은 정크 아트에서


피카소, 슈비터즈, 코넬의 이러한 작업들은 당시에는 콜라주로 불리어졌으나 후에 돌이켜볼 때 쓰레기 조각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본격적인 쓰레기 예술가로는 리처드 스탠키비츠가 두드러지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러시아 사람 나움 가보의 미학과 상통하는 점이 발견된다(그림 53).
스탠키비츠는 1951년 어느 날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화실 뒷마당을 파다가 벽돌과 녹슨 쇠파이프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산소 용접하여 조각의 부분으로 사용한 것이 그의 쓰레기 조각(Junk Sculpture)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사실주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쓰레기들은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명의 찌꺼기들이다.
1951-52년에는 피카소와 곤잘레스의 전례를 따라서 데이비드 스미스와 함께 녹슨 쇠 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했는데 그러한 경험으로 버려진 쇠 조각들을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1997년 4월과 5월 맨해튼에 있는 상업화랑 자브리스키(Zabriskie)에서 스탠키비츠 회고전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가 쓰레기 조각의 선구자였음을 새삼 인식했다.

조셉 코넬의 영향을 받은 루이즈 네벨슨은 쓰레기 조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데, 나이로 보면 뉴욕 스쿨 1세에 속하지만 그녀가 사용한 재료나 그 사용방법은 팝아트 예술가들이 물질을 혼용하는 방법이나 조립예술가들, 쓰레기 예술가들의 방법과 유사했다(그림 54).
1900년 러시아의 키에프(Kiev)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온 그녀는 유럽으로 가서 한스 호프만의 문하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한때 멕시코의 벽화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다.

그녀의 유명한 〈벽들〉 시리즈의 경우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물질들이 각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다.
그녀는 주위에 널려 있는 각종 작은 물질들을 배열하고 그것을 모두 검정색, 금색, 또는 흰색으로 칠하여 입체주의적 구성감각이 모두 제거되도록 했다.
수십 개의 나무상자들이 있는 벽을 제작하고 상자 안에는 수백 개의 물질들을 배열했는데, 가구의 일부를 잘라 사용하거나 폐허가 된 집에서 구한 물질들을 재료로 삼았다.
그녀는 조각의 개념을 환경예술의 개념으로 확대한 최초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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