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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마라Jean-Paul Marat(1743~93)는 스위스 태생의 외과의사, 언론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가장 과격하고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는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소크라테스에 비유할 정도였습니다.
즉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에 비할 수 있을 겁니다.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총에 유명을 달리하신 것처럼 마라는 그를 반대하는 반혁명 지지자 처녀에 의해 칼로 살해당했습니다.
우리나라 화가가 김구 선생님의 돌아가신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면 <김구의 죽음 Kin Gu Breathing His Last>이란 제목을 붙이고 두고두고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남았을 겁니다.
마라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1770년대에 런던에서 의사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과학과 철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는데, <예속의 연속 The Chains of Slavery>(1774)도 그중 한 권입니다.
마라는 1777년 프랑스로 돌아왔고, 루이 16세의 동생(훗날 샤를 10세) 다르투아 백작의 경호원들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과학자로 성공하기를 바라며 불, 전기, 빛에 관한 실험의 결과를 논문으로 썼습니다.
전기에 관해 쓴 논문은 1783년 루앙의 로열아카데미에 받아들여졌으며 의사로서도 성공하여 환자들 대부분이 중산층과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는 1783년 의사직을 그만두고 과학적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780년에 <범죄 입법을 위한 계획 Plan for Criminal Legislation>을 출간했는데, 정부가 발매를 금지했고 그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이때부터 마라는 현존하는 정치체제에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으며 몽테스키와 장-자크 루소의 앙시앙 레짐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동화되었습니다.
게다가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정치체제에 더욱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1789년 9월 마라는 신문 <시민의 친구 The Friend of the People>의 편집자였고 과격한 혁명분자들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는 왕실의 적자를 세금으로 충당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1790년 초 왕의 재무장관 자크 넥커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글을 쓴 후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석 달 만에 돌아왔는데, 혁명세력이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마라는 1792년 9월 공화정이 확립되자 1790년부터 생각해왔던 군주제 폐지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는 1792년 9월부터 국민공회의 의원이 되었습니다.
마라는 반혁명분자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반혁명적인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침공의 위험에 처하게 되자 긴급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독재정치를 펴는 것에 대해 찬성했습니다.
마라는 국민공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793년 4월 지롱드당은 그를 혁명재판에 세워 죄를 묻기로 했지만 지롱드당은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7월 13일 지롱드당을 지지하는 샤로트 코르데이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샤로트 코르데이는 24살난 처녀로 드라마 작가 피에르 코르네유의 후손이며 보수적 왕당파 집안 출신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유딧Judith(아시리아 장군 홀로 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에 비견해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수녀단에서 교육을 받고 2년 동안 수녀로 헌신한 적도 있는 그녀는 플루타르크, 루소, 볼테르의 저서를 읽었고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민주혁명 세력과 왕당파 간의 불화는 매우 심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사실 폭군도 아니었고 매우 유약한 사람이었으며 나름대로 과거 군주가 하지 못한 개혁을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왕은 하늘이 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왕을 시민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으니 왕정을 지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했겠습니까?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유럽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으며 결국 유럽을 제패하려는 야심으로 나타났고,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평민으로 나폴레옹이 황제에까지 오르고 귀족 작위를 평민도 국가에 공을 세우면 부여하는 등 민주정체를 확립한 건 프랑스 혁명의 결실입니다.
아무튼 당시만 해도 왕당파의 반발이 심했으며 마라는 이런 역사의 전환기에서 타살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가 쓴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에 의해 궁정 최고 화가였으며 그의 별명은 '화단의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운명이 나폴레옹과 함께 하는 걸 의미했고,
나폴레옹이 실각하여 귀양을 가 섬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 했듯이 다비드로 이웃나라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민필름이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적었는데,
그렇습니다.
다비드가 노린 것이 바로 그런 점이었습니다.
다비드는 아직 몸에 온기가 남아 있는 마라의 시신을 스케치하여 작업실에서 이렇게 완성했는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렇게 그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고한 마라의 죽음을 보고 연민을 느끼게 만듬으로써 혁명을 지지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요즘 시세말로 마라는 두 번 죽은 것입니다.
다비드가 한 번 더 죽인 것이지요.
왜 목욕통에서 죽었느냐구요?
목욕할 때 24살난 처녀가 서시미를 뜨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파리로 와서 생선을 다루는 예리한 칼을 사서 그것으로 죽였습니다.
물론 그녀는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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