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경쟁심이 대단했으므로 

 

이반은 그날 오후 워홀의 화실을 방문하여 그림을 직접 보기로 약속했다.
집에 돌아온 워홀은 널려 있는 상업용 그림들을 치우느라 바빴는데 이반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상업미술가라는 사실을 알렸다가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대로 오후 늦게 이반이 워홀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는 15분 동안 워홀의 그림을 둘러보더니 “이 그림들은 퉁명스럽고 직선적이며 어떤 결론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것들은 추상표현주의 그림들과 비슷하고 결론이 없는 그림들이다”라고 말하고는 웃으면서 “내가 건방지게 말하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반은 이때 워홀의 비개성적인 그림들을 보고 그것이 미래의 미국회화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워홀은 경쟁심이 대단했으므로 최근 예술가들의 동향에 관해 궁금한 점을 이반에게 물으면서 특히 리히텐슈타인에 관해 물었다.
워홀이 리히텐슈타인에게 특히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리히텐슈타인처럼 카스텔리 화랑에서 전람회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리히텐슈타인이 어느 날 그림을 몇 점 들고 화랑으로 왔는데 아주 부끄러워했다.
난 그의 그림을 본 후 두 점을 두고 가라고 하면서 카스텔리가 오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리히텐슈타인은 현재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둥 그에 관해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이반은 1959년부터 카스텔리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전에는 마사 잭슨 밑에서 일했다.
마사 잭슨은 자신이 타고 간 뚜껑이 위로 열리는 신형 올드스모빌 스포츠카를 폴록의 그림 두 점과 맞바꾼 열정적인 중개상이었다.
1956년 여름 음주한 폴록은 이 자동차를 타고 저승까지 가버렸다.
이반이 잭슨 밑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일레나 소나벤드가 잭슨의 화랑에 왔다가 이반을 보더니 그에게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이반, 당신은 이런 일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예요. 지금 친구들과 함께 점심식사하러 가는 길인데 함께 가지 않겠어요?”라고 속삭였다.
그날 이후 이반은 소나벤드의 소개로 카스텔리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소나벤드는 이혼한 카스텔리의 새 아내가 되었다.
재미난 것은 카스텔리의 친구가 나중에 소나벤드를 카스텔리로부터 빼앗아 아내로 삼았다는 점이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유럽에서 화랑을 경영한 적이 카스텔리는 뉴욕으로 와서도 화랑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는 늙었으므로 젊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예술행위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해 젊은 조수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행위에 관심이 많았던 이반이 조언자로서 그를 도왔다.
이반은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1960년대에 소설을 다섯 편이나 썼다.
현재 이반은 소호의 레오 카스텔리 화랑 건너편에서 오케이 해리스(O. K. Harris)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데 뉴욕에서는 그의 화랑만이 유일하게 화랑 내에서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표지를 붙여놓아 필자를 포함해 금연 풍토에 주눅 들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이반은 워홀과 많은 대화를 나눈 뒤 화실을 떠나면서 워홀에게 작은 만화그림 〈작은 낸시〉를 포장해 카스텔리 화랑으로 보내라고 말했다.
이제 워홀의 친구가 되어 그를 돕기로 약속한 이반은 카스텔리에게 워홀의 작품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어느 날 카스텔리를 대동하고 워홀의 화실에 나타났다.

카스텔리는 화실 안을 죽 둘러보다가 벽에 걸려 있는 〈딕 트레이시〉(그림 67)와 〈성형수술〉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며,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리히텐슈타인의 만화그림에는 익살이 있는 반면 워홀의 그림에는 익살이 없고 오히려 관람하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으며 그것은 궤변과도 같았다.
카스텔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음, 불행하게도 시기가 안 좋군. 난 이제 막 리히텐슈타인을 화랑에 전속시켰는데 당신과 그의 그림을 함께 소개한다면 두 사람이 충돌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카스텔리는 그날 워홀의 그림 한 점을 사면서 친구의 화랑에서 전람회를 주선해보겠다고 말한 후 차를 타고 가버렸다.
카스텔리가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발견할 수 없는 궤변을 워홀의 그림에서 발견한 것은 뒤샹의 의도와도 같은 것으로 워홀의 작품에는 아이러니와 함께 미학적 등급에 혼란을 주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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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미술의 영향
 

  보스가 스헤르토겐보스 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초기 작품을 보면 위레트흐트에서 지낸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후에 나타난 성숙한 양식에서 보여지는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으로 미루어 볼 때
네덜란드 남쪽을 여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는 중에 <성 율리아노의 십자가 처형 Crucifixion of St. Julia>을 그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휴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1440년경~82, 1467~82년에 주로 활동)의 포르티나리 세쪽 제단화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이탈리아 상인이나 외교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이 형제회 기록에 남아 있는 건
15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그해 8월 9일 형제회 친구들이 성 요한 교회에서 그를 추도하는 장례미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보스에 관한 내용은 시문서와 형제회 기록이 거의 전부지만
17세기의 몇몇 자료를 통해 그의 작품 몇 점이 성 요한 교회에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가 제단 위에 있었고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모 마리아 제단에 장식되었다.
1504년 부르고뉴의 미남 공작 필리프는 예로니무스 반 아켄Jeronimus van Aeken으로 불리운 보스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는데,
<최후의 심판>으로 양날개 패널에 <천국>과 <지옥>이 묘사된 세쪽짜리 커다란 그림이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빈 소재 세쪽 제단화를 필리프가 주문한 작품의 축소판 복제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작은 1629년 프레데리크 헨리Frederick Henry 왕자의 네덜란드 군대가 스페인으로부터 스헤르토겐보스를 탈환했을 때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톨릭의 번영시대가 칼뱅주의자들의 금욕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뮤지엄 그리고 개인이 소장한 상당수의 보스 작품은 원작을 복제 또는 모방한 것들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30여 점에 불과하고 그림과 소품 드로잉들이다.
원작을 보려면 마드리드의 프라도 뮤지엄에 가야 한다.
보스와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주요 제단화 세 점과 소품 몇 점이 그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 중 초기에 제작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작품에 제작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상이 심하고 후세 사람들이 덧칠을 했으므로
작품에 나타난 양식과 기교의 미묘한 차이를 들어 연대순을 확정짓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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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심리학뿐 아니라 ...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철학과 심리학뿐 아니라
역사, 종교, 문학, 그리고 사회학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을 통털어서 소위 말하는 문명사를 알아야 합니다.
서양에는 대학 교양과목으로 문명사가 있어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이들 분야를 접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동양 문명사라는 과목이 있어 철학, 심리학을 포함하여 역사, 종교, 문학, 그리고 사회학도 대충을 가르쳤으면 합니다.

미술의 경우 예술가에게도 미학과 미술사 전공자에게도 미술사를 필히 공부해야 합니다.
미술사를 단지 양식의 역사로만 보는 건 매우 단순한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이후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의 군주제 하에서의 국가들의 화단의 양식 경향은 궁정과 귀족들의 컬렉션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궁정과 귀족 컬렉터들이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거의 소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화가들에게 벨라스케스는 무명 화가나 다름 없었고, 따라서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 비해 벨라스케스 양식이 주는 영향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프랑스 궁정에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소장되고서야
프랑스 화가들은 그의 양식을 모방하면서 분석하게 되었습니다.
들라크루아, 마네, 드가 등이 벨라스케스의 양식으로 인해 크게 진일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의 예로 보더라도
정치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미술사의 진행이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혹은 근대로 이어지는 과도기에서 제작된 소위 말하는 지옥도를 예를 들면,
종교혁명을 알지 못하면 왜 수많은 지옥도가 나와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교화시키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종교혁명을 알려면 바티칸의 교황의 세력과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술사는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 등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즉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면 당대의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미켈란젤로의 형이상학적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와 종교혁명을 알아야 합니다.
미켈란젤로 자신은 철학자였습니다.
철학과 미술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합니다.
미와 모방에 대한 관점이 바로 철학에서 비롯했기 때문이지요.

심리학은 작품에 나타난 인물과 인물 사이의 긴장감 외에도 색상에 대한 느낌 선에 대한 감정이입 등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색의 심리학 혹은 선의 심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검정색은 죽은 색이라고도 말하는데, 검정색을 따뜻한 느낌을 주기 위해 사용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로드코 스틸이란 화가인데 그는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화가로 그에게 색에 대한 이해는 곧 작품에 대한 이해와 직결됩니다.
색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고려해서 그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멕시코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소위 말하는 민중미술이 성행한 적이 있는데, 군부독재라는 정치적 상황을 알지 못하면 이런 작품들은 이해가 안 됩니다.
스페인 동란을 모르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이해할 수 없으며 멕시코의 동란을 모르면 리베라를 포함한 벽화화가들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나라 화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그 나라의 역사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듯 미술사를 공부한다는 데는 문명에 끼친 모든 영향을 두루 알아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과거 미술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이런 문명사에 대한 공부가 없다보니 모든 작품을 양식적으로만 이해했을 뿐 작품이 제작된 동기와 결과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요.

모쪼록 미술사에 대한 공부가 폭넓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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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피카비아와 기계주의 미학


프랑시스 피카비아(1879~1953)는 1879년 1월 22일 파리에서 쿠바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1953년 타계했다.
에콜 데 보자르와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카미유 피사로의 지도를 받았고, 1903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했고 1905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09~11년 입체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으며 퓌토 그룹에 가담하여 자크와 레이몽, 마르셀 뒤샹 형제를 알게 되었다.
퓌토에 살던 자크의 집에 주로 모인 퓌토 그룹의 중추적 역할은 자크와 레이몽이 했고, 이 그룹에 시인 아폴리네르, 리브몽-드세뉴, 글레이즈, 메쳉제, 레제 등이 모였다.
이 그룹에서 마르셀 뒤샹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메쳉제가 소개한 아마추어 수학자 모리스 프린스를 통해 퓌토 그룹 예술가들은 사차원에 관심을 기울였고 삼차원보다 수준 높은 사차원의 세계가 가까운 장래에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뒤샹이 8살 많은 피카비아를 만난 것은 1911년 10월에 열린 가을전을 통해서였다.
뒤샹은 그에 대해 훗날 술회했다.
“놀랄 만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회의주의자였다.
항상 ‘그래, 하지만 ...’이라고 말하거나 ‘아냐, 그러나 ...’라고 했다.”
성적으로 조숙한 피카비아는 18살 때 학교를 자퇴하고 파리에 익히 알려진 언론인의 애인을 데리고 스위스로 달아났다.
그는 바람둥이였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방탕했고 거의 매일 밤 술을 지독히 마셨으며 아편을 피웠는데 당시 아편은 아주 귀했다.
자동차를 여러 대 가지고 있었고 돈을 물 쓰듯 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던 가브리엘 뷔페와 1909년에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의 첫 번째 아내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입체주의 양식을 선호했고, 들로네의 오르피즘 방법으로 작업했으며, 육안으로 분별할 수 있는 사물의 색보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간성적인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하늘을 빨간색으로 땅을 파란색으로 칠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다.
그의 그림은 만화경 같았다.

그는 말했다.
“나의 작품에서 주관적인 표현은 제목에 있으며, 시각적 묘사는 객체일 뿐이다.
하지만 객체는 객체임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기도 한 이유는 제목을 나타내는 판토마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체가 인간의 심장과도 같은 잠재적 요소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제시해준다.”

피카비아는 1913년 아모리 쇼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나 그와 자신이 1915년에 창간한 비평지 <291>에 글을 기고했다.
이 비평지는 1913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아폴리네르의 책임 하에 발간된 비평지 <스와레 드 파리>를 모델로 했다.
<291>은 나중에 <카메라 워크>로 명칭이 바뀌었다.
창간호에는 피카비아의 상상에 의한 기계를 모티프로 한 독창적인 데생들을 여러 점 소개했으며, 아폴리네르의 표의문자, 데 자야의 인쇄적인 구성작품, 스티글리츠의 시를 소개했다.
<291>은 맨해튼 5번가 291번지에 소재한 스티글리츠의 화랑에서 딴 것으로 그의 화랑 명칭은 291 화랑이었다.
291 호랑은 모더니즘의 황무지와도 같았던 미국 미술계에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불리는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을 처음 뉴욕에 소개한 곳도 이 화랑이었으며, 다양한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여 미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피카비아는 291 화랑을 중심으로 뉴욕에서 뒤샹과 함께 미국 내에서의 다다운동을 주도했다.

피카비아는 1915년 7~8월에 <291>을 통해 초상화를 여러 점 발표했다.
스티글리츠의 초상을 카메라의 형태로, 아그네스 에른스트 메이어의 초상을 전기를 충전시키는 플러그로 묘사했으며, 자화상을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내는 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291>의 창간에 참여한 데 자야는 피카비아의 작품에 관한 글을 비평지에 기고하면서 모더니즘의 정신을 찬양했다.
그는 <291>의 기능이 “자유, 개인주의, 자아표현”임을 홍보했다.
데 자야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고 드로잉하기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소유한 신문 두 곳과 멕시코시티의 주요 신문에 만화를 기고했다.
멕시코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에 빠지자 데 자야 가족은 1907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데 자야는 <이브닝 월드>에 취직되어 미술계와 관련된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는 일을 했고, 스티글리츠는 신문에서 그의 드로잉을 보고 291 화랑에서 1909년과 1910년에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피카비아는 1916년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다다 비평지 <391> 제1호를 발간했고, 1918년 이것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취리히 다다에 합류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간 후에는 선동적인 다다 시위에 참여했으며, 기계주의 작품을 전시했고, 당혹스럽고 풍자적인 논문 다수를 발표했다.
1919년 가을전을 위한 카탈로그에는 조르주 리베몽 데상느의 글이 실렸다.
“만일 여러분이 그랑 팔레 미술관에 가게 되면 계단 아래 그늘진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살아 있는 괴물처럼 생긴 것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괴물이란 피카비아가 기계주의 방법으로 그린 작품을 의미했다.
피카비아는 가을전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임의로 작품을 그곳에 걸 수 있었다.
그의 기계회화가 파리에서 소개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가을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1914년 이후 처음 개최된 파리 미술계의 대대적인 첫 잔치였는데 그의 작품이 추문을 야기했다.
페르낭 레제가 튜브처럼 생긴 그림을 그렸지만 완전히 기계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파리의 다다는 시인 차라가 1920년 1월 17일 취리히로부터 파리에 도착하고 난 후 더욱 극성스럽기 시작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차라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차라와 피카비아는 브르통과 함께 다다 그룹을 리드했으며 다다 선언문을 1월 23일에 발표했다.
다다 예술가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웠고, 매사에 충동적이었으며, 어떤 구속에서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거리에서 가톨릭 신부를 만나면 조롱했고, 분수를 보면 벌거벗고 들어가 놀았으며, 극장에 몰려가 소란을 피워대며 무대를 향해 계란, 야채, 심지어 소고기까지 던졌는데, 요즘 말로 불랑배들 같았다.
1921년 6월 파리를 방문한 뒤샹을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피카비아는 뒤샹의 <로즈 셀라비>를 비평지 <391>에 소개하면서 여장으로 분장한 그를 <성녀> 혹은 다른 말로 <다다 그림>이라고 했다.

파리 다다운동이 붕괴된 뒤 초현실주의에 가담했으며 이전에 비해 활동이 줄었지만 1930년대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1924년에 에릭 사티와 함께 발레 <휴식>을 제작했고, 이듬해에는 르네 클레르와 함께 영화 <막간>을 제작했다.

피카비아는 20세기의 가장 다재다능한 예술가였고, 잇따라 나타난 새로운 양식들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부조리와 비인습적인 것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늘 새로운 사고의 중심에 있었으며, 당혹스런 경향이 있기는 하나 끊임없이 신선한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1949년 파리의 드루앵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이때 논문집 <491>이 발간되었다.
피카비아의 후기 작품들은 조악한 것이 많으며 대표작은 대부분 사라졌다.
따라서 그의 명성은 쇠퇴했으며, 재능은 있지만 발빠른 추종자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개최된 대규모 회고전은 이런 시각을 완전히 바로잡았다.
피카비아는 현대미술의 커다란 특징인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었고 새로움 자체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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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언급한 대로 1960년대 초에 자유방임주의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동숭동과 흑석동에 있는 다방에서는 종일 대중적인 노래로 세계를 흽쓴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화여고에 재학하던 영순이와 숙명여고에 재학하던 성숙이에게도 남자 중의 남자였으며 엘비스의 초상화가 그려진 포스터를 벽에 붙여놓고 볼 때마다 좋아했다.
그리고 요염한 자태로 남자들을 성적으로 자극한 마를린 먼로는 백치미를 지녔는데 미국남자들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남성들의 성적 우상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헤비록 그룹이 서서히 출현하기 시작해 세상은 좀 더 왁자지껄해졌는데 이것들은 지상에서 있었던 사건들이고, 지하세계(Underground)에서는 영화제작이 성행했다.
기계의 발달로 종합예술 영화는 새로운 장르로 부각되었고 대중용 카메라가 막 시판되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세계에는 양지문화가 있었지만 지하세계에는 그늘진 문화가 있었는데, 시인, 배우, 예술가들이 창조한 비트, 히피, 펑크 문화가 서서히 지상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1960년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팝아트를 비롯한 예술행위를 살펴보면 전체 뉴욕 스쿨에서의 위치를 제대로 알게 된다.

라우센버그와 존스 두 사람이 한 쌍의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칠 무렵 워홀은 상업미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슈퍼스타였지만 순수미술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었다.
그는 라우센버그와 존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도 그들처럼 예술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워홀이 상업미술에서 인정받은 것은 물론 그의 재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공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면이 있었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갖은 방법도 불사하는 약삭빠른 구석이 있었다.
약삭빠른 구석이란 아방가르드 정신의 결여를 말하는데 ‘예술을 위한 예술’행위를 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과 유사한 그림을 그리면 더 이상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아주 새로운 그림을 시도했는데, 이는 자신의 미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디자인과 같은 시각적 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워홀은 기교적인 디자이너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인데 이 점은 독자들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판단할 일이다.

워홀은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화랑들을 자주 방문해 첩보원처럼 최근 예술가들의 동태를 살폈으며, 무엇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늘 궁리했다.
함께 화랑을 방문하곤 하던 친구 테드 캐리가 어느 날 오후 워홀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전에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 갔다가 만화 같은 그림을 보았는데 네가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과 비슷하니 그 화랑에 가봐” 하고 일러주었다.
캐리와 함께 카스텔리 화랑으로 갔더니 화랑 구석에 캐리가 말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만화를 주제로 한 그림이었는데 로케트에 사내가 타 있고 배경에 소녀가 있었다.

그날 캐리는 존스가 그린 〈전구〉(1958)를 475달러에 구입했다.
캐리가 화랑의 책임자 이반 캅(그림 68)과 작품가격을 흥정할 때 워홀은 이반에게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훗날 이반은 워홀을 만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앤디는 아주 말수가 적었고 부끄럼을 탔지만 미술계의 동향에 관해 제대로 관망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가 화랑측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있느냐고 묻길래 나는 라우센버그의 그림 한 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소녀가 비치볼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림이었다.
앤디는 그것을 보더니 놀라면서 ‘오, 내가 이와 꼭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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