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언급한 대로 1960년대 초에 자유방임주의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동숭동과 흑석동에 있는 다방에서는 종일 대중적인 노래로 세계를 흽쓴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화여고에 재학하던 영순이와 숙명여고에 재학하던 성숙이에게도 남자 중의 남자였으며 엘비스의 초상화가 그려진 포스터를 벽에 붙여놓고 볼 때마다 좋아했다.
그리고 요염한 자태로 남자들을 성적으로 자극한 마를린 먼로는 백치미를 지녔는데 미국남자들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남성들의 성적 우상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헤비록 그룹이 서서히 출현하기 시작해 세상은 좀 더 왁자지껄해졌는데 이것들은 지상에서 있었던 사건들이고, 지하세계(Underground)에서는 영화제작이 성행했다.
기계의 발달로 종합예술 영화는 새로운 장르로 부각되었고 대중용 카메라가 막 시판되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세계에는 양지문화가 있었지만 지하세계에는 그늘진 문화가 있었는데, 시인, 배우, 예술가들이 창조한 비트, 히피, 펑크 문화가 서서히 지상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1960년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팝아트를 비롯한 예술행위를 살펴보면 전체 뉴욕 스쿨에서의 위치를 제대로 알게 된다.
라우센버그와 존스 두 사람이 한 쌍의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칠 무렵 워홀은 상업미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슈퍼스타였지만 순수미술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었다.
그는 라우센버그와 존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도 그들처럼 예술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워홀이 상업미술에서 인정받은 것은 물론 그의 재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공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면이 있었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갖은 방법도 불사하는 약삭빠른 구석이 있었다.
약삭빠른 구석이란 아방가르드 정신의 결여를 말하는데 ‘예술을 위한 예술’행위를 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과 유사한 그림을 그리면 더 이상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아주 새로운 그림을 시도했는데, 이는 자신의 미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디자인과 같은 시각적 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워홀은 기교적인 디자이너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인데 이 점은 독자들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판단할 일이다.
워홀은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화랑들을 자주 방문해 첩보원처럼 최근 예술가들의 동태를 살폈으며, 무엇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늘 궁리했다.
함께 화랑을 방문하곤 하던 친구 테드 캐리가 어느 날 오후 워홀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전에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 갔다가 만화 같은 그림을 보았는데 네가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과 비슷하니 그 화랑에 가봐” 하고 일러주었다.
캐리와 함께 카스텔리 화랑으로 갔더니 화랑 구석에 캐리가 말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만화를 주제로 한 그림이었는데 로케트에 사내가 타 있고 배경에 소녀가 있었다.
그날 캐리는 존스가 그린 〈전구〉(1958)를 475달러에 구입했다.
캐리가 화랑의 책임자 이반 캅(그림 68)과 작품가격을 흥정할 때 워홀은 이반에게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훗날 이반은 워홀을 만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앤디는 아주 말수가 적었고 부끄럼을 탔지만 미술계의 동향에 관해 제대로 관망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가 화랑측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있느냐고 묻길래 나는 라우센버그의 그림 한 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소녀가 비치볼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림이었다.
앤디는 그것을 보더니 놀라면서 ‘오, 내가 이와 꼭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