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미술


대지 미술은 흙, 바위, 모래 등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 세 가지의 구별이 명확하지는 않다.
대지작품은 주로 거대한 규모의 작업을 의미한다.
이런 작품은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는데 당시의 다양한 경향의 미술과 관련이 있다.
제작된 형태가 종종 극도로 단순한 점은 미니멀 아트와 비슷하며,
보잘것없는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아르테 포베라와 관련이 있고,
제작된 작품이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와 관련이 있으며,
거창한 작업에 관한 계획안은 단지 계획으로만 존재하므로 개념 미술과 연결지을 수 있다.
또한 도시 문화의 세련된 기술에 대한 혐오를 반영한 히피 문화의 자연 회귀 정신의 한 부분으로서 선사시대의 흙무더기와 목초지 경계선에 대한 연구에 열광했던 당시의 상황과 연관되는 점도 있다.
전통적인 엘리트 미술과 상업성을 지향하는 화랑 중심의 미술계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또한 현대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였지만,
사실 거대한 대지작품은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외진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적이지 못했다.

대지 미술의 개념은 1968년 뉴욕의 드완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이듬해 코넬 대학에서 열린 ‘대지 미술전’을 통해 정립되었다.
드완 화랑에서의 전시회에는 강철 입방체를 매장해놓은 르윗의 <구멍 속의 상자>와 네바다 사막 위에 두 개의 흰 평행선을 그린 디 마리아의 <1마일 드로잉>의 기록사진들이 포함되었다.
이런 작품들은 개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디 마리아는 전시장을 흙으로 채웠고 다른 예술가들은 바위와 작은 나뭇가지 같은 물질들을 화랑에 가져다놓았다.

1945~49년 시러큐스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5년 뉴욕의 대니얼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솔 르윗(1928~)은 1966년 휘트니 연례전과 1968년의 드완 화랑에서 열린 ‘10전’에 초대되었다.
알루미늄 대들보 위에 에나멜을 씌워서 구워 만든, 틀도 없고 유리도 끼워져 있지 않은 다중 칸막이 구조물은 르윗을 도널드 저드, 로버트 모리스와 더불어 미니멀 아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올려놓은 동시에 시리얼 아트의 발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구체 미술처럼 수학적 공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68년에 금속 입방체를 제작하여 네덜란드 베르게이크에 있는 비세르 하우스 내의 땅에 묻었고 이 오브제가 시각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멜 보크너는 <미니멀 아트>에서 르윗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르윗의 복잡한 다중 구조물은 엄격한 논리 체계의 결과로, 개인적 요인의 작용을 가능한 제거한 것이다.
이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그의 작품의 경계를 제작자와 관람자 모두로부터 분리된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물’로서 제한하는 데 적합하다. ...
르윗의 작품을 접하면 즉시 직관적으로 질서 정연함을 느낄 수 있으나 작품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방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선, 이음매, 각과 같은 엄청난 양의 정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르윗은 작품의 개념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고 미술품은 이러해야 한다는 어떠한 기존 관념과도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개념적인 질서가 시각적 혼란으로 빠지는 특이한 지각의 와해 현상에 도달했다.”

관람자는 르윗 조각의 주위를 걸어가며 감상하게 되므로 그의 조각이 개별적이고 관계없는 사물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즉각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다른 시점에서 본 모습들이 표로 그려지기 때문에 매순간마다 다르게 보이지만 늘 평면적이라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한 월터 디 마리아(1935~)는 1968년 유럽을 방문한 뒤 이듬해 구겐하임 재단 연구지원금을 받았다.
디 마리아는 미니멀 아트의 초기 주창자 중 한 사람이었고, 미니멀 아트라는 명칭이 일반화되기 이전인 1960년경 이미 미니멀 아트 작품을 제작했다.
1961년부터 퍼포먼스 작업에서 로버트 모리스 및 이본 레이너와 함께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1961년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아트 야드Art Yard 프로젝트를 통해 대비 미술 분야를 개척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개념 미술의 범주에 속하는데, 1968년의 <마일 드로잉>이 이런 예로, 모하비 사막에 서로 3.6m 떨어진 두 개의 분필선이 평행으로 3.2km 뻗어 있는 작품이다.
1968년 뮌헨의 하이너 프리드리히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여기에 45.3 입방 마터에 달하는 흙으로 가득 찬 방을 전시했다.

누구보다도 거대한 규모의 대지 미술 작업을 한 예술가는 로버트 스미스슨(1938~73)이었다.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스미스슨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의 범주에 속했다.
그는 특히 반사작용과 거울 이미지들을 실험했는데, 예를 들어 크릴론을 칠한 금속 테에 거울처럼 반사하는 플라스틱만 끼운 작품들을 전시하기도 했다.
<지구라트 거울>은 보통의 거울 조각들을 하나 위에 또 다른 하나를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구축한 작품이다.
그는 수학적 비개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1966년 <아츠 Arts> 11월호에 실린 글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스미스슨은 1960년대 말부터 대지 미술로 전환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와 뉴저지 주의 버려진 채석장이나 오래된 광산의 흔적을 찾아가 바위조각이나 자갈, 지질학적 폐물들을 수집하여 무작위로 쌓아올리거나 금속상자 혹은 나무상자 속에 배열했다.
이것과 거울들을 장소 계획서, 지질도, 인스태마틱 컬러사진과 함께 놓아 잘 알려진 ‘탈장소 Non-Sites’를 구성했다.
그는 이전에 정크 예술가들이 도시의 쓰레기를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연의 쓰레기를 예술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유타 주의 그레이트 솔트 호에 나선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나선형 방파제>(1970)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전시 장소에서 제작된 구조물 중 하나로 물의 흐름에 따라 침식되도록 만들어졌다.
1971년에는 네덜란드의 엠멘에 <나선형 언덕>을 제작했다.
스미스슨은 이런 새로운 개념들을 충분히 발전시키기도 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다른 주요 대지 예술가들도 대부분 스니스슨과 마찬가지로 미국인들로 지하 미로를 제작한 앨리스 에이콕(1946~), 메리 미스(1944~), 마이클 하이저(1944~) 등이 있다.
하이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이중 부정>(1969~70)은 네바다 사막 위에 만들어진 폭 30피트, 깊이 50피트, 총 길이 1,500피트인 두 개의 길로, 그가 “예술가들이 늘 자신들의 작품을 놓고 싶어 하는 유린되지 않고 평화로우며 종교적인 공간”으로서 찾아낸 장소에 만들어졌다.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이며 실험 예술가 크리스토(1935~)는 때때로 대지 예술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품은 사실 분류가 불가능하다.
섬유 공장을 운영하던 화공학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52~56년 소피아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는 1964년에 뉴욕에 정착했고 197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처음에는 초상화가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곧 크리스토 자신이 발전시킨 표현의 한 형태이며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포장 empaquetage’을 창안했다.
이는 캔버스 천이나 반투명 비닐 같은 물질로 포장한 물체와 그 결과를 예술이라고 명명하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크리스토는 처음에 스튜디오에 있는 물감 통 같은 작은 물체로 포장을 시작했는데, 이는 만 레이가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의 규모가 점점 더 커져 나무와 자동차를 거쳐 건물과 환경의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나의 작업은 전치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오늘의 나조차도 정착하지 못한 사람이고, 이것이 나로 하여금 지속되지 않는 예술을 만들게 한다. ...
나는 매우 흥분되는 작품을 제작한다.
강철, 돌, 혹은 나무와 다르게 천은 바람과 태양의 물리적인 상태를 감지한다.
작품은 새로운 것이며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영국의 가장 대표적인 대지 예술가로는 앤디 골즈워디(1956~)와 리처드 롱(1945~)을 들 수 있다.
롱의 작품은 조각, 개념 미술, 대지 미술 모두를 아우른다.
1967년 이후의 작업은 영국의 자연에서 출발한 것으로 1969년부터 국외로 확대되어 때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적대국에서까지 행해졌다.
그는 걸어가면서 수집한 돌과 잔가지 같은 것을 화랑 안으로 가져와 원 또는 단순한 기하 형태로 배열 전시했다.
또한 화랑이 아니라 재료들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며, 산책로를 찍은 사진, 걸어가며 본 것이나 자신의 심리 상태를 쓴 글, 지도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롱은 영국 대지 미술을 이끄는 인물로 이미 197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국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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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마를린 먼로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로스앤젤레스 페러스 화랑에서 열린 워홀의 첫 개인전이 끝난 다음날인 1962년 8월 5일 남자들의 성의 우상 마를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대적으로 보도된 그녀의 자살기사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가장 인기 있는 스타로 헐리우드의 공주였던 마를린이 무엇이 부족하여 세상을 버렸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론은 몇 주에 걸쳐 마를린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 배우로서의 활약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녀의 사생활을 파헤쳤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한 그녀를 동정했다. 워홀은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마를린을 직접 만난 적이 두 번 있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만남이란 물론 일방적인 만남으로 멀찌감치 서서 그녀를 바라본 정도에 불과했다.
그 정도 만남이야 많은 남자들에게도 해당할 터이며 워홀이 그녀를 흠모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이야 어찌 워홀 한 사람에게만 있었겠는가!
그녀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여전히 사람들이 그녀에 관한 관심을 버리지 않자 워홀은 그녀를 자신의 예술을 위한 전리품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의 마를린 사진이 수록된 책을 사서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를린의 목 아래 부분은 삭제하고 얼굴만 크게 실크스크린하거나 커다란 캔버스에 실크스크린한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또는 20개씩 병렬시키기도 했다.
마를린의 초상화도 수프 통조림이나 우표처럼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다가 나중에는 마를린의 얼굴, 머리카락, 눈썹, 입술, 목덜미에 여러 가지 색을 칠했다.
워홀은 아름다운 여배우의 머리카락을 노란색으로 칠하고 눈썹은 녹색으로, 입술은 붉게, 얼굴은 피부색으로 그리고 옷깃은 초록색으로 칠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색들은 바탕의 오렌지색과 어울리지 않는 상대색들이었다(그림 87).
캔버스에 먼저 색을 칠해놓고 색이 마르면 그 위에 마를린의 형태를 실크스크린했는데 사진의 이미지가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바탕의 밝은 색들과 어우러졌다.
조수 글럭은 워홀에게 가장자리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실크스크린을 밀 때마다 정확하게 인쇄가 되도록 하자고 말했지만 워홀은 잽싸게 일하는 성질이라서 그런 소심한 짓을 하기 싫어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초상화에 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물감이 밖으로 삐져나가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머리의 형태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고 붉은 색이 입술 밖으로까지 번지게 했으며 눈 가장자리의 녹색은 실제 여배우의 화장보다 훨씬 컸다.
글럭의 말에 따르면 작업을 마쳤을 때는 입술이 약간 비스듬해졌고 눈썹은 조금 위로 올라갔으며 머리카락은 오른쪽으로 넘쳐났다고 한다.
글럭이 워홀에게 “앤디, 조금 비뚤어졌어”라고 하자 워홀은 “난 그게 더 좋아”라고 대꾸했다.

〈100개의 마를린 초상화〉라고도 불리우는 〈마를린 접개〉는 두 개의 캔버스로 제작되었는데 한 캔버스에는 색을 사용하여 50개의 마를린 초상화를 실크스크린했고, 다른 캔버스에는 흑백으로 50개의 초상화를 실크스크린했다.
흑백 초상화에는 검정색을 일부러 진하게도 흐리게도 칠했는데 마치 신문을 인쇄할 때 실수로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부러 얼룩을 남기는 전형적인 회화방법을 사용했다.
워홀은 기계를 조작하여 자신이 바라는 색조로 조절할 만한 기교가 있었지만 실크스크린을 그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서투름을 조작했다.
기교로 보면 낡은 수법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크스크린이라는 최근의 수단에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 초상화는 새로운 감각을 창출하기에 충분했다.
팝 아트란 말을 처음 사용하고 누구보다 팝 아트에 대해 잘 이해했던 영국인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워홀의 연속적인 이미지들은 일본의 플라스틱 장난감들처럼 보인다.
회화적으로 보면 단순히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 이미지들은 생명력 있는 제스처로 나타나 새삼스럽게 인간적으로 보이거나 최소한 우연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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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 과 제자 앵그르
 

  이 원고는 <예술과 정치의 만남>이란 제목으로 신세계 잡지에 기고한 것입니다.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 과 제자 앵그르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고상한 이상과 순수 이미지의 재활이 르네상스시대에 발생했고, 18세기 말부터 이런 양식이 다시금 두드러졌는데,
신고전주의로 불리우는 이의 대표적인 화가가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이고 그를 쏙빼닮은 후계자가 앵그르이다.
두 사람을 통해서 예술과 정치의 만남이 예술에는 불순한 동기를 남겨 본래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가 어떻게 왜곡되며,
정치에는 놀라운 선전 효과를 주어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게 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술과 정치의 만남은 정치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시작되었다.

다비드를 최고 화가로 만든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2년 프랑스 정부는 34살의 다비드에게 호라티우스 삼형제에 관한 그림을 그릴 것을 의뢰했다.
이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왕국 사람들이다.
로마왕국이 이웃의 알바왕국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 집안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 집안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오빠는 누이동생을 칼로 쳐서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8세기의 걸작으로 미술사에 올랐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실제 모델을 사용하여 그린 것이며, 옷의 주름은 마네킹에 걸친 옷을 보고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다.
다비드는 장인에게서 명검과 명투구 등 고대인이 사용하던 소품들을 구입하여 오브제로 사용했다.
신고전주의란 고전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는 것 외에도 모델의 의상과 실내 그리고 그림에 사용되는 오브제들이 당대의 것들로 묘사해내는 것이다.
이 작품을 치밀한 계산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화면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여 긴장감을 고조시켰으며 사내들의 결연한 맹세와 의지와는 대조적으로 오른편에는 예고되는 비극으로 절망에 빠진 아낙들이 비탄에 빠져 있다.
다비드는 왼편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호라티우스 맏형의 왼쪽 다리를 스무 번의 드로잉 끝에 만족할 만하게 그릴 수 있었다.
오른편 사비나의 노란 의상과 배경은 다비드의 제자 드루아가 그렸는데 제자가 스승의 작품에 부분적으로 돕는 건 보통이었다.
개인의 비극을 극복하고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는 메세지가 담긴 이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시민의 결속을 위한 고도의 의도와 계획에 의한 정치와 예술의 합작품이다.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살롱전에 소개된 지 7년 후인 1789년 7월 14일 8~9백 명의 시민이 폭정과 억압의 상징으로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무기와 화약을 탈취하기 위해 군대와 충돌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봉화가 올랐다.
소위 7월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혁명세력은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시민의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려 처형했다.
이로써 왕은 하늘이 낸다는 전통이 사라졌고 시민 중에서 국가의 통치자가 선출되는 새로운 역사가 서양에서 처음으로 발생했고 이 공화국의 첫 주인공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공화국을 위한 제단화 <마라의 죽음>
다비드는 쟈코뱅 클럽 외에도 여러 혁명 단체에 깊이 참여했으므로 따라서 혁명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회화가 혁명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혁명에 있어 마라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그는 시민에게 소크라테스에 비견될 정도로 정신적 대들보로서 ‘시민의 친구’로 불리었다.
그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서만 자유와 평등이 확립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는데 오래된 왕정에서 민정으로의 이양은 민주를 바탕으로 한 큰 과업이었으므로 행동을 강조한 건 당연했다.
마라가 23살 난 처녀 샤로트에 의해 1793년 7월 13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당파 집안 출신의 샤로트는 자신을 아시리아 장군 홀로 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 주디스에 비견하면서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한 그녀는 마치를 타고 카엥으로부터 11일 파리에 도착했으며 15cm 길이의 예리한 칼을 구입했다.
마라의 아파트로 갔지만 아내 시몬느 에브라르가 안으로 들이지 않자 신문 파는 사람이 시몬느를 성가시게 구는 사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라는 피부병 때문에 터번을 두르고 식초를 탄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자주해야 했으므로 목욕탕에 조그만 탁상을 놓고 그곳에서 집무하곤 했다.
마라는 샤로트에게 반혁명분자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샤로트가 국민공회의 대의원 8명이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그녀는 반혁명분자의 이름을 적었고 마라가 그들은 파리에서 단두대의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미리 준비한 칼로 마라의 심장을 찔렀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그렸는데 그가 얼마나 혁명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를 말해주며 양식과 독창성에 빼어남을 알게 해준다.
그가 묘사한 마라는 예수 외에도 고대의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의한 명암이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마라의 모습을 더욱 미화시킨다.
그는 마라의 손에 편지가 쥐어져 있게 해 좀더 회화적 설명을 덧붙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793년 7월 13일: 마리 앤 샤로트가 시민 마라에게/ 당신의 친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정녕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다비드가 쓴 것이고 원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자유란 이름하에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전 불행하고 이는 당신의 보호를 요구하는 충분한 이유입니다.”

<황제옥좌의 나폴레옹>
로마대상을 수상하여 로마 주재 프랑스 아카데미에 유학한 앵그르는 초상화가로 유명했다.
그의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이는 그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되었다.
그가 선호한 모티프는 목욕하는 여인들의 다양한 동작이었다.
4년의 장학 기간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로마에 체류하면서 프랑스인의 초상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다.

1803년 리제 시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1통령 보나파르트>를 그린 앵그르는 통령에서 황제로 즉위한 보나파르트를 그려 1806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다비드는 궁정화가로 나폴레옹을 직접 보고 그릴 수 있었지만 로마에서의 앵그르는 나폴레옹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렸다.
그는 스승이 그린 나폴레옹의 머리를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황제의 예복은 겉옷, 금색 레이스가 달린 비단 허리띠, 검뿐이다.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을지라도 앵그르는 그의 위상을 나타내며 또한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해야 했는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연히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구해야 했다.
나폴레옹이 매우 좋아한 로마 황제의 현란한 모습이 일부 적용되어 복잡한 금색의 사용과 담비 모피가운과 벨벳이 사용되었다.
이런 나폴레옹의 모습은 주피터의 모습을 방불케 했는데 주피터의 독수리가 나폴레옹의 발 아래 카페트에 디자인된 것만 봐도 주피터를 염두에 두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상이 로마제국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으며 자신이 샤를막느의 뒤를 이은 황제라고 믿었는데 샤를막느는 9세기 로마 황제이면서 프랑크족의 왕으로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중앙 유럽의 전지역을 통치한 사람이었다.

터키의 후궁 <그랑드 오달리스크>
앵그르는 색을 칠하기 전 드로잉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했는데 회화에서 드로잉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장 크게 보았다.
그러나 1814년에 그린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보면 그에게 색에 대한 절묘한 감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말로 ‘후궁’이란 뜻이다.
앵그르는 오리엔탈 비너스의 사지를 꽃잎처럼 부드럽고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고 그곳을 여행한 유럽인들이 쓴 기행문과 책자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후궁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는 라파엘로를 거의 숭배할 정도였지만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고전적 미의 이상이 구현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의 프랑스 여인의 몸의 비례, 무감동한 우아함, 차거운 느낌과 육감적 느낌이 섞인 낯설음은 우피지에 소장되어 있는 파르미지아니노가 1535년경에 그린 <긴 목을 한 마돈나>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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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 미술


구체 미술Concrete art(아르 콩크레Art Concret, 콘크레테 쿤스트Konkrete Kunst)과 구성주의의 차이는 구체 미술은 환영을 배제하고 작품 자체와 그 작품의 구성 요소가 가상의 성질이 없이 있는 그대로 제시되는 데 있다.
재료는 그 자체만을 반영한다.
‘실제 재료, 실제 공간’이라는 구호는 구체 미술과 관련하여 빈번히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술 문헌에서 구체라는 단어는 추상의 반의어로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1861년 귀스타브 쿠르베는 사실주의 선언문에서 아카데미의 역사화나 종교화, 일반적인 의미의 상상에 의한 미술과는 대조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묘사하는 미술을 구체 미술이라고 했다.
이 단어는 1930년 반 두스뷔르흐가 ‘아르 콩크레 Art Concret’라는 선언문을 발표했을 때 처음으로 전문용어가 되었다.
이는 그가 격렬하게 반대한 원과 사각형 협회의 결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구성주의 원칙을 규정한 이 선언문에 카를순드, 반 두스뷔르흐, 투툰지안, 반츠, 엘리옹 등이 서명했다.

구체 미술 운동에 참여한 프랑스 화가 장 엘리옹(1904~87)은 릴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그후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26년 우루과이 화가 호아킨 토레스-가르시아(1874~1949)를 통해 입체주의를 알게 되었고,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몬드리안을 만났다.
또한 반 두스뷔르흐를 알게 되었으며 그의 선언문에 서명했다.
엘리옹은 1930년대에 제작한 기하 추상으로 유명한데 그의 작품들은 기묘하게 구부러진 면들로 이루어진 넓게 패턴화된 구성으로 1920년대 초에 페르낭 레제가 제작한 기계적 회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구체 미술 선언문은 간결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 회화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첫째, 미술은 범세계적이다.
둘째, 미술작품은 제작되기 전에 예술가의 정신에 의해 완전히 인식되고 형성되어야 하며, 자연의 형식적인 특성이나 인간의 관능성 혹은 감상성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정주의, 연극성, 상징주의 등을 배제하고자 한다.
셋째, 회화는 완전히 순수한 조형 요소, 즉 면과 색채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회화적 요소는 ‘그 자체’ 이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회화도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넷째, 회화의 요소뿐만 아니라 구성도 간결하고 시각적으로 조절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법은 기계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확하고 반인상주의적이어야 한다.
여섯째, 절대적인 명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선언문은 구성주의로 대표되는 일종의 비재현적 추상과 자연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세부 묘사를 줄이는 재현적 추상, 그리고 표현적 추상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반 두스뷔르흐가 1931년에 타계한 뒤 구체 미술이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다가 1936년 스위스에서 막스 빌과 아르프에 의해 다시 사용되었다.
막스 빌(1908~94)은 ‘구체 미술’이란 제목으로 1944년 바젤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회, 1960년 취리히 미술협회에서 열린 전시회 및 1964년 취리히의 헬름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 등 여러 전시회를 기획했다.
스위스인 빌은 1927~29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
1929년부터 화가, 조각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일을 했고, 1932~36년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반 두스뷔르흐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30년에 구체 미술을 채택하여 스위스에서 추상 대신 구체란 용어를 유행시켰다.
그는 1941년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갔으며 그곳에서 구체 미술의 개념을 전파했다.
빌의 작품은 주로 차가운 미술이라 불리던 유형에 속했는데, 차가운 미술이란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유발시키는 수학적 공식에 입각한 기하 추상 혹은 구성주의 미술 유형을 가리킨다.
빌은 자신이 기획한 전시회들에서 구체라는 단어를 추상과 거의 비슷한 분야를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그 명칭이 비구상 미술을 폭넓게 지칭하도록 만들었다.
도날드 저드와 로버트 모리스 같은 미니멀 아트의 주도적인 예술가들은 빌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빌이 상당히 기여한 구성주의 미술 경향은 훗날 추상 미술과 체계적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빌은 구체 미술을 수학적 원칙에 의거하여 부분들 사이의 비율과 관계를 결정하는 기하 추상이나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가 기획한 전시회에 수학적 태도를 취한 예술가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구체 혹은 구체주의자라는 단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웨덴에서 기하적 추상 양식으로 작업하던 예술가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요네스, 베르틀링, 로드헤 등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를 다양한 양식으로 응용했다.
1941~47년 스톡홀름 미술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한 아르네 요네스(1914~76)의 기념비적인 조각은 공간이나 환경과 하나로 통합되므로 건축적인 형태를 띤다.
그러나 분위기는 매우 서정적이며 유기적인 성장을 연상시키거나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종종 현저하게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1948년경 로트와 레제의 영향을 받은 뒤 기하 추상으로 방향을 바꾼 올레 베르틀링(1911~81)은 직사각형과 수직 수평선이 지배적인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추구하다가 점점 자신의 개성적인 화법을 발전시켜 매우 단순화된 쐐기 형태가 두드러진 선명한 검정, 빨강, 노랑 색조의 추상화를 그렸다.
야한 금속성 색채의 그의 그림들은 사당히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렌나르트 로드헤(1916~)는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그림을 그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기하 추상으로 전환했으며,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구체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48년 솔다티, 무나리, 평론가 질로 도르플레스 등의 후원으로 구체 미술운동(MAC, Movimento per l'arte concreta)이 일어났다.
아타나시오 솔다티(1896~1953)는 처음에는 건축을 공부하여 1920년 학위를 받은 뒤 1922년부터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와 형이상학적 회화의 영향 아래 주로 정물화를 그렸으나, 1930년대 후반 구성주의로 전향했고, 1946년 구체 미술 운동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1950년가지 솔다티는 이탈리아의 기하 추상의 선구자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조각가이며 화가로서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사회적 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한 브루노 무나리(1907~)는 짧은 기간동안 미래주의에 심취하며 1931년 항공 회화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쓸모없는 기계로 명명한 추상 구조물과 철사 모빌이었다.
무나리는 1938년 자신의 기계 미술 개념을 설명한 여러 선언문 중 첫 번째인 ‘기계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구체 미술 운동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의 아르테 프로그라마타Arte Programmata, 즉 산업 디자인과 연계된 복수 제작품 미술의 선구자였다.
아르테 프로그라마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키네틱 아트에 대해 붙여진 용어로 프로그램 중에 무작위적 요소가 개입될 수도 있으나 대체로 모터로 작동되는 일련의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그 박에 옵 아트와 환경 미술을 비롯하여 특히 광선을 이용한 환경 미술에서의 관람자 참여도 여기에 포함된다.
무나리는 1951년 로마에서 개최된 ‘이탈리아의 추상 미술과 구체 미술전’에 참가했다.

1940년대 후반 폰타나도 이 구체 미술 운동과 연관이 있었고, 카포그로시는 짧은 기간동안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작업했다.
아르헨티나 태생 이탈리아 조각가이며 도예가 루초 폰타나(1899~1968)는 1930년 밀라노의 밀리오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처음으로 비구상 조각을 선보였고,
1935년까지 다수의 추상 작품을 제작하면서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새로운 양식과 기법을 추구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흰색, 검정색, 황금색 석고로 장식적인 도기 작품 및 추상 입상들을 제작했다.
1934년 파리의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고, 이듬해 제1회 이탈리아 추상 예술가 선언문에 서명했으며, 이탈리아에서 열린 최초의 공동 추상 미술전에 참가했다.
1946년 유명한 ‘백색 선언 Manifesto Blanco’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네온 및 텔레비전과 같은 첨단기술을 사용하여 전후의 새로운 정신을 표현한다는 자신의 새로운 미학을 표명했다.
그는 이젤회화의 환영적 혹은 허상의 공간을 거부하고, 대신 색채와 형식을 실제 공간에서 자유로이 전개시켜 캔버스의 틀이나 조각의 부피를 벗어나는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새로운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작품을 건축과 주변 공간에 완전히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이후 대두될 공간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고, 폰타나의 이론은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모두에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주세페 카포그로시(1900~72)는 로마 태생으로 법학을 공부한 뒤 1927년 파리로 갔으며, 1930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33년 이탈리아로 돌아오자마자 로마 화파의 일원이 되었다.
1949년 로마 화파와 결별한 뒤 표현적 추상과 구체 미술의 중간 격인 ‘기호’ 구성회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곧바로 앵포르멜에 반발하던 많은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카포그로시는 곡선으로 된 안쪽에 톱니 모양이 불쑥 나와 있는 빗과 유사한 형태의 서체적 상징을 사용했으며, 이 기본 이미지로 표면에 율동적인 연결감과 운동감을 부여했다.
잘 연결된 표면 위에 표의문자를 연상시키는 디자인, 즉 고립되었지만 균형이 잡힌 요소들을 겹쳐 놓음으로써 모든 방향으로 무한하게 팽창할 수 있는 올오버 패턴을 만들어냈다.

구체 미술이라는 용어가 사실상 기하 추상과 동의어라는 것은 1945년 파리의 르네 드루앵 화랑에서 열린 ‘구체 미술전’이라는 전후 최초의 중요한 추상 전시회를 통해 알 수 있다.
반 두스뷔르흐 미망인의 도움으로 이 전시회에는 들로네 부부, 도멜라, 에르뱅, 몬드리안, 칸딘스키, 마넬리, 조피 토아버-아르프, 앙투안 페브스네르 등과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집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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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예술로 둔갑한 신문기사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하는 데 열정적이던 워홀은 현대의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눈을 돌렸다.
그것이 바로 매일매일 터져 나오는 새로운 사건,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하는 신문의 표지기사(cover story, 신문의 1면 기사)들이다.
그는 일간지 《뉴욕 포스트》 1961년 11월 3일자 표지기사 〈메그의 남자〉(그림 82)를 확대했다.
영국의 마가렛 공주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의 왼쪽 상단에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마가렛 공주와 시나트라의 얼굴을 사진과 달리 초상화처럼 그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막상 초상화를 보면 신문표지를 재현한 것임을 알면서도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게 했다.
글자와 숫자는 워홀의 그림에서 중요한 회화적 요소였으며 날카롭게 각진 글자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대충만 보지 않고 읽도록 시각적으로 충동했다.

그가 두 번째 신문 표지기사를 그린 것은 1962년 3월 29일자 《데일리 뉴스》였다.
신문의 앞면과 뒷면을 함께 그렸는데 뒷면의 기사 제목은 〈에디 피셔 쓰러지다/여기 병원에 입원:로마에 있는 리즈〉(그림 83)로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가수 에디 피셔와 영화배우 리즈 테일러에 관한 내용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 부부인 데다가 그때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기사는 더욱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인기 있는 두 스타의 붕괴되기 직전의 부부관계를 주제로 그리는 것이 바로 워홀의 의도였다.
그가 리즈를 그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62년 여름 워홀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주간지 《타임》이 자신의 기사를 보도한 데다 앞서 말했듯이 7월에는 로스앤젤레스 페러스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신문 표지기사로 작품을 해오던 워홀은 6월 비극적인 사회 사건들을 주제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워홀은 그 동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헨리가 내게 죽음과 재난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었다.
1962년 6월 4일 우리는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그가 테이블 위에 《뉴욕 미러》 신문을 올려놓았다.
신문의 표지기사는 ‘비행기 사고로 129명 사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죽음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자동차 사고, 재난, 사형을 집행하기 위한 전기의자 등등…….

헨리는 “삶에 관해서는 충분하다. 이젠 죽음에 관해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는 의아해 하는 워홀에게 신문을 내밀며 “이것이 진짜 일어난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헨리가 보여준 《뉴욕 미러》의 〈129명 비행기 사고로 사망!〉(1967. 6.4) 기사는 파리 근처에서 프랑스의 보잉 707기가 추락한 내용을 보도한 것으로 워홀의 세 번째 표지기사 그림이 되었다(그림 80).
비행기 사고는 자동차 사고에 비해 횟수는 적지만 떼죽음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에게 끔찍한 사건으로 각인된다.

워홀은 “내가 작업하는 모든 것들이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리즈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친구 스웬슨에게 “그녀가 병에 걸렸으므로 사람들은 그녀가 곧 죽을 것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
워홀은 신문을 읽다보니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공휴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운전하게 되므로 자연히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도 부쩍 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혹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신문과 잡지를 자주 뒤적거린 워홀은 “지독한 장면을 보고 또 보다보니 아무 느낌도 생기지 않더라”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한 자동차 사고현장은 그의 가장 과격하고 힘 있는 주제였다.
〈불타는 푸른 자동차, 아홉 번〉(그림 84)은 자동차가 뒤집어진 채 불타는 장면을 초록색으로 아홉 번 실크스크린하여 캔버스에 부착한 것이다.
실크스크린 작업은 정교한 기교를 요해 어느 정도 훈련기간이 필요했다.
워홀은 수없이 실험했으므로 이제 제법 기교를 부릴 줄도 알게 되었으며, 일부러 얼룩을 남겨 세심하지 않게 묘사하는 방법은 그의 술수적인 기교의 소산이었다.
그림의 오른쪽 끝을 부러 겹치게 하여 생기는 반복효과를 회화적 요소로 사용했다.
아홉 번을 반복해도 여전히 충돌사고 현장은 참혹했다.
수십 번을 반복한 〈시각적 자동차 충돌〉(1962)은 워홀의 말마따나 옷감의 무늬처럼 나타났다.
추상화처럼 보이는 그 그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고의 구체적 장면이 보였다.
〈발과 타이어〉(그림 85)는 자동차 타이어에 신발이 낀 모습만을 크게 확대하여 추상화처럼 묘사한 작품으로 신발과 타이어로 한정하여 사고현장을 상징했다.
이러한 작업은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동정을 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참혹한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도록 하여 한 번쯤 자동차 사고가 끔찍하다는 것을 상기하게 했다.

워홀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난 친절하게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그들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만든다.”

신문표지 그림들은 워홀의 회화 경향에 분기점이 되긴 했지만 훌륭한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들을 경악시킨 기사를 재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워홀 자신도 그러한 그림들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시 수프 통조림과 코카콜라 병을 그리기 시작했다.
〈푸른 코카콜라 병들〉(그림 86)은 112개의 병을 바둑판처럼 가로세로로 반복하여 대량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 요소로 사용한 작품이다.
동시에 병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
고르게 색칠한 병들은 반듯한 모습이었지만 어떤 병은 고의로 엷은 색조를 사용했고 어떤 것은 마시고 난 후의 빈병이었다.
이러한 경우를 보더라도 워홀은 진지한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그는 훌륭한 예술가라기보다는 술수적 디자이너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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