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마를린 먼로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로스앤젤레스 페러스 화랑에서 열린 워홀의 첫 개인전이 끝난 다음날인 1962년 8월 5일 남자들의 성의 우상 마를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대적으로 보도된 그녀의 자살기사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가장 인기 있는 스타로 헐리우드의 공주였던 마를린이 무엇이 부족하여 세상을 버렸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론은 몇 주에 걸쳐 마를린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 배우로서의 활약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녀의 사생활을 파헤쳤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한 그녀를 동정했다. 워홀은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마를린을 직접 만난 적이 두 번 있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만남이란 물론 일방적인 만남으로 멀찌감치 서서 그녀를 바라본 정도에 불과했다.
그 정도 만남이야 많은 남자들에게도 해당할 터이며 워홀이 그녀를 흠모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이야 어찌 워홀 한 사람에게만 있었겠는가!
그녀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여전히 사람들이 그녀에 관한 관심을 버리지 않자 워홀은 그녀를 자신의 예술을 위한 전리품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의 마를린 사진이 수록된 책을 사서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를린의 목 아래 부분은 삭제하고 얼굴만 크게 실크스크린하거나 커다란 캔버스에 실크스크린한 작은 캔버스를 2개, 4개, 6개, 또는 20개씩 병렬시키기도 했다.
마를린의 초상화도 수프 통조림이나 우표처럼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다가 나중에는 마를린의 얼굴, 머리카락, 눈썹, 입술, 목덜미에 여러 가지 색을 칠했다.
워홀은 아름다운 여배우의 머리카락을 노란색으로 칠하고 눈썹은 녹색으로, 입술은 붉게, 얼굴은 피부색으로 그리고 옷깃은 초록색으로 칠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색들은 바탕의 오렌지색과 어울리지 않는 상대색들이었다(그림 87).
캔버스에 먼저 색을 칠해놓고 색이 마르면 그 위에 마를린의 형태를 실크스크린했는데 사진의 이미지가 흑백으로 인쇄되면서 바탕의 밝은 색들과 어우러졌다.
조수 글럭은 워홀에게 가장자리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실크스크린을 밀 때마다 정확하게 인쇄가 되도록 하자고 말했지만 워홀은 잽싸게 일하는 성질이라서 그런 소심한 짓을 하기 싫어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초상화에 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물감이 밖으로 삐져나가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머리의 형태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고 붉은 색이 입술 밖으로까지 번지게 했으며 눈 가장자리의 녹색은 실제 여배우의 화장보다 훨씬 컸다.
글럭의 말에 따르면 작업을 마쳤을 때는 입술이 약간 비스듬해졌고 눈썹은 조금 위로 올라갔으며 머리카락은 오른쪽으로 넘쳐났다고 한다.
글럭이 워홀에게 “앤디, 조금 비뚤어졌어”라고 하자 워홀은 “난 그게 더 좋아”라고 대꾸했다.
〈100개의 마를린 초상화〉라고도 불리우는 〈마를린 접개〉는 두 개의 캔버스로 제작되었는데 한 캔버스에는 색을 사용하여 50개의 마를린 초상화를 실크스크린했고, 다른 캔버스에는 흑백으로 50개의 초상화를 실크스크린했다.
흑백 초상화에는 검정색을 일부러 진하게도 흐리게도 칠했는데 마치 신문을 인쇄할 때 실수로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부러 얼룩을 남기는 전형적인 회화방법을 사용했다.
워홀은 기계를 조작하여 자신이 바라는 색조로 조절할 만한 기교가 있었지만 실크스크린을 그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서투름을 조작했다.
기교로 보면 낡은 수법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크스크린이라는 최근의 수단에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 초상화는 새로운 감각을 창출하기에 충분했다.
팝 아트란 말을 처음 사용하고 누구보다 팝 아트에 대해 잘 이해했던 영국인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워홀의 연속적인 이미지들은 일본의 플라스틱 장난감들처럼 보인다.
회화적으로 보면 단순히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 이미지들은 생명력 있는 제스처로 나타나 새삼스럽게 인간적으로 보이거나 최소한 우연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