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니즘


윌러비 샤프는 1967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린 ‘광선, 움직임, 공간’ 전시회 도록에서 처음으로 루미니즘Luminism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루미아Lumia란 용어는 토머스 윌프리드(1889~1968)가 20세기 전반기에 자신의 광선 구조물을 설명하며 이미 사용한 적이 있었다.
덴마크계 미국 실험예술가 윌프리드는 덴마크, 런던, 소르본 대학에서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 뒤 1916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광선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지 않고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 매체로 생각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1905년부터 백열등과 담배상자 안에 집어넣은 채색된 유리조각들을 이용하여 광선 구조물을 실험했다.
1919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건과 이들을 연결시키는 색깔 있는 연동장치로 이루어진 5개의 건반과 6개의 주된 영사기 및 여러 개의 보조투광기로 구성된 장치를 가지고 최초의 ‘클러빌럭스 Clavilux’를 제작했다.
이것은 회전하며 조절되는 거울들과 채색된 유리 슬라이드들을 통해 빛의 흐름이 스크린 위에 투사되도록 조종되고, 스크린 위에는 미묘하고 복잡한 색채의 변화와 혼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928년에는 자동으로 조작되는 클러빌럭스를 처음 제작했다.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작품을 20개 이상 제작했으며,
시카고의 셔먼 호텔에 있는 64m 길이의 <움직이는 벽>(1929)과 1964년 뉴욕 모마 강당 라운지에 설치된 <루미아 조곡 Op. 158> 등 빛을 이용한 많은 다른 구조물을 제작했다.
1930년 빛을 미술의 영역에서 사용하기 위한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라이트 아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윌프리드는 1948년 12월 <미학과 미술 비평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더욱 위대한 리얼리티, 조화로운 의식, 인간의 본질과 위대한 공통분모 사이의 균형, 즉 보편적이고 리드미컬한 흐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미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경에 생긴 ‘색채 오르간’ 개념은 다색 광선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거나 음악은 없더라도 음악을 연상시키는 구성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며, 예수회 신부이자 수학자인 루이 베르트랑 카스텔(1688~1757)이 1734년에 처음으로 색채 오르간인 <클레브생 오퀼레르>를 연주했다.
다색 광선의 움직이는 형태와 음악을 조화롭게 일치시키거나 둘 사이의 연관성을 연상시키려는 시도는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과 러시아 추상화가 바라노프-로시네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알렉산데르 스크리아빈(1872~1915)은 1915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열린 <프로메테우스> 공연에서 음악과 광선이 어우러진 환경을 구축했으며, 블라디미르 바라노프-로시네(1888~1942)는 <색채 피아노>를 제작했다.
그는 <색채 피아노> 위에서 시각적 연주를 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회화를 수학한 바라노프-로시네는 1910~16년 파리에 머물면서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입체주의에 이르는 현대 미술을 섭렵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추상화와 추상 구성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No. 1>(1913)은 뉴욕 모마에서 소개한 것으로 다색의 목판과 잘게 부순 계란껍질 및 판지로 제작한 것이다.
그는 193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비구상적인 색채 구성으로 음악적인 소리와 같이 공명하는 비구상 미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표현적 추상을 이끌어냈던 19세기 말의 주요 미술 개념 중 하나였으며 이런 경향은 쿠프카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보헤미아 동부의 오포치노 태생 구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는 소년 시절 그 지방에서 강신술사자로 알려져 비밀 종파를 이끈 마구제조인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이때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 나타나자 강신술과 비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신지학에도 관심을 쏟았고, 특히 신지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1888년 야로메르에 있는 미술실업학교에서 알로이스 스투드니치카Alois Studnicka(1842~1927)의 지도로 미술 수업을 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프라하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체코의 나자렛 화파의 추종자였던 스투드니치카의 영향으로 쿠프카는 장식미술과 추상미술의 표현력 있는 색채와 체코 화가 요세프 마네스Josef Manes(1820~71)와 미쿨라시 알레시Mikulas Ales(1852~1913)에 대해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쿠프카는 프라하에서도 역시 나자렛 화파의 종교 화가인 프란티세크 세크벤스Frantisek Sequens(1836~96)에게 지도받으며 정신적 상징주의 미술을 주창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더욱 공고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쿠프카는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모든 추상적인 것들을 묘사할 수 있는 수단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를 창조하기로 하고 스스로를 ‘색채 교향악가’라고 했다.

쿠프카는 움직임의 묘사와 에티엔-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래프chronophotograph 기법,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비재현적인 추상 형태로 움직임을 암시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09년 음악의 법칙에 따른 움직임과 연속운동을 묘사한 파스텔화와 소묘 연작을 내놓았다.
그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음악에서 유추한 미술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라슬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1895~1946)는 1920년대에 ‘광선 조절기’를 제작하면서 ‘프로그램이 입력된 광선 로봇’으로 묘사되어 온 광선 전시 기계를 만들어 영화 <광선 전시, 검정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1925~30)의 제작에 사용했다.
헝가리계 미국 화가이며 조각가 모홀리-나기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1918년 부다페스트에서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모임인 오늘이라는 의미의 마MA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 빈으로 갔고 그곳에서 말레비치, 리시츠키, 가보의 영향을 받았다.
1923~28년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하며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실험영화, 연극, 산업디자인, 사진, 타이포그래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1928년 그로피우스와 함께 바우하우스를 그만두었으며, 그후 몇 년 동안 베를린에서 주로 무대디자인과 실험영화를 제작했다.
1935년 런던으로 가서 <서클> 선언문으로 대표되는 구성주의 그룹에 합류하여 광선회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런던에서 공간 조절기Space Modulators로 명명한 구조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37년 시카고로 활동무대를 옮겨 뉴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고, 조지 케페시와 함께 디자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모홀리-나기는 구성주의 화파에서 가장 실험정신이 강하고 다재다능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미술에 광선, 움직임, 사진, 영화,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소위 순수미술은 전체 환경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구성주의 원리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21년 한스 리히터(1888~1976)는 V. 에겔링과 함께 광선을 투사하여 자신의 첫 번째 추상영화인 <리듬 21>을 제작했다.
베를린 태생 독일 화가 리히터는 1917년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 다다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때부터 추상 작품을 제작했지만 표현주의적 성격을 띤 목판화와 리놀륨 판화도 계속해서 제작했다.
1918년 스웨덴 추상화가 에겔링을 만나 오랫동안 교류하며 함께 음악의 리듬과 대위법에 바탕을 둔 추상적 ‘두루마리’ 소묘를 제작했다.
1920년에 신조형주의와 구성주의를 접한 후 1921년부터 추상영화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검정색, 흰색, 회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커다란 캔버스에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효과를 실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투사기는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레 파르크, 리폴드, 게르하르트 폰 그레베니츠, 페테르스, 비아시 등은 광선을 투사하기 위해 회전하거나 곡면을 지닌 거울과 반사기, 편광, 렌즈와 프리즘을 이용한 굴절 조절, 막힌 부조 표면 등을 이용한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아르헨티나 실험예술가 훌리오 레 파르크Julio Le Parc(1928~)는 1958년 파리로 건너가 잠시 빅토르 바자렐리 밑에서 작업한 후 시각예술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옵 아트, 키네틱 아트, 광선을 이용한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예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과학적 원칙에 따라 작업했으며, 작품에 대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고, 시각예술연구회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제작을 선호했다.
그는 관람자의 주관적인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자극에 따라 발생하는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각 반응을 찾았다.
1960년경에는 색채와 광선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프리즘과 입방체를 사용하여 모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했는데,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은 투명성과 반사광 면에서 계산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가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부조도 제작했고, 여러 재료의 다양한 표면 질감을 이용하여 반사광을 얻었다.

미국 조각가 리처드 리폴드Richard Lippold(1915~)의 아버지는 기계공학자였다.
리폴드는 1933~37년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1940~41년 미시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중 철사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거의 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은 금속선과 금속대를 사용하여 긴장감 있게 구성된 구조물로 무게가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광선과 키네티시즘에 주로 의존하며, 특히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에서 움직임이 발생하는 기법을 이용했다.

네덜란드 실험예술가 헨크 페테르스Henk Peeters(1925~)는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눌Nul 그룹의 일원이었다.
눌은 네덜란드 신경향 미술을 대표하는 구성주의, 실험예술가들의 그룹으로 1961년 페테르스를 비롯하여 얀 스혼호벤, 헤르만 데 브리스가 결성했다.
독일 그룹 제로Zero와 유사한 목표를 추구했으며 종종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페테르스는 1960년에 추상화로 스위스 상을 수상했다.
주로 흰색의 일상 재료들로 콜라주와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뒷면에 투명 나일론을 댄 탈지면으로 된 패널이다.
또한 빛과 물의 효과를 탐구한 작품도 선보였는데 예를 들면 1965년 겔젠키르헨에 있는 할프만스호프에서 전시한 <물-천장>이다.
빛을 독립된 미적 매체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에서 프리즘과 렌즈를 이용하여 빛의 굴절을 통제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실험예술가 알베르토 비아시Alberto Biasi(1937~)는 그루포 N의 일원이었다.
그루포Gruppo N은 1959년 파도바에서 결성된 그룹으로 여기에 비아시를 비롯하여 엔니오 키조, 조반니 안토니오 코스타, 에도아르도 N. 란디, 만프레도 마시로니가 속해 있었다.
주로 기하 추상, 특히 옵 아트, 환경 미술, 관람자의 참여에 관심을 가졌다.
비아시는 자그레브에서 아르테 프로그라마타 협회 및 신경향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고, 산마리노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주로 프리즘을 통해 굴절된 빛의 분산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된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가보의 <광선 축제>(1929)이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1938년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작품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다.
이 작품이 현대의 ‘소리와 광선’ 공연의 시초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폰타나와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 특히 피네, 마크, 워커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다.

제로는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오토 피네Otto Piene(1928~)와 하인츠 마크Heinz Mack(1931~)가 결성한 그룹으로 두 사람 모두 키네틱 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으며, 뒤에 귄터 워커Gunther Uecker(1930~)가 그룹에 가세했다.
그룹의 주장은 그룹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의 정기간행물 <재로>를 통해 발표되었다.
제로는 새로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침묵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이런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순수한 색채와 빛의 효과를 위해 구체적인 형상과 형태를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피네는 작품 ‘빛의 발레’에서 색깔이 있는 투명한 가스가 채워진 풍선을 이용했다.
이 그룹은 신경향 운동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공동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1948~53년 뮌헨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953~57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피네는 1965년부터 뒤셀도르프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주로 단색조의 그림을 그렸지만 차폐장치를 사용하여 광선을 조절함으로써 화면 위에 보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반사경, 일광 반사 신호기 등을 이용하여 광선에 대해 연구했다.
1959년 무렵부터 양초 모양의 검정색으로 된 패턴을 사용하여 그림자 소묘와 그림자 회화를 제작했다.
동시에 무용수 대신 기계가 그림자를 투사하는 광선 발레도 제작했다.

피네는 자신의 광선 발레에 관해 말했다.
“나는 광선이 벽 위에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투영되는 거대한 반원형의 공간을 생각한다.
관객들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전기 광선과 플렉시글라스로 오브제를 만들어 그것을 헬륨 조형물Heliumplastik이라고 불렀고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하기도 했다.
피네는 루미니즘과 다감각적인 환경 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한 선구자이다.

1950~53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마크는 1965년 마르조토 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파리 비엔날레에서 1등상을 차지했다.
마크는 스스로 ‘역동적인 구조물’이라고 부른 광선 오브제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매끄럽게 광택을 낸 금속판들을 플렉시글라스나 휘어진 유리판 뒤에 놓고 전기 모터를 통해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전달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반사 광선을 생성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1968년애는 광선 오브제에 눈부신 태양 광선을 반사시켜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구현해내는 ‘사하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한 TV 영화를 위해 11m 높이의 광선 기둥을 세운 것도 특기할 만하다.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에서 공부한 워커는 1950년대 후반부터 흰색 못을 사용한 독특한 작업을 선보였는데, 바탕 판에 흰색 못을 용접하는 방식으로 오브제를 제작했다.
이 오브제는 공간 안에서 특별한 광선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광선 숲>(1959)에서 못의 머리 부분은 그 크기가 일정하지만 못의 길이는 약간씩 불규칙하여 못들이 꽂혀 있는 판 위로 물결이 치는 듯한 또 하나의 새로운 표면이 만들어진다.
1960년대에는 광선 상자와 회전하는 원반을 이용했으며 후에는 네온 튜브를 사용하여 광선 조각을 실험했다.
그의 작품은 옵 아트, 키네틱 아트, 루미니즘과 유사하다.

미술작품에 광선을 이용한 실험예술가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이 사용한 기법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선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으로, 광선은 매우 환상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되어 한마디로 규정지어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새로운 광선 연구에 깊이 몰두한 예술가들 중 일부는 새로운 방법과 기구에 몰두하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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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개인전을 거절했던


가장 두드러진 팝아트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던 워홀의 시도는 적중했다.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스타들의 초상화는 자연히 인기가 있었고 중개상들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뉴욕에 있는 화랑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지 못한 형편인 그에게 아름다운 일레노 와드가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녀는 화랑이 좁다는 핑계로 워홀의 개인전을 거절했던 화랑주인이다.

일레노는 여왕벌처럼 행세하면서 명령하기를 좋아했으며 고급 옷을 입고 귀족처럼 우아한 폼을 잡았다.
이성적이지만 지나치게 따지는 타입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데가 있는 그녀는 1940년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담배를 피우면서 가끔 눈망울을 깜빡이며 매력 포인트를 과시하려 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때는 곧잘 화를 냈다.
맨해튼에서 성장한 일레노는 광고기획 일을 한 적이 있고 파리에서 유명한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오르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1953년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센트럴 파크 남쪽에서 두 블럭 떨어진 7애비뉴에 과거 마굿간을 하던 곳을 세내 화랑을 열었는데 화랑의 이름을 마굿간(스테이블, Stable)이라고 불렀다.

일레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하여 후원했는데 그녀의 안목은 남달리 정확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화랑에 소속된 예술가로는 조셉 코넬, 조안 미첼, 이사무 노구치,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처드 스탠키비츠, 시 툼블리가 있었다. 일레노는 1960년 화랑을 확장해 33 이스트 74번가에 있는 연립 주택 아래층으로 이사했으며, 세 예술가를 더 후원했는데 알렉스 캐츠, 로버트 인디애나, 그리고 얌전하고 조용한 성격의 마리솔이었다.

워홀의 미학적 조언자 디는 일레노와의 자리를 마련해 세 사람은 함께 술을 마셨다.
디는 일레노에게 워홀의 전람회를 열어줄 것을 종용했다.
“자, 일레노.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네가 앤디의 전람회를 열어줄 것이냐 아니냐인데 앤디는 훌륭한 예술가야. 앤디는 전람회를 가져야만 해”라고 말했다.
워홀은 그때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 여자는 지갑을 꺼내 돈을 헤아려보더니 2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게 주면서 ‘앤디, 당신이 이것을 그린다면 당신의 전람회를 열어주겠어’라고 말했다.

일레노가 자리를 뜨자 디는 그녀를 조심하라고 충고하면서 그녀는 라우센버그와 툼블리에게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노구치 같은 유명한 예술가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일레노는 그녀의 화랑에서 라우센버그의 그림을 소개할 무렵 화랑의 잡일을 하던 라우센버그에게 빗자루를 들고 화랑을 청소하도록 시켰다고 알려주었다.

워홀은 일레노의 화랑을 자주 방문해 근래 예술가들의 작품을 참조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유능한 일레노와 마주치기를 기다리곤 했다.
워홀은 의당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출세를 위해서라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워홀의 켐벨 수프 통조림 그림을 본 일레노는 워홀을 재능 있는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여성적인 남자 동성애자에게 호감을 가지는데 소박하고 진지하며 어딘가 얼띤 데가 있는 워홀도 여성적인 성격의 동성애자였다.
일레노는 워홀이 마음에 들었지만 전시계획이 차 있어 곧 워홀의 전람회를 열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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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주의


색채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공간을 암시하는 양식을 동시주의Simultanisme(Simultanism)라 하는데, 로베르 들로네(1885~1941)가 창안한 용어이다.
파리 태생으로 장식적 상업회화를 공부한 뒤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들로네는 1906년에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가지며 모티프가 될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인상주의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빛과 색채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신인상주의는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1861~1944)이 1886년에 만든 명칭이다.
조르주 쇠라(1859~91)는 신인상주의 운동의 제창자로 대표적인 화가였고 친구 폴 시냐크는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신인상주의의 이론적 토대는 점묘법을 사용한 분할주의로서 순색의 색점으로 그리는 것인데 작품의 규모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점의 크기를 조절한다.
쇠라 작품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강렬한 빛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한다.
쇠라의 분할주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앙리 마티스가 주로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쇠라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들로네는 1912~13년에 <원반>과 <우주의 원형>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동시적 창>에서 시작한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이었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말했다.
“오로지 색채만이 형태이자 주제이다.
회화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묘사적이고 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불완전한 표현수단으로 인해 점차 타락하여 노예 상태나 모방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가 빛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사물에 비친 빛이나 여러 사물 사이의 관계에 의해 파생되는 빛을 그리는 데 급급하여 빛에 회화적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들로네의 작품들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Orphism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아폴리네르는 1912년 섹시옹 도르Section d'Or 전시회와 1913년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 전시된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오르피즘이란 명칭을 만들어냈다.
섹시옹 도르는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한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했고, 자신의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1913)에서 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그리는 회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보고 여기에 들로네 외에 들로네의 아내 소니아 들로네-테르크, 프랑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페르낭 레제, 쿠프카 등을 포함시켰다.

비재현적 추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프란티셰크 쿠프카(1871~1957)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한 후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화가 중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화가 중 하나이다.
그가 수년 동안 습작을 통해 연마하고 발전시킨 아이디어들은 <무정형: 두 가지 색의 푸가>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이 작품은 1912년 살롱 도톤에 그의 다른 작품 <따뜻한 색채 이론>과 함께 전시되어 일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미술사에서 의도적으로 제작된 최초의 비재현적 추상화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들은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는 명칭을 창안해낼 때 오르피즘의 예로서 들로네, 피카비아 회화와 더불어 인용되었다.
그의 1912년작 <누턴-원반>은 여러 개의 원이 서로 겹쳐지고 스펙트럼같이 다양한 색상으로 분할된 추상 구성 작품으로 서로 대비되는 색상들을 이용하여 색채의 추상성을 실험한 들로네의 시도와 일치했다.

오르피크orphique라는 단어는 이전에 상징주의자들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아폴리네르는 여기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한 입체주의에 서정적 색채를 가미하려는 시도나, 쿠프카처럼 순수 색채 추상과 음악의 유사성에 관심을 갖는 경우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마케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오르피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낭만적인 연상 때문이었다.

들로네는 동시주의라는 용어를 미셀-외젠 슈브뢸의 저서 <색채의 동시 대비와 채색된 대상의 배열에 관한 법칙>(1839)에서 따왔으며, 이 책은 쇠라와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색채 이론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들로네는 말했다.
“1912~13년경 나는 오직 색채와, 색채의 대비로만 이루어지면서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동시에 지각되는 회화 형태를 생각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슈브뢸의 과학 용어인 ‘동시 대비’를 사용했다.”

그러나 슈브뢸에게 있어 이 용어는 인접한 두 색채가 대비를 이루면서 각각의 특성을 상호 고취시키는 시각적인 효과를 설명한 것으로 순전히 과학적인 성격의 용어였다.
반면 들로네는 이 용어를 부정확하고 다소 모호하게 사용했다.
즉 색채는 추상화 내에서 회화적 형태는 물론 움직임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며,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이 용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들로네의 이론과 작품은 색채가 단순히 드로잉을 보조하는 장식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1900년경부터 유럽 회화에 널리 펴져 있던 이런 경향은 들로네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추상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의 발전, 특히 1930년대 막스 빌이 주창한 구체 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키네틱 아트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동시주의는 아폴리네르가 채택하여 일반화시켰다.
그는 이것을 통해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낸 자신의 ‘칼리그람 Calligramme’의 토대와 당시 유행하던 예술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시성’의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진적엔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동시성은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의 토대를 형성한 것 외에도 상드라르, 르베르디, 거트루드 스타인의 글과 사티의 음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시주의에 대해 가장 예리하게 설명한 사람 중 하나인 로저 섀턱은 <연회 시대>에 “후안 그리스의 정물화, 아폴리네르의 시, 프루스트의 시구나 심지어 다음조 음악 등 어떤 경우에도 예술작품은 다양한 시대와 장소 및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대등하게 통합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1976년 3월 ‘시간과 공간은 어제 죽었다’ 전시회가 케임브리지의 케틀스 야드에서 열렸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전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이해했던 방식 그대로의 동시주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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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더욱 커다란 크기로


워홀은 더욱 커다란 크기로 실크스크린을 뜨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옆에서 실크를 잡아주거나 실크가 접히지 않도록 도와줄 조수가 필요했다.
1963년 6월 어느 날 워홀은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뉴스쿨(New School)에서 개최된 시낭송회에 갔다가 갓 스무 살이 된 곱슬머리 시인 제라드 말랑가를 소개받았다.
브롱크스에서 태어나 와그너 칼리지를 졸업한 후 직장을 찾고 있던 말랑가는 워홀에게 자신은 실크스크린을 거의 전문가처럼 제작할 수 있다고 하면서 조수로 채용해 달라고 했다.
사실 3년 전부터 직물 디자인을 하기 위해 방과후 실크스크린 제작을 해왔던 말랑가는 다음날 워홀의 작업실에 나타난 그날부터 시간당 1달러 25센트를 받기로 하고 워홀의 조수가 되었다.

말랑가가 처음으로 한 일은 리즈의 초상화를 1m 정사각형으로 제작하는 일이었다.
수차례에 걸친 애정행각을 보여준 리즈는 근래에 병이 났으므로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에 출연하면서 10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더욱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리즈는 함께 〈클레오파트라〉에 출연한 미남배우 리처드 버튼과 사랑에 빠졌다.
흥행에 성공한 이 영화의 영향으로 많은 여자들이 클레오파트라 같은 모습이 되고자 했다. 거리에는 온통 머리카락으로 앞이마를 덮고 짙은 눈 화장을 한 클레오파트라 투성이었다.
말랑가는 워홀의 작업실에서 남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리즈의 초상화를 실크스크린으로 대량생산했다.
워홀은 말랑가에게 리즈의 다양한 포즈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게 하면서 그녀가 과거의 세 남편들과 함께 있는 장면도 제작하게 했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사람들의 관심거리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생에 나타난 남자들〉은 그런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클레오파트라로 분장한 파란 리즈〉는 가발을 쓰고 클레오파트라처럼 분장한 모습의 리즈를 파란색으로 제작한 것이다.

마를린이 여성적인 성의 우상이었다면 남성적인 성의 우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꼽을 수 있다.
워홀은 마를린 초상화를 만들었듯이 가장 대중적인 슈퍼스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엘비스의 노래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했고 엘비스가 출현한 영화만도 여러 편 되었다.
엘비스는 노래를 부를 때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다리를 떨었는데 그의 제스처를 태평로에서 구두를 닦던 소년들도 따라했다.
워홀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의 초상화를 자신의 특허품으로 만들었고 스타의 초상화는 그를 다른 팝아트 예술가들과 구별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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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클로드 오스카 모네는 1840년 11월 14일 파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 아돌프와 어머니 루이스 쥐스틴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파리 9번구 라피트 가 45번지였고 부모 모두 파리에 정착한 2세대 파리인이었습니다.
클로드 오스카는 노트르담 드 로레트 성당에서 세례받을 때의 세례명을 줄여서 오스카로 불리웠습니다.
아돌프는 오스카가 다섯 살 때 서북 해안 노르망디의 르 아브르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 살던 누이 마리 잔 르카드르의 남편이 아돌프를 야채도매업에 끌여들였기 때문입니다.
르카드르는 선구업에도 관여하고 있었으며 르 아브르에 큰 저택을 갖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모네는 1851년 4월 1일 르 아브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훗날 회상했습니다.

천성적으로 규율이 내몸에 맞지 않았다.
어렸지만 나는 어떤 규율에도 굽히지 않았다. …
학교는 감옥과도 같았으며 하루 네 시간 수업이었지만 내게는 대단히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학적부에는 “심성이 매우 착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네는 일찍부터 캐리커처를 그렸고 나폴레옹 시절 궁정화가로 활약한 위대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문하생이었던 장 프랑수아 샤를 오샤르로부터 드로잉을 배웠습니다.
오샤르는 살롱전에 초상화와 풍경화를 출품한 적이 있으며 드로잉의 대가로 알려졌습니다.
오샤르로부터 수학한 예술가 중 샤를 륄리에는 르 아브르 미술학교 책임자가 되었으며 오통 프리에츠와 라울 뒤피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를 즐긴 어머니는 모네가 16살 되던 1857년 1월 28일에 타계했습니다.
그림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는 회화에 대한 아들의 집념을 우려했고 따라서 모네는 아버지와 불화했으며 어머니가 타계한 후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모네는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1858년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마리 잔 고모는 조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리 잔은 아마추어 화가로 쿠르베의 친구 화가 아르망 고티에의 친구였습니다.
조카가 회화에 재능이 있음을 안 고모는 지붕 밑 다락방을 작업실로 내주고 계속해서 드로잉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며 그림재료를 사주었습니다.
그녀가 모네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아돌프를 설득했습니다.
아돌프는 모네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되 경제적 뒷받침은 해주지 않겠다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드로잉 솜씨가 훌륭했던 모네는 오스카 모네를 줄여서 ‘O. 모네’라고 서명한 풍자화를 문방구, 액자, 철물 등을 파는 상점에 내다 팔기 시작했으며 친지와 동네의 유지들이 그의 드로잉을 구입했습니다.
그는 20프랑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훗날 과장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초상화를 그렸다면 지금쯤은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다!”

드로잉은 표구상 그라비에의 상점 진열장에 전시되었는데 상점 주인의 옛 동업자이자 화가 외젠 부댕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된 적도 있었습니다.

외젠 부댕이 르 아브르에서 작업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모네는 그를 따라 바다와 들로 가서 그의 작업을 처음부터 완성될 때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활력과 신선함을 직접 캔버스에 담아야 한다고 한 부댕은 모네에게 “넌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넌 풍경화를 어떻게 드로잉하고 어떻게 색을 칠하는지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야외에서 이젤을 세우고 자연의 모습을 직접 그리는 건 그 무렵에 막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1840년대부터 물감을 튜브에 넣을 수 있게 되어 물감 운반이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걸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 고루한 화가들은 야외에서 직접 그리기를 꺼려했습니다.
화실에서 그린 그림과 자연에서 직접 그린 그림은 당연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자연의 생동감은 기억했다가 화실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동감을 느낀 바로 그 장소에서 그려야지만 그대로 관람자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몇 달 동안 부댕을 따라다니던 모네는 부댕의 작업에 호기심을 갖고 그의 화실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멀리까지 가서 함께 자연 경관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자연히 스승의 회화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네의 초기 작품에서 부댕의 영향을 발견하기란 쉽습니다.

여든두 살 때인 1922년에 모네는 이때를 회상했습니다.

그 상점에 풍자화를 전시하곤 했는데, 그 덕택으로 르 아브르에서 다소나마 유명해졌으며 변변치는 못하더라도 수입이 생겼다.
게다가 외젠 부댕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때 서른 살 안팎이던 그는 막 화가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부댕의 제의를 받아 나는 그와 함께 야외로 가서 작업했다.
물감 한 통을 사들고 둘이서 루엘(르 아브르 동북쪽)까지 갔다. …
그는 이젤을 세운 후 작업에 몰두했다. …
그제서야 베일이 걷히듯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화가로서의 나의 운명이 눈 앞에 전개되었다.
이제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부댕의 덕분일 것이다. …
그는 너무도 자상하게 내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으며 자연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1858년에 그린 <루엘 풍경>은 부댕의 가르침을 받아 그린 것으로 모네가 야외에서 그린 첫 풍경화인 이 작품을 그해 8월과 9월 르 아브르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모네를 가리켜서 “하늘 묘사의 왕”이라고 극찬한 부댕은 모네에게 자연을 탐구할 것을 누누히 가르쳤습니다.
모네는 부댕을 통해 눈이 점차 열리며 자연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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