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아트


미니멀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의 몇몇 특징과 액션 페인팅에 대한 반작용으로 195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경향을 말한다.
미니멀리즘이란 용어와 개념을 러시아계 미국 화가이며 이론가 존 그레이엄John Graham(1881~1961)이 1937년 <미술의 체계와 변증법 System and Dialectics of Art>에서 이미 사용했으며,
앞서 다비트 부를리우크는 1929년 듀덴싱 화랑에서 열린 그레이엄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미니멀리즘은 작업 수단의 최소화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 미니멀리즘 회화는 주제가 곧 회화 자체가 되는 순수하게 사실적인 것이다”라고 적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는지 또는 어디서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레이엄이 쓴 글에 의하면 가보, 리시츠키, 다비트 부를리우크,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알고 있었고, 그의 초기 작품은 광선주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말레비치,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행하던 신지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20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다.
뉴욕 화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모더니즘의 대변자라는 평을 들었고 미국 미술과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연결시키는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그레이엄은 미국에서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 기법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이미 이것을 언급했으며 미니멀리즘의 논리를 예견했다.
그는 <미술의 체계와 변증법>에서 신비철학, 신비주의, 현대 미술의 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브를리우크는 미니멀리즘이 회화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면서 그레이엄을 선구자로 꼽았다.

현대 미술 운동의 동향을 설명하는 많은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미니멀 아트는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
영국 평론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현대미술의 개념>(1974)에 기고한 ‘미니멀 아트’에서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적었다.
“여기에서 논의된 모든 미술 운동 중에서 미니멀 아트는 가장 불분명하며, 가장 독립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미술을 통틀어 이보다 더 현대 미술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니멀 아트에는 두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단일 색채로 균일하게 채색된 캔버스처럼 미니멀 작품은 거의 차별화 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이 된다.
둘째, 작품이 뚜렷하게 차별화 되어도 예술가의 작업량은 최소한도에 머무르는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량생산품이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사용되어 이들이 서로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미니멀 아트란 명칭은 평론가 바버라 로즈가 1965년 <아트 인 아메리카> 10, 11월호에 기고한 논문 ‘ABC 아트’에서 사용했다.
미니멀 아트 중에서도 최소한의 내적 차별성을 지닌 한 부류에만 주목한 로즈는 1950년대에 일어난 새로운 감수성으로의 전환에 대해 언급하고
“공허하고 중립적이며 기계적인 비인격성을 지녀 앞서 등장한 낭만적이고 자전적인 추상표현주의 양식과 격심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관람자가 감정과 내용의 명백한 부재를 목격하고서 얼어붙도록 만드는” 미술에 대해 서술했다.
로즈는 새로운 종류의 미술이 독창성, 감상적이거나 표현적인 내용, 복잡성과 같은 전통적인 필요조건들을 의도적으로 폐기 처분했다고 지적했다.

재즈 음악가이기도 한 프랑스 화가 클랭은 유럽의 네오-다다 운동의 주도자였으며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1930~)와 함께 누보 레알리즘 운동을 시작했다.
레스타니는 1960년에 누보 레알리슴 선언문을 발표했다.
클랭은 1946년에 이미 한 가지 색으로 균일하게 칠한 비대상 회화인 모노크롬을 작업했지만, 1950년에 런던에서 비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1955년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에서는 거부당했다.
1956년 파리의 콜레트 알랑디 화랑에서 처음 전시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IKB)’이라고 부른 독특한 푸른색을 사용하여 모노크롬 회화, 조각된 형상, 캔버스 위의 스폰지 부조를 제작한 ‘푸른색 시기’를 맞이했다.

1959년 소르본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클랭은 자신의 모노크롬 회화 이론은 색채에서 주관적인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색채가 갖는 개성을 없애고 색채에 형이상학적 특징을 부여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설명했으며,
“그리고 내가 점차적으로 빗물질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색채를 통해서였다”고 했다.
이 강연의 일부는 1973년 김펠 피스 화랑이 기획한 회고전 도록에 다시 실렸다.
클랭은 자신이 푸른색을 선호한 이유를 밝혔다.
“푸른색은 어떤 특징도 없으며, 특징이라는 한계를 초월하지만 다른 색채는 그렇지 않다.
다른 색채들은 거의 심리적인 의미로 확대 해석되는데, 열을 발산하는 것으로 미리 상정되는 붉은색을 예로 들 수 있다.
모든 색채는 심리적으로 물질적이거나 실체적인 개념을 연상시키지만, 푸른색은 바다와 하늘 정도만을 암시할 뿐이다.“

클랭은 1958년 흰색으로 칠해진 텅 빈 화랑을 보여준 <텅 빈 전시회>로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1952년 전체적으로 흰색으로 된 일련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고 이어서 전체적으로 검정색으로 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찢기고 구겨진 신문이 붙어 있고 검정색 에나멜 물감으로 인해 표면이 불규칙적이고 전체가 검은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그는 미니멀리티를 실험한 최초의 화가 중 하나였다.

미니멀 아트라는 명칭은 기교를 감축하고 전통적인 미술의 방식을 거부하는 미술에 더 포괄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래서 모리스 루이스는 종종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잭슨 폴록의 후기 작품에서 헬렌 프랭컨탤러로 이어진, 초벌칠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얼룩을 만드는 기법을 루이스가 도입하면서 물감의 회화적인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니멀 조각가들로 토니 스미스, 칼 안드레, 로버트 모리스, 도널드 저드 등이 있다.
1933~36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 1937~38년에는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한 토니 스미스Tony Smith(1912~80)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현장 감독으로 견습생활을 했으며, 1940~60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했다.
1940년경 조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960년대 초에는 미니멀 아트 조각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스미스의 작품은 규모가 크고, 강철 또는 채색한 강철로 제작된 단순한 기하 형태들로 구성되었다.
그의 조각은 잘 들어맞는 모듈 단위체나 직사각형의 상자들로 구성되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은 표현성과 환영을 배제하고 미술작품을 오브제 그 자체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미니멀 아트의 미학을 동시대의 어떤 작품보다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브란쿠시 제자로 나무 조각을 시작으로 조각에 몰두한 칼 안드레Carl Andre(1935~)의 초기 작품에서 브란쿠시의 영향을 발견하기란 쉽다.
1960~64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서 일했으며, 그 경험으로 상호 교환이 가능한 규격화된 단위의 사용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66년 뉴욕의 유태 미술관에서 열린 ‘기초적 구조’ 전시회에 선보인 그의 작품 <지렛대>는 139개의 내화 벽돌을 각각 분리시켜 일렬로 배열해놓은 것이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로 분류되며, 또한 그 중 일부는 시리얼 아트 및 체계적인 미술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는 스티로폼이나 벽돌, 시멘트 블록, 자성체 등 동일한 형태의 공업 재료들을 부착하거나 접합시키는 과정 없이 수학적인 일정한 체계에 따라 쌓아올려 작품을 제작했으며,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해체되었다.
1965년경부터 간단한 수학 원리에 따라 직각의 격자 모양으로 작품을 바닥에 수평으로 배치했다.
또한 대지 미술도 시도하여 이 분야의 선구자로 꼽힌다.

1948~51년 캔자스시티 대학, 캔자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한 후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1931~) 1953~55년에 오리건 주의 리드 칼리지에서 수학하고 1966년에는 헌터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모리스는 미니멀 아트 주창자 중 가장 뛰어나며 자신의 의도를 명료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로 꼽힌다.
그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관계적 non-relational’ 혹은 ‘전체론적 holistic’인 미학을 표방했다.
1965년 뉴욕의 그린 화랑에서 기초적 구조 작품들을 전시했으며, 그후 부분과 내부 구조가 없는 기본적인 다면체와 같이 즉시 명시할 수 있는 단순한 오브제들을 발표하면서 기교를 거부하고 극도의 지적인 단순화를 추구했다.

모리스는 미니멀 아트에서 조각가이면서 이론가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단일한 형태 unitary forms’라고 명명한 기초적 구조 이론은 1966년 <아트 포럼> 2월호와 10월호에 기고한 논문 두 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이 논문들은 1968년 그레고리 뱃콕이 엮은 <미니멀 아트>에 재수록되었다.
모리스가 용의주도하게 가장 쉽게 지각되고 이해되는 형태, 더욱 단순한 다면체를 사용한 것은 한편으로는 추상표현주의가 신봉하던 즉흥적이며 개성적인 표현에 대한 반발이었다.
동시에 그는 몬드리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원칙, 즉 미술작품은 부분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통일된 체계라는 입장에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후기 작품에서는 모듈의 변화와 연속적인 반복을 점차 중시함에 따라 형태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또한 모리스는 1960년대에 칼 안드레와 함께 예술가의 작업은 작업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고 방식을 탈피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스튜디오나 화랑 같은 제한된 공간을 넘어 환경 속에서 미술품으로도 가능하도록 설계된 ‘현장 in situ' 조각작품 개념을 주창했다.

미니멀 아트의 주도적인 인물이며 이론가인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94)는 1946~47년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했다.
1953년 컬럼비아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마이어 사피로의 지도를 받아 미술사학을 공부하여 1962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드는 1959~65년 <아츠 매거진>의 미술비평가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화가로 출발했는데, 나중에 저드는 이 시기의 작품을 “불완전한 추상 half-baked abstractions”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에는 표면의 질감을 강조한 단색조의 부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63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상자와 같은 똑같은 직사각형 형태를 벽에 설치된 사다리처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특수한 오브제’라고 했으며, 1965년 <아츠 이어북 Arts Yearbook>에서 처음 출간한 ‘특수한 오브제’란 제목의 글에서 땅 위에 놓여진 이런 조각을 옹호했다.
“실제 공간은 평편한 표면의 회화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력하고 특별하다.”
처음에는 주로 나무로 작업했지만 1963~64년 뉴욕의 그린 화랑에서 열린 성공적인 전시회 이후 공업용으로 제조된 다양한 금속과 채색된 퍼스펙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970년 저드는 작품을 전시할 특별한 장소에 맞추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야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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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라우센버그는 워홀에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이제 워홀에게는 운이 트였다. 뉴욕에서의 개인전을 고대하던 워홀은 일레노 와드가 11월 6일로 전람회 스케줄을 정하자 들떴다.
그는 전람회 준비작업에 열중했는데 〈야구〉(1962)도 이때의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워홀의 친구들이 축하해주었고 헨리 겔드잘러는 워홀을 위해 자신의 아파트에서 파티를 열고 미술계 인사들을 초대하여 소개했다.

1962년 9월 18일에는 소나벤드 부부가 라우센버그와 스위스 예술가 칼 프레데릭과 함께 워홀의 화실을 방문했다.
파리에 화랑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던 소나벤드 부부는 파리에서 전람회를 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워홀은 환호하며 그동안 둘둘 말아놓았던 캔버스들을 꺼내 펴보였다.
마를린의 초상화와 코카콜라 병 210개를 그린 그림을 포함하여 여러 점이었다.
워홀이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구하여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라우센버그는 연신 워홀에게 질문하면서 그의 아이디어를 경청하려고 했다.
워홀은 라우센버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것에 대단히 만족하면서 평소보다 더욱 떠벌였다.
캔버스 끝에서 끝까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 그리는 워홀의 방법은 라우센버그와 프레드릭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라우센버그는 워홀에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충고했고 워홀은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인사치레에 불과했지 사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워홀은 자신의 회화방법에 만족했으며 단지 새로운 팝 이미지만 찾을 뿐이었다.
워홀은 라우센버그에게 그의 초상화를 실크스크린으로 뜨고 싶으니 사진을 한 장 보내달라고 했다.
라우센버그는 주로 실크스크린 기법에 관해 질문했으며 워홀은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가르쳐주었다.
워홀이 가르쳐준 기교는 나중에 라우센버그의 실크스크린 작품에 응용되었다.
이듬해 유태인 뮤지엄(Jewish Museum)에서 라우센버그의 전람회가 열렸을 때 폭이 988cm나 되는 실크스크린이 소개된 것만 보아도 실크스크린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라우센버그는 창의력 있는 예술가이고 워홀은 남의 것을 모방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했으므로 라우센버그가 실크스크린 작품을 소개하자 워홀이 라우센버그로부터 아이디어를 훔친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워홀》의 저자 데이비드 부르돈은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역설했다.

11월에 스테이블 화랑에서 열린 워홀의 전시는 기대했던 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레노는 “전람회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워홀의 그림이 모두 팔렸다고 떠벌이면서 워홀을 ‘사랑스런 앤디(Andy Candy)’라고 불렀다.

전람회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가 재스퍼 존스를 데리고 워홀의 화실로 왔다.
헨리는 워홀이 존스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존스를 만날 기회를 주려고 데려온 것이다.
존스는 워홀의 화실을 자세히 둘러보았지만 그의 작품들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비치해두고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워홀은 그날도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며 존스의 사진을 찍었고 존스는 그런 워홀의 행동을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라우센버그의 초상화를 제작한 워홀은 존스의 방문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다.
헨리가 존스에게 워홀의 그림들을 소개했지만 존스는 시큰둥했다.
“워홀과 존스 두 사람은 친구 관계로 진전되지 않더라”고 헨리가 나중에 말했다.
1978년 이후에는 존스가 워홀에게 예술가로서 존경심을 표하게 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워홀을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워홀은 원래 지성적인 사람이 못 되었던 반면 존스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서적을 읽고 늘 명상하면서 고상한 사고를 그림으로 나타내려 한 지성적인 화가였기 때문이다.

워홀의 화실에 있던 데이비드 부르돈은 존스가 간 후 “재스퍼는 여기에 온 것을 별로 탐탁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워홀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부르돈은 “네가 그림들을 꺼내 보여줄 때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니?”라고 말했다.
워홀은 존스가 라우센버그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예술가임을 그때 알았다.

부르돈은 1950년대 말부터 그리니치 빌리지의 지역신문 《빌리지 보이스 Village Voice》에 미술평론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부르돈은 워홀의 수프 통조림 그림을 보고 워홀의 화실을 직접 방문해 “당신이 바로 수프 통조림을 그린 장본인입니까?”라고 물으면서 “난 당신을 상업미술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화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상업미술에 관한 주제를 그리고 있군요. 당신 작품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런지 알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워홀이 부르돈을 좋아한 이유는 그의 지성에 찬 의심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예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워홀이 “팝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부르돈은 솔직하게 “난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했는데 워홀은 그의 솔직함이 맘에 들었다.
그는 《워홀》이라는 책을 써서 워홀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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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 번의 영주 사타케 쇼잔과 그의 신하 오타노 나오타케의 회화
 

  오쿄의 메가네에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한 경관 묘사는 우키요에에 영향을 끼쳐 1770년대와 1780년대에 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1735~1814)의 우키에에 계승되었다.
서양화의 원근법을 도입한 풍경 판화 우키에에 탁월한 도요하루는 시대의 취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안에이安永에서 간세이寬政기에 걸쳐 명성을 얻었다.
일본의 초기 풍경화가 대부분 노조키 카라쿠리(이중희 174, 124)를 통해 감상하는 메가네에였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1770년대부터 1800년대 까지 서양의 양식을 자의적으로 받아들인 화풍이 성행했는데 에도양풍화江戶洋風畵로 아키타 난화와 시바 고칸의 양풍화는 언급할 만하다.
오늘날 동경인 에도에서 북쪽으로 560km 떨어진 아키타 번秋田藩의 영주 사타케 쇼잔佐竹曙山과 그의 신하 오타노 나오타케小田野直武(1749~80)가 중심이 되어 그린 서양식 회화를 아키타 난화秋田蘭畵라고 한다.
아키타 번은 악화된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1773년에 당대의 물산학자 히라가 겐나이를 에도로부터 초빙했으며 겐나이는 아키타 번의 지성支城인 가쿠타데에서 그곳의 무사 오타노 나오타케의 뛰어난 그림 솜씨를 보고 그를 에도로 오게 해서 서양화를 배우게 했다.
나오타케가 처음 그린 것은 1774년 8월에 간행된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위한 삽화였다.
서양 의학서에 있는 동판화로 된 인체해부 그림을 모사하는 것으로 서양인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곧 서양 양식을 익히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음영에 의한 엄격한 사실주의를 익힐 수 있었다.
아키타 번의 영주 사타케 쇼잔은 영지와 에도를 격년제로 근무하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에 의해 나오타케가 타계한 1780년 이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에도에서 근무하면서 아키나 난화의 창시자 나오타케로부터 서양 양식을 배웠다.

아키나 난화는 자주적 서양화풍의 그림이라는 것 외에도 자체의 화론에 입각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사타케 쇼잔이 1778년 9월에 발간한 『쇼잔사생첩曙山寫生帖』에 ‘화법강령’과 ‘화도이해’라는 소제목으로 아키나 난화 화론이 수록되어 있다.
그들은 서양화를 유용성의 명분으로 받아들였으며 박물학 도감과 같은 사실묘사가 절실한 분야에 필요하다고 타당성을 주장했다.
쇼잔은 사생도뿐만 아니라 서양화풍의 그림도 그렸다.
쇼잔은 ‘화법강령’에서 동양화의 근간과 같은 필법을 부정했다.

첫째, “필법을 주로 할 경우 실용을 잃어버린다”고 하면서 “세필로써 형상을 그리고 채색하여 비로소 묵의 흔적을 없앤다”고 했다.
필법을 부정하는 반면 세필의 묘사와 채색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둘째, 여백 대신에 실공간을 도입한 것으로 동양화에서 여백은 암시적 의미를 지니며 여운을 담은 표현공간의 역할을 하지만, 쇼잔은 여백을 비현실적 공간으로 인식했으므로 화면 전체가 하늘이나 구름 등 현실적인 실공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도이해’에서는 서양화법을 논했다.
첫째, 음영법으로 사물의 그림자가 태양의 반대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음영은 사물의 실체인식이 아니라 광원에 의한 일시적인 무형의 현상이지만 쇼잔은 현재 바라보는 상태가 사물을 파악하는 기준임을 주장했다.
둘째, 원근법으로 멀고 가까움의 차이에 따른 크기와 농담의 변화, 지평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함을 역설했다.
특기할 것은 서양화론이 서양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양화론에서 그 개념을 빌어온 것이란 점이다.

나오타케가 서양 양식으로 풍경화를 그린 것이 에도의 서민 출신 화가 시바 고칸司馬江漢(1747~1818)을 자극했다.
고칸은 히라가 겐나이의 소개로 나오타케를 만나 그로부터 직접 서양화법을 배웠다.
그는 일찍이 1770년경 우키에에서 니시키에라고 불린 다색 판화 기법의 개발에 성공한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1725?~70)의 화풍에 투시원근법을 적용했다.
하루노부는 1765년에 다색 판화 기법을 개발하여 우키요에에 획기적인 발전을 꾀했다.
고칸은 우키요에풍의 미인화에도 음영화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화풍을 개발하기도 했다.
고칸은 원근법을 적용하여 일본의 풍경을 그리면서 낮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사용하여 현실 공간을 광대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게 표현했다.
그는 수평선 부근을 밝게 처리하거나 경물이 사라지는 소실점에 산이나 연기 등을 구성시켰다.
그리고 화면 전체에 명암이 나타나게 했는데 그의 작품은 더러 이국풍의 풍경으로 나타났다.
그의 1783년작 <삼위경도三幇景圖>와 1786년작 <영국교도兩國橋圖>에는 실경보다 넓게 펼쳐진 공간과 투명하게 맑은 대기가 느껴진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을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이 시기에 그대로 옮길 수 있게 해준 기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고칸이 말한 사진경寫眞鏡이 그것으로 초기 카메라Camera Opuscule이다.
그는 사진경에 관해 적었다.
“산수는 그 땅을 밟는 것과 같이 그리는 법으로서 사진경이라고 하는 도구이다.
이것을 가지고 만물을 옮겨 그린다.
때문에 일찍이 대상을 보지 않고 그리는 법이 없다.
동양화와 같이 무명의 산수를 그리는 일은 없다.”

에도양풍화는 1787년 막부의 총리격인 로쥬老中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1758~1829)가 부임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다노부는 간세개혁寬政改革을 단행하여 막부체제를 위협하는 상업 자본의 만연을 억제하고 귀농과 농업생산 증대에 힘썼다.
그는 간세이학寬政異學의 금禁이란 정책으로 양학洋學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했다.
양풍화도 기반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양풍화가 개발한 풍경 묘사는 에도 시대 말기의 우키에로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자연공간을 객관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원근법과 명암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점과 세밀하게 묘사하는 서양화의 영향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1866~1924)가 인상주의 양식을 소개할 때가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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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 회화


색면 회화Color Field는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이 직접 스며들게 하는 방법에 의한 것으로 1951년 잭슨 폴록이 시작했다.
이런 방법을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1928~)가 받아들였다.
뉴욕 태생으로 1949년 버몬트의 베닝턴 칼리지를 졸업한 프랭컨탤러는 아슐리 고르키와 잭슨 폴록의 영향 아래 추상표현주의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개했다.
특히 새로운 색채 배합 방법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1950년경 캔버스의 넓은 면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색만을 칠한 양식으로 주목받았다.
1950년대 초에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을 부어 염색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폴록으로부터 이어받았으며 이를 통해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회화적인 붓자국을 없앨 수 있었다.
1952년작 <산과 바다>는 모리스 루이스와 케니스 놀런드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이들의 양식 전개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프랭컨탤러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색면 회화로 연결되는 비약적인 발전의 중요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962년경부터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으나 염색 기법을 고수하여 그려진 이미지와 캔버스의 표면이 완전히 일치하도록 했다.
프랭컨탤러는 1958년 로버트 머더웰과 결혼했고, 1968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일 대학 캘훈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에 선정되었다.
1973년에는 스미스 칼리지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이며 그룹전과 개인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프랭컨탤러는 형상-바탕의 환영적인 대비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을 없애고 색채를 순전히 시각적인 현상으로 서정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염색 기법과 뿌리기 기법은 이전에 개인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온 회화적이고 촉각적인 표면 효과를 없앴다.
이 기법을 받아들인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1912~62)는 이전보다 더욱 순수한 시각적 색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 태생의 루이스 아버지는 러시아 이민자였다.
그는 1939년경부터 화가로서 루이스라는 성을 사용했다.
1929~33년 볼티모어 순수응용미술학교에 다닌 뒤 1936년 뉴욕으로 가서 연방 예술 프로젝트의 이젤화 부문에 참여했고, 당시 두코 에나멜 물감을 사용하여 기법적인 실험을 하던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와 다른 화가들의 작업실에 합류했다.
1940년 볼티모어로 돌아와 개인 지도를 했으며 1948년부터 마그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4년 케니스 놀런드와 함께 뉴욕의 쿠츠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 시기에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루이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4년 루이스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여 회화 양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프랭컨탤러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녀의 작품 <산과 바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때부터 루이스는 묽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으며, 두꺼운 면포에 초벌칠을 하지 않거나 때로는 부분적으로 풀을 먹이고 그 위에 물감을 부었다.
결과적으로 물감은 캔버스 위에 층을 이루는 대신에 염색용 염료처럼 스며들었다.
루이스는 캔버스 자체를 움직이거나 캔버스를 살짝 고정하고 있는 틀을 움직여 물감의 흐름을 조정했다.
1954년과 1957~60년에 제작한 <베일> 연작에서는 캔버스 위에 부은 물감의 반투명한 색들이 부분적으로 겹쳐 줄무늬를 형성했다.
물감을 붓는 기법으로 인해 루이스는 작품에 개성이 개입될 여지를 없앴으며 액션 페인팅의 제스처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 기법으로 추상적 이미지가 사라져 구상의 마지막 흔적도 제거되었다.
따라서 이 염색 기법은 최종적으로 물감을 칠한 회화의 표면에서 항상 느낄 수 있기 마련인 촉감을 차단하여 색채가 지닌 순수한 시각적 효과만을 보여주었다.
이 기법은 특별히 정밀한 실행을 요구하여 일단 제작된 뒤에는 수정이나 변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이스는 1955년에 제작한 작품 대부분을 폐기했으며 1957년 뉴욕의 마사 잭슨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했으나 팔리지 않은 작품 대부분도 폐기했다.

루이스는 1960년 여름부터 이듬해 봄 사이에 120점의 <펼쳐짐 Unfurleds> 연작을 그렸다.
이 연작에서는 캔버스의 오른편과 왼편에 대각선 색띠를 넣어 각기 피라미드 반쪽 형태를 만들었는데, 피라미드의 나머지 반쪽은 화면 밖에 위치하는 것이 되므로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캔버스의 넓은 중앙 부분은 신기하게도 여백이 아닌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영역이 된다.
또한 <펼쳐짐> 연작에서는 색띠의 윤곽선이 더욱 명확해졌으며 색채도 겹쳐짐 없이 순수한 상태로 나타난다.
1961년 봄 루이스는 <펼쳐짐> 연작을 중단하고 그의 마지막 연작이 된 <띠>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에서는 수직 색띠 다발이 빈 캔버스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서 겹쳐짐은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일한 순색으로 이루어진 수직 띠들의 윤곽선은 매우 명확하고 단지 색채 조화와 대비를 위해 부분적으로 조금 번져 있다.
색띠의 너비도 색채 고유의 색감 정도나 체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루이스가 이루어낸 색채의 비물질화로부터 그의 계승자들은 미술작품의 비물질화까지 끌어냈다.
이런 예로 순수하게 시각적인 색 안개와 같은 줄스 올리츠키의 모노크롬 스프레이 회화와 물감이 흠뻑 스며든 색면 위에 찍힌 래리 푼스의 진동하는 다원형 점, 로버트 어윈의 구부러진 색 원반을 들 수 있다.

러시아계 미국 화가 줄스 올리츠키Jules Olitski(1922~)는 1939~42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1940~47년 뉴욕의 보자르 디자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한 후 자드킨 조각학교와, 1949~50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54년 뉴욕 대학에서 미술 교육으로 학위를 받고, 1956~63년 롱아일랜드의 포스트 칼리지, 1963~67년까지 베닝턴 칼리지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올리츠키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여 프랭컨탤러와 루이스가 시작한 염색 기법을 채택하여 발전시켰다.
1960년대 초의 이른바 ‘중심핵’ 그림들은 놀런드의 동심원과 루이스의 <펼쳐짐>을 연상하게 하는 육중한 윤곽선을 결합한 것이다.
1964년에는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올오버 회화를 시작했다.
윤곽선이 없어진 그의 작품들은 1960년대 후반 단색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제작하는 색면 회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는 주로 이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작품에서 올리츠키는 형태나 물감의 물리적 영향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색감이 만드는 순수한 시각적 장을 창출하려고 했다.
또한 염색 기법과 그 이후의 스프레이 뿌리기 기법을 결합함으로써 유사한 톤의 색띠들이 이루는 미묘한 대비와 함께 신비롭게 떠다니는 색채 안개로 밝고 현란한 색채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형태나 원근법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색채만으로 환영적 공간을 창조했다.
1970년대에는 색채의 범위를 줄여 회색과 갈색의 미묘한 변화를 주로 다루었으며, 간혹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화면에 도입된 표현적인 표면 효과는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면을 구사한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개성 있는 방식을 전개했다.

도쿄 태생 미국 화가 래리 푼스Larry Poons(1937~)는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와 뉴욕의 신사회 과학원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지도를 받은 뒤 1958년 보스턴 미술관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푼스는 프랭컨탤러와 루이스와 더불어 색면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개인적인 양식은 색면 회화와 차이가 있다.
푼스는 강렬한 색채 위에 계란형의 점들을 그렸는데 이는 시지각의 작용에 의해 후퇴하는 듯이 보이며 신기한 잔상을 만든다.
이처럼 독특한 시각 경험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는 한때 옵 아트 화가들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1960년대 말 그의 작품은 좀더 회화적이 되어 색채는 더욱 엄격해지고 점은 박테리아를 현미경으로 확대시킨 것과 유사한 줄무늬들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그림에 깊이감과 공간감이 생겼으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색채의 시각적 경험이었다.

미국 화가 로버트 어윈Robert Irwin(1928~)은 지각 심리학 분야의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고,
1966년부터는 작품을 통해 지각적 조작과 공간 변경을 위한 조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구성 요소들의 수적인 측면이나 복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끊임없이 단순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1968~69년에 제작한 ‘원반 회화’ 연작은 유명한데 이는 원반 형태를 벽에 걸고 주의 깊게 빛을 비춰 굴절시킨 것으로 정확한 형태라든가 정해진 위치 없이도 독립적으로 지각되는 색채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초에는 조심스럽게 자르고 광택 처리하여 프리즘처럼 무지개 빛이 나는 아크릴 수지를 재료로 원주를 제작했으며,
캘리포니아 주 노스리지 시의 의뢰를 받아 10m 높이의 조각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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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에게 전화해 곧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1962년 여름 일레노의 화랑에 소속된 알렉스 캐츠와 일레노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이 워홀에게는 행운이었다.
불화의 원인을 일레노는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서”라고 말했지만 사실 일레노는 캐츠의 행위를 괘씸해하면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레노가 화난 이유는 지난해 캐츠가 케네스 코치의 작품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의 무대를 장식했던 그림을 일레노의 라이벌 마사 잭슨에게 1,500달러에 팔아 6월 5일부터 30일까지 잭슨의 화랑에서 소개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은 캐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잭슨과 일레노의 경쟁이 촉발한 사건에 캐츠가 말려든 것뿐이다.
일레노는 11월에 계획된 캐츠의 개인전을 취소하면서 캐츠를 그녀의 화랑 스테이블에서 쫓아냈다.
비쩍 마른 캐츠는 “시팔년!”이라는 말을 일레노의 면전에 던지고 화랑을 떠났다.

일레노가 스테이블에서 캐츠의 전람회를 열어준 것은 1960년 3월과 이듬해 2월 두 차례였다.
일레노와 결별한 캐츠는 1964년 피슈바흐(Fischbach)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진 이래 1970년까지 그곳에서 계속 전람회를 가졌다.

캐츠는 추상과 사실주의 사이에서 사실주의를 택하면서도 상업미술가 출신답게 추상적인 디자인의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사람을 주로 그린 그는 색을 평평하게 사용하고 선을 단순화했으며 사람들을 어떤 상황 속에 있도록 하여 시적이고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는 엷은 색을 넓게 칠했는데 컬러필드 예술가처럼 감성적 느낌이 나도록 색을 사용했다(그림 92).
항상 사람들이 편히 쉬는 장면, 파티, 피크닉, 개와 고양이가 노는 장면, 차 마시는 장면 등을 그리면서 사실주의에 기초한 추상을 소개했다.

퀸즈 뮤지엄 개관 25주년 기념 파티에서 필자는 캐츠를 보았다.
깡마른 그는 안내하는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주면서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가 여자가 다이얼을 돌린 후 캐츠가 찾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시팔(fuck)! 시팔!”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뉴요커다웠다.
‘시팔’이라는 말을 할 줄 모르면 뉴욕커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70세가 된 캐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뉴요커에게 ‘시팔’은 욕이랄 수 없다.

1962년 어느 여름날 코네티컷 주에 있는 별장에서 발가벗고 햇볕에 몸을 그을리고 있던 일레노 와드는 문득 워홀을 떠올렸다.
그녀는 방으로 가서 전화번호 수첩을 찾아 워홀에게 전화해 곧 만나자고 했다.
화실에 도착한 일레노는 인사만 하고는 방안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켐벨 수프 통조림 그림, 코카콜라 병들을 수십 개 그린 그림, 〈네 자신이 해라〉(그림 93), 그리고 마를린과 엘비스의 초상화들이 있었다.
일레노는 “앤디,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11월은 연중에 가장 좋은 달인데 글쎄 그 달이 비어있지 않겠어? 그때 네 전람회를 열까 생각 중이야”라고 말했다.
워홀은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와우!”라고 소리쳤다.
캐츠의 퇴진은 워홀의 앞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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