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 포베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는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유행한 상황 미술과 개념 미술 및 일부 미니멀 아트와 유사한 미술 운동이다.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가 1970년에 토리노 시립 뮤지엄에서 ‘아르테 포베라’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처음 이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이 운동에 대한 기초 책을 편집 간행했다. 아르테 포베라는 전통적인 미술 형식이나 도상의 사용을 거부하며 조직화되지 않은 해프닝을 이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 방식으로 보았다.

첼란트는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적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한다.
이는 실제의 재료들과 전체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런 현실을 비록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사적인 강렬한 방식으로 해석해내려는 예술가들의 시도를 강조한다.”

레나토 바리리는 1971년 <오퍼스 인터내셔널 Opus International> 지에 기고한 글 ‘토리노 시립 뮤지엄전에 고나해’에서 적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도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가장 관습적인 표현 방식이 되어온 물감을 칠한 캔버스도 거부한다.
대체로 아르테 포베라는 ‘산물’ 혹은 ‘작품’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제작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 대신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제시한다.”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적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마리오 체롤리, 마리오 메르츠 등으로 그들은 자연 그대로의 쓸모없는 재료로 미술작품을 제작했다.
비엘라 태생으로 토리노에서 공부한 후 1957년까지 미술품 복원가인 아버지의 조수로 일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1933~)는 아르테 포베라의 창시자 중 하나로 처음에는 뉴 리얼리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고 1962년에 시작한 ‘거울 회화’로 유명하다.
피스톨레토는 대체로 정지 동작의 실물 크기 인물 사진을 얇은 반투명지에 베긴 다음 윤곽선을 따라 인물을 오려내어 광택을 낸 얇은 강철판에 붙인 뒤 어두운 색조로 그림을 마무리하고 형상 주변의 관람자의 모습이 비칠 수 있는 위치에 철판을 놓았다.
이는 사진 이미지에 움직이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그림 속에 관람자를 포함시키는 시도였다.
그는 지각의 두 단계, 즉 금속 표면에 비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와 그림 속의 정적인 인물을 다루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1949~55년 로마 미술원에서 공부한 조각가 마리오 체롤리Mario Ceroli(1938~)는 포장 사자에서 얻은 거칠고 두꺼운 판자로 도시나 사람들의 이미지를 만드는 ‘사물-조각’을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아르테 포베라 경향을 좇아 거친 목재와 포장 상자로 전화기와 같은 공산품을 확대한 복제품을 조립했다.
또한 안과 겉을 모두 볼 수 있는 새장과 같은 구조물도 제작했다.

평론가 질로 도르플레스는 1970년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서양 현대 미술사에서 플라스틱이나 금속 등 새로운 재료를 극도로 세련되게 사용한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최근의 경향”이라고 적었다.
그는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리스 예술가 블라시스 카니아리스Vlassis Caniaris(1928~)를 꼽았다.
아테네 태생으로 의학을 공부한 뒤 1955년 아테네 미술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마친 카니아리스는 1956년 로마로 갔고, 1960년 파리에 정착했다.
1960년 낡고 찢어진 폴리에스테르 헝겊조각들로 이루어진 그의 전시회는 아르테 포베라를 예고했다.
1960년대 초 아테네 집들의 담벼락에 뉴 리얼리즘 양식으로 일련의 회화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이는 그리스의 정치적 불안을 상징하는 정치성 짙은 선전문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1967년 그리스로 돌아갔지만 정부의 강제수용소를 상징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선동적인 전시회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 했다.
1973년 외국 작가들과 관련된 연구 계획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 학술 교환 서비스의 ‘배를린의 예술가들’ 프로그램에 초대되었으며, 1975년 ‘이주자들’이라고 명명된 ‘상황’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에 아르테 포베라를 추구한 일부 예술가들이 정치적인 참여 미술을 지향하는 설치 작업으로 전환했는데 그 결과는 난해하고 모호한 것이 되고 말았다.
1980년 베른에서 열린 ‘논쟁과 통합’ 전시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에는 “이탈리아, 나아가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대해 미술을 수단으로 한 예술가들의 반동이요 비판이며 응답인 이 전시회는 ‘강령’이자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뮤개(1936~)는 커다란 흰색 탁자보 위에 수많은 맑은 유리알들이 가득 들어 있는 거대한 유리잔을 전시했다.
이것은 전시 작품 중 유일하게 작품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던 설치 작품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 내게 가져와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수많은 유리알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파솔리니에 이르는 역사의 희생자들을 상징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마리오 메르츠Mario Merz(1925~)는 덩굴다발, 기둥, 얇은 알루미늄 조각으로 포장한 흙, 가는 가죽끈, 맥주병, 네온관으로 만든 아치 등 갖가지 재료로 ‘공간-오브제’를 제작했다.
또 다른 빈 방에는 그리스 예술가 야니스 쿠넬리스가 고대 인물을 본뜬 두상을 배치해놓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불을 지펴 사방의 벽을 밝히고 있었고 그 불에서 그름 자국을 얻어내려고 천장 아래에 18개의 작은 금속판들을 설치했다.

피라이우스 태생으로 1956년 로마에 정착하여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1936~)는 그리스로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초기에는 글자, 숫자, 기호를 스텔실 기법으로 찍어 그림을 그렸다.
1960년대 중반에 회화를 그만두고 1967년에는 아르테 포베라 운동에 가담했다.
쿠넬리스의 특징적인 작품은 여러 가지 재료와, 때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이용한 설치 작업이었다.
‘20세기 이탈리아 미술’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쿠넬리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비구상 계열의 네오-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중 가장 복합적이고 시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로 꾸준히 서장하고 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제작한다. ...
쿠넬리스는 미술품, 심지어는 전시회에 대한 전통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그 자신이 ‘무력한 양식’이라고 부른 것을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타잔과 제인〉


워홀의 작업실 ‘소방서’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
어빙 블럼도 워홀을 방문해 영화배우들의 초상화는 뉴욕보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시하는 게 더 낫다고 하면서 페러스(Ferus) 화랑에서 다시 개인전을 열자고 제의했다.
워홀은 블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9월 마지막 주 워홀은 페러스 화랑에서의 전시(1963. 9. 30 ~10. 31)를 위해 무비 카메라를 메고 친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이 전시에서는 엘비스와 리즈의 초상화를 소개했다. 이미 〈붉은 엘비스〉라는 작품을 수십 점 제작했던 워홀은 이번에는 로크롤의 왕 엘비스를 기타를 든 모습 대신 권총을 들고 막 총을 쏠 태세인 카우보이 모습으로 제작했다.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온 엘비스의 모습을 실제 사람 크기보다 더욱 크게 확대하여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가 영웅처럼 보이도록 했다.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미남배우 말론 브란도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있는 모습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그림 111).
권총과 모터사이클은 남성을 상징하는 물질로 여자들에게 엘비스와 말론 브란도를 성적 우상으로 인식시키기에 적절했다.
블럼은 워홀이 엘비스를 한 상자 보냈다면서 모두 합하니까 198cm 높이에 폭이 457cm에 달하더라고 말했다.
리즈 초상화는 1m 정사각형으로 모두 12점이었다.

워홀은 윈 챔벌레인의 스테이션 왜건을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는데 그와 말랑가는 운전을 할 줄 몰랐으므로 챔벌레인과 테일러 메드가 번갈아가며 운전을 했다.
시인이며 영화배우인 메드는 미시간 주 그로세 포인트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난 다섯 살 때부터 이미 스타였다. 담임교사들은 항상 나를 위해 각본을 썼다”라고 말했다.
드라마를 전공한 메드는 1960년대 초 이미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알려진 배우라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워홀은 1956년에 세계를 일주하긴 했지만 아예 펜실베니아 주 서쪽 밖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어 서부로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워홀은 영화배우이자 사진작가인 데니스 하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두 달 전 뉴욕에 와서 워홀의 화실을 방문하고 〈모나리자〉를 한 점 구입했다.
배우이자 작가인 아내 브룩 헤이워드(그림 115)는 영화배우들이 모인 파티에서 워홀을 대단히 칭찬하며 유명배우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하퍼 부부를 만나 반가운 해후를 나눈 워홀은 10월 초 캘리포니아 남쪽 파사데나 뮤지엄(Pasadena Art Museum)에서 열리고 있던 뒤샹 회고전을 같이 관람했고 그곳에서 뒤샹과 그의 아내 티니와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 드완 화랑(Dwan Gallery)의 전시회를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와 있는 올덴버그와 그의 아내 팻도 만났다.
워홀은 전람회를 자축하는 파티에서 뒤샹 부부와 올덴버그 부부와 함께 샴페인을 과음하고 말았다.
그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차를 세우고 길에 쭈그리고 앉아 토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주 머무는 동안 워홀은 2시간짜리 흑백 유성영화 〈타잔과 제인 Tarzan and Jane〉(1963)을 제작했다.
깡마른 메드가 정글의 왕자 타잔 역을 맡았고 곱슬머리 나오미 레빈이 제인 역을 맡았다.
영화제작자로서 두 달 전 워홀과 만난 레빈은 〈보편적인 사랑〉에서 괴물 거미의 역을 맡았었는데 워홀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와 제인 역을 맡겠다고 자청했다.
말랑가의 말로는 레빈은 워홀에게 홀딱 반한 많은 여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워홀은 자신이 묵고 있는 비벌리힐스 호텔 목욕통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레빈이 옷을 홀랑 벗고 수영장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도 필름에 담았다.
하퍼, 올덴버그 부부, 예술가 월리 버먼도 단역을 맡아 워홀의 영화에서 열연했다.

페러스 화랑에서의 전람회는 그림이 한 점도 팔리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블럼은 워홀의 실크스크린이 기계로 제작한 것 같아 예술품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평론가는 워홀이 자신을 예술가로 알리는 데 실패했다고 적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르 누보


아르 누보Art Nouveau는 1880년부터 1910년 사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장식미술 양식을 일컫는 명칭으로 19세기 후반의 아카데믹한 역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이 양식 운동은 과거의 양식들을 모방하고 변화시키는 대신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고 한 신중한 시도였다.
본래 장식미술 양식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가구, 판화작품, 삽화 등의 실용, 응용미술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회화와 조각 운동이 파리에서 시작된 것에 반해 아르 누보는 주로 런던에서 발생되어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독일에서는 1896년 창간된 잡지 <디 유겐트 Die Jugend>에서 유래한 명칭인 유겐트슈틸Jugendstil,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슈틸Sezessionstil, 이탈리아에서는 아르 누보 디자인 보급에 크게 기여한 런던 리전트 스트리트의 리버티 상회 이름을 딴 스틸레 리버티Stile Liberty,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타Modernista로 불렸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189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점을 반영하여 모던 스타일로 통했다.

영국 아르 누보 양식의 기원은 윌리엄 모리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비롯한 라파엘 전파 화가들로부터 윌리엄 블레이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양식을 주도한 예술가들로는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 오브리 비어즐리, 찰스 리키츠, 월터 크레인을 비롯하여 글래고스 출신 건축가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 및 프란시스 맥도널드와 마거리트 맥도널드 자매를 꼽을 수 있다.
수많은 자지들도 아르 누보 양식의 유행에 기여했는데, 그중 중요한 잡지로 맥머도의 <샌추리 길드 목마 The Century Guild Hobby Horse>(1884), 리키츠의 <더 다이얼 The Dial>(1889), 비어즐리의 <더 옐로우 북 The Yellow Book>(1894~95)과 <더 사보이 The Savoy>(1896~98) 등을 들 수 있다.
1893년에 창간된 <더 스튜디오 The Studio> 역시 아르 누보 양식을 선전하는 데 기여했고, 리버티 상회가 날염한 직물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 양식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럽에서는 브뤼셀에서 처음 아르 누보 양식이 분명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예술가는 빅토르 오르타와 앙리 반 데 벨데였다.
안트베르펜 태생의 벨기에 화가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는 신인상주의 양식으로 작업했고, 1901년부터 바이마르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2년부터는 가구 디자인과 실내장식에 전념했으며 1902~14년 바이마르에 응용미술연구실을 설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브뤼셀과 스위스에서 살다가 1926년 겐트 대학의 건축사 교수가 되었으며 겐트에 응용미술학교를 세웠다.

빅토르 오르타는 타셀 저택의 계단 설계에서 훗날 ‘벨기에식 선 장식’으로 불리게 될 양식을 창안했다.
벨기에 아르 누보 양식은 처음에는 영국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곧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884년 이후 그루프 데 뱅이 기획한 일련의 전시회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맥머도의 친구들이 허버트 혼과 셀윈 이미지가 만든 응용미술 작품들과 책 삽화가 아방가르드 회화 작품들과 나란히 전시되었다.
그루프 데 뱅의 창립 회원 중 한 사람인 유명한 화가 제임스 엔소르는 매우 개성적인 표현주의 화풍을 구사했지만 아르 누보 양식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루프 데 뱅Groupe des Vingt은 1883년 브뤼셀에서 결성되어 1893년 해체된 아방가르드 예술가 모임으로 라 리브르 에스테티크의 전신이다.
라 리브르 에스테티크La Libre Esthetique는 그루프 데 뱅의 작품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1884년 브뤼셀에서 결성된 예술가 협회로 1914년까지 유지되었고 당시 벨기에 아방가르드 예술가 대부분 참여했다.
이들은 혁신적인 외국 미술의 전시회를 주최했으며 벨기에 예술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했다.
그루프 데 뱅은 벨기에와 외국의 혁신적인 미술을 장려하고 전시회를 기획했으며, 엔소르를 비롯한 당시 벨기에 현대 미술을 선도하고 토대를 이룬 예술가들로 구성되었다.
1881년에 창간된 <현대 미술 L'Art Moderne> 지를 통해 주로 선전 활동했다.

아르 누보 양식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1860~1949)는 1877~79년 브뤼셀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플랑드르 출신의 어머니가 기념품 상점을 운영했는데, 이곳에서 팔던 중국 자기, 카니발 가면, 조개껍질 등은 엔소르의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터너의 영향을 받아 1890년대에는 보다 밝은 색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엔소르는 아방가르드의 색채를 띤 그루프 데 뱅의 창립 회원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이 그룹의 전시회에서 계속 거부당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 대부분은 1900년 이전에 완성되었으나 이런 매우 독창적인 작품들은 20세기 미술 동향의 많은 부분을 예고했다.
그는 플랑드르 표현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를 선구자로 꼽았다.

프랑스에서는 1890년대에 유행한 영국 선호 풍조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런 장식품들 이외의 영국 아르 누보 양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 양식이 반영된 대표적인 예로는 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의 장신구와 유리제품,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가 만든 유리제품을 들 수 있다.
건축에서는 엑토르 그리마르Hector Grimard(1807~1942)의 파리 지하철 설계를 들 수 있다.

스페인의 아르 누보 양식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특히 그곳에서 활동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야(1852~1926)는 훗날 아르 누보 운동 전반에 걸쳐 주목할 만한 천재로 통했다.
그 외에도 루이스 도네미크 이 몬타네르Luis Domenech y Montaner(1850~1923)가 지은 팔라우데 라 무시카 카탈라나는 중요한 아르 누보 양식 건축물로 꼽힌다.
이 건축물은 아르 누보 양식의 특성을 과거의 역사적 건축 양식들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어 슈무츨러는 “역사주의를 가미하여 격을 떨어뜨린 혼성 아르 누보 양식을 유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이 건축은 그와 달리 가장 빼어나고도 주요한 예”라고 적었다.

독일의 유겐트슈틸 운동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와 스위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조각가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1863~1927)의 태피스트리 전시회를 계기로 뮌헨에서 예기치 않게 시작되었으며, 그 후 두 갈래로 나누어져 발전했다.
꽃 장식 유겐트슈틸 양식은 영국의 꽃 장식 아르 누보 양식을 기초로 한 것으로 1900년 이전의 응용미술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독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로 오토 에크만Otto Eckmann(1865~1902)을 꼽을 수 있다.
정기간행물 <판 Pan>의 삽화로 그린 작품 대부분이 걸작으로 꼽힌다.
1900년 이후에는 1899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벨기에 건축가 반 데 벨데의 영향을 주로 받아 추상적인 유겐트슈틸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건축가 페터 베렌스 역시 이런 양식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뒤늦게 빈을 중심으로 아르 누보 양식이 유행했는데 오스트리아 아르 누보 예술가들은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에서 벗어난 반면 매킨토시와 맥머도의 제자인 찰스 앤즐리 보이지의 영향을 받아 거의 기하적 양식을 추구했다.
1895년 이후 활동한 주요 인물로는 건축가 오토 바그너를 비롯하여 건축가이자 설계사인 요제프 호프만과 요제츠 올브리히, 설계사 콜로만 모저를 들 수 있다.
아르 누보 양식은 빈의 정기간행물 <베르 사크룸 Ver Sacrum>을 통해 보급되어으며, ‘제체시온슈틸’이라는 명칭은 빈 분리파 전시회들(1889~1899)을 위해 올브리히가 설계한 전시회장에서 따온 것이다.
1898~1903년에 발행된 빈 분리파의 기관지 <베르 사크룸>은 빈 아르 누보의 정기간행물 중 가장 뛰어났다.
다뱡면의 문학작품과 삽화, 그래픽 작품을 주로 실었으며 장식미술과 건축에 대한 기록은 별로 많이 다루지 않았다.
베르 사크룸은 라틴어로 봄의 향연이란 뜻이다.

이탈리아에서 아르 누보 양식은 대부분 영국과 빈의 건축 양식에서 따온 세부 장식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이 경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국가적으로 통일된 고유의 아르 누보 양식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했다.
주요 인물로는 꽃 모양 장식 양식을 창안해낸 주세페 솜마루가Giuseppe Sommaruga(1857~1932)를 들 수 있다.

미국에서는 개성이 전혀 다른 두 명의 예술가가 아르 누보 양식을 주도했다.
건축가인 루이스 설리번은 비록 자신이 설계한 건출물 자체에서는 아니더라도 장식을 통해 아르 누보 양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장식이란 구조에 역점을 두어 건축과 더불어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작품에서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지는 않았다.
반면 루이스 컴펏 티파니는 1880~1890년에 제작한 유리제품 디자인을 통해 매우 개성적이며 우아한 아르 누보 형태를 개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 누보 운동은 자취를 감추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잠〉은 실제 5시간 반짜리로


제목을 〈잠〉(그림 109, 110)이라고 붙인 6시간짜리 이 영화는 지오르노가 계속 자다가 이따금 잠결에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사람은 누구나 매일 6시간 또는 그 이상 잠을 자지만 자신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워홀은 지오르노의 잠을 통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잠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잠자는 누드를 그린 화가는 많았지만 온통 잠을 주제로 영화를 제작한 사람은 워홀이 처음이다.
거의 동작이 없는 그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1963년 9월 맨해튼에서 에릭 새티의 곡 〈원통함 Vexations〉의 연주회가 있었다.
80초짜리 피아노곡을 840번 반복하여 연주했는데 존 케이지를 비롯해 모두 15명의 연주자들이 릴레이처럼 돌아가면서 평균 20분씩 연주했다.
워홀이 이 콘서트에 가지는 않았더라도 말랑가가 6~7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콘서트홀에 앉아 있었으므로 말랑가를 통해 〈원통함〉에 관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잠〉도 이 작품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워홀의 〈잠〉은 그래머시 아트 극장(Gramercy Arts Theater)에서 1964년 1월 17일부터 20일까지 상영되었는데 평론가들이 관심을 나타냈다.
단조로운 장면들이 6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는 〈잠〉을 보려면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영화평론가 아처 윈스튼은 《뉴욕 포스트》에 글을 기고했다.

워홀의 〈잠〉은 실제 5시간 반짜리로 가장 긴 영화라고 할 수 없다.
가장 긴 영화는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영화 〈탐욕〉으로 8시간 반이나 된다.
… 내가 그래머시 아트 극장에서 약 한 시간 가량 〈잠〉을 관람하는 동안 120명 객석의 극장에는 오직 6명만이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무대 위에는 라디오가 두 대 있었고 각각 다른 로큰롤이 흘러나왔다.
… 그러나 일요일 밤 다시 극장에 갔을 때는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서 웅성거리며 〈잠〉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로비에서 만난 워홀은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잠〉은 6월 로스앤젤레스 시네마 극장(Cinema Theater)에서도 상영되었는데 뉴욕에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영화가 상영되고 첫 45분 동안 관객의 수는 약 5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상영 도중 갑자기 한 사람이 일어나서 무대로 올라가 큰 소리로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사람들을 선동하자 약 200명가량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극장 측에 돈을 물러달라고 소동을 피웠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영화를 끝까지 관람한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들도 약 50명 정도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신표현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는 신야수주의 혹은 격렬하고 거친 회화에 붙인 명칭으로 프랑스에서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로 불렸다.
이탈리아어로 ‘아방가르드를 넘어선’이란 뜻의 트란스아반구아르디아transavanguardia를 번역한 말이다.
신표현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며 더 넓은 의미로 진보적 경향을 보여주는 미술을 말한다.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20세기의 미국 미술’ 전시회(1993)의 카탈로그에 수록된 글에서 이 용어를 만들어낸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는 신표현주의의 줄리언 슈나벌 등을 “뜨거운 트랜스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네오-지오Neo-Geometric Conceptualism의 제프 쿤스 등을 “차가운 트랜스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분류했다.
네오-지오는 신기하적 개념주의를 줄인 말로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사용하여 신표현주의의 주정주의에 반발한 미국 예술가 그룹의 작품을 일컬은 명칭이다.

신표현주의는 1970년대 말에 나타난 회화 운동으로 재료를 처리하는 거친 방식이나 강렬한 감정적 주관성을 특징으로 하며, 작품의 크기가 크고 짧은 시간에 제작되고, 때로는 키퍼의 경우 지푸라기를 부착하고, 슈나벌의 경우 깨진 도자기를 캔버스에 직접 부착했다.
보통 구상적이며 폭력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지는 때때로 진동하는 표면 효과에 흡수된다.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 초 많은 대규모 전시회를 통해 확고한 위치를 점했는데 1981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정신’ 전시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운동은 1970년대의 ‘무엇이든 사용 가능하다 anything goes’는 태도로 좀더 전통적인 형태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이런 경향은 화상이나 콜렉터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슈나벌을 선두로 몇몇 신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관습적인 기법을 모두 무시하고 일부러 형편없게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실제로 ‘나쁜 회화 Bad Painting’란 제목으로 1978년 뉴욕의 신현대 뮤지엄에서 전시회가 열렸으며, ‘나쁜 회화’란 용어는 이런 맥락의 신표현주의 작품 일부에 적용되었다.
펑크 아트와 ‘어리석은 회화 Stupid Painting’란 용어들은 ‘나쁜 회화’를 대신할 만한 했다.

뉴욕의 브루클린 태생으로 휴스턴 대학을 1972년에 졸업한 줄리언 슈나벌Julian Schnabel(1951~)은 1976년 휴스턴 현대 뮤지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9년 뉴욕의 메리 분 화랑에서 연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80년대에는 화단의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급부상했다.
1982년에 세계 주요 현대 뮤지엄 중 하나인 암스테르담 시립 뮤지엄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언론은 슈나벌을 화가라기보다는 대중적 스타로 다루는 일이 종종 있었다.
슈나벌의 작품은 규모가 크고 신표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카페트, 벨벳과 같은 특이한 재료 위에 그리기도 했으며 깨진 도자기로 표면을 덮거나 다른 삼차원적 물체와 통합시키기도 했다.
때때로 캔버스 틀 자체가 중앙으로 돌출되어 삼차원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슈나벌은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나의 작품은 나 자신에 대한 것보다는 세상에 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나는 어떤 감정적 상태, 사람들이 실제로 몰입할 수 있는 상태를 목표로 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반겼지만 1970년부터 <타임> 지의 평론가로 활약하는 로버트 휴스Robert Hughes(1938~)는 “슈나벌의 작품을 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기름기 흐르는 가슴 근육의 움직임을 연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혹평했다.
슈나벌의 엄청난 작품 가격은 내재적 가치보다는 언론의 과대 광고와 작품의 투자가치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90년의 한 경매에서 슈나벌의 작품에 대해 단 한건의 입찰도 시도되지 않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박수를 쳤다.
1983년에 조각을 시작했고, 낙서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에 관한 영화 <바스키아>(1996)를 감독했다.
현재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도 미국 신표현주의자들로 로버트 쿠시너Robert Kushner(1949~), 데이비드 샐리David Salle(1952~) 등이 있다.
쿠시너는 신표현주의 외에도 신장식주의New Decorativeness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신장식주의는 추상, 구상 혹은 이 둘을 혼합한 복잡한 패턴을 밝게 채색한 회화를 지향한 운동으로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 발생했다.
이런 패턴과 장식 운동은 미니멀 아트의 엄격한 비인격성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장식 미술은 미술에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하므로 순수 미술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몇몇 남성이 가세했으며 쿠시너와 조각가 네드 스미스Ned Smith(1948~)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신표현주의는 미국 외에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번성했고 독일의 신표현주의자들은 종종 ‘새롭고 거친 사람들 Neue Wilden’로 불렸다.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1938~)는 화가, 판화가, 소묘가, 조각가로 동베를린에서 공부했지만, 1956년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이때부터 본래의 성인 케른Kern 대신에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일부러 거칠고 조야한 그림을 그려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회화를 통해 신표현주의의 선구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만취>(1962~63)로 이를 <엉망이 되어 가는 밤>으로도 불린다.
이 작품은 커다란 성기를 가진 남성을 보여주는데,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이 작품이 자화상으로 추측했다.
1963년 이 작품이 처음 베를린에서 소개되었을 때 경찰이 압수했다.
1969년부터 이미지의 위아래를 거꾸로 그리기 시작하여 더욱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너선 파인버그는 저서 <1940년 이후의 미술>(1995)에서 바젤리츠의 “위아래를 뒤바꾼 거꾸로 된 회화”를 “주제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켜 표현적인 표면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리려는 장치”라고 했다.
대니얼 휠러는 저서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1991)에서 바젤리츠의 색채에 대해 “보기 드물게 충만하고 원숙한 색채”라고 격찬했으며, 그의 작품이 “풍부하나 문제가 있는 과거를 창조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다시 하나로 통합된 문화를 제시하는 르네상스적 기품과 현존”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와는 반대로 로버트 휴스는 바젤리츠를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된 예술가의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법학을 공부하고 간헐적으로 회화 교육을 받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1945~)는 화가이며 조각가 호르스트 안테스Horst Antes(1936~),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86)와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키퍼는 초기에 개념 미술 작업을 하면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자화상 사진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로 전향하면서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주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작품은 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거대한 캔버스로 종종 밀짚과 같은 물질이 첨가되기도 했으며 페인트와 피가 함께 섞이기도 했다.
독일의 역사와 북유럽의 신화를 다루었고 독일의 최근 역사와 화해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1987년 로버트 휴스는 기퍼에 관해 “대서양 양편을 통털어 그의 세대에 가장 위대한 화가 ... 지난 10년 동안 상징적 시각의 명백한 위대함을 보여준 몇 안 되는 시각예술가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내적인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적인 공허감”을 나타냈다고 혹평한 평론가도 있다.

바델리츠와 키퍼 외에도 독일 신표현주의자들로 라이너 페팅Rainer Fetting(1949~), 외르크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1945~), 베른트 코베를링Bernd Koberling(1938~),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tz(1941~), A. R. 펭크A. R. Penck(랄프 빙클러Ralf Winkler, 1939~) 등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산드로 키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1952~), 밈모 팔라디노Mimmo Paladino(1948~)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피렌체 태생으로 프렌체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산드로 키아Sandro Chia(1946~)는 1970년대 초에 개념 미술과 퍼포먼스를 시도했으나 1975년 회화로 복귀했으며, 1970년대 말에는 대가들의 작품을 패러디하여 영웅적인 상황을 흉내낸 장면을 설정하고 팽팽한 근육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독특한 양식을 구축하여 동시대 이탈리아 화가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졌다.
<작업 중인 용감한 소년>(1981)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로버트 휴스는 키아의 작품에 나타난 형상에 대해 “고전 조각에서 유래한 것 같은 자세로 바람을 가르면서 석탄을 운반하는 여성스러운 인부들”이라고 적었다.
키아는 또한 회화와 유사한 성격의 조각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