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18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반세기 동안 서양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회화 운동인 인상주의는 체계적인 운동으로 순수 프랑스 미술의 현상이었지만, 많은 나라에서 인상주의의 목적과 실천을 수용하여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유럽은 물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근본적으로 인상주의는 화가의 개성과 세계에 대한 반응을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추구하여 거대하고 딱딱한 형식에 사로잡혀 높은 완성도만을 추구하던 회화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인상주의 운동의 중축은 1860년대에 형성되었고, 인상주의란 명칭은 1874년 파리에서 열린 최초의 그룹전을 평한 한 평론가가 조롱조로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1873년 국전이 열린 후 5월 어느 날 크로드 모네는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그룹전을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공언했다.
모네가 중재자가 되어 협회 설립정관을 몇 차례 뜯어고친 후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가 탄생했다.
이들은 ‘무명협동협회 Societe Anonyme Cooperative’라고 명칭을 정하고 그룹전을 열기로 했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남게 된 이 전시는 1874년 카퓌신 불바드 35번지, 사진작가 펠렉스 투르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작업실에서 개최되었다.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이 실렸으며 출품 작가는 모네 외에 부댕, 펠렉스, 브라크몽, 세잔,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이유보트 등이었다.
전시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인데,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연장하기도 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으며, 카탈로그는 50센티메에 팔았다.
첫날부터 비교적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는데 그들은 작품 앞에서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 예사였다.
어떤 사람은 전시장을 둘러본 후 화가들이 권총에 물감 튜브를 장전해 캔버스를 향해 발포한 후 뻔뻔스럽게도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모네가 ‘새로운 회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평론가들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 반항적인 전시회를 즉각적이고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협회의 리더 모네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4월 25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였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인상주의란 용어가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다.

인상주의전은 이후 일곱 번 열렸으며 마지막 전시회는 1886년에 개최되었는데, 이즈음에 인상주의 그룹은 그 응집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상주의 운동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구성된 적이 없었다.
중심 인물들로는 단 한 번도 인상주의전에 출품하지 않은 에두아르 마네, 모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폴 세잔을 꼽을 수 있다.

평편한 표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인 성질을 인식하기 시작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자신의 글 <모더니스트 회화>(1960)에서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꼽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미술은 매체를 간과하였고 미술을 통해 미술을 숨겨왔다.
모더니즘은 미술을 통해 미술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
옛 거장들은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한계인 평면적인 표면, 지지대의 모양, 안료의 특성들을 단지 은연 중에, 혹은 간접적으로만 습득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했다.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이같은 한계는 개방적으로 습득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마네의 회화는 그것이 그려진 표면 아래의 평면을 선언한 솔직함 덕분에 최초의 모더니스트 회화가 되었다.”

모더니즘의 기원을 19세기 중반 파리에 두는 시각이 일반적이며,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므로 예술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67)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들레르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는 화가는 현대 생활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보들레르의 친구 마네의 회화는 모더니즘 전통에서 핵심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마네의 회화가 회화 자체를 위한 매체의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점차적으로 몰두하게 된 아방가르드 회화 경향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인 전통으로 인식한 그린버그는 마네를 모더니즘의 출발점으로 상정했으며, 사실상 파리나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작품을 무시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현대 미술 Modern Art’이란 용어는 1849년 <아트 저널>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오늘날 현대 미술이 19세기에서 제1차 세계대전 사이까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물론 일부 평론가들은 훨씬 전 또는 후를 출발점으로 꼽기도 한다.
앨런 보니스는 <현대 유럽 미술 Modern European Art>(1972)에서 양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독립성 측면을 고려하여 1863년을 “현대 회화사의 가장 알맞은 출발점”으로 보는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우선 “대중이나 예술가들 사이에서 국전이 누리던 특권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낙선전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적었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의 국전,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 또는 그 밖의 곳에서 유사한 단체들이 19세기 중반에 수행한 중대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양한 작품이 출품되던 대규모 연례전은 예술가가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정상적인 통로였다.
그 외에는 어떤 대안도 없었으며, 예술가가 국전에서 전시하지 않을 것이며 미술관과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낙선전 이후 상황은 와전히 달라졌다.
1874년 인상주의자들이 그들만의 전시회를 기획한 것처럼 예술가들은 직접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화상의 중요성이 매우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즉 화상들이 예술가의 대리인으로서 활약하고, 사업적인 일들을 처리하며 전시회를 기획하는 등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들이 곧 나타났다.”

보니스는 역시 낙선전에서 논쟁의 초점이 된 마네가 “새로운 방법, 게다가 현저하게 현대적인 방법으로 미술에 대해 사고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현대성modernity은 그림에 대한 마네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종종 표면적인 주제보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 더욱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마네가 현대 미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문학, 일화 또는 도덕적인 내용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모네의 작품 <인상, 일출>(1872)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생 인상주의 운동의 목표를 고수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1~1926)는 젊은 시절에 지독한 가난을 겪었지만 1880년대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1890년대에는 파리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지베르니에 저택을 구입할 정도로 부유해졌다.
1890년부터 모네는 같은 모티프를 시간대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상태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그리는 회화 연작에 몰두했다.
<건초더미>(1890~91)와 <루앙 성당>(1891~95)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 후 모네의 관심은 점차적으로 지베르니의 저택에 만든 연못 정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9년부터 <수련> 연작을 그렸으며 그 뒤 계속 이 모티프에만 몰두했다.
1914~16년에는 거대한 크기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저택 마당에 특별한 작업실을 짓고 그곳에서 작업했다.
말년에는 백내장 수술(1923)을 받는 등 시력이 약화되어 곤란을 겪었으나 1926년 타계할 때까지 그렸다.
타계하기 직전에 완성한 수련으로 가득한 거대한 장식 회화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1927년 파리의 오랑제리 미술관에 설치되었다.

모네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가한 화가들 중 가장 오래 생존했다.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그는 19세기 후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마지막으로 그린 수련 작품의 거의 추상적 형태는 이후 등장할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칸딘스키는 1895년에 모네의 <건초더미>에서 추상성을 인식했으며, 리투아니아 태생의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마이어 셔피로Meyer Schapiro(1904~96)는 1937년 “뛰어난 공간적 형태를 지닌 수련 회화는 어떤 식이로든 현대 추상 미술과 연관이 있다”고 했다.
모네의 어른거리는 화면과 추상 표현주의, 특히 잭슨 폴록의 올오버 구성 간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어빙 샌들러는 <추상 표현주의>(1970)에서 모네의 작품과 폴록의 작품에 나타난 유사성은 우연이었다면서 적었다.
“폴록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
확실히 폴록의 ‘뿌리기’ 회화는 모네의 <수련>과 유사하다.
그러나 폴록은 복제된 것이 아닌 실제 모네의 후기 작품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1940년대의 진보적인 화가들은 인상주의를 진지하게, 또는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탁월한 인상주의 예술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는 여덟 차례에 걸쳐 개최된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 참가했지만 다른 인상주의 예수가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작품은 어떤 일정 부분에서만 인상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타의 인상주의 화가처럼 드가는 계획되지 않은 자발적인 장면의 분위기와 움직임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고, 사진의 영향을 받아 스냅 사진에서와 같이 인물을 잘라 그리기도 했으며, 일본 채색 판화의 영향을 받아 낯선 시점을 모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풍경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효과를 표현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인상주의자들의 관심사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드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자발성과 우연의 효과는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며, 실제로 그는 매우 신중히 화면을 구성했다.
그는 “자연을 바탕으로 작업할 때도 반드시 구성은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으며, 또한 “나의 작품보다 더 자발적이지 않은 작품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

최초의 인상주의자들 중 하나로 현재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서 가장 사랑받는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는 특유의 모티프들, 즉 예쁜 어린아이, 꽃, 아름다운 장면, 특히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모티프 자체가 본능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모티프들을 통해 르누아르 자신이 가졌던 즐거움을 직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몇몇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활동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880년경부터 성공을 거두었으며 세기의 전환기에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890년대에 관절염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1897년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1912년부터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후기 작품에서는 인상주의 시기의 작품에서보다 더욱 따뜻한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형태도 충만하고 둥글며 부드럽게 처리되었다.
르누아르의 아들로 유명한 영화 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1962년 매우 생생하고 감동적인 자서전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Renoir, My Father>를 썼고, 이는 1962년 영어로도 출간되었다.

엑상프로방스 태생으로 고갱, 반 고흐와 더불어서 가장 위대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인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은 20세기 미술의 전개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잔의 아버지는 모자 사업을 시작했다가 은행가로 성공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안정 덕분에 세잔은 말년까지 주목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면서 여덟 차례의 그룹전 중 첫 번째와 세 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다.
세잔은 1895년 파리에서 화상 앙부르아주 볼라르가 개인전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비교적 모호한 태도로 작업했다.
이 전시회는 대중에게는 거의 충격을 주지 않았지만 많은 젊은 세대의 화가들을 자극했으며, 당시 그는 거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86년 아버지가 타계하고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 자 드 부팡 집안의 재산을 상속한 후로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살았다.
세잔의 목표는 최상의 프랑스 고전 전통의 형식 구조와 최상의 현대적 자연주의를 결합하는 회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는 “자연을 좇아 푸생을 되살리고자 하는” 야망과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처럼 한결같고 불후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는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소재, 곧 아내 오르탕스의 초상, 정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엑상프로방스의 경관, 특히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자연에 대한 세잔의 각고의 분석은 모네가 <건초더미>, <포플라>에서 대상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훈련을 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세잔은 기본적인 구조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배경, 시간 심지어 계절 조차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인 회화적 균형을 위해 자연적 외관의 형태를 미묘하게 기울이거나 늘려 왜곡했다.
삼차원 표현은 원근법이나 단축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우 특이하고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가 타계한 지 1년 후인 1907년 파리에서 개최된 추모전은 입체주의 발생의 주된 요인이 되었고, 이후 그는 계속해서 다채롭고 지속적이며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리샤르 베르디는 <세잔>(1992)에서 직접적인 추종자들에 대해 그가 미친 영향을 요약했다.
“세잔의 미술이 내포한 의미는 너무나도 다방면에 걸쳐 있어서, 차세대의 가장 진보적인 화가들 중 그를 무시하고 작업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은 모두 사실상 초기 현대 미술의 탄생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세잔은 “우리를 수호하는 ...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마티스에게는 “회화의 신”과도 같았다.
클레는 그를 “더할 나위 없이 가장 뛰어난 스승”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세잔 미술로부터 양식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던 칸딘스키조차도 대상을 순수한 회화적인 상태로 전환시킨 그를 추상 미술의 토대를 쌓아올린 예술가로 인정하고 갈채를 보냈다.
세잔은 오늘날에도 매우 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1996년 테이트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를 찾은 관람자의 수는 40만 8천 6백 88명으로 공식 집계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달랐지만 외양을 세세하게 기록하기보다는 특정한 한 순간에 눈이 본 ‘인상’을 포착하면서 자발적이고 신선하게 주위 환경을 묘사함으로써 아카데미의 관습에 대항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들의 전형적인 주제는 풍경으로 야외로 나가 자연 속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인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 밖에도 그들은 여러 주제를 다루었는데, 특히 일상적인 도시생활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화상 뒤랑-뤼엘의 선전에 힘입어 인상주의 화가들은 1880년대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는 그들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나갔다.
프랑스 밖의 예술가들이 전적으로 인상주의를 받아들인 경우는 드물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인상주의의 사상과 그들 고유의 전통을 종합하면서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보다 자유로운 붓질을 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인상주의가 가장 열렬히 수용된 나라는 미국이다.
인상주의는 오스트레일리와 영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프랑스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의 책을 영역한 인상주의에 관한 책이 1903년 영국에서 최초로 발간되었으며 모네와 친분이 있고 피사로와 서신을 교환하던 영국의 풍경화가 윈퍼드 듀허스트Wynford Dewhurst(1864~1941)가 쓴 <인상주의 회화: 그 기원과 발전 Impressionist Painting: Its Genesis and Development>은 최초로 영어로 씌여진 책으로 그 이듬해에 발간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인상주의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는 톰 로버츠이고, 영국에서는 주로 시커트와 스티어를 통해 인상주의가 유입되었다고 간주되고 있지만, 두 사람의 작품 차이점을 비교하면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부정확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D.S. 매콜은 “평론가들과 대중을 놀라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모든 새로운 회화”에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적용되었다고 논평했다.

인상주의는 모방이나 수용의 반응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역반응도 불러 일으켰다.
사실 인상주의의 영향은 너무 대단한 것이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미술사는 인상주의의 여파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광학적 원칙에 과학적인 기초를 부여하려고 노력했으며, 후기 인상주의는 순수하게 재현적인 기능으로부터 색채와 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여러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인상주의자들이 덧없고 우연한 것에 너무 집중함으로써 희생되었다고 생각한 감성적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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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워홀의 유성영화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에 별처럼 떠오른 워홀은 영화에 더욱 집념을 보였다.
인기 있는 영화 제작자에게 어울리는 언더그라운드의 스타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마리오 몬테즈와 에디 시즈윅이다.
푸에르토리코 태생의 마리오는 스페인계 사람들이 사는 뉴욕의 빈민가에서 성장했다.
마른 체구에 검은 피부를 한 마리오는 TV에서 방영하는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연기를 익혔다고 했는데 특히 여자로 분장하는 역할에 뛰어났다.
1963년 배우로 데뷔하여 훌륭한 연기로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라서 돈을 번 것은 아니므로 낮에는 우체부일을 하고 밤에만 화려한 배우였다.
동료 우체부들은 여장하고 영화에 출연하는 마리오를 언더그라운드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마리오는 자신이 입을 여자의상을 대부분 싸구려 상점에서 구입했지만 가끔은 손수 디자인해 만들기도 했다.
그의 여장 연기는 불완전한 영어구사와 함께 얼띤 데가 있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여 더욱 인기가 높았다.

워홀의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마리오와 에디가 워홀의 〈매춘부〉(1964)에 출연했지만 두 사람의 역할에는 대사가 없었다.
〈매춘부〉는 워홀이 동시녹음이 가능한 16mm 오리콘 무비 카메라를 구입하고 처음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워홀은 성능 좋은 녹음기를 사서 소리를 따로 녹음한 뒤 편집과정에서 사운드 트랙으로 옮겼다.
이처럼 워홀은 촬영현장의 대사와 소리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소리를 영상에 접목시키기를 좋아해서 영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소리 자체는 사변적이었으므로 소리에 대한 워홀의 관심을 알 수 있다.

〈매춘부〉 역시 워홀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동작 없이 70분 동안 계속되는 흑백영화다.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한 장면뿐으로 그나마 따로 삽입한 것이다.
마리오가 흰 바지에 긴 장갑을 끼고 금발 가발을 쓴 매력적인 여인으로 분했다.
캐롤 코신스키는 흰 고양이를 안고 마리오와 함께 소파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고양이를 놓아주었다.
워홀의 조수 필립 파간은 소파 뒤에 서 있었고 정장을 한 말랑가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마리오를 바라보았다.
마리오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바나나를 아주 요염한 모습으로 먹었다.
그(영화에서는 그녀)는 바나나 껍질을 천천히 벗긴 후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입 속에 넣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바나나를 먹었다.
촬영하던 워홀은 카메라를 마리오에게 고정시켜 놓고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러 갔는데 촬영중에 그러기 예사였다.
카메라맨이 없는 상태에서도 배우들은 연기를 계속했다.
바나나를 다 먹은 마리오는 껍질을 바닥으로 던지고 다시 핸드백에서 바나나를 꺼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으며, 바나나를 다리에 쓱쓱 비비기도 하고 말랑가와 키스를 하기도 했다.
워홀은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이 여전히 수화기를 붙들고 떠들고 있었다.

대사는 빌리 리니크, 시인 해리 패인라이트와 로널드 타벨이 따로 만들어 삽입했다.
워홀이 브루클린 출신의 재능 있는 타벨과 만난 것은 1964년 11월이었다.
말랑가와 함께 젊은 시인들을 위한 시낭송회를 보러갔던 워홀은 시를 낭송하던 타벨이 마음에 들어 말랑가를 보내 타벨을 불러오도록 했다.
워홀은 타벨에게 “당신의 시낭송이 마음에 든다”면서 자신이 제작하고 있는 영화를 위해 뭐라도 읽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날 이후 워홀의 사단에 소속된 타벨은 워홀 영화의 대사를 맡았는데 “소설가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타벨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익살스러운 것은 70분짜리 흑백영화 〈스크린 테스트 2〉(1965)였다.
검은 가발을 쓴 마리오만 출연하여 인기 있는 여주인공 에스메랄다의 연기를 흉내내는 영화이다.
에스메랄다는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Notre Dame de Paris》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다.
마리오는 에스메랄다를 익살스럽게 풍자하여 사람들을 웃겼다.
자진해서 연출을 맡은 타벨은 마리오에게 스커트를 올리고 자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하면서 “염려마라, 자지를 찍을 것은 아니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마리오는 “나도 안다, 내 자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라고 응수했다.
타벨은 마리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워홀은 마리오의 연기에 흡족해했다.
〈매춘부〉와 〈스크린 테스트 2〉에서 성공한 마리오는 우쭐해하면서 그 후로도 헐리우드 인기 스타의 연기를 익살로 바꾸는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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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

 
네오-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창설자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는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는 아주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부터 로마 군인들의 힘이 하늘 옾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더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황제를 선출했으며 나중에는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를 많은 권리금을 받고 팔았다.
중이 고기맛을 안 것처럼 군인들이 돈벌이에 전념했으니 자연히 국경을 지키는 일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틈을 노린 독일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왔으며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공격을 감행하면서 잃어버린 그들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다.
전쟁과 흑사병이 이탈리아 인구를 삼분의 일로 줄어들게 했으며 정부는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세금을 올렸으므로 과중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달아났고 군인들은 시민들이 달아나지 않도록 감시하기에 바빴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위대한 철학자 플로티누스가 태어난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과 콘스탄티누스가 왕국을 재정비하면서 질서를 회복했는데 이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지만 플로티투스의 글에는 시대에 관한 암울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는 선과 아름다움이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유했는데 아마 대단한 낙천주의자였거나 초현실주의자였던 것 같았다.
낙천주의자답게 그는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인들을 차별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잘 어울렸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가망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희망이 있는 정신세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그가 추구한 정신세계란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망한 후에야 즐길 수 있는 하늘나라였지만 그에게는 환상과도 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반대되는 관념의 이데아 세계였다.
딘 인제Dean Inge는 플로티누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플라톤주의는 부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발기지 않고서는 플라톤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했다.
플로티누스 안에서 플라톤은 부활을 맞았다.

플로티누스는 중세 기독교 신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으로 인정받고 있다.
플로티누스가 설명한 이데아 세계는 아주 아름다운데 단테Dante가 낙원을 찬양한 것에 해당한다.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가장 정련된 환상으로는 순수하게 응집된 거침없는 노래가 사파이어 색들로 아롱지는 왕좌에 앉아 있는 그분 앞에서 불려진다."

사파이어 광채가 아롱지는 왕좌 앞에서 노래하는 플로티누스에게 당시 군국주의의 부패 따위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럿셀은 플로티누스에 고나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주가 반사하는 것에 의해 수반되는 기쁨과 비탄만이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산출하며, 사람은 즐거워하는 절망주의자이거나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인데 플로티누스는 후자에 속한다."

비애스러운 희망주의자 플로티누스는 유물론을 배척했으며 플라톤의 이론을 아주 선명하도록 재현했고 영혼과 몸에 관한 그의 이원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욱 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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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 아트


옵 아트는 옵티컬 아트Optical art를 줄인 말로 1965년 뉴욕 모마에서 열린 ‘반응하는 눈’ 전시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각적 모호함과 최소한의 시각적 장치를 이용하여 시각에 충격과 혼란을 줌으로써 작품이 진동하거나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환각적인 움직임을 창출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시각적 변칙에 관한 예술적 탐구와 지각 심리학에 관한 과학적 탐구 사이의 경계는 매우 미미하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옵 아트의 목적은 망막에 매우 강력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시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시각적 모호함을 유발하거나 양립 불가능한 지각적 환영을 동시에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시각 체계는 피로는 느끼고 일관된 영상을 유지하기 위해 눈동자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이런 의도에서 주위를 분산시키는 재현적 주제들을 제거하고 최대한의 기하학적 명료성을 추구하며, 미리 정해진 시각적 흥분을 일으키기 위해 마치 기계와 같이 정밀하게 화면과 모서리를 통제한다.

옵 아트 예술가들의 많은 작품들은 지각 심리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는 잘 알려진 시각적 착각 현상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그들은 화면이 진동하거나 뒤틀리는 듯한 착각 현상을 유발하기 위해 크기, 형태, 방향, 명암, 많은 연속 단위 등을 체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팽창과 확대 등과 같은 착각 현상을 야기시키기 위해 주기적인 패턴 체계 속에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대 또는 축소시키기도 했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또 다른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패턴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각 현상을 일으켜 모호하고 대립적인 착시를 유발시키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이다.
무늬가 전면에 걸쳐 그려진 화면에서 형태들은 흔들리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무한히 후퇴하는 듯한 착각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종종 가상의 비현실적인 공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옵 아트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헝가리계 프랑스 화가 빅토르 바자렐리Victor Vasarely(1908~97)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포돌리니-볼크만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며, 1929년에는 ‘부다페스트의 바우하우스’로 불린 알렉산데르 보르트니크의 뮈헤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모홀리-나기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의 지도를 받았고, 말레비치, 몬드리안 같은 구성주의 화가들과 칸딘스키, 그로피우스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바자렐리는 1930년 파리에 정착하여 판화에 전념하다가 1943년 다시 회화 작업을 시작했다.
1947년경 자신의 대표적인 양식인 기하적 추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44년 드니즈 르네 화랑과 관련된 예술가들의 그룹이 창립된 이후부터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시각 예술 연구회의 발전에도 공헌했다.
초기에는 스스로도 인장하듯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1882~1960)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경부터 완전 추상을 추구한 에르뱅은 1931년에 추상-창조 협회의 창립에 가담했으며, 1949년에는 <비구상과 비대상 미술 L'Art non-figuratif et non-objectif>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괴테의 색채 이론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면서 자신의 후기 작업에 관해 설명했다.
에르뱅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하여 기하적 추상에 몰두한 몇 안 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였으며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바자렐리는 옵 아트로 발전하게 될 시각적 모호함을 점차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일반적으로 옵 아트의 주요 창시자이자 가장 완벽한 실행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1955년경부터 여러 개의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이 선언문들은 광학적인 현상을 미술에 이용하는 것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서 이 분야에서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품과 더불어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시네티즘 cinetisme’(혹은 아르 시네티크art cinetique)이란 용어를 적용한 작품들을 통해 시각적 모호함을 통해 움직이는 듯한 환영적 인상을 창출해내는 방법과 수단을 탐구했으며, 이런 목적을 위해 나오고 들어가는 형태들을 서로 교차시키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나도록 했다.
이런 작품은 통상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이나 미학적 경험이 아니라 지각의 불안을 통해 야기된 시각적 경험을 목적으로 한다.

바자렐리는 예술가란 자유롭게 복수 제작할 수 있도록 원형을 만드는 기술자라고 믿었고, 움직이는 개념에 매료되었으며, 옵 아트 뿐만 아니라 키네틱 아트로도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또한 건축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70년 고르데스에 자신의 미술관을 열었으며, 1976년 엑상프로방스의 자드부퐁에 길이 87미터의 6각형 건물 여섯 동으로 이루어진 재단 건물을 디자인했다.
이 건물에서 높이 8미터의 7개 커다란 방은 다색의 기하적 형태로 뒤덮였고, 외부와 내부의 “풍경”이 결합되어 “색채로 가득 찬 기쁨의 도시”가 이루어졌다.

바자렐리 외에 옵 아트 선구자들로 ‘변형 가능한 부조’를 제작한 이스라엘의 야코프 아감, 진동하는 스크린을 제작한 베네수엘라의 헤수스 라파엘 소토, 영국의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 바자렐리의 아들 이바랄과 역시 프랑스 태생인 프랑수아 모를레 등이 있다.

야코프 아감Yaacov Agam(야코프 기프슈타인Jacob Gipstein, 1928~)은 1946년부터 예루살렘의 베자렐 미술 학교에서 모르데카이 아르돈Mordecai Ardon(막스 브론슈타인Max Bronstein, 1896~1992)의 지도를 받았다.
이스라엘 화가 아르돈은 1920~25년 바우하우스에서 클레, 이텐, 칸딘스키 등에게서 회화를 배웠고 1926년에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는 베를린에 있던 이텐 미술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33년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며, 베자렐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1940년에 교장이 되었으며, 1952년에 이스라엘 교육부의 미술 고문이 되었다.
1950년대에 유럽에서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고 초현실주의풍의 강렬한 상상력을 지닌 뛰어난 색채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아감은 아르돈의 권유로 1949년 취리히로 가서 당시 그곳의 공예 학교에 재직하던 이텐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지크프리트 기디온의 강의를 들었으며 막스 빌도 만났다.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감은 실험적 구성주의 경향을 확고하게 따르면서 타시즘과 앵포르멜의 충동적 주관주의를 거부했다.
1951년 무일푼으로 파리로 간 그는 레제와 에르뱅을 알게 되었고, 1953년 파리의 크라방 화랑에서 변화 가능한 회화 작품과 변형시킬 수 있는 부조 작품 45점을 소개했다.
1955년 뷔리, 소토, 탱글리, 콜더 등과 함께 드니즈 르네 화랑에서 열린 ‘움직임’ 전시회에 참가했는데, 이 전시회는 키네틱 아트 운동의 획기적인 전시회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부터 아감은 움직임과 관람자의 참여를 강조하는 비구상 미술 분야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아감은 관람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시각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대위법적 회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런 작품에 관해 그는 말했다.
“여기에서는 구조와 색채가 각기 다른 몇 가지 시각적 주제들이 대위법적 구성으로 스며들어 통합된다.
이런 그림의 표면은 연속적인 물결처럼 수직적으로 나란히 끼워진 각기둥 부조로 되어 있다.
그 위에는 서로 다른 주제들이 그려져 있어 리드미컬한 운율 체계를 보여준다.
나는 여덟 개나 되는 분명히 다른 주제들을 한 작품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너는 그림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그 주제들이 서로 통합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네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움직일 때 그것들이 어떻게 천천히 분리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감은 관람자의 위치와 시각의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완전히 변하는 벽화와 천장화에 뛰어났다.
1966년 이후에 제작된 아감의 ‘변형 가능한 조각품’에는 유희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
즉 관람자들이 ‘무수히 많은 공간’을 창출해낼 수 있도록 작품의 구성 요소를 직접 재배치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또한 빛을 이용한 환경을 창조했으며 빛의 효과를 이용한 실험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67년 파리에서 열린 ‘광선과 움직임’ 전시회에 그의 ‘대위법적 회화’ 가운데 하나를 전시했는데 그것은 <피아트 럭스>로 회전하면서 섬광 촬영장치의 빛을 받았고 말소리와 억양 그리고 크기에 반응했다.
아감은 1974년 예술과 문학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텔아비브 대학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헤수스 라파엘 소토Jesus Rafael Soto(1923~)는 1942~47년 카라카스 조형 예술 학교에서 공부하고 1947~50년 마라카이보 미술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1950년 파리로 가 살면서 베네수엘라와 파리의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했다.
소토는 처음에는 후기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리다가 입체주의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파리로 가기 전에는 말레비치의 그림을 도판으로 접하고 영향을 받았으나 몬드리안과 구성주의자들의 작품을 본 후에는 시각적인 현상과 옵 아트를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대 초 수열, 반복, 연속과 같은 연작을 통해 시리얼 아트를 실험하기도 했다.
<투명한 사각형의 대체>(1953~54)에서는 평편한 표면 위에 공간의 효과를 창조해냈는데, 이후 이것을 직사각형과 곡선의 형태로 디자인하여 채색한 두세 개의 투명한 유리판들을 겹쳐놓음으로써 3차원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작품은 관람자가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관람자의 참여가 요구되었다.

소토는 1961년에 질감과 효과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못이나 나무조각을 박아놓은 고무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질감의 효과가 강조된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1963년에는 <필적>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직으로 줄이 그어져 있는 평편한 평면 위에 얇고 구부러진 철사들을 매달아 미묘한 진동을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진동> 연작이 시작된 것도 거의 같은 시기이다.
이런 작품들 중 일부는 <필적> 연작에서처럼 줄이 그어진 패널의 앞에 매달아놓은 막대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다른 것들은 뒤쪽 패널에 고정되어 균형 있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각형들에 의해 그 효과가 나기도 한다.
관람자의 참여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60년대 후반에 더욱 두드러졌다.

런던 태생의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Bridget Louise Riley(1931~)는 1949~53년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샘 레이빈의 지도로 소묘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1952~55년에는 왕립 미술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라일리는 1959년 여름에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렸고 이듬해 드 소스마레와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미래주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라일리의 작품은 바자렐리의 기본 개념과 유사하지만 양식과 실제 작업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녀는 옵 아트 예술가들이 사용한 대부분의 기법에 정통했는데, 특히 크기나 형태를 미묘하게 변화시키거나 연속적인 단위를 배치하여 올오버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 능통했다.
또한 옵 아트의 특징인 망막 효과를 추구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움직임에 대한 환각적인 환영 현상이며, 다른 하나는 망막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일시적인 안정감과 질서감을 가진 비교적 작은 영역에 눈을 고정시킴으로써 유발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각적인 피로감이 빠르게 일어나면서 서로 충돌하는 패턴과 2차적인 형태들이 나타나며, 이것들이 겹쳐져서 안정되고 판단 가능한 지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라일리는 흑백으로 된 그림으로 옵 아트 작업을 시작했는데 거의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회색조를 거쳐 1965년경에는 유사한 효과를 목적으로 한 색채 구성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작품은 과학적 도형과 같은 정확함과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것은 실제로 과학적 도표와 같은 정확함과 정밀함을 요하는 세밀한 밑그림이나 지시 사항에 따라 조수들에 의해 제작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 패턴이 관람자의 눈을 현혹시키고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정확함 때문이다.

바자렐리의 아들 장-피에르 바자렐리 이바랄Jean-Pierre Vasarely Yvaral(1934~)은 파리 응용 미술 학교에서 공학했다. 신경향의 일원이었으며 시각 예술 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했다.
신경향Nouvelle Tendance(New Tendency)은 1960년대 초반 대부분의 서유럽 나라들과 일본,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표면화되고 있던 매우 다양한 구성주의적 경향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표현 양식은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미술작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과학의 기술의 차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움직임과 같은 직접적 자극 이용, 전통적인 미학적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운동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신경향의 두 선구자는 1963년에 타계한 이탈리아 실험 예술가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1933~63)와 1962년에 타계한 니스 태생의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Yves Klein(1928~62)으로 알려져 있다.
시각 예술 연구회Groupe de Recherche d'Art Visuel(GRAV)는 1960년 파리에서 형성된 단체로 처음에는 11명의 예술가가 참여했으나 후에 6명으로 줄었다. 훌리오 레 파르크, 프랑수아 모를레, 프란시스코 소브리노, 조엘 스탱, 이바랄, 오라시오 가르시아-로시가 그 구성원들이었다.
신경향의 맥락에서 형성된 이 그룹의 주된 목적은 빛과 움직임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연구였다.
그룹의 구성원들은 미술작품의 제작에 있어서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채택하고, 현대적인 산업 재료를 예술적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는지를 조사했다.
동시대의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관람자의 적극적 동참이 요구되는 미술작품을 제작하려고 했으며, 개별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으나 익명의 공동 작품도 제작했다.

이바랄은 허상적인 움직임의 느낌이나 엄격하게 제한된 깊이 내에서 다가오고 물러나는 형태들의 모호한 패턴을 창출하기 위해 주로 무아레moire 패턴에서 흑백의 사용에 집중했다.
프랭크 포퍼는 이바랄이 구사한 무아레 효과에 대해 적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최대한 순수하게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주된 목표이다.
따라서 대상과 대상의 시각적 현존에 대한 우리의 지각 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는다.
이것은 빛을 발산하는 실을 사용한 작품의 경우에서 특히 그러하며, 여기에서 개입의 효과는 현저한 비물질화 효과를 창출한다.
‘작품’은 소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호 교차하는 선들의 변화는 즉각적으로 지각 가능하다.”

프랑수아 모를레Francois Morellet(1926~)는 옵 아트 중 특정 분야의 선구자이다.
시각 예술 연구회의 창립 회원으로 이 그룹은 물론 신경향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다.
모를레는 <구형-씨실> 연작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은 작은 금속대나 금속관을 서로 직각으로 쌓아올려 만든 구형들로 이루어졌다.
이 연작 중 일부는 지름이 1.8m에 달하며 모빌처럼 매달려 있고 광선의 반사에 의한 신비로운 특성을 보여준다.
모를레는 금속 그물을 각기 다른 축으로 하나 하나씩 쌓아올린 <철망> 연작도 제작했다.
그리고 채색한 정사각형들을 임의로 배열하여 회화에서 우연적인 요소를 탐구했다.

미국에서는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1888~1976)가 1950년대에 자신이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효과 사이의 모순’이라도 부른 바를 증명했다.
독일계 미국 화가이며 디자이너 알베르스는 1913~15년 베를린 왕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에센에 있는 미술 공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표현주의 경향의 석판화와 목판화를 제작했다.
1919~20년 뮌헨 아카데미에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스승이기도 한 프란츠 슈투흐에게 회화를 배웠다.
1920년 바우하우스에 들어갔고 특히 유리 그림과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인에 몰두했다.
1925년 바우하우스 교사가 되었고 타이포그래피와 유리나 금속 실용 제품의 디자인 및 가구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도 계속 그곳에 남아 1933년 폐교할 때까지 작업했다.
1933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새로 설립된 실험적인 학교인 블랙 마운틴 칼리지를 처음 방문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알베르스는 193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고 1949년까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전공 대학원 과정을 맡아 강의했다.
1950년 예일 대학의 건축 디자인 학부의 주임교수가 되어 1958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재직했으며 그 후 1960년까지 객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알베르스는 미술 교육 과정에서 미술이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자신의 목적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형태 요소들과 구도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했으며, 미술은 이성적으로 통제된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는 재현적 묘사를 피했으며 “미술은 재현이 아니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절제된 형식을 꾀했고 회화의 수단과 효과 사이의 균형도 추구했다.
즉흥적 경향이나 개성적 표현을 기계와 같은 개성 없는 정밀함으로 대체시킨 그의 작품은 기하적 추상이나 구성주의로 분류된다.
그는 1950년에 시작하여 오랫동안 연작으로 그린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치밀하게 계산된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극히 비슷한 색채 범위 내에서 미묘하게 변화시킨 색조들로 채색한 정사각형의 닮은꼴들을 중첩시킨 것이다.
앞서 칸딘스키가 보여준 것처럼 그는 인접한 색채들이 서로 반응하여 팽창하거나 수축하고 또 후퇴하거나 전진하는 경향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기초 연구는 칸딘스키보다 더 체계적인 것으로서 그 결과가 <색채의 상호 작용 Interaction of Color>(1963)으로 출간되었다.
시각적인 불명료성을 교묘하게 이용한 그의 구성 작품들 중 일부는 옵 아트에 가깝다.
매우 유사한 색조의 색채들이 병치되었을 때 제3의 색채로 보이게 된다는 시각 현상을 활용한 그의 실험 혹은 옵 아트 예술가들이 창안하고 탐구한 것과 일부 흡사하다.

미국 옵 아트 예술가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리처드 아누슈키에비치Richard Anuszkiewicz(1930~)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이리 태생의 아누슈키에비치는 1948~53년 클리블랜드 아트 인스티튜트, 1953~55년 예일 대학, 1955~56년 켄트 주립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옵 아트의 특징인 기묘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며 현란한 효과를 창출하는 기하적 추상화를 매우 꼼꼼한 솜씨로 그렸다.
그는 옵 아트의 원칙을 활용한 미국 예술가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다.

옵티컬 아트라는 용어는 1960년대 이후 클레먼트 그린버그를 위시한 평론가들에 의해 비평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후기 회화적 추상에 속하면서 표현적인 성격 없이 완전히 시각적이고 비촉각적인 느낌을 가진 색채 공간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을 지칭했다.
색면 회화와 옵 아트 모두 규모가 매우 중요하여 크기를 축소시킨 도판에서는 작품의 효과를 느끼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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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별이다!”라고


1964년 6월 어느 토요일 밤 워홀은 마냥 긴 무성영화 〈엠파이어〉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북쪽으로 16블럭 떨어진 타임라이프 건물 40층에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8시간이나 촬영했다.
워홀은 성능이 좋은 오리콘 카메라를 빌렸는데 365m 높이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모두 찍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번에 3분이 아니라 35분씩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콘 카메라를 사용해 본 조나스 메커스가 워홀에게 카메라 사용법을 가르쳐주었고 말랑가는 촬영을 도왔다.
35분짜리 필름 14통을 사서 12통을 사용했으니 전체가 8시간짜리 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오후 6시부터 촬영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둠이 깔리자 빌딩의 사무실에 전등이 켜지지 시작했다.
빌딩은 전등 빛으로 조금씩 밝아졌으며 얼마 후 환해졌다.
워홀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별이다!”라고 소리쳤다.
새벽 1시경이 되자 사무실의 등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해 곧 건물 전체가 어두워졌으며 1시 30분경 워홀은 촬영을 끝냈다.
이 영화는 이듬해 3월 시청극장(City Hall Cinema)에서 상영되어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엠파이어〉에 관한 메커스의 평이 《빌리지 보이스》(1963. 8. 13)에 실렸다.

지난 토요일 난 앤디 워홀의 서사시 〈엠파이어〉가 상영되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
… 카메라는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엠파이어〉는 새로운 영화로 탄생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영화제작자 워홀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워홀은 메커스의 평에 만족했고 자신이 영화에서 조금씩 성공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워홀은 〈엠파이어〉의 촬영을 마치고 남은 필름 두 통으로 다른 영화를 한 편 제작하고 싶었다.
빌려온 카메라를 월요일까지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그는 헨리 겔드잘러(그림 117)에게 전화해서 일요일 오후 공장으로 오라고 했다.
헨리가 “내가 할 일이 뭐냐?”고 묻자 워홀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시가를 피우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워홀은 일요일 오후 공장으로 온 헨리에게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촬영을 시작했다.
헨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전 아주 놀랐어요.
앤디가 카메라 뒤에 서 있지 않았거든요.
앤디는 필름이 돌아가도록 카메라를 장치해 놓고는 전화를 걸러 가버렸고 이따금 카메라로 와서는 내게 손을 흔들었어요.
전 이상한 경험을 했다니까요.
한 시간 반이 후딱 지나갔어요.
카메라 뒤에는 아무도 없는데 난 한 시간 반 동안 혼자 앉아서 몸짓을 했어요.
모든 것이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고 숨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렇게 해서 100분짜리 무성영화 〈헨리 겔드잘러〉(1964)가 완성되었다.
메커스의 호평이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며칠 뒤 영화제작자 피터 골드만의 반박문이 《빌리지 보이스》(1964. 8. 27)에 다시 실렸다.

난 메커스의 호평에 관대할 수 없다.
그 영화는 카메라도 렌즈도 필름도 없이 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초점도 맞추지 않은 카메라는 두 시간 동안 테일러 메드의 똥구멍만 비추었다.
… 8월 13일 지면에는 앤디 워홀을 지나치게 칭찬하는 글이 실렸으며 … 워홀이 영화제작자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이며 순정적인 자라고 썼는데 앞으로 워홀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한 수십 편의 영화를 보아야 할 것이며 이런 신문광고를 보게 될 것이다.
‘지루함을 보장한다.
14시간 동안 순전히 공허한 스크린!’

호평이든 악평이든 평론가들이 워홀의 영화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는 것은 그가 영화계에서 문제의 제작자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워홀의 긍극적 목적은 호평이 아니라 재능을 인정받아 헐리우드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1964년은 워홀에게 성공의 해였다. 카스텔리 화랑에서 꽃그림이 모두 팔렸을 뿐 아니라 영화 네 편이 9월에 열리는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되었다.
영화를 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그에게 이 일은 성공의 청신호와도 같았다.
워홀은 〈잠〉, 〈키스〉, 〈이발〉, 〈식사〉 네 편의 영화를 출품했고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동안 매일 5시 30분부터 자정까지 필하모닉 홀에서 상영되었다.
워홀은 라 몬테 영에게 페스티벌에 출품할 영화의 사운드 트랙의 작곡을 부탁했다.
그해 12월 7일 브로드웨이 89번가에 있는 뉴요커 극장(New Yorker Theatre)에서는 메커스의 주최로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수상 파티가 열렸는데 워홀의 영화 5편이 선정되었다.
선정된 영화는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된 4편과 〈엠파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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