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18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반세기 동안 서양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회화 운동인 인상주의는 체계적인 운동으로 순수 프랑스 미술의 현상이었지만, 많은 나라에서 인상주의의 목적과 실천을 수용하여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유럽은 물론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근본적으로 인상주의는 화가의 개성과 세계에 대한 반응을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추구하여 거대하고 딱딱한 형식에 사로잡혀 높은 완성도만을 추구하던 회화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인상주의 운동의 중축은 1860년대에 형성되었고, 인상주의란 명칭은 1874년 파리에서 열린 최초의 그룹전을 평한 한 평론가가 조롱조로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1873년 국전이 열린 후 5월 어느 날 크로드 모네는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그룹전을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공언했다.
모네가 중재자가 되어 협회 설립정관을 몇 차례 뜯어고친 후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가 탄생했다.
이들은 ‘무명협동협회 Societe Anonyme Cooperative’라고 명칭을 정하고 그룹전을 열기로 했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남게 된 이 전시는 1874년 카퓌신 불바드 35번지, 사진작가 펠렉스 투르나숑 나다르Felix Tournachon Nadar(1820~1910)의 2층 작업실에서 개최되었다.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이 실렸으며 출품 작가는 모네 외에 부댕, 펠렉스, 브라크몽, 세잔,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이유보트 등이었다.
전시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인데,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연장하기도 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으며, 카탈로그는 50센티메에 팔았다.
첫날부터 비교적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는데 그들은 작품 앞에서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 예사였다.
어떤 사람은 전시장을 둘러본 후 화가들이 권총에 물감 튜브를 장전해 캔버스를 향해 발포한 후 뻔뻔스럽게도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모네가 ‘새로운 회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평론가들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 반항적인 전시회를 즉각적이고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협회의 리더 모네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4월 25일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였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인상주의란 용어가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다.

인상주의전은 이후 일곱 번 열렸으며 마지막 전시회는 1886년에 개최되었는데, 이즈음에 인상주의 그룹은 그 응집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상주의 운동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구성된 적이 없었다.
중심 인물들로는 단 한 번도 인상주의전에 출품하지 않은 에두아르 마네, 모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폴 세잔을 꼽을 수 있다.

평편한 표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인 성질을 인식하기 시작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자신의 글 <모더니스트 회화>(1960)에서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꼽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미술은 매체를 간과하였고 미술을 통해 미술을 숨겨왔다.
모더니즘은 미술을 통해 미술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
옛 거장들은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한계인 평면적인 표면, 지지대의 모양, 안료의 특성들을 단지 은연 중에, 혹은 간접적으로만 습득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했다.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이같은 한계는 개방적으로 습득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마네의 회화는 그것이 그려진 표면 아래의 평면을 선언한 솔직함 덕분에 최초의 모더니스트 회화가 되었다.”

모더니즘의 기원을 19세기 중반 파리에 두는 시각이 일반적이며,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므로 예술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67)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들레르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는 화가는 현대 생활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보들레르의 친구 마네의 회화는 모더니즘 전통에서 핵심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마네의 회화가 회화 자체를 위한 매체의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점차적으로 몰두하게 된 아방가르드 회화 경향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인 전통으로 인식한 그린버그는 마네를 모더니즘의 출발점으로 상정했으며, 사실상 파리나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작품을 무시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현대 미술 Modern Art’이란 용어는 1849년 <아트 저널>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오늘날 현대 미술이 19세기에서 제1차 세계대전 사이까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물론 일부 평론가들은 훨씬 전 또는 후를 출발점으로 꼽기도 한다.
앨런 보니스는 <현대 유럽 미술 Modern European Art>(1972)에서 양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독립성 측면을 고려하여 1863년을 “현대 회화사의 가장 알맞은 출발점”으로 보는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우선 “대중이나 예술가들 사이에서 국전이 누리던 특권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낙선전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적었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의 국전,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 또는 그 밖의 곳에서 유사한 단체들이 19세기 중반에 수행한 중대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양한 작품이 출품되던 대규모 연례전은 예술가가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정상적인 통로였다.
그 외에는 어떤 대안도 없었으며, 예술가가 국전에서 전시하지 않을 것이며 미술관과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낙선전 이후 상황은 와전히 달라졌다.
1874년 인상주의자들이 그들만의 전시회를 기획한 것처럼 예술가들은 직접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화상의 중요성이 매우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즉 화상들이 예술가의 대리인으로서 활약하고, 사업적인 일들을 처리하며 전시회를 기획하는 등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들이 곧 나타났다.”

보니스는 역시 낙선전에서 논쟁의 초점이 된 마네가 “새로운 방법, 게다가 현저하게 현대적인 방법으로 미술에 대해 사고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현대성modernity은 그림에 대한 마네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종종 표면적인 주제보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 더욱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마네가 현대 미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문학, 일화 또는 도덕적인 내용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모네의 작품 <인상, 일출>(1872)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생 인상주의 운동의 목표를 고수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1~1926)는 젊은 시절에 지독한 가난을 겪었지만 1880년대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1890년대에는 파리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지베르니에 저택을 구입할 정도로 부유해졌다.
1890년부터 모네는 같은 모티프를 시간대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상태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그리는 회화 연작에 몰두했다.
<건초더미>(1890~91)와 <루앙 성당>(1891~95)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 후 모네의 관심은 점차적으로 지베르니의 저택에 만든 연못 정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9년부터 <수련> 연작을 그렸으며 그 뒤 계속 이 모티프에만 몰두했다.
1914~16년에는 거대한 크기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저택 마당에 특별한 작업실을 짓고 그곳에서 작업했다.
말년에는 백내장 수술(1923)을 받는 등 시력이 약화되어 곤란을 겪었으나 1926년 타계할 때까지 그렸다.
타계하기 직전에 완성한 수련으로 가득한 거대한 장식 회화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1927년 파리의 오랑제리 미술관에 설치되었다.

모네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가한 화가들 중 가장 오래 생존했다.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그는 19세기 후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마지막으로 그린 수련 작품의 거의 추상적 형태는 이후 등장할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칸딘스키는 1895년에 모네의 <건초더미>에서 추상성을 인식했으며, 리투아니아 태생의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마이어 셔피로Meyer Schapiro(1904~96)는 1937년 “뛰어난 공간적 형태를 지닌 수련 회화는 어떤 식이로든 현대 추상 미술과 연관이 있다”고 했다.
모네의 어른거리는 화면과 추상 표현주의, 특히 잭슨 폴록의 올오버 구성 간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어빙 샌들러는 <추상 표현주의>(1970)에서 모네의 작품과 폴록의 작품에 나타난 유사성은 우연이었다면서 적었다.
“폴록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
확실히 폴록의 ‘뿌리기’ 회화는 모네의 <수련>과 유사하다.
그러나 폴록은 복제된 것이 아닌 실제 모네의 후기 작품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1940년대의 진보적인 화가들은 인상주의를 진지하게, 또는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탁월한 인상주의 예술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는 여덟 차례에 걸쳐 개최된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 참가했지만 다른 인상주의 예수가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작품은 어떤 일정 부분에서만 인상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타의 인상주의 화가처럼 드가는 계획되지 않은 자발적인 장면의 분위기와 움직임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고, 사진의 영향을 받아 스냅 사진에서와 같이 인물을 잘라 그리기도 했으며, 일본 채색 판화의 영향을 받아 낯선 시점을 모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풍경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효과를 표현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인상주의자들의 관심사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드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자발성과 우연의 효과는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며, 실제로 그는 매우 신중히 화면을 구성했다.
그는 “자연을 바탕으로 작업할 때도 반드시 구성은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으며, 또한 “나의 작품보다 더 자발적이지 않은 작품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

최초의 인상주의자들 중 하나로 현재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서 가장 사랑받는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는 특유의 모티프들, 즉 예쁜 어린아이, 꽃, 아름다운 장면, 특히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모티프 자체가 본능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모티프들을 통해 르누아르 자신이 가졌던 즐거움을 직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몇몇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활동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880년경부터 성공을 거두었으며 세기의 전환기에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890년대에 관절염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1897년 자전거를 타다 팔이 부러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1912년부터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후기 작품에서는 인상주의 시기의 작품에서보다 더욱 따뜻한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형태도 충만하고 둥글며 부드럽게 처리되었다.
르누아르의 아들로 유명한 영화 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1962년 매우 생생하고 감동적인 자서전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Renoir, My Father>를 썼고, 이는 1962년 영어로도 출간되었다.

엑상프로방스 태생으로 고갱, 반 고흐와 더불어서 가장 위대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인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은 20세기 미술의 전개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잔의 아버지는 모자 사업을 시작했다가 은행가로 성공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안정 덕분에 세잔은 말년까지 주목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면서 여덟 차례의 그룹전 중 첫 번째와 세 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다.
세잔은 1895년 파리에서 화상 앙부르아주 볼라르가 개인전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비교적 모호한 태도로 작업했다.
이 전시회는 대중에게는 거의 충격을 주지 않았지만 많은 젊은 세대의 화가들을 자극했으며, 당시 그는 거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86년 아버지가 타계하고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 자 드 부팡 집안의 재산을 상속한 후로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살았다.
세잔의 목표는 최상의 프랑스 고전 전통의 형식 구조와 최상의 현대적 자연주의를 결합하는 회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는 “자연을 좇아 푸생을 되살리고자 하는” 야망과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처럼 한결같고 불후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는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소재, 곧 아내 오르탕스의 초상, 정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엑상프로방스의 경관, 특히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자연에 대한 세잔의 각고의 분석은 모네가 <건초더미>, <포플라>에서 대상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훈련을 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세잔은 기본적인 구조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배경, 시간 심지어 계절 조차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인 회화적 균형을 위해 자연적 외관의 형태를 미묘하게 기울이거나 늘려 왜곡했다.
삼차원 표현은 원근법이나 단축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우 특이하고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가 타계한 지 1년 후인 1907년 파리에서 개최된 추모전은 입체주의 발생의 주된 요인이 되었고, 이후 그는 계속해서 다채롭고 지속적이며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리샤르 베르디는 <세잔>(1992)에서 직접적인 추종자들에 대해 그가 미친 영향을 요약했다.
“세잔의 미술이 내포한 의미는 너무나도 다방면에 걸쳐 있어서, 차세대의 가장 진보적인 화가들 중 그를 무시하고 작업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은 모두 사실상 초기 현대 미술의 탄생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세잔은 “우리를 수호하는 ...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마티스에게는 “회화의 신”과도 같았다.
클레는 그를 “더할 나위 없이 가장 뛰어난 스승”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세잔 미술로부터 양식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던 칸딘스키조차도 대상을 순수한 회화적인 상태로 전환시킨 그를 추상 미술의 토대를 쌓아올린 예술가로 인정하고 갈채를 보냈다.
세잔은 오늘날에도 매우 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1996년 테이트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를 찾은 관람자의 수는 40만 8천 6백 88명으로 공식 집계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달랐지만 외양을 세세하게 기록하기보다는 특정한 한 순간에 눈이 본 ‘인상’을 포착하면서 자발적이고 신선하게 주위 환경을 묘사함으로써 아카데미의 관습에 대항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들의 전형적인 주제는 풍경으로 야외로 나가 자연 속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인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 밖에도 그들은 여러 주제를 다루었는데, 특히 일상적인 도시생활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화상 뒤랑-뤼엘의 선전에 힘입어 인상주의 화가들은 1880년대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으며 1890년대에는 그들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나갔다.
프랑스 밖의 예술가들이 전적으로 인상주의를 받아들인 경우는 드물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인상주의의 사상과 그들 고유의 전통을 종합하면서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보다 자유로운 붓질을 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인상주의가 가장 열렬히 수용된 나라는 미국이다.
인상주의는 오스트레일리와 영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프랑스 평론가 카미유 모클레르의 책을 영역한 인상주의에 관한 책이 1903년 영국에서 최초로 발간되었으며 모네와 친분이 있고 피사로와 서신을 교환하던 영국의 풍경화가 윈퍼드 듀허스트Wynford Dewhurst(1864~1941)가 쓴 <인상주의 회화: 그 기원과 발전 Impressionist Painting: Its Genesis and Development>은 최초로 영어로 씌여진 책으로 그 이듬해에 발간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인상주의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는 톰 로버츠이고, 영국에서는 주로 시커트와 스티어를 통해 인상주의가 유입되었다고 간주되고 있지만, 두 사람의 작품 차이점을 비교하면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부정확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D.S. 매콜은 “평론가들과 대중을 놀라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모든 새로운 회화”에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적용되었다고 논평했다.

인상주의는 모방이나 수용의 반응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역반응도 불러 일으켰다.
사실 인상주의의 영향은 너무 대단한 것이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미술사는 인상주의의 여파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광학적 원칙에 과학적인 기초를 부여하려고 노력했으며, 후기 인상주의는 순수하게 재현적인 기능으로부터 색채와 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여러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인상주의자들이 덧없고 우연한 것에 너무 집중함으로써 희생되었다고 생각한 감성적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