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미술 1


추상 미술abstract art은 형태와 색채가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려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의 표현적 목적을 갖는 미술을 말한다.
따라서 많은 장식 미술을 추상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서구의 전통적인 미술 개념을 탈피한 20세기의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1930년대와 그 이후 많은 문학 작품과 미술 비평을 발표했으며 일반 대중에게 아방가르드 미술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허버트 리드Sir Herbert Read(1893~1968)는 이에 대해 <아트 나우 Art Now>(개정판 1948)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관례적으로 어떤 미술작품이 외적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예술가의 지각에서 출발했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대상에 기반하지 않는 독자적이고 일관적인 미학적 총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든 미술작품을 우리는 추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의 추상 미술은 1910~20년에 탄생하여 10여 년 동안 그 특수한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현재는 20세기 미술의 가장 특징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추상 미술은 수많은 운동과 사조로 발전했지만 두세 개의 기본적인 경향들로 추려낼 수 있다.
미국 미술사학자이면서 미술 행정가 앨프리드 H. 바Alfred H. Barr(1902~81)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1936)에서 “지나친 단순화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추상 미술을 두 개의 주요 경향으로 양분했다.
우선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첫 번째 경향은 “지적이고, 구조적이며, 건축학적이고, 기하적이며, 직선적이고, 고전적인 엄격함을 지닌, 논리와 계산에 기반한” 것이다.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두 번째 경향은 “지적이기보다 직관적이며 감상적이고, 기하적이기보다 유기체적이며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취하고, 직선적이기보다 곡선적이며, 구조적이기보다 장식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기보다 낭만적이다.”

러시아 화가 카시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Karimir Severinovich Malevich(1878~1935)는 키예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1905년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 인상주의’라 불린 양식에 있어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복제품과 시추킨, 모로조프 컬렉션을 통해 보나르, 뷔야르, 세잔, 레제를 비롯한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작품을 접했다.
1908년경 나탈리아 세르게예브나 곤차로바Natalia Sergeevna Goncharova(1881~1962), 미하일 페도로비치 라리오노프Mikhail Fedorovich Larionov(1882~1964)와 교류하면서 말레비치의 양식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1898년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운 곤차로바는 러시아 농촌 미술과 중세 성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 시기 그녀의 회화 작품에서 세련된 원시주의가 나타난 것도 이런 관심의 영향이었다.
1908년 군대에 징집될 때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 학교에서 공부한 라리오노프는 많은 작품을 제작한 다작의 화가였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기 인상주의를 러시아풍으로 해석한 작품을 그린 그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후에 아내가 된 곤차로바와 함께 러시아 민속 미술에 바탕을 둔 일종의 세련된 원시주의를 발전시켰는데, 그의 양식이 곤차로바보다 훨씬 공격적이었다.
1914년 곤차로바와 함께 파리의 폴 기욤 화랑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1915년 곤차로바와 함께 다시 파리로 와서 정착했다.
이후 그는 사실상 이젤화를 그만두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에 열중했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면서 시골 농부들을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전의 세련된 기교 대신 의도적으로 원시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입체주의 기법에 깊이 몰두했는데, 농부들을 그린 많은 작품에서 인물들은 레제를 연상시키는 원통 같은 형태로 형식화되어 나타나고, 형상과 배경은 깊이감이 거의 없이 대조를 이루는 평면적인 색채의 색면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표현되었다.
이런 경향을 추구하면서 그림에서 모티프의 중요성은 감소된 반면, 평면과 양감의 구성은 더욱 중요해지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되었으며, 어느 정도 미래주의적 요소를 지닌 독자적인 분석적 입체주의에 도달한 말레비치는 이 양식을 입체-미래주의라고 명명했다.
입체-미래주의의 뒤를 이어 1913년과 1914년에는 또 다른 급격한 양식의 변화를 이루었다.
즉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따라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콜라주를 통해 그림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말레비치는 비구상 회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15년 12월 절대주의 회화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절대주의가 분석적 입체주의나 종합적 입체주의로부터 직접 발전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입체주의는 세잔의 권고에 따라 자연의 현상을 기하적이거나 그와 유사한 형태로 분해한 것인데 반해, 절대주의는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서, 보이는 현실과 전혀 연관이 없는 기하적 추상 형태로 그림을 구성해나갔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bjective World>에 수록된 논문 ‘절대주의 Suprematism’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절대주의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진정한 미술에 도달하기 위해, 또 이런 우월한 관점에서 순수한 예술적 감각을 통해 삶을 조망하기 위해, 주변 환경의 사실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혹은 그 밖의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미적 정서’라 불리는 감정의 순수한 표현이라고 묘사했다.
절대주의 회화를 구성한 기본 요소들은 직사각형, 원, 삼각형, 십자가형이다.
말레비치는 ‘가장 순수한’ 형태는 정사각형이라고 믿었다.
‘순수한 감성’을 표현한 회화는 1917~18년의 그 유명한 <흰색 위의 흰색> 연작으로 절정에 도달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절대주의 구성: 흰색 위의 흰색>이다.
앨프레드 바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에서, 20세기 미술사에서 말레비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추상 미술의 역사에서 말레비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선구자, 이론가이며 예술가로서, 러시아의 많은 추종자들뿐 아니라 리시츠키와 모홀리-나기를 통해, 중부 유럽의 추상 미술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휩쓸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네덜란드 데 스테일의 영향력과 결합하여 독일과 나머지 유럽 대부분의 건축, 가구, 인쇄, 상업 미술에 변혁을 가져온 추상 미술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

모스크바 태생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1893년 모교의 법대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1895년 러시아에서 처음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1897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되는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뮌헨의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은 아르 누보, 즉 독일어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이었고, 이 양식에 정통한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Phalanx라는 아방가르드 전시 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칸딘스키는 1909년에 뮌헨 신예술가 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한편 그는 하계 예술가 모임의 중심 인물이었는데, 이 모임은 뮌헨 교외 무르나우에 있는, 칸딘스키의 정부인 가브리엘레 뮌터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에는 러시아 화가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을 비롯하여 독일의 젊은 화가인 프라츠 마르크와 아우구스트 마케가 참여했다.
이들은 1911년 말 뮌헨 신예술가 협회에서 탈퇴한 분리 그룹의 핵심 인물들로, 블라우에 라이터Der Blaue Reiter(청기사) 그룹을 결성했다.
칸딘스키는 1912년에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Uber das Geistige in der Kunst insbesondere in der Maleret>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추상 미술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갔고 1921년 독일로 돌아와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되어 1933년 폐교될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1924년 클레, 야블렌스키, 파이닝거와 함께 블라우엔 피어Die Blauen Vier를 결성했으며 1927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다.
블라우엔 피어는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4인방이라는 의미로 블라우에 라이터를 계승하여 결성한 모임이다.
칸딘스키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인 <점 선 면: 회화의 기초적 요소들의 분석 Punkt und Linie zu Flache: Beitrag zur Analyse der malerischen Elemente>이 1926년 바우하우스 총서로 출간되었다.
1933년 바우하우스가 국가 사회주의 정부에 의해 문을 닫게 되자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파리로 가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의 작품들은 1937년 뮌헨에서 나치의 기획으로 개최된 퇴폐 미술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1939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칸딘스키는 비구상적인 추상을 향해 나아갔는데, 이는 미술의 본질을 ‘비대상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철학적 관점의 전개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시기의 추상 회화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초기의 완전히 비재현적인 과슈 작품들은 보통 1910년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시기를 1913년으로 늦추어 추정하기도 한다.
바우하우스 시기의 추상화는 기하적 추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표현주의 미술에 속했고 뮌헨 시기의 낭만적 요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좀더 계획적으로 구상되었으며 형태의 기하적 성격은 더욱 명확해졌다.
작품의 성격과 중요성을 감안하거나 이론적이며 교육적인 저술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때 칸딘스키는 20세기 전반기의 비재현적 추상화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자연의 사물이나 광경의 표현적인 특징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지 않고 실제 모습에 상관하지 않은 채 미술 재료 특히 물감 본래의 표현적 속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둔 선구자였다.

추상 미술의 문제를 바의 관점보다 더 후대의 관점에서 조금 다르게 보면, 추상 미술에는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적인 외관을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형상으로 감축시키는 방법으로, 브란쿠시의 조각을 예로 들 수 있다.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는 11살 때 가출해 7년 동안 방황한 끝에 크라이오바에서 고급 가구 제작자의 도제로 일하다가 1898년 부쿠레슈티의 미술 학교에 들어갔다.
1902년 뮌헨으로 갔고 그 후 걸어서 파리까지 간 뒤 1904년 그곳에 정착하여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다.
이 무렵 브란쿠시는 로댕의 자연주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그의 작품을 본 로댕은 자신의 조수 겸 제자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브란쿠시는 이를 거절했다.
이 무렵 그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이는 사물의 외관을 충실하게 혹은 표현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런 노선을 따라 그는 추상 분야에서 금세기 최고의 거장이 되었다.
그는 묘사하고자 하는 형태를 단순화시켜 개개의 사물을 서로 구별짓게 하는 고유한 세부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각 부류가 가진 특징적인 형태를 살려서 강조했다.
단순함과 총체적 진리야말로 그의 이상이었다.
1920년 브란쿠시는 파리 교외에 살던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저택 정원에 세울 목조 조각 <끝없는 기둥>을 만들었다.
높이 7미터의 이 기둥은 높이 올려다볼수록 점점 크기가 작게 보이는 9개의 마름모꼴 형태로 구성되었다.
브란쿠시는 이후에도 야러 번 기둥 모티프를 반복해 다루었으며 특히 1937년 티르구지우의 공원을 장식할 조각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 조국 루마니아를 방문했을 대도 기둥 모티프를 사용하여 높이 29.33미터의 강철 조각 <끝없는 기둥>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받침대 역할을 하는 강철 사각 기둥 위에 15개의 단위 형태들을 세운 것으로, 맨 위와 맨 아래 부분은 이 단위 형태를 반으로 자른 형태로 되어 있다.

생전의 브란쿠시의 명성은 대단했으며, 그가 미친 영향 또한 상당했다. 엡스타인과 아르치펜코에게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었고 고디에-브제스카는 공인된 브란쿠시의 숭배자였다.
칼 안드레이는 브란쿠시의 <끝없는 기둥>에서 영감을 얻어 그것을 변환시켜 공장 생산된 내화 벽돌들을 수평으로 배열해놓았다고 주장했다.
브란쿠시는 자신의 작업실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는데 그 중에는 여러 차례 개작된 그의 대표작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루마니아에서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1976년을 ‘브란쿠시의 해’로 공식 지정했으며, 영국에서는 숀 허드슨이 예술원의 도움을 받아 티르구지우의 공원에 대한 기록 영화인 <루마니아인 브란쿠시>를 제작했다.

자연적인 외관을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형상으로 감축시키는 방법 외에도 비재현적인 기본 형상들로 작품을 구축한 경향이 있었는데 벤 니컬슨Ben Nicholson(1894~1982)의 부조가 여기에 해당된다.
버킹엄셔의 데넘 태생 니컬슨은 1911년 잠시 슬레이드 미술 학교에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식으로 회화를 배우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 보티시즘 화가들과 접촉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1920년 위니프리드 데이커(로버츠)와 결혼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1년 파리에 머물며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들을 보았다.
1920년대에는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들은 입체주의의 피상적인 매너리즘에 결코 찬성하지 않으면서 입체주의적 방식의 추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보여주었다.
기하 추상에 관심을 돌린 그는 특히 마분지를 잘라 저부조를 제작했는데 주로 자신의 이름과 연관된 형태를 만들었다.
1934년 세븐 앤드 파이브 협회에서 첫 번째 흰색 부조를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즉각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의 액션 페인팅을 예로 들 수 있다.
1929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지방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회화 공부를 시작한 폴록은 1930년대에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중반까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인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캔버스를 마루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 다음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루었으며 때로는 모래나 유리조각, 혹은 다른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이유에서 이는 제스처 회화로 불렸고 미국에서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폴록은 올오버 회화 양식을 도입한 화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이는 전체 화면 내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을 두지 않으며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전통적 의미의 구성을 포기한 회화 양식이다.
폴록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려져 있기도 하다.
이후 이런 회화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하기도 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감을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들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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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작업실 ‘공장’에 다양한 사람들이


워홀이 영부인과 사진을 찍을 정도로 유명해졌다는 것이 팝 아트가 미국미술을 독점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워홀 혼자 팝 아트에 군림했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워홀이 미국의 중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순수미술이 대중화된 것은 이 무렵이었으며 대중문화를 순수미술로 포장하는 것도 이 시기에 가능했다.

1965년에도 워홀은 가장 유명한 〈열네 살짜리 소녀〉(1965), 〈가장 아름다운 소년들 13명〉(1965), 〈50가지 기이한 일과 50가지 개성들〉(1965)을 비롯해 많은 영화를 제작했다.
이제 워홀의 작업실 ‘공장’에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해 그곳은 예술가의 작업실이라기보다는 클럽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워홀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한가했으므로 그곳에 죽치고 있는 일이 많았다.
패션모델, 배우, 예술가, 영화 제작자, 평론가, 시인, 잡지 편집자, 대학생, 그리고 출세를 꿈꾸며 지방에서 온 야심만만한 젊은 남녀들이 워홀을 찾았다.
그들은 모여서 파티를 열기 예사였고 대마초를 피우거나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동성애자도 적지 않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워홀의 영화에 출연해 언더그라운드의 스타가 되기를 소원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도 이따금 공장을 방문했는데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점을 시인하기도 했다.

워홀의 주변에 모여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일종의 워홀리즘(Warholism)의 기류를 형성할 판이었다.
친구들은 워홀과 대화하기 위해 공장에 오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을 즐거워했다.
젊은 남녀들의 만남은 곧 연애로 진전되었고 때로는 삼각관계와 사각관계가 이루어지고 그룹으로 사랑을 나누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워홀은 “그들이 나와 놀아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놀았다”고 말했다.
워홀은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찍기를 좋아했고 녹음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대화내용을 녹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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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한 짝사랑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적인 논리를 폈는데 다음과 같다.

신은 목적을 갖고 순수한 사고로, 행복으로, 그리고 자아실천Self-Fulfilment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만물은 신의 사랑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신은 모든 행위의 최종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여기서 신의 사랑이란 개념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신만이 오로지 물질이 없는 형상으로 진화는 좀더 신에 가까워지는 걸 의미하지만 신과 같이 완전해질 수 없는 이유는 물질이 온전히 제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교는 한 마디로 진화하는 철학적 종교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종교는 플라톤의 종교와 상이한데, 플라톤의 종교를 수학적이라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종교는 생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을 셋으로 구분했다.

1. 감지되고 소멸되는 것들로 식물과 동물
2. 감지는 되지만 소멸되지 않는 것들로 하늘에 떠있는 별들
3. 감지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것들로 사람과 신의 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이란 태초에 우주라는 거대한 시계를 만든 사람으로 그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시계와도 같은 우주 안에서 인과법칙을 따라 운동이 일어난다.
신은 마치 시계를 만든 사람처럼 부동유동자Unmoved Mover였다.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지만 그 밖의 것들을 움직이는 자이다.
그에게 신은 살아 있는 영원한 존재였으므로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태초에 "누구로부터도 원인을 제공받지 않고 자력으로 운동을 일으킨 부동유동자"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에 관해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스피노자Spinoza(1632-77)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신이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짝사랑해야 한다는 것인데, 짝사랑을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세상에 못할 짓이 그 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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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네 가지 원인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네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성하고 달라진다고 보았다.

네 가지 원인이란 다음과 같다.

물질적Material 원인
형상적Formal 원인
능률적Efficient 원인
최종적Final 원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예로 들면, 동상에 사용된 청동은 물질적 원인에 속하고, 겉으로 나타난 이순신의 모습은 형상적 원인에 속하며, 조각가가 청동이란 재료로 이순신의 모습을 제작한 것은 능률적 원인에 속하고, 이순신의 모습을 구상한 조각가의 아이디어는 최종적 원인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를 시계에 비유하면, 시계의 제작자가 시계 속에 운동이 일어나도록 함으로써 시계의 운동에 변화의 목적을 제공했다.
이런 변화는 진화하는 것으로 진화의 목적은 시계의 온전한 운동으로 신과 유사해지는 것으로, 즉 시계가 시계 제작자의 의도대로 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헤겔Hegel(1770-1831)에게 영향을 주어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역사가 절대정신에 의해 신의 의도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시계가 시계 제작자의 의도대로 운동한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몸의 형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어째 생소한 말로 들린다.
그가 말한 형상이란 이순신 장군 조각이 차지하는 공간이 아니라 몸을 하나가 되게 하는 조화unity로서 유기체organism란 말이 더욱 그럴듯 하다고 럿셀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눈은 보는 기능을 갖고 있지만 몸을 떠나서 눈은 그런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데 실상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보기 때문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는 형상이 사물의 근원이며 고유한 본체substance라고 주장하면서 만물이 반드시 물질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물질이 없는 영원한 것들도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영혼이 그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형상이 물질보다 더욱 실재라고 했다.
그의 형상과 물질에 대한 구별은 그의 논리에서 가능성potentiality과 실재성actuality의 구분으로 진전된다.
가능성을 원천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그의 이론에는 혼란이 발생한다.
그는 모든 변화를 진화로 보면서 사물은 변하며, 더욱 형상을 갖게 되고, 형상은 좀더 실재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했다.
신이 변치 않는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순수한 형상이기 때문에 순수 실재라서 그러하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론은 그래서 희망적이었으며 또한 목적론적이었다.
이미 결론을 가정하고 전개한 논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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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탄생한 입체주의는 일반적으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과 브라크의 <누드>(1907~08)에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대략 1912년 가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그 후를 종합적 입체주의로 구분한다.
입체주의란 명칭은 <질 블라스 Gil Blas>의 평론가로서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명칭과 관련이 있는 루이 보셀의 글에서 유래했다.
보셀은 1909년 5월 25일 칸바일러 화랑에서 1908년 11월 14일에 개최된 브라크의 전시회를 평가하면서 ‘입체 cubes’와 ‘이상한 입방체 bizarreries cubiques’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주택 도색업자 아버지 밑에서 도제로 일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1900년 파리로 가서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아카데미 옹베르에서 공부했다.
그는 같은 르아브르 출신인 오통 프리에스와 어울리면서 1906년에는 르시오타와 레스타크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야수주의 양식으로 그렸으며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살롱 도톤과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브라크는 기질적으로 야수주의의 주관적이고 충동적인 성향과 맞지 않았으며 1907년 살롱 도톤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에서 큰 충격을 받고 분석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좀더 논리적인 기하적 분석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7년 화상 칸바일러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고 함께 작업하면서 입체주의 양식을 창조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두 사람의 작품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했다.
1908년 가을 다니엘-앙리 칸바일러는 1907년 이후의 브라크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기획했는데, 이 작품들은 두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롱 도톤 주최측으로부터 거부당했던 것이었다.
야수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낸 루이 보셀은 이 그림들이 ‘입체들’을 그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혹평했다.
이렇게 해서 입체주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처음에 입체주의는 사실주의 기법의 하나였다.
입체주의자들은 고갱, 반 고흐와 나비 그룹으로부터 야수주의에 이르는 당대의 표현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들고 감각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 기법을 엄격하게 배격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새로운 표현 기법의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강한 인간적 호소력이나 정서적인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모티프 대신에 중립적인 모티프를 선호했다.
또한 정서적 느낌이 내포된 색채의 사용을 배제하기 위해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단색조의 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1900년대까지 여전히 유행하던 인상주의의 광학적 사실주의Optical Realism에도 반기를 들었다.
인상주의자들의 목적은 변화하는 빛에 따라 사물의 채색된 표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반면 분석적 입체주의는 세잔의 ‘지각적 사실주의 Perceptual Realism’를 계승한 것이다.
분석적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의 불변적 구조가 견고한 리얼리티처럼 인지되도록 묘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런 기법 중 많은 부분은 이미 세잔이 좀더 조심스러운 형태로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 기법은 현재에는 친숙하지만 당시에는 낯설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그림의 표면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시선이 화면 속으로 후퇴하는 거리감을 줄였다.
파편화된 평면들을 나란히, 또는 중첩되게 그림으로서 얕은 회화 공간을 표현했다.
기타, 바이올린, 머리, 인물 등의 대상은 양감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평면으로 분해되고 단편화된 다음 회화 공간을 표현하는 면들의 체계 속으로 도입되었다.
때때로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본 대상의 단편들이 하나의 그림 속에 합쳐지기도 하고, 세잔의 경우처럼 공간 표현에 이동하는 원근법이 도입되기도 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고안하여 레제가 완성한 엄격하고 매우 논리적인 이 기법은 입체주의 화파를 이루는 예술가들에 의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서 전통 회화의 현대적 변용으로 전락했다.

1911년과 1912년 브라크는 세레와 소르그에서 피카소와 함께 작업했고, 이때 종합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콜라주를 처음 시도했다.
그는 화면에 실제 사물과 인쇄물의 글자를 도입함으로써 실제와 화면 속의 환영적 이미지를 통합하고 또 서로 대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브라크는 피카소와 나란히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구사하며 함께 활동했다.
종합적 입체주의로 알려진 제2기 입체주의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파피에 콜레는 브라크와 피카소, 후안 그리스가 함께 발전시킨 새로운 기법으로 신문, 벽지, 유포, 성냥갑, 공연 프로그램 인쇄물 등을 캔버스에 붙이고, 소묘(브라크) 또는 소묘와 유화(피카소와 그리스)를 결합시킨 방법이었다.
캔버스에 부착된 재료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이는 회화 표면의 일부인 동시에 그림 이미지의 가상적 공간 속에서 재현의 기능을 했다.
그런데 파피에 콜레와 소묘 혹은 유화를 결합시킨 효과를 회화로 흉내낸 그림이 등장하면서 화면은 더욱 모호해졌다.
한층 밝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피카소와 그리스는 물감에 모래나 다른 재료를 섞어 함께 사용했다.
초기의 분석적 입체주의가 주로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발달했다면 종합적 입체주의에서는 단편화된 형상의 추상으로부터 안정되고 통일된 회화 구성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리스, 피카소, 브라크는 각각 독자적인 방식으로 종합적 입체주의를 전개시켰다.
브라크는 1918년부터 감각적이고 촉감적인 성질, 색채와 표면의 표현적 가치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드리드 태생의 후안 그리스Juan Gris(호세 비토리아노 곤잘레스Jose Vittoriano Gonzalez, 1887~1927)가 파리로 온 것은 1906년이었고, 라비낭 가 13번지 피카소의 집이 있는 건물에 살면서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을 만났다.
1910년에 정식으로 회화를 시작한 그는 1912년에는 브라크와 피카소가 먼저 시작한 파피에 콜레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종합적 입체주의를 나름대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갔는데 이는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스는 4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입체주의 화파에 관한 언급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10년 로베르 들로네, 앙리 르 포코니에, 알베르 글레즈, 페르낭 레제와 장 메챙제가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 함께 작품을 전시했을 때였다.
파리 태생의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는 장식적인 상업 회화 공부를 한 뒤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순수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으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그는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들로네는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 1911년과 1912년에 열린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13년 들로네는 <원반>과 <우주의 원형>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는 <동시적 창>에서 시작한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 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켰지만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쿠프카의 작품과 더불어 유럽 미술 최초의 진정한 색채 추상화였다.

추상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 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 미술의 발전, 특히 1930년대 막스 빌이 주창한 구체 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키네틱 아트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1901년 파리로 이주하여 1906년부터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한 앙리 르 포코니에Henri Le Fauconnier(1881~1946)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양식으로 그렸고, 1910년경부터 입체주의 화가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년부터 아카데미 드 라 팔레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입체주의를 버리고 다양한 표현주의를 받아들였다.
르 포코니에의 작품에는 입체주의에서 파생된 구조적인 특징들이 남아 있었으나 그는 이것을 표현적인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후에 전 유럽에 떨치게 될 명성의 기반을 닦았으며 매너리즘적인 입체주의를 네덜란드에 확산시킨 것은 물론 네덜란드 특유의 표현주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파리 태생의 알베르 글레즈Albert Gleizes(1881~1953)는 공업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00년경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11년 다른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의 창립 구성원이었고 메챙제와 함께 <입체주의에 관하여 Du Cubisme>라는 중요한 책을 집필했다.
글레즈는 유럽과 미국에 입체주의를 널리 알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는 입체주의 양식에 실제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노르망디의 아르장탕 태생의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1881~1955)는 1897~99년 캉에서 건축가의 도제로 일한 뒤 1900~02년 파리의 한 건축 사무소에서 제도가로 일했으며 1903~04년에는 사진을 수정하는 일을 했다.
1903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장식미술 학교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1909년경부터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1911년부터 퓌토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퓌토 그룹은 1911~13년 파리 근교의 퓌토에 있는 자크 비용의 작업실에서 비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졌던 예술가 그룹으로 주로 입체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마르셀 뒤샹과 레몽 뒤샹-비용, 글레즈, 메챙제, 그리스, 아르치펜코와 체코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 등이 참여했다.

레제의 입체주의 시기의 작품은 튜브 모양과 곡선으로 그려진 추상화로 피카소와 브라크가 선호한 직선 형태와는 대조된다.
1911년경 입체주의 화가 중 최초로 비구상적인 추상 미술을 실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르 코르뷔지에, 오장팡과 교류했다.
레제는 기계 부품을 즐겨 그렸으며, 정밀하고 매끈한 기계를 그린 그의 회화는 정적인 특성을 띤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는 캔버스 전체에 한 개의 사물만을 묘사하곤 했는데, 때로는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 그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앙리 포시용, 앙드레 모루아, 다리위스 미요와 함께 예일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캘리포니아의 밀스 칼리지에서도 가르쳤다.
이 시기에는 주로 곡예사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구성 작품에 몰두했다.
1945년 프랑스로 돌아온 뒤부터 그의 작품에는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더욱 두드러지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색조의 변화가 없는 평면적 색채와 두터운 검은 윤곽선, 그리고 원통형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형태 사이의 대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정적이고 장대한 양식은 계속 유지되었다.

레제는 입체주의 시기에는 자율적 활동으로서의 미술 개념을 신봉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갑자기 눈이 부시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현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미술을 창조하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는 명확히 묘사된 일상 사물 속의 시적 가치와 현대 기계류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물건들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프롤레타리아적인 모티프를 선호하여 이를 기계문명과 관련된 모티프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정밀하게 묘사했다.
레제의 사상은 1923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기계 미학: 공장에서 제조된 물건, 장인, 예술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그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광범위했으며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낭트 태생의 장 메챙제Jean Metzinger(1883~1957)는 1903년 파리로 가서 신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년과 1911년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1913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슈투름 전시회에 참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메챙제의 양식은 더욱 사실적으로 변했고 입체주의 이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입체주의 화가들이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시인이자 입체주의의 대변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을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이 모방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들 입체주의 화가들은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하나의 단체를 이루어 1911년 봄 살롱 데 쟁데팡당이 열렸을 때 별도의 전시장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같은 해 이 그룹에 뒤샹 삼형제, 피카비아, 아르치펜코, 마레, 레트, 레제와 마리 로랑생 등이 가세했다.
로랑생의 작품은 입체주의적이지 않았지만 당시 그녀는 입체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1912년에는 그리스, 쉬르바주, 마르쿠시, 에르뱅, 몬드리안, 리베라와 쿠프카 등이 합류했다.
이들 중 몇몇 화가들의 양식은 매우 미미하게 입체주의적이었고 대부분의 화가들이 수년 내에 입체주의 노선을 포기했다.
평론가들 중에서는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로제 알라르, 모리스 레날 등이 이 운동을 지지했다.
아폴리네르는 1913년에 <입체주의 화가들, 미학적 명상 Les Peintres cubistes Meditations esthetiques>을 출간했다.

모스크바 태생의 레오폴 쉬르바주Leopold Survage(1879~1968)는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1908년 파리로 가서 마티스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그러나 곧 입체주의에 매료되었으며 입체주의 화가들과 함께 1911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글레즈, 아르치펜코와 함께 섹시옹 도르Section d'Or에 가담했다.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하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예술가들은 1912년 라 보에티에 화랑에서 ‘섹시옹 도르’란 명칭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같은 명칭의 잡지도 발행했다.
쉬르바주는 대규모 장식에 재주가 있어 디아길레프로부터 발레 <마르바>를 위한 무대장치를 의뢰받기도 했다.
그는 입체주의에 집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체주의의 원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입체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린 정물화보다 도시 풍경을 더 좋아했으며, 정통적인 입체주의와는 거리가 먼 신비한 요소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공간감을 나타내곤 했다.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 마르쿠시Marcoussis(1883~1941)는 크라쿠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뒤 1903년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몇 년 동안 만화가로 일하다가 1910년에 브라크를 만났고 그 후 피카소, 아폴리네르와 알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다른 입체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 그룹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에 다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마르쿠시는 비주류 입체주의 화가 중 가장 지각력이 뛰어난 화가였고, 입체주의 기법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으며, 명백하고 단순한 구성을 시적 사실주의,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결합시켰다.
마르쿠시는 1913년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다시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실험했으나 보다 대표적인 작품은 자연을 연상시키는 회화들이다.

1906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한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1882~1960)은 1909년에 바토-라부아르에 작업실을 마련했고,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표현적인 풍경과 입체주의 구조를 결합했다.
에르뱅의 작품은 서서히 추상화되어 1917년경 완전히 추상에 이르렀다.
에르뱅은 오랫동안 기하 추상에 몰두한 몇 안 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로서 많은 젊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과나후아토 태생으로 멕시코 벽화주 화파의 선구자인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Diego Maria Rivera(1886~1957)는 10살 때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세기 절충주의의 아카데믹한 화가 산티아고 레불과 멕시코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인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밑에서 공부했다.
1908~09년 치차로와 함께 스페인에서 공부했고, 1911~21년 파리에서 살면서 모딜리아니의 친구가 되었으며, 입체주의자들의 모임에도 자주 참여했다.
리베라는 입체주의 미학을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1913~17년 입체주의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아카데미즘의 유물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식적 구축의 특징에도 정통했다.

입체주의는 1911년경부터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관련된 많은 운동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출판물에 실린 도판과 세베리니가 쓴 글을 통해 입체주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 2월 보초니, 루솔로와 카라의 파리 방문을 계기로 입체주의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 화가들이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입체주의 회화에서 역동성과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지만 미래주의는 입체주의가 고안한 표현 기법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관련된 모든 사조들 가운데 가장 입체주의에 가깝다.
사실 재능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단일한 하나의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 입체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다이아몬드 잭’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러시아 미술품 콜렉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1854~1937)은 피카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시추킨은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컬텍션으로 유명하다.
말레비치는 1913년 그의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대해 입체-미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의 영향은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에 의해 시작된 광선주의 운동을 자극했다.
독일에서는 야수주의뿐만 아니라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작품도 표현주의란 명칭으로 뒤셀도르프, 쾰른, 베를린과 뮌헨에서 전시되었다.
입체주의의 영향은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특히 프란츠 마르크의 양식 발전에도 기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입체주의와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국가적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한 아방가르드 화파가 부상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거의 모든 독일 예술가들의 표현주의에 대한 열정은 입체주의가 가진 반표현주의적인 엄격성으로 인해 무위로 끝났다.
당시 영국에서는 입체주의가 거의 발전하지 못했지만 몇몇 입체주의 작품은 로저 프라이가 기획한 제2회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입체주의는 보티시즘 양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보티시즘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사조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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