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표현주의와 오토마티즘 1
추상 표현주의는 뉴욕 화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명칭으로 뉴욕 화파에 속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훌륭하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뉴욕 화파-1940년대와 1950년대의 제1 세대 회화’ 전시회에 뉴욕 화파로 알려지게 된 예술가 15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사실상 양식적인 일관성은 거의 없었다.
활동 시기와 장소가 우연히도 일치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미술사학자들과 평론가들이 그들을 하나의 화파로 묶을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모든 작품이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인 것도 아니어서 추상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인 액션 페인팅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자기 표현적 붓놀림을 구사하지도 않았다.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 속의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오토마티즘automatism 기법을 주로 이어받았다.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으로서의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우연의 효과를 노린 데서 확산되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오토마티즘을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사용했던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을 통해 무의식을 탐험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오토마티즘을 한 구절로 언급했는데, 문학 작품의 창작 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드로잉과 회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마술적 예술의 비밀들 ... 다른 이들로 하여금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를 갖다 주게 하라.
마음을 그 자체에 집중시키기에 가장 좋은 상태로 돌입하라.
너를 가장 수동적이고 수용적으로 만들어라.
네 자신을 자신의 천재성, 자신의 재능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재능과 천재성으로부터 떼어 놓아라.”
후에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와 회화 Le Surrealisme et la peinture>(1928)에 적었다.
“초현실주의의 근본적인 발견”은 “어떤 선입견적 의도도 없이 쓰기를 재촉하는 펜과 그리기를 재촉하는 연필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최소한 시인이 자신 안에 감추어 둔 감정적인 모든 것을 드러내줄 수 있는, 매우 고귀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르네 파스롱의 <간추린 초현실주의 백과사전>(1984)에 의하면 “오토마티즘적인 초현실주의 드로잉의 진정한 발명가”는 앙드레 마송Andre Masson(1896~1987)이다.
“1923년 혹은 1924년경 마송의 드로잉들은 여기저기에 짐승이나 색의 윤곽선을 암시하는 듯한 ‘방황하는 선들’로 발전했다.”
마송은 곧 보다 정교한 오토마티즘 기법을 개발했는데 접착성 물질로 캔버스에 드로잉한 후 색 모래를 흩뿌려서 색을 입히는 방법이었다.
우아즈의 바라니 태생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은 브뤼셀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1912년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 중의 경험은 마송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심오하고 난해한 호기심, 모든 사물의 상징적 통일에 대한 모호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철학적으로 진전시킬 만한 지성이 부족했던 마송은 예술 활동을 통해 그런 사고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데 전념했다.
1950년에 쓴 <그린다는 기쁨 Le Plaisir de Peindre>에 적었다.
“이것은 본능보다 사고가, 아니면 흔히 영감이라 불리는 것보다 지성이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화가이자 시인들이 다루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무의식과 의식, 직관과 이해는 초의식 상태에서 눈부신 일치를 이루도록 변화되는 것이 분명하다.”
마송은 1919년 파리로 돌아갔고 입체주의, 특히 후안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앙드레 드랭의 영향도 받았다.
1922년부터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인 미로, 에른스트, 시인 미셀 레리스, 조르주 랭부르와 친교했으며, 랭부르는 마송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써주었다.
브르통의 주목을 받아 마송은 1924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특히 오토마티즘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실행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를 ‘무의식의 힘에 대한 탐구’로 여기면서 1928년 브르통과의 의견 충돌 후 초현실주의 운동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 기법으로 작업했다.
물감 대신 풀을 이용해 캔버스 위에 오토마티즘적인 그림을 그린 후 채색된 모래를 뿌려 색채를 입히는 방식으로 회화를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즉흥적이고 암시적이며 상징적이었다.
1940년 미국으로 간 마송이 뉴욕 그룹의 피신해 온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 표현주의의 초기 단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마송의 모래 회화에 나타난 오토마티즘과 잭슨 폴록이 실행한 미국 액션 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는 1946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이듬해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했다.
마송은 매우 뛰어난 기법과 때로 모호하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내적 시각, 외형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눈을 결합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그린다는 기쁨>에 적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작한 작품에서 놀라움의 효과가 사라진 뒤 나타나는 진정한 힘은 다음 세 가지 조건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첫째는 선행한 명상의 강도,
둘째는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셋째는 이 시대 미술에 걸맞는 회화적 수단을 알아내고자 하는 필요성이다.”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송과는 다른 오토마티즘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들 중 몇몇은 꿈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이는 기계적인 오토마티즘에 반대되는 심리적 오토마티즘의 한 종류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을 받아들여 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변형시켰으며 이를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편집증 증상의 일종인 망상을 개발해야 하며 동시에 이성과 의지의 조절이 의도적으로 중지되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미술이나 시의 창작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어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종 라파엘 전파와 연결되는 섬세한 회화 기법을 사용하여 환각적 현실감을 창출했는데, 이것은 때때로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렸으며, 그가 묘사한 비현실적인 꿈의 공간, 이미지의 기이하고 환각적인 측면과 대조를 이루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때대로 엄격한 오토마티즘 방법보다는 우연을 이용하여 최초의 이미지를 얻는 방법으로 데칼코마니, 푸마주, 프로타주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오토마티즘 회화에 사용된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1936년경 오스카르 도밍게스Oscar Dominguez(1906~58)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뒤에 막스 에른스트에 의해 유화에 적용되었다.
테네리페 태생의 스페인 화가이며 조각가 도밍게스는 1934년에 파리에 정착했고, 브르통과 엘뤼아르를 만났으며,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1945년까지 몸담았다.
처음에는 달리의 화풍을 본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으나 1935년경부터 오토마티즘 기법을 채택했다.
그는 흰색의 얇은 종이 위에 넓은 붓으로 물감을 바른 다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종이로 덮고 가볍게 문질러 물감이 아무렇게나 우연적으로 흐르도록 했다.
그 결과로 얻어진 작품에 호나상의 동굴, 밀림, 또는 바다 속의 생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브르통이 격찬한 이 기법의 핵심은 미리 주제나 형태를 구상하지 않고 그림을 만드는 데 있다.
도밍게스는 자신이 고안한 데칼코마니 오토마티즘 기법을 사용한 작품을 초현실주의 잡지 <미노토르 Minotaure>에 소개했다.
푸마주fumage는 1930년대 말 오스트리아계 멕시코 화가 볼프강 팔렌Wolfgang Paalen(1907~59)이 도입한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파렌은 종이 밑에 촛불을 대고 움직여 그을린 자국으로 기이하고 꿈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이는 무의식에 의한 자유로운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의 우연에 관한 이론의 좋은 예이다.
유화에 적용된 이 방법은 매우 유연한 리듬의 오토마티즘적인 붓질을 가능하게 했다.
팔렌은 1932~35년에 추상-창조 그룹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1936~40년에는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푸마주 기법을 ‘암울한 왕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림 속에 유성과 같은 줄무늬를 그려넣었으며 훗날 이를 숨겨진 신의 얼굴이라고 설명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개발한 오토마티즘 기법 중 하나인 프로타주frottage는 원칙적으로 놋쇠 기념패를 탁본하는 과정과 유사한 방법이며 이를 막스 에른스트가 고안했다.
에른스트는 1925년 8월 10일 숙소의 마룻바닥을 보다가 마루의 광택에 비치는 나무결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규칙한 패턴을 좇다가 이것을 종이 위에 옮겼다.
그는 이를 <자연사 Histoire naturelle>(1926)에서 밝혔다.
이후 나뭇잎의 잎맥, 마포의 결, 현대 회화의 붓자국 등으로 동일한 작업을 했으며 이런 우연적인 패턴을 회화 디자인의 기초로 이용했다.
이 방법은 나중에 유화에도 사용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방법을 잠재의식의 접근하기 위한 기법으로 채택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오토마티즘에 대한 관심은 추상 표현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 몇몇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욱 진전시켰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일단 이미지가 오토마티즘적이거나 우연한 방법으로 형성되고 나면 그것을 완전히 의식적인 목적으로 신중하게 이용했지만, 폴록과 같은 액션 페인팅 화가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전체 창조 과정에 오토마티즘이 속속들이 배어들어 있다.
또 다른 오토마티즘의 유형으로는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0)가 스스로 ‘유령주의’라고 명명한 방법이 있다.
192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문학계에 명성을 쌓은 미쇼는 1924년 파리로 갔고, 1926 처음으로 회화와 소묘를 제작했다.
1937~40년에 본격적으로 회화에 매진하여 유령주의로 명명한 검정색 배경 위에 과슈로 그리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선호한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그린 이 서정적이면서도 꿈과 같은 추상 작품들은 심령 이미지, 신화, 유령이 존재하는 모호한 세계를 창출해냈다.
오토마티즘은 마타Matta(로베르토 세바스티안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 1911~)를 통해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고르키와 머더웰을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산티아고 태생의 칠레계 프랑스 화가 마타는 1931년 산티아고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1933년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간간이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서 제도가로 일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1936년 스페인에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만나 살바도르 달리를 소개받았다.
마타는 달리를 통해 파리의 앙드레 브르통을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에 의한 제작 원리를 실행한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39년부터 초현실주의와 결별한 1948년까지 뉴욕에 거주하며 미국의 초현실주의, 특히 고르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 칭한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오토마티즘 기법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인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가끔은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1941년 멕시코 여행 후 이런 자각에 이르러 대지의 힘과 성적인 힘, 우주적인 힘이 만나 폭발적인 대격변을 일으키는 모습을 표현했다.
1940년대 초 작품에서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떠다니고 충돌하는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형태들로 인해 역동적인 측면이 점점 증가되었다.
이런 공간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마타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계 미국 화가 아슐리 고르키Arshile Gorky(보스다니크 마노크 아도이안Vosdaning Manoog Adoian, 1905~48)는 1909년 터키인의 박해를 피해 아르메니아 연방의 수도 예리반으로 와서 인쇄공과 제본공으로 일했다.
192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보스턴의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뉴욕으로 이사하여 그랜드 센트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적 추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는 기하적 추상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주의 기법을 보다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의도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1940년대 초에 뉴욕에 거주하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비로소 고유한 양식에 도달했다.
이런 영향 하에서 미로의 양식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이 있는 추상화를 그렸다.
고르키의 초기 작품은 여러 화가의 작품을 솜씨좋게 뒤섞어 모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말년의 작품에서는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초현실주의와 생물 형태적 추상을 매우 독창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훌륭한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최초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워싱턴 주 애버딘 태생의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1915~91)은 유년 시절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고, 잠시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다가 1932년 스탠터드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정신분석 이론에 관한 것이었으며 평생 이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1937년 하버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들라크루아의 <일기 Journals>에 나오는 미학 개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40년 뉴욕으로 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마이어 셔피로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뉴욕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특히 오토마티즘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1941년 마타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한 후 본격적으로 회화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머더웰은 1951년 뉴욕의 헌터 칼리지의 부교수로 임용되었고 1959년까지 재직했다.
1958년에는 헬렌 프랭컨탤러와 결혼했고, 1962년부터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의 미술 편집장을 지냈다.
1940년대 초 머더웰이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 표방한 기본적인 추상 이미지와 형태는 그의 작품 활동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49년에는 유명한 연작 <스페인 공화국에 부치는 비가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회화 연작을 내놓았다.
스페인 동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된 이 작품들은 선명한 흑백 회화로 거칠게 그려진 수직 띠가 허공에 떠있는 달걀 형태를 양쪽에서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머더웰은 “이젤화의 전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벽화로서의 회화 개념을 완성시켜 화면의 통일성을 간직한 채 끝없는 측면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두 번째 주제인 ‘광활 Open’이 등장했는데 이 연작은 기하적 형태와 짙은 색채를 사용한 색면 회화로 대형 화면을 이용해 색채의 감각적 효과를 탐구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판화가로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추상 표현주의 초기의 표현적인 강렬함과 장엄함을 바탕으로 1960년대 초의 작품 <아프리카>에서 이미지를 따온 세 번째 주제가 등장했다.
머더웰을 포함하여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는 점점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고,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40년대 말 뉴욕 화파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하나는 드 쿠닝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이 그룹의 예술가들은 유럽의 제스처 회화에 해당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 작품을 완성작이라기보다는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 과정 중에 있는 예술가의 내적 정신 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테르담 태생의 네덜란드계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97)은 1916~20년 상업 장식 회사에서 견습 생활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조형 예술 및 기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26년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했지만 곧 아슐리 고르키 및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다른 예술가들로 구성된 서클에 가입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말기 입체주의로부터 유래된 보다 발전된 추상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드 쿠닝은 1930년대에 여러 기법으로 그렸고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쟈코메티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켰는데, 이는 1970년대가지 그의 작품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동시대 화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물을 주제로 삼은 화가로 처음에는 남성을 후에는 여성을 그렸다.
그는 동갑내기 가장 가까운 친구 고르키와 그 밖의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유기체적이고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들죽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1948년까지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드 쿠닝의 곡선 형태를 담은 차분한 회색 색조의 추상과 모호하게 암시된 생물 형태적 형태는 1940년대 초 뉴욕 화파의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948년 찰스 이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드 쿠닝은 폴록과 함께 자발성과 액션 페인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상 표현주의 화파의 비공식적인 리더가 되었다.
드 쿠닝의 공간 구성, 표현적 붓놀림에 담긴 에너지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드 쿠닝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여성 주제도 함께 발전시켜 나갔다.
이따금씩 이것을 에로틱한 상징, 흡혈귀, 출산의 여신으로 바구어 갔는데, 인물화에서도 이전의 보다 순수한 추상화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문제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그는 인물의 모델링을 생략하고 울퉁불퉁한 윤곽선만을 사용하여 인물과 환경이 뒤섞여 흐르도록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환경의 혼합체인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를 ‘비환경’이라고 칭했다.
그는 때때로 해부학적 형태를 분해하고 위치를 옮겨 격렬한 선적 추상을 만들어냈다.
드 쿠닝은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해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비록 순수 추상만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전 생애를 통해 표현주의에서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었다.
추상 표현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와이오밍 주 코디 태생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이었다.
1929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지방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폴록은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3년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곧 그 화랑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금세기 미술 화랑은 페기 구겐하임이 연 화랑으로 초현실주의의 온상과도 같은 화랑이었다.
1940년대 중반까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에 캔버스를 마루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 다음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각, 혹은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이유에서 이는 제스처 회화로 불렸으며 미국에서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었다.
액션 페인팅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제스처 회화gestural painting는 좀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제스처 회화는 하나의 그림은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화가의 행위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몸짓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행위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제스처란 명칭은 특히 물감을 사용하는 태도와 붓놀림이 시각적으로 확인되고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회화에 적용된다.
이 용어는 이따금 앵포르멜 또는 타시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폴록은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 양식을 도입한 화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화면 전체가 구조적으로 거의 구별하기 불가능하게 균일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회화 양식인 올오버는 폴록의 ‘뿌리고 튀기는’ 기법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 뒤로 이 용어는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1928~)처럼 ‘휘갈겨 쓴’ 구성 요소를 사용하거나 색면 회화 화가들처럼 색채를 사용하여 캔버스 전체를 비교적 단일하게 처리한 회화 작품을 일컫는다.
1950년대 중반부터 추상 표현주의에서 이탈하여 일명 후기 회화적 추상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미술 운동을 시작한 트웜블리는 ‘쓰여진 이미지들’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끄적거림이나 낙서와 외형상 유사했다.
그는 전통적인 구성 개념을 거부하고 폴록이 시작한 올오버 양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폴록의 것보다 느슨하고 자유로웠다.
그는 중앙에 선을 그어 면을 나누거나 거의 색조의 변화가 없는 거대한 표면에 낙서가 된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조각들을 붙여 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트웜블리의 작품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탈분화 dedifferentiation’ 미술과 비교되기도 한다.
독일어로눈 ‘슈트로이-콤포지치온 Streu-Komposition’이라고 하는 올오버 양식의 그림은 관람자의 주의를 화면 전체에 고르게 분산시키며 균형, 조화, 리듬 등에 의해 서로 연결되는 중심 부분들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림은 미니멀 아트의 기초적 구조들과 유사한, 구분이 없는 하나의 시각적 단일체가 된다.
이런 방법으로 연결된 요소들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종속시키거나 포함하지 않으므로 올오버 회화는 비관계적이다.
폴록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와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라져 있기도 하다.
이후 이런 회화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의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또한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감을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폴록은 1950년대에 올오버 양식의 작품뿐만 아니라 구상적이거나 유사 구상적인 흑백 작품 그리고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작품을 계속해서 제작했다.
해럴드 로젠버그를 비롯한 진보적인 평론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난해한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폴록은 20세기 미국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일반적으로 안정받았으나 화가들은 이미 그 운동에 반발하고 있었다.
폴록은 뉴욕 화파 중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많은 지역에서 전시회를 가진 화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