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창조: 비구상 미술
추상-창조: 비구상 미술Abstraction-Creation: Art non-figuratif은 1931년 2월 파리에서 추상 혹은 비대상 미술을 추구하는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결성한 그룹 명칭이다.
이들은 1930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 추상 미술전을 열고 이듬해에 그룹을 결성했다.
추상-창조 그룹은 1930년에 창립된 원과 사각형 그룹을 계승한 것으로, 국적 제한이 없었고, 조직의 구속력이 약해 한 때 회원이 4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룹의 명칭이 나타내는 것처럼 이들은 소위 ‘창조적인’ 추상의 발전을 꾀했는데 ‘창조적인’ 추상이란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ere(1888~1964)를 비롯한 몇몇 프랑스 화가들이 발전시킨 추상화나 영국의 대상적 추상처럼 자연의 외관에서 출발한 추상이 아니라 비구상적 요소들, 대개는 기하적 요소로 이루어진 추상 작품들을 의미한다.
보르도 국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0년 파리로 가서 생계를 위해 기자로 일하면서 계속 회화에 몰두한 비시에르는 초기에 위풍당당한 기세와 미묘한 매력을 지닌 고향 풍경화를 주로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전혀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감동적이다.
파리로 돌아온 뒤 1919년 살롱 도톤을 통해 처음 작품을 전시했고, 이때 앙드레 로트Andre Lhote(1885~1962)를 만났으며, 그를 통해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샤를-에두아르 잔레Charles-Edouard Jeanneret, 1887~1965)를 알게 되었고,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 <에스프리 누보>에 글을 기고했다.
보르도 태생의 로트는 10년 동안 상업적인 목조각공으로 일한 뒤 1906년경 흑인 조각과 고갱의 회화에 크게 감명을 받아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906년 파리로 가서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 전시했다.
1910년 드뤼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을 때 앙드레 살몽, 기욤 아폴리네르, 자크 리비에르 같은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에 주목했고 파리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트는 1911년 입체주의를 접하고 입체주의의 매너리즘적인 양식을 사용하여 특히 항구 풍경과 운동경기 같은 일상적인 장면과 사물을 묘사했다.
로트는 인물과 사물을 분해하여 주도 면밀한 윤곽선과 순색으로 이루어진 유사 기하적 평면들로 재구성하는데, 1917년작 <럭비>는 그런 한 예이다.
로트는 1917~40년 <라 누벨 르뷔 프랑세즈 La Nouvelle Revue Francaise>에 자신의 미학적 견해를 상세히 서술한 평론과 논설을 기고했으며, 작가로서 성공하려는 야망을 갖고 1923~50년 미술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출간했다.
로트는 1922년 자신이 설립한 아카데미 몽파르나스를 통해 프랑스는 물론 외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로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제는 매우 다양하여 풍경, 정물, 실내 정경, 신화, 초상 등을 망라한다.
모든 작품은 색조의 변화가 없는 선명한 색채로 칠해지고 정밀하게 표현된 평면과 반기하적 형태들이 상호 작용하는 복잡한 체계로 세심히 구성되어 있다.
그의 정물화 중에는 퓨리즘 작품과 유사한 은근한 매력을 지닌 것이 있으나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디자인과 리듬은 대게 즉흥적이기보다는 지적인 사고를 거쳐 나온 것이다.
스위스계 프랑스 건축가이며 화가인 르 코르뷔지에는 고향 쇼드퐁 미술 학교에서 공부했고 조판공 훈련을 받았다.
1905년에 건축 공부를 시작했고 현대 건축 발전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하나가 되었다.
회화와 판화에서도 건축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입체주의의 여러 혁신적인 기법에 깊이 몰두했다가 후에 종합적 입체주의는 공허한 장식 미술로 변질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1918년 아메데 오장팡Amedee Ozenfant(1886~1966)을 만나 이 같은 견해를 밝힌 <입체주의 이후 Apres le Cubisme>라는 저서를 공동 집필하여 출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회화 작품에 ‘잔레’로 서명했다.
1920년 오장팡과 함께 <에스프리 누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1920년대의 새로운 미학 정신을 훌륭히 서술했으며, 기계 미학을 표방한 퓨리즘Purism 운동을 탄생시켰다.
퓨리즘은 1918년 무렵부터 1925년경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 기계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과 관련되어 있었다.
퓨리즘은 르 코르뷔지에와 오장팡에 의해 주도되었고 <입체주의 이후>에서 퓨리즘의 토대를 규정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입체주의 이후>에 적었다.
“새로운 정신으로 활기가 넘치는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정신이란 명확한 개념에 의해 좌우되는 건설적이고 종합적인 정신이다.”
그는 장식 자체를 위한 장식을 혐오하는 퓨리즘의 태도를 계속 견지했지만, 회화 작품은 더욱 역동적으로 변해갔고 양감의 표현도 프레스코를 연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0년대 후반 그의 작품에서는 더욱 풍부한 상상력과 서정성이 나타났지만 지나친 표현을 철저히 혐오하는 기본 정신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는 1930년에 프랑스로 귀화했으며 이후 회화보다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 건축가로서 상당한 영예와 명성을 얻었다.
엔의 생캉탱 태생의 프랑스 화가 오장팡은 스페인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뒤 생캉탱 미술 학교에서 소묘를 공부했다.
오장팡은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체주의 그룹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1915년 이후 입체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장식적 추상으로 퇴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견해를 1915~17년 직접 편집하던 비평지 <엘랑 L'Elan>에 발표했다.
오장팡은 자신이 창간한 <엘랑>을 통해 종합적 입체주의의 장식적 경향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으며 뒤에 퓨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을 주창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에스프리 누보>를 창간했는데 이는 1925년까지 퓨리즘과 기계 미학의 주요 토론장이 되었다.
1924년 르 코르뷔지에와 공동으로 <현대 회화 La Peinture Moderne>를 집필했는데 후에 그는 이를 “에스프리 누보 운동의 요약”이라고 말했다.
그는 1928년 그의 가장 중요산 저서 <미술 Art>를 출간했다.
이 책은 1931년 영국에서 <현대 미술의 기초 Foundations of Modern Art>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1952년에는 뉴욕에서도 출간되었다.
그는 1931~38년에 대규모 구성 작품 <삶>을 제작했는데, 이것은 100여 명 이상의 인물들이 인류의 단결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퓨리즘 양식으로 그린 것이다.
1938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오장팡 미술 학교를 세웠다.
그 후 몇 년 동안 ‘전성설 theory of preformation’을 발전시켰는데, 이 이론은 세계의 위대한 걸작들은 ‘발견자’가 그것을 찾아내어 생명을 불어넣기를 기다리며 항상 인류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퓨리즘 시기와 1930년대 동안의 오장팡의 작품은 경제 개념, 곧 가장 경제적인 수단으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개념의 지배를 받았다.
후기 작품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인상을 주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좀더 세밀한 세부들이 드러난다.
한편 비시에르는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를 알게 되었을 무렵 입체주의 양식을 터득하여 “인간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입체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작품들은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것이었다.
비시에르는 자연의 표현적인 속성들에서 영감을 얻어 타시즘 양식의 그림을 그린 에콜 드 파리 예술가들 중에서 표현 추상의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그린 그림들은 매우 개성적인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1938년에 은퇴한 뒤 사실상 무명 화가로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쟁 중 녹내장 때문에 정상 시력의 1/3도 안 되게 시력이 저하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태피스트리와 다른 재료들을 이어 붙인 작품을 제작했다.
1948년 수술이 성공하여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에 이르러 그토록 오랜 기간 누리지 못했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비시에르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말기 작품으로 인해 감식력이 보다 뛰어난 소장가들과 미술품 수집가들은 초기 및 중기의 작품들을 재평가하게 되었는데, 그는 머지 않아 그 작품들이 이미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말기 작품보다 더 높이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태피스트리 같은 작품 중 일부에는 상형문자가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추상 방식은 자연의 외관을 서정적이고 세심한 구성의 추상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근원이 되는 것들의 표현적인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추상-창조 그룹은 추상 미술의 추구라는 커다란 원칙하에 외견상 매우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가보, 페브스네르,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와 몬드리안,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 도멜라의 신조형주의로부터 마넬리, 글레즈 같은 예술가들과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심지어는 아르프의 생물 형태적 추상이나 일부 추상적 초현실주의 등 많은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포괄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과 데 스테일의 지지자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점차 표현적 추상이나 서정적 추상보다는 기하적 추상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러시아 화가, 조각가이며 그래픽 예술가 엘 리시츠키El Lissizky(옐리예제르 마르코비치Eliezer Markowich, 1890~1941)는 1909~14년 다름슈타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리시츠키는 입체-미래주의 양식과 루보크lubok라 불리는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을 사용하면서 샤갈과 함께 유태교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루보크는 밝게 채색된 러시아 민속 판화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민속 우화나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루보크는 17세기 중반부터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작되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루보크란 용어는 교육받은 계층이 평민 미술에 대해 내린 경멸적인 평가를 함축했다.
그리고 조잡한, 값싼, 단정치 못한, 심미안이 결여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시츠키는 1919년 비텝스크에서 말레비치를 알게 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를 주도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활자 인쇄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0년에 직접 저술한 10쪽 분량의 책 <2개의 정사각형 이야기 The Story of Two Squares>를 디자인했는데, 1922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이 책은 현대 인쇄 디자인과 서적 디자인 분야에서 중요한 지표로 간주된다.
1922년 베를린으로 간 그는 일랴 에렌부르크와 함께 <베시치/게겐슈탄트/오브제 Veshch/Gegenstand/Object>란 제목의 구성주의 잡지를 창간했고, 반 두스뷔르흐 및 데 스테일의 일원들과 교류했으며, 한스 리히터, 모홀리-나기와 함께 구성주의 그룹을 창설하고 잡지 <게 G>를 창간했다.
<게>는 형성Gestaltung을 의미한다. 리시츠키는 1923~25년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ABC 그룹을 조직하고 같은 명칭의 잡지를 그룹 회원들과 공동으로 발간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추상 예술가였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그리고 몬드리안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하노버 공과 대학에서 건축과 조각을 배운 독일 추상화가 프리드리히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Friedrich Vordemberge-Gildewart(1899~1962)는 그 대학에서 엘 리시츠키를 알게 되었다.
또한 아르프, 슈비터스, 반 두스뷔르흐와 접촉했으며, 반 두스뷔르흐를 통해 접하게 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은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의 작품 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나치 독일에서 비재현적 미술이 금지되자 1937년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1938년에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했다.
1954년 독일로 돌아왔고 울름 조형 예술 대학의 시각 정보학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목적이 미술과 기술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밝혔다.
세심하게 계획된 그의 작품은 염격한 환경에서 장식으로서는 세련되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이 결여되어 있고 감정적 호소력이 부족하다.
암스테르담 태생의 세자르 도멜라 니벤호이스Cesar Domela Nieuwenhuis(1900~92)는 1919년 네덜란드를 떠나 아스코나와 베른에서 자연 풍경을 그리면서 구성주의와 추상 미술을 실험했다.
그 뒤 베를린으로 옮겨 1923년 노벰버그루페Novembergruppe의 전시회에서 비구상 작품을 선보였다.
노벰버그루페는 1918년 11월 베를린에서 결성된 급진적 독일 예술가 그룹으로 진보적인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국민 생활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들이 공언한 목적이었다.
그룹의 결성을 주도한 사람은 막스 페히슈타인, 세자르 클라인이나 후에 하인리히 캄펜동크, 루돌프 벨링, 에리히 부흐홀츠, 오토 뮐러, 한스 푸르만 등이 가담했다.
도멜라 니벤호이스는 1924~25년 파리에서 반 두스뷔르흐, 몬드리안과 교제하면서 데 스테일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924년 헤이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27~33년 베를린에 머물면서 나운 가보의 영향을 받아 여러 다른 재료의 재질과 색채의 대비를 이용하여 몽타주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유명해졌다.
1933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다.
피렌체 태생의 알베르토 마넬리Alberto Magnelli(1888~1971)는 1911년경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채 피렌체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교제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넬 리가 공식적으로 미래주의 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1913~14년 파리에 머물면서 마티스, 피카소 및 여러 입체주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1915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잠시 동안 밝은 색채의 추상화를 그렸지만 곧 구상적 회화로 전환하여 이탈리아 형이상학적 화파의 영향을 받은 형식화된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31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을 방문한 마넬리는 바위덩어리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스스로 <깨진 돌>이란 제목을 붙인 추상에 가까운 화화 연작을 제작했다.
1933년 파리로 가서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완전한 추상 회화로 다시 돌아갔다.
실제로 마넬리는 작품 활동 초기에 칸딘스키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앵포르멜이나 표현적 추상 양식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추상 구성은 윤곽선이 뚜렷하게 그려진 기하적, 혹은 그에 가까운 형태들이 구성주의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구축된 것이었으며 단지 색채만이 극히 표현적이었다.
또한 형태의 윤곽선을 처리한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이에 대해 벨기에 화가, 판화가이며 미술평론가로서 원과 사각형, 추상-창조 등의 그룹 창립에 적극적으로 활약한 미셀 쇠포르Michel Seuphor(1901~99)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넬리의 발견 중 가장 훌륭한 것 가운데 하나는 투명한 피부 같은 역할을 하는 다색선으로, 이것은 형태를 둘러싸거나 분할하기도 하며, 침투한 영역을 지니고 있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히 그 영역을 변화시킨다.”
프랑스 예술가로는 장 고랭, 오귀스트 에르뱅, 장 엘리옹이 추상-창조 그룹에 참여했다.
생테밀리옹블랭 태생의 장 고랭Jean Gorin(1899~1981)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26년 몬드리안을 만나 신조형주의로 전환했으며 최초로 신조형주의 양식의 부조 구성물을 제작했다.
원과 사각형 그룹과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이었고 추상-창조 그룹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36년의 연감을 편집했다.
1946년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의 창립에 참여했다.
고랭의 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놓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구성주의 구조물의 유형을 예고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대각선적 형태와 원형을 도입했으나 몬드리안의 수평-수직 양식을 지속했다.
1930년대 파리에서는 모든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적극 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화가들은 두드러진 활약을 나타내지 못했다.
1936년경 몇몇 주요한 구성주의자들이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뒤 그룹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1978년 뮌스터에서 과거의 그룹전을 되살린 ‘추상-창조’ 전시회가 열렸고 이는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에서도 잇달아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