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리즘

 
그리스인은 올림푸스 산에 거주하는 신들만 섬긴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대중적이며 야만적인 종교도 갖고 있었다.
이런 원시종교는 세계 각처에 흔했다.
그들은 의식을 통해 열광적이 되어 동물을 잡아먹었고 기분내키면 사람마저도 잡아먹었다.
이를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고 한다.
사전에도 이 말이 남아 있어 그들의 오래전 풍습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인의 다신론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복잡한데 아시아로부터 종교를 수입해다 썼으므로 그리스인들에게 종교적 상품은 매우 넉넉한 편이었다.

그들의 남신과 여신들이 노는 꼴은 가관이었는데 하는 짓들이 요즘 가장 못된 놈들의 하는 짓보다 더 했다.
신들은 도둑질했고, 간통했으며, 사악한 짓들을 골라 했고, 한결같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서로 힘겨루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들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영웅들의 치고박고하던 이야기들 같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이야기가 부풀고 또 부풀어져서 아주 엉뚱한 이야기로 진전되었다.
그러니까 신들은 다름아닌 당대의 영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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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의 차이>

세상에는 우연도 있고 필연도 있다.
우연은 의지의 결과이고 필연은 의도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우연 중에 가장 놀랄 만한 건 복권에 당첨되는 것일 게다.
확률로 보더라도 당첨은 우연의 결과이지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복권을 사려는 의지가 놀라운 우연의 결과를 빚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연이 의지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의지마저 없으면 우연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커미디언의 말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그리고 매일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날 신이 말하기를 복권이라도 사야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냐고 했다.
우연이 신의 소행이라면 그 우연을 바라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난 과거에 많은 것들을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대부분이 필연의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영화적 과거에 대한 회상에 의해서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의 일대기적인 영화를 예를 들어 그 영화를 두 번 보게 되면 처음에는 그 주인공의 삶이 많은 부분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그 영화를 볼 때는 우연으로 본 사건들이 필연적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미래의 관점에서 '지나간 현재'를 바라보게 되면,
현재 내가 고민하고 결정하는 사항이나 양자택일한 사항도 필연의 과정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지금 '지나간 현재'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운명론적이다.
운명론은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의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운명론이나 예정론에 반발한다.
나도 한때 그런 것들은 패배의식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온 과거의 발자취를 더듬으면 내게 일어난 지난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우연과 필연은 어떻게 다른가?

버스 안에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건 우연의 결과이다.
내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둘러본 결과로 그곳에 앉아 있는 20대 중반의 매력 있는 여자를 바라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버스를 타기 전 내가 생각하는 매력을 갖춘 여자를 만나기를 바란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쪽을 바라보려는 의지만 갖게 된 것이고 바라보니 그 여자가 매력적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그때 옆에 앉았던 친구가 말한다.
"재 예쁘지 않니?"
"예쁘다."
"꼬셔야지."

이는 실제로 있었던 대화이다.
뉴욕에서 아주 오랜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나 그와 함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눈 대화이다.
그 친구는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매력 있는 여자는 컬럼비아 대학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우리가 탄 버스에 올랐다.
그 친구가 "꼬셔야지"라고 말한 건 그 여자가 그곳에서 버스를 탄 것으로 미루어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얼마 가다가 그 여자는 내렸고 우리는 더 멀리에 있는 뮤지엄으로 갔다.

그 후 친구가 자기 아파트에서 연 파티에 초대했을 때 난 그곳에서 버스에 탔던 그 여자를 만났다.
친구가 꼬신 것이다.
몇 해 후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난 그 여자에게 금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두 사람은 현재 서울에 살고 있고 친구의 아내를 볼 때면 버스에서 처음 본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 친구가 그 여자를 본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단지 바라보려는 의지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꼬시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금 난 의지와 의도라는 개념으로 우연과 필연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의지를 강요당하며 살고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를 갈까 무엇을 살까 등등의 구체적인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서점으로 갈까 전시회에 갈까 추억이 있는 덕수궁을 산책할까 등등 행위를 하기 위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런 결정과 선택은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편 의도는 계획을 세우는 걸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도록 혹은 사건이 내게 유리하게 발생되도록 고의적인 계획을 세우는 걸 의미한다.
이는 의도를 가지는 순간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이 필연이란 뜻이다.
물론 원래의 계획대로 일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필연인데 도중에라도 계획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의도를 완전히 놓지 않는 한 필연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의도는 언어로 설명되어야 한다.
"예쁘다"는 의도에 대한 설명이 아니지만 "꼬셔야지"는 의도에 대한 설명이다.
꼬시겠다는 의도가 생기니까 그 친구는 컬럼비아 대학 캠퍼스를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샅샅이 뒤졌고 그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우연을 가장하고 접근했을 것이고,
그 여자는 그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매우 계획적이었다.

난 과거에 만난 사람들 그리고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그들을 알게 된 것이 필연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도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와는 달리 단순한 의지만으로 행동하지 않게 되다보니 그 어느 시점부터 내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필연의 결과로 이해가 된다.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일수록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주인공과 그 주인공과 관련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필연에 의해서였다는 걸 알게 된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말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도,
내게 큰 상처를 입힐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헤어지게 될 사람을 만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것도,
상처의 아픔으로 몸서리쳤던 것도,
헤어진 사람을 끝내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동안 보고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살게 했다면 이는 필연적인 나의 성숙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난 많은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을 했다.
난 세상이 넓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아주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현재에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주 많다는 걸 시인한다.
내가 현재의 나로 살아온 것이 필연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우연히 어떤 상황 속에 내던져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의도와 의지를 분간하지 못해 많은 사건들이 우연의 결과인 줄로만 알았다.
세상에는 우연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 필연에 의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연의 존재를 믿고 필연에 의해 사건이 발생한다고 믿게 되니 무엇을 의도할 때 원하는 바를 미리 계획할 때 조심스러워진다.
그 결과를 조심스럽게 따져보게 된다.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Pull game에서 일단 흰 당구공을 힘껏 치게 되면 9개의 공들이 이리저리 튀며 흩어진다.
9개의 공이 제각기 갈대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의 향방은 이미 흰 공이 다가갈 때 정해진다.
돌일킬 수 없게 예정대로 혹은 필연적으로 흩어지게 된다.
하나의 작은 결정조차도 다양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연을 고대하거나 우연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내가 복권을 사지 않는 이유는 우연의 확률이 너무 적어서 마음에 둘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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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르네상스는 예술과 문학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지만 철학에서는 중요한 인물을 내놓지 못했고 정치학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가 유일하게 탁월한 이론을 소개했다.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1536~1603)가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오고 차거우며 약아빠지게 생긴 교활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보통 키에 앞이마가 튀어나왔고 검은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눈을 가졌으며 얇은 입술에서 모나리사의 수수께기같은 미소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두 줄로 자신을 표햔했는데 다음과 같았다.

"나는 웃는데 내 웃음은 내 안에 없고
나는 타오르는데 타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훌륭한 시민이었으며 정직한 편이었고 훌륭한 아비였다.
그가 훌륭한 시민이었다는 것은 그가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국을 나의 혼보다 더 사랑한다."

마키아벨리는 1501년 늦게 마리에타 코르시니Marietta Corsini와 결혼해 다섯 자녀를 얻었는데 마리에타에게 훌륭한 남편은 못되었지만 가수 바베라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남편 평균 정도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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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철학

 
마키아벨리의 철학은 과학적이었고 경험적이었는데 공무원생활에서 얻은 체험이었다.
그는 사람에 관해 오늘날의 심리학자와도 같은 과락적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목적이 좋든 나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극도한 개인주의이다.

그의 철학을 비판하기 전 우리가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상기한다면 마키아벨리의 국수주의는 이탈리아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치가는 사기꾼같아야 한다는 솔직한 그의 주장은 오히려 지성적이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아틸리아에서는 오히려 바람직했고 힘 없는 나라가 힘 있는 나라들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손자병법과도 같은 상식적인 논리와도 같았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의 도시 플로렌스에서 1469년 5월 3일에 태어났고 집안은 13세기 때부터 대대로 부유했다.
집안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법학박사였던 아버지만 유일하게 집안에서 가장 가난해서 경제적으로 떳떳치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총명했지만 가난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책을 통해 독학할 수 있었다.

1498년 사보나롤라Savonarola가 처형당하고 플로렌스 정부는 공화국으로 개편되었으며 금욕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공화국에 과격한 재구성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를 촉구한 당파가 득세할 경우 마키아벨리는 29살의 나이로 고등법원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공화국 내부문제에 관한 일이 그의 업무였는데 업무가 확장되어 공화국의 10인집행위원회의 비서역할도 그가 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시그노리아Signoria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외무부와 국방부의 장관 비서가 되어 외교문제와 국방문제들에 관여하게 되었다.

사법관들은 이탈리아 국내와 외국에 대사를 대신해서 가곤했는데 마키아벨리는 1500년에 처음으로 임무를 띠고 프랑스를 가게 되었고, 프랑스에 5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한 군주의 집권 하에 나라가 부강해진 것을 직접 목격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1494년부터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를 넘보던 스페인과 힘을 겨루면서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이제 황성옛터였으며 이탈리아는 이 시기에 볼품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있었다.
역사의식을 가진 지성인이라면 분노할 일이었고 마키아벨리가 조국의 역사에 복통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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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표현주의와 오토마티즘 2


추상 표현주의 화파에는 드 쿠닝과 폴록과는 달리 표현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한 그룹에 대해 또 다른 그룹을 이룬 이런 계열의 화가들 가운데 바넷 뉴먼과 라인하르트가 두드러졌다.
뉴욕 주 맨해튼 태생의 바넷 뉴먼Barnett Newman(바루흐 네브만Baruch Newman, 1905~70)의 부모는 폴란드계 이민자이다.
뉴먼은 1922~26년 아트 스투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수학했고 1927년 뉴욕 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 후 부친의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1929년 공황으로 파산한 뒤 1937년까지 어렵게 경영을 계속했다.
1930년대에는 임시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했고, 1934년 뉴욕 시장에 출마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런 믿음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새롭게 출발한 뉴먼은 1940년대 후반 점차 신비적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켰는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카드뮴 빛 빨강 캔버스에 밝은 카드뮴 빛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합일>을 제작하여 비약적 결과를 성취했다.
또한 1948년에 로스코, 배지오티스, 머더웰 등과 협력하여 예술가의 주제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1950년대 초반 추상 표현주의의 화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했던 잡지 <호랑이의 눈 Tiger's Eye>의 부주필로 활약하기도 했다.

뉴먼은 뉴욕 화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기술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래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추상 표현주의 이후에 나타난 여러 새로운 양식의 선구자로, 모노크롬의 색면 회화, 전체론적 회화 또는 비관계적 회화, 그리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의 등장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셰이프트 캔버스는 1960년대 전통적인 직사각형 형태에서 벗어난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를 일컫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비직사각형 그림이 당시에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고딕과 르네상스 시대의 제단화는 종종 윗부분이 뾰족했고,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에는 타원형의 캔버스가 특히 유행했다.
그러나 현대 회화의 문맥에서 셰이프트 캔버스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그림이 다른 어떤 것을 베끼거나 참고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림의 ‘사물성’을 강조하는 추상 회화의 종류를 의미한다.
셰이프트 캔버스의 가장 유력한 발명자는 프랭크 스텔라로서 그는 V자형, 마름모꼴, 원형의 조각 형태를 이용했다.
그 뒤를 잇는 가장 독창적이고도 헌신적인 추종자는 엘리자베스 머레이였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스미스가 대표적이다.

뉴먼은 관람자의 시야를 압도하는 커다란 화면을 사용해 크기에 질적 중요성을 부여한 선구자로도 꼽힌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뉴먼의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마크 로스코, 라인하르트, 클리퍼드 스틸, 애드 라인하르트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55년 초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파티잰 리뷰>지에 뉴먼의 작품을 극찬하는 글을 기고했다.

뉴먼의 영향을 받은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70)는 라트비아의 드빈스크 태생으로 1913년 미국으로 와 1921~23년 예일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5년 회화를 시작했으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맥스 웨버에게 잠시 배운 것 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그는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의 창립에 참여했다.
로스코, 고틀리브 등이 참여한 텐The Ten 그룹은 1935년에 창설되어 1940년까지 전시회를 개최했다.
텐 그룹의 화가들은 추상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룹을 1898년 존 위치먼이 결성한 같은 명칭의 인상주의 그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로스코는 1940년대 초에 미로, 고르키, 배지오티스 등이 그랬던 것처럼 생물 형태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을 결합시키면서 추상적인 초현실주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다.
1943년 방송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 작품들의 제목은 잘 알려진 고대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영원한 상징들이기 때문에 다시 사용했다.
그것은 지역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과 동기를 상징한다. ...
현대 심리학은 그것이 외부 생활 조건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꿈과 일상어와 예술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 취향은 점차 사라졌으며, 1947년 무렵부터는 자신의 성숙한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로스코는 캔버스를 2개 혹은 3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는 좀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작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이 구름과 같은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의 색채는 마치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 작용에서 나온다.
그는 관람자가 완전히 총체적 색채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거대한 규모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로스코는 1958년 말했다.
“형상이 나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와 동료들은 형상을 있는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고틀리브의 작품이나 나의 작품 그 어느 것도 추상화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색채-공간 배열을 창조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주제를 희석시키거나 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제목에 내포되어 있는 주제를 강화하기 위해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나는 친밀한 상태를 창조하기 원하므로 대형 그림을 그린다.
대형 그림은 관람자에게 즉각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한다.
이 대형 그림은 너를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로스코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 작용이 감소되었다.
로스코는 1960년대 말 타계하기 바로 직전에 균일하게 반짝이는 색채로 이루어진 두 개의 불균등한 직사각형 영역으로 나누는 기하적 분할의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화파의 어느 화가보다도 미국과 해외에서 가장 널리 전시되었다.

로스코의 가까운 친구 틀리퍼드 스틸Clifford Still(1904~80)은 노스다코타 주 그랜딘 태생으로 스포캔 대학과 워싱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1935~41년 워싱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41~43년 전쟁 산업에 종사한 뒤 1946~50년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에서 가르쳤고, 1951~60년 뉴욕에 거주할 때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63년 은퇴한 후에는 메릴랜드 주의 웨스트민스터에 거주했다.
스틸은 여러 양식들을 실험한 후 1946년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확고한 추상 표현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적인 모호한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대형 그림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스코와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 달리 스틸은 두껍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으며,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들을 그렸다.

뉴욕 태생으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 1921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한 애돌프 고틀리브Adolph Gottlieb(1903~74)는 미국으로 돌아와 1923년 쿠퍼 유니언의 파슨스 디자인 학교를 다녔다.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의 창립에 가담했고 이듬해 연방 예술 프로젝트Federal Arts Projet에 참여했다.
연방 예술 프로젝트는 1935년 미국 정부가 제창한 사업으로 194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사업의 목적은 경제 공황의 타격을 받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국가의 예술적 잠재력을 공공건물과 장소의 장식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연방 예술 프로젝트는 뉴 딜 정책의 일환으로 앞서 수립된 프로젝트들을 토대로 기획되었다.
1933년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1933년 겨울부터 1934년에 걸쳐 예술가들은 주급제로 공공사업에 고용되었다.
프로젝트가 종료된 1943년 6월까지 약 3,600명의 예술가들이 1,600점에 달하는 작품에 동원되었으며, 1,200점 이상의 벽화가 의뢰되었다.
안타깝게도 연방 예술 프로젝트 하에 제작된 벽화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한두 점의 예비 습작만이 전해진다.

고틀리브는 1930년대 후반 원시미술과 미국 인디언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런 관심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완숙기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에 명백히 드러난다.
이 시기의 풍경화는 특히 비현실적 공간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1937년부터 거주한 애리조나 주 사막의 풍경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고틀리브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1941년 이후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접촉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예술적 소재의 근원으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초현실주의 논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뉴욕 화파의 일원인 그는 특히 1941~51년의 <상형문자> 연작으로 잘 알려졌다.
이 작품들은 여러 구획으로 나눠져 있으며 각각의 구획은 도시적인 형태로 채워져 있는데 이런 형태는 무의식적 연상 작용을 통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프로이트의 상징이나 추상적인 신화의 개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틀리브는 매우 독창적인 추상 표현주의 화가였으며 세계 각지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뉴욕 주 버펄로 태생의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67)는 1931~3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했고, 1936~37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와 미국 미술가 학교에서, 그리고 1945~51년에는 뉴욕 대학의 파인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1944~45년 전쟁 동안에는 미국 해군 사진사로 일했고 1944~47년에는 뉴욕의 신문 <PM>지의 평론가와 만화가로 일했다.
1937~47년 미국 추상 미술가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라인하르트의 회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양식상 급격하게 변화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추상이었다.
1930년대에는 입체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양쪽으로부터 다소 영향을 받아 뚜렷하고 윤곽선이 분명한 기하적 양식을 사용했다.
1940년대에는 올오버 회화 단계를 거쳐 1940년대 말에는 몇몇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머더웰의 작품에 가까워졌다.
그는 머더웰과 공동으로 <미국의 현대 예술가들 Modern Artists in America>(1950)을 펴냈다.

1950년대 라인하르트의 완숙된 양식은 예술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에서 발전되어 나왔다.
그는 빈 형태, 공허, 반복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추구함으로써 다가올 1960년대의 미니멀 아트를 예견했다.
1950년대에는 색채를 어둡게 하고 색채의 대비를 억제하기 시작하여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과 같은 기하적 형태를 배경 색과 약간의 명도 차이만 있는 색채로 칠하여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한 모노크롬 회화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
1952년경에는 화면을 대칭적으로 3등분 한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각 부분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완전한 검은색’ 양식으로 나아갔다.
1947~67년 브루클린 칼리지, 1959~67년까지는 헌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 와이오밍 대학, 예일 대학, 시러큐스 대학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양식적 발전에 대한 지적 근거를 제시하는 교조적인 글을 자주 썼다.

일군의 새로운 예술가들, 특히 필립 거스턴, 콘래드 마카-렐리, 제임스 브룩스, 브래들리 워커 톰린 등이 1950년대 초에 추상 표현주의 기법을 받아들여 추상 표현주의는 뉴욕 화파의 상징적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태생의 미국 화가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1913~80)은 1916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0년 로스앤젤레스의 오티스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석달 동안 공부한 후 유럽을 여행했고 1934년 멕시코 벽화가들을 알게 되었다.
1935~42년 연방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벽화를 제작했는데 이를 통해 멕시코 벽화에서 얻은 경험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으며 동시에 대규모로 구상적 추상을 실험할 수 있었다.
1941~44년 아이오와 주립 대학, 1945~47년 워싱턴 주에 있는 여러 대학, 1951~59년 뉴욕의 여러 대학, 1953~57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가르쳤고, 짧은 기간 동안 다른 여러 곳에서도 강의했다.
1940년대 초에도 여전히 초현실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에 가까우면서도 고유한 구상적 방식으로 환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거스턴은 1940년대 말 즈음에 도시의 풍경을 어렴풋이 암시하는 추상을 실험했으며 어느 정도는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성주의보다는 낭만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표현적, 기하적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1950년경에는 작품에서 구상적인 요소를 제거했다.
그의 이와 같은 방식은 ‘추상적 인상주의’로 묘사되었으며 마카-렐리와 같이 추상 표현주의자들 가운데 좀더 서정적인 화가들과 연관되었다.
1955년경부터는 형태와 분리된 추상적인 색채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색채의 형태’에 관해 언급한 화가들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엷고 부드럽게 처리한 배경의 중앙에 밝고 강렬한 색채의 영역들을 배치함으로써 화면 위의 상호 작용과 연관되어 이미지들이 육중하고 지배적인 효과를 갖도록 했다.
1960년대에는 회색조의 색채가 이전의 밝은 색채를 서서히 대체했고, 희미하게 대상을 연상시키는 특성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풍자적이며 고야처럼 그로테스크한 새로운 구상적 방식을 도입했다.
거스턴은 만화적 기법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색채를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야만적인 방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KKK단을 주제로 한 장면과 허나상적인 사회적 비평을 그렸다.
1975년 일련의 회화 작품을 제작하면서 1950년대의 풍부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되돌아갔고 이전의 작품에서 나타났던 KKK단의 ‘두목들’은 밝은 적색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후기 작품에 대한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거스턴은 주로 뉴욕 화파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추상 표현주의자 그룹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에 적었다.
“우리가 추상 미술에서 이어받은 신화 속에는 무언가 우스꽝스럽고 탐욕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회화는 자율적이며 순수하고 스스로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 구성 요소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결정함을 이룬다.
그러나 회화란 ‘순수하지 않다’. 회화를 지속시키는 것은 ‘순수하지 않음’을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자 이미지에 지배당하는 존재들이다.”

보스턴 태생의 콘래드 마카-렐리Conrad Marca-Relli(1913~2000)는 쿠퍼 유니언에서 1년 동안 공부했으나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1945년까지 미국 육군에 복무한 후 유럽과 멕시코를 여행했으며, 1950년대에 매우 독창적이고 극적인 콜라주 회화 기법을 발전시켜 추상 표현주의 제2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마카-렐리의 기법은 채색된 캔버스에서 잘라낸 형태들을 형태의 윤곽선을 이루는 검정 풀과 표현적인 조합을 형성하도록 바탕이 되는 캔버스에 붙이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부조 회화와 구성을 실험했는데, 보다 객관적이고 절제된 후기 회화적 추상의 양식과 유사했다.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태생의 제임스 브룩스James Brooks(1906~92)는 1925~26년 댈러스 아트 인스티튜트, 1927~31년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다.
1930년대에 연방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힘차고 기념비적인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고, 1940년대에 추상 미술로 전환하여 성숙한 화풍을 구사했으며, 1950년대에는 추상 표현주의자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뉴욕 주 시러큐스 태생의 브래들리 워커 톰린Bradley Walker Tomlin(1899~1953)은 1917~21년 시러큐스 대학을 다닌 후 파리의 아카데미 콜라로시와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초현실주의적인 구상의 요소를 담고 있는 입체주의 정물화를 그리다가 머더웰을 통해 오토마티즘 기법을 접하면서 1940년대에는 추상 표현주의로 전환했다.
1940년대 말경 톰린은 표의문자를 그려 넣은 독특한 구성 양식을 발전시켰다.
절제 있고 규칙적인 붓질로 유사 기하적인 형태를 만들어냈는데, 이런 형태는 기본적인 격자형 위에서 자유롭게 결합되거나 일정한 형을 이루었다.

추상 표현주의가 미술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부분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킨다는 전통적인 구성 방식과 대조적인 ‘전체론적’ 구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은 것으로, 몬드리안도 이런 구성 개념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그림 전체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이, 일정한 체계가 없는 무한한 회화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가 되었다.
모노크롬에 가가운 뉴먼, 라인하르트, 로스코의 그림이나 좀더 표현적인 클리퍼드 스틸, 클라인, 거스턴의 추상화들, 그리고 폴록의 올오버 그림들이 모두 이런 회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일정한 체계가 없는 회화 공간이라는 개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어떤 특정한 초점이나 자연스러운 경계가 전혀 없는 올오버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상 표현주의의 명성은 대단했는데, 이는 1971년 모리스 터치먼이 1965년 전시회 카탈로그 개정판에 기고한 서문에 잘 요약되어 있다.

“미국에서 지난 15년 동안 이름을 떨친 주요 예술가들은 모두가 사실상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성과를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대부분 유럽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입체주의의 창안을 도입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추상 표현주의는 미국 미술로서는 처음으로 유럽 화단, 특히 에콜 드 파리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미술은 추상 표현주의와 더불어 비로소 국제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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