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앤디 워홀 영화 주식회사


〈첼시의 소녀들〉이 성공하자 워홀은 ‘앤디 워홀 영화 주식회사(Andy Warhol Films, Inc.)’를 설립했다.
이제 화랑에서 그림이 팔릴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첼시의 소녀들〉 덕분에 앞으로 영화를 여러 편 찍을 수 있는 수입이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때부터는 그가 제작한 영화들이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므로 그는 더 이상 자금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를 도운 조수는 폴 모리세이였다.
이제 워홀은 상업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는데 그러고 보니 현재의 공장 규모가 작아 여러 면에서 불편할 게 뻔했다.

〈첼시의 소녀들〉이 미국 여러 도시에서 성공을 거두자 워홀은 이미 제작한 영화 〈나의 도박꾼〉(1965, 70분)을 맨해튼 웨스트 44번가에 있는 허드슨 극장(Hudson Theater)에서 상영하도록 했다.
《뉴욕 타임즈》의 수석 평론가가 워홀의 영화는 형편없는 아마추어의 솜씨며 내다버려야 할 쓰레기라고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상영된 첫 주의 매표액이 1만 8,000달러였고 워홀의 몫은 4,000달러였다.
7월과 8월 7주 동안 상영된 워홀의 영화가 성공하자 극장 측은 계속해서 8월에는 〈나는 남자〉(그림 149)를, 10월에는 〈자전거를 타는 소년〉(1967, 96분)을, 그리고 11월에는 〈누드 식당〉(1967)을 상영했다.
〈나는 남자〉는 1967년 7월에 100분짜리 컬러 필름으로 제작한 것으로 미국에서 대단히 히트한 스위스 영화 〈나는 여자〉로부터 제목을 따온 것이다.

1968년 2월 월간지 《컨피덴셜 Confidential》은 표지에 워홀의 사진과 동성애를 다룬 영화 〈자전거를 타는 소년〉을 소개하면서 워홀의 다른 영화들도 같이 소개했다(그림 148).
잡지는 워홀이 주로 동성애를 주제로 다루었다고 기술했다.
〈누드 식당〉은 일 년 후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상영되었으며 워홀은 화제의 인물로 계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워홀이 이제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회화에 대한 그의 집념은 변함이 없었다.
1967년 워홀은 1m 크기의 정사각형 실크스크린을 10점 소개했는데 모두 마를린 먼로의 초상화로 밝은 색을 사용해 과거에 제작했던 것들과 다르도록 했다.
10가지 주제를 250장 실크스크린하여 10장을 한 세트로 500달러에 팔았다.
값은 앙등했다.
1987년에는 9장이 12만 5,000달러에 팔렸으며 검정색 마를린 초상화는 한 장에 25,000달러에 팔렸다.
마를린 초상화가 금방 팔리자 워홀은 프린트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1968년 2월 워홀은 비바, 모리세이와 함께 유럽 순회전이 시작되는 스톡홀름으로 갔다.
스톡홀롬 현대미술관(1968. 2. 10~3. 17)에 당도하니 정면에 그의 황소머리 벽지가 걸려 있고 주위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워홀은 꽃그림 12점과 전기의자 10점을 출품했으며 500개의 브릴로 상자도 함께 소개할 계획이었다.
8점의 〈은빛 구름〉도 보냈는데 수소가 모자라 구름들이 땅에 가라앉아 있었다.
마를린의 초상화 10점은 방 하나에 따로 진열되었고 미술관은 영화 〈첼시의 소녀들〉과 〈자전거를 타는 소년〉도 상영할 예정이었다.
워홀은 미술관의 전시 기획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이 전시는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카셀 도큐멘타를 비롯하여 베른, 오슬로에서도 열렸다.

워홀이 화제의 예술가였던 만큼 칭찬하는 평론가들도 있었지만 공격하는 평론가들도 많았다.
1968년 5월 작가 이마무 아미리 바라카가 워홀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필모어 이스트 극장(Fillmore East Theater) 무대에 올라가 이렇게 웅변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성장해서 말론 브란도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우리 아이들이 성장해서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리기를 바라지 않으며 동성애 찬양이 의미심장하다거나 미학적이라고 여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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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나타난 반 고흐의 복음

 
반 고흐는 27살에 화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그림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동안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27살의 남자가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처음부터 무리스러운 일입니다.
미대를 나와도 화가가 되기 어려운 마당에 27살의 남자가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말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 고흐는 숙부의 아트 딜러상 구필에서 7년 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7년 동안 보아온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는 화가가 된다는 생각이 그렇게까지 무리스러운 것은 아니었지요.

27살부터 5년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도 능히 그릴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그림들이었습니다.
원근에 대한 감각이 없어 멀고 가까운 것을 제대로 비례적으로 나타내지 못했고
인물의 구성에서도 매우 초보적이었으며
채색 또한 형편 없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뮤지엄에 가면 초기의 작품들이 있는데 얼마나 못그렸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물을 그리고 인체교본을 보는 등 5년 동안 미대 1, 2학년에서 가르칠 그런 교과과정을 혼자 공부했습니다.

그가 그림에서 본 결정적인 복음은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이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가 채석장에 돌을 깨는 남자들의 노동을 그린 이래 그림에서 노동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르베 이전의 그림을 보면 부르주아와 귀족들의 삶이 전부였지 않습니까?
쿠르베를 시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하층민들이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림의 사회주의가 시작된 것이지요.
쿠르베, 도미에, 밀레, 반 고흐로 이어지는 일련의 화가들은 한 마디로 회화의 사회주의자들입니다.
밀레가 노동자의 노동을 농부의 노동을 신성시해서 그린 그림은 반 고흐에게 시각적 복음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성장한 반 고흐는 밀레의 그림에 매료되어 그의 그림을 수없이 모사했습니다.
밀레의 씨 부리는 사람은 반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까?
다만 다른 점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누더기를 입은 데 비해서 반 고흐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은 당시의 좀더 나은 옷을 걸친 것입니다.
농부의 현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반 고흐는 씨 뿌릴 시기가 아닌 막 추수를 한 들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그림도 그렸는데 그런 정도로 농부를 그리기 좋아했지요.
그는 밀레처럼 농부화가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밀레는 그에게 회화의 새로운 통로를 열어준 매우 고마운 분입니다.

초기에 반 고흐가 노동자의 노동을 주로 그렸고 농부의 초상을 많이 그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밀레의 덕택에 반 고흐는 32살 때 처음으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첫 걸작입니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그가 제대로 화가의 생애를 시작했고 37살에 자살했으니 화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5년이 전부입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의 복음입니다.
하루종일 농부 가족이 밖에서 노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하는 장면인데 감자가 전부입니다.
손마디 마디마다 툭튀어나온 거친 손으로 감자를 들고 먹는 장면입니다.
당시 자본주의가 성행하면서 겪는 노동자들의 삶은 이러했고 반 고흐는 문명의 그늘에서 혹사하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를 회화의 전도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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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광기를 묻는 분이 있어서

 
반 고흐에 관해서는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습니다.
반 고흐의 그림과 그의 광기에 관해 질문한 분도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그림과 광기와는 무관합니다.
글쎄 광기라는 말이 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반 고흐의 병은 의학명으로 간질입니다.
자주 발작을 하는 간질이 아니라 아주 드물게 발작하는 간질입니다.
정신병원에 1년 입원되어 있는 동안 다섯 번밖에는 발작을 안 했습니다.
문제는 발작할 때 위험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물감을 먹었는데 당시 물감은 가루를 오일에 섞어 사용했고 독소가 있었습니다.
물감을 먹었다는 건 이성을 잃었다는 말이겠지요.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발작이라서 그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그림을 아주 많이 그렸는데 몇 점이 그리다 만 것들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흰 캔버스가 드러나게 부분적으로 완성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학자들은 그것들이 발작으로 인해 그리다 중단된 것들이 아닌가 짐작하지만 이미 그려진 그림들에서 발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느 분이 반 고흐는 해바라기보다는 덩쿨나무를 더 좋아했다.
죽을 때 자신의 묘지에 덩쿨나무를 심어달라고 했다.
묘지에 가보니 덩쿨나무가 있더라.
이런 식으로 잘 모르고 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해바라기를 여러 점 그렸고
고갱이 아를로 와서 자신과 함께 지내기로 하자 반 고흐는 고갱에게 자랑도 할겸 해바라기 그림을 더 그렸으며
고갱이 왔을 때도 해바라기를 그렸고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생한 해바라기도 그렸고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도 그렸습니다.
반 고흐는 정멀로 해바라기를 좋아했습니다.
해바라기는 그를 상징하는 그의 꽃입니다.

덩쿨나무에 관해서는
그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병원의 정원을 많이 그렸는데 그곳에 나무를 타고 가어올라가며 자라는 덩쿨나무가 있었습니다.
풍경을 그리다보니 나무를 가까이서 그리다보니 덩쿨나무도 함께 그렸지요.
생레미에는 덩쿨나무가 많아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덩쿨나무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삼나무와 올리브나무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반 고흐는 갑자기 자살했습니다.
유언을 글로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곧 죽을 거라고 미리 예고한 적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묘지에 덩쿨나무를 심어달라고 적거나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그에 관해서는 뜬소문도 많고 새로운 뜬소문도 만들어져서 이번 기회에 바로잡을 겸 몇자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분에게 말한다면 그의 우울증에 대해 이해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에게는 우울증이 있었고
자신의 귀를 자를 때부터 우울증이 심해졌습니다.
발작과 우울증이 한꺼번에 그를 괴롭힌 것입니다.
그러나 발작보다는 우울증이 더 그를 고독하고 외롭고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우울증에는 원인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우선 자신의 작품이 팔리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동생에게 너무 경제적으로 의존한 것에 대한 우울증입니다.
작품이 팔렸으면 돈이 생기고 동생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림이 팔리지 않은 데 대한 우울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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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의 쟁점


아름다운 것이 예술이며 예술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존속되어 왔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매우 막연하다.
'아름다움'이 인간의 주관적 경험의 심리적 요인을 지칭하는 것인지 혹은 인간의 경험과는 별도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예술작품을 정의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이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이 오랫동안 존속되어 왔으므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곧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된다.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 칸트가 지적 탐구의 영역을 진, 선, 미, 즉 과학적, 도덕적, 미학적 영역으로 세분하고서부터였다.
18세기에는 철학적 관심이 예술작품의 '유일성'을 밝히는 데 있었고, 19세기에는 예술작품을 통해 얻게 되는 '미적 경험'의 본질과 예술작품이 창작된 과정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생겼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예술작품에 대한 유일성에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예술에 관한 이론들에 대한 탐색이 진행되었다.

예술철학은 예술에 관한 담론을 전제로 하며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를 내포한다.
오늘날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는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객관적 존재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는 언어로서의 인지주의적cognitivist 관점,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매체로서의 표현주의적expressionist 관점,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제품으로서의 형식주의적formalist 관점, 제도에 의해 감상의 대상으로 정해진 것으로서의 제도주의적institutionalist 관점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정의 모두 논리적으로 만족할 만하지 못하므로 철학적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인지주의는 예술적 인지 언어와 과학적 인지 언어의 구별에 혼동스러워하며, 표현주의는 예술적 표현 매체와 비예술적 표현 매체를 구별해야 하는 문제를 낳고, 형식주의는 예술작품의 아름다움과 비예술적 사물이 지닌 아름다움의 구별과 더불어 아름답지 않은 예술작품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으며, 제도주의는 제도적으로 무엇이든 미적 감상 대상으로 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예술작품의 개념이 분명해지고 어떤 것을 예술작품으로 분류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가정할 경우, 즉 예술작품의 독자적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예술작품은 필연적으로 감상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며, 감상의 대상이란 곧 가치평가의 대상임을 함의하며, 모든 평가는 반드시 평가 기준을 전제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이며, 한 작품이 지니고 있는 그런 기능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되고 있으며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의 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같은 종류의 예술작품들이 개인에 따라서,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다양하게 평가되거나 또는 흔히 상충되기 때문이다.
한 예술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경우라도 그런 평가의 이론적 근거는 논리적으로 투명하지 못하며 지적 설득력도 부족하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대한 가치 평가는 철학적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예술철학은 예술작품의 개념, 예술작품의 해석, 예술작품의 가치 평가의 문제를 다루며, 그 밖에도 예술과 언어, 예술과 심리학, 예술과 사회학, 예술과 철학적 신념 등 많은 세분화된 문제들을 다룬다.
다름 학문과는 달리 예술철학은 사람과 사회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어떤 문제를 더 중요하게 다루게 되고 어떤 문제는 덜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그 이유는 다른 지적 분야의 신념이나 이론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새로운 자연적 혹은 사회적 문제는 과거에는 주목되지 않았던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철학적 사조는 비철학적 담론에 관한 새로운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예술철학의 문제는 예술을 둘러싼 신념, 이론,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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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히트작 〈첼시의 소녀들〉


워홀의 공장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 워홀과 조수들은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워홀은 하는 수 없이 공장 입구에 커다란 공고문을 써 붙였다.

“전화를 걸든지 미리 약속을 하든지 하시오. 그냥 와서는 안 됩니다. 모든 쓰레기들은 배척합니다.”

사람들은 공고문에 개의치 않고 공장으로 왔지만 워홀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는 수십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일부는 시나리오를 먼저 만든 후 제작했지만 대부분은 즉흥적으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을 비난하는 시위가 잦았으며 마리화나를 자유롭게 필 수 있도록 요구하는 사람들도 시위 군중 속에 끼어 있었다.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에서는 73세의 승려가 미국의 비호를 받은 베트남 정부가 불교를 탄압하는 행위에 반발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분신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흠뻑 젖도록 가솔린을 부은 후 불을 붙이고 목석처럼 앉은 채 타들어갔다.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각 신문들이 이 장면을 보도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베트남의 내정에 관여했다.
그러나 워홀은 베트남 전쟁뿐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가 제작한 영화들이 마약, 섹스, 동성애와 관련이 있어 사람들이 그러한 점을 지적하며 시위라도 할까 우려했다.

워홀에게는 여자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 가운데 니코, 브리지드 폴크, 수잔 보텀리(그림 145)가 있다. 첼시 호텔에 묵고 있던 보텀리의 사진이 《에스콰이어》 1967년 2월호에 〈미국 신여성 : 21세〉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첼시 호텔에서 보텀리와 폴크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들을 영화에 출연시킨 워홀은 “난 필름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카메라를 내버려두는데 그래야만 사람을 어떤 인위적인 상황에 두지 않고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찍은 필름들은 실제 인생과 환상적인 인생을 뒤섞은 것처럼 나타났다.

1966년에 제작한 〈첼시의 소녀들〉(그림 145, 147)은 첼시 호텔의 객실 여덟 군데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각기 독립된 1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한 것으로 호텔이라는 작은 세계를 소개한 흑백과 컬러가 혼용된 세 시간 반짜리 영화다.
침대가 유일한 가구인 호텔방에서 벌어지는 장면에는 마약, 섹스, 그리고 남녀의 환상적인 삶이 있었는데, 자유분방했던 1960년대 중반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영화이기도 했다.
〈첼시의 소녀들〉에 출연한 여배우들은 모두 냉혈동물 같았다.
니코가 앞머리를 자르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곧 니코가 자신의 섹스 경험을 말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니코는 아마 에디 시즈윅의 경험담을 대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로 니코는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마리오도 여장을 하고 열연했다.

뉴욕 웨스트 23번가에 있는 낡은 첼시 호텔은 1883년 예술을 사랑하는 뉴욕의 부자 열 명이 세운 공동거주 건물이다.
마크 트웨인이 이곳에서 회합을 열어 첼시 호텔은 처음부터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
이곳에서 소설가 토마스 울프와 아서 밀러가 작품을 썼으며 시인 딜런 토마스가 이곳에 살다가 죽었다.
그 후 유럽이나 미국의 화가들이 여기서 작업을 하거나 서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 유서 깊은 호텔이 워홀의 영화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첼시의 소녀들〉은 200명의 객석을 가진 극장에서 그해 9월 초 개봉되었으며 반응이 좋아 10월 19일부터 25일까지, 11월 6일부터 9일까지, 11월 19일부터 30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재상영되었다.
영화평론가 조나스 메커스는 이 영화가 워홀의 최고 야심작으로 여태까지 제작한 영화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흥행에 성공해서 모든 지출을 제하고 나니 5,000달러의 이익이 남아 워홀과 극장 측이 반반 나누었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 67번가에 있는 리젠시(Regency) 극장에서도 하루 세 차례씩 한 달 동안 상영되었다.
필름은 그곳으로부터 다시 요크 시네마(York Cinema)로 갔으며 워홀은 대단히 즐거워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1,500~3,000달러 정도 들었는데 매표수익금은 13만 달러였다.
4만 5,000달러의 순이익에서 절반은 워홀의 몫이었다.
뉴욕에서 성공한 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 댈러스, 워싱턴, 샌디에이고, 캔사스 시티에서도 상영되었다.
영화는 한 번만 히트하면 이렇게 막대한 수입이 들어오므로 지금도 영화에 미친 사람들은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다.

《뉴스위크》에서 평론가 잭 크롤이 〈첼시의 소녀들〉을 대단한 영화라고 칭찬했지만 주간지 《타임》은 워홀의 영화가 아주 지저분하고 음란하다고 비난하면서 “이 영화는 언더그라운드의 것으로 하수도와 같다”고 결론지었다.
일간지 《뉴욕 타임즈》를 비롯하여 많은 평론가들이 워홀을 비난했지만 이 영화는 경제적 성공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워홀의 이름을 영화계에 널리 알림으로써 워홀은 더욱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스타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어떤 사람은 그의 등장이 마치 파티 전체의 등장처럼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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