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히트작 〈첼시의 소녀들〉


워홀의 공장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 워홀과 조수들은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워홀은 하는 수 없이 공장 입구에 커다란 공고문을 써 붙였다.

“전화를 걸든지 미리 약속을 하든지 하시오. 그냥 와서는 안 됩니다. 모든 쓰레기들은 배척합니다.”

사람들은 공고문에 개의치 않고 공장으로 왔지만 워홀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는 수십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일부는 시나리오를 먼저 만든 후 제작했지만 대부분은 즉흥적으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을 비난하는 시위가 잦았으며 마리화나를 자유롭게 필 수 있도록 요구하는 사람들도 시위 군중 속에 끼어 있었다.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에서는 73세의 승려가 미국의 비호를 받은 베트남 정부가 불교를 탄압하는 행위에 반발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분신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흠뻑 젖도록 가솔린을 부은 후 불을 붙이고 목석처럼 앉은 채 타들어갔다.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각 신문들이 이 장면을 보도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베트남의 내정에 관여했다.
그러나 워홀은 베트남 전쟁뿐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가 제작한 영화들이 마약, 섹스, 동성애와 관련이 있어 사람들이 그러한 점을 지적하며 시위라도 할까 우려했다.

워홀에게는 여자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 가운데 니코, 브리지드 폴크, 수잔 보텀리(그림 145)가 있다. 첼시 호텔에 묵고 있던 보텀리의 사진이 《에스콰이어》 1967년 2월호에 〈미국 신여성 : 21세〉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첼시 호텔에서 보텀리와 폴크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들을 영화에 출연시킨 워홀은 “난 필름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카메라를 내버려두는데 그래야만 사람을 어떤 인위적인 상황에 두지 않고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찍은 필름들은 실제 인생과 환상적인 인생을 뒤섞은 것처럼 나타났다.

1966년에 제작한 〈첼시의 소녀들〉(그림 145, 147)은 첼시 호텔의 객실 여덟 군데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각기 독립된 1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한 것으로 호텔이라는 작은 세계를 소개한 흑백과 컬러가 혼용된 세 시간 반짜리 영화다.
침대가 유일한 가구인 호텔방에서 벌어지는 장면에는 마약, 섹스, 그리고 남녀의 환상적인 삶이 있었는데, 자유분방했던 1960년대 중반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영화이기도 했다.
〈첼시의 소녀들〉에 출연한 여배우들은 모두 냉혈동물 같았다.
니코가 앞머리를 자르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곧 니코가 자신의 섹스 경험을 말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니코는 아마 에디 시즈윅의 경험담을 대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로 니코는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마리오도 여장을 하고 열연했다.

뉴욕 웨스트 23번가에 있는 낡은 첼시 호텔은 1883년 예술을 사랑하는 뉴욕의 부자 열 명이 세운 공동거주 건물이다.
마크 트웨인이 이곳에서 회합을 열어 첼시 호텔은 처음부터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
이곳에서 소설가 토마스 울프와 아서 밀러가 작품을 썼으며 시인 딜런 토마스가 이곳에 살다가 죽었다.
그 후 유럽이나 미국의 화가들이 여기서 작업을 하거나 서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 유서 깊은 호텔이 워홀의 영화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첼시의 소녀들〉은 200명의 객석을 가진 극장에서 그해 9월 초 개봉되었으며 반응이 좋아 10월 19일부터 25일까지, 11월 6일부터 9일까지, 11월 19일부터 30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재상영되었다.
영화평론가 조나스 메커스는 이 영화가 워홀의 최고 야심작으로 여태까지 제작한 영화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흥행에 성공해서 모든 지출을 제하고 나니 5,000달러의 이익이 남아 워홀과 극장 측이 반반 나누었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 67번가에 있는 리젠시(Regency) 극장에서도 하루 세 차례씩 한 달 동안 상영되었다.
필름은 그곳으로부터 다시 요크 시네마(York Cinema)로 갔으며 워홀은 대단히 즐거워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1,500~3,000달러 정도 들었는데 매표수익금은 13만 달러였다.
4만 5,000달러의 순이익에서 절반은 워홀의 몫이었다.
뉴욕에서 성공한 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 댈러스, 워싱턴, 샌디에이고, 캔사스 시티에서도 상영되었다.
영화는 한 번만 히트하면 이렇게 막대한 수입이 들어오므로 지금도 영화에 미친 사람들은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다.

《뉴스위크》에서 평론가 잭 크롤이 〈첼시의 소녀들〉을 대단한 영화라고 칭찬했지만 주간지 《타임》은 워홀의 영화가 아주 지저분하고 음란하다고 비난하면서 “이 영화는 언더그라운드의 것으로 하수도와 같다”고 결론지었다.
일간지 《뉴욕 타임즈》를 비롯하여 많은 평론가들이 워홀을 비난했지만 이 영화는 경제적 성공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워홀의 이름을 영화계에 널리 알림으로써 워홀은 더욱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스타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어떤 사람은 그의 등장이 마치 파티 전체의 등장처럼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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