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문’

1942년 10월 14일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그들을 위한 전람회를 메디슨 가에 있는 ‘화이트로 라이드 Whitelaw Reid ’에서 개최했다. 전람회의 명제는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서 First Papers of Surrealism’이었는데, 미국 작가들은 아직껏 그처럼 왁자지껄하고 요란한 전람회를 본 적이 없었다. 전람회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주최했고, 뒤샹은 2마일 가량의 기다란 끈을 사용하여 내부를 장식했다. 그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했고, 뒤샹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전시장 안에서 미식축구나 돌차기 놀이(hopscotch), 줄넘기를 하게 했다. 뒤샹이 기획하고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가 공간을 구성하여 탕기, 뒤샹, 마타, 에른스트, 마송, 그리고 미국작가 만 레이의 작품들을 배치했다. 전람회장의 실내에서는 지하철역에서 들을 수 있는 기차소음이 재생되었으며 기차소리가 날 때마다 전람회장의 불들이 껌뻑거렸다. 그러나 그런 장치들이 작품을 자세히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미로, 에른스트, 쿠어트 셀리그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 옆에는 피카소와 클레의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는데 피카소와 클레는 자신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미국 작가들로는 바지오츠, 마더웰, 데이비드 헤어가 참여했으며 마타와 달리의 그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유럽 예술가들 중 꿈, 정신이상, 시에 관심이 많았던 브르통은 당시 마타의 아파트 윗층에 살고 있었다. 브르통은 뉴욕에 5년 동안 체재했는데 문화적으로 아주 뒤떨어진 미국생활에서 만족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예술가들의 모임에도 덜 참석했으며, 돈이 떨어지자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하여 나치를 비난하는 방송을 했다. 그는 미국인 조각가 데이비드 헤어와 우정을 나누었고, 그와 함께 잡지 『VVV』를 창간했다. 번역은 브르통의 아내가 맡았다. 그러나 브르통과 헤어는 우정관계에서 연적의 상대로 돌변했는데 이는 브르통의 아내 재클린이 헤어와 사랑에 빠져 브르통의 아이를 데리고 헤어에게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성적으로 더욱 자유분방했다. 달리도 친구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카라를 자신의 아내로 낚아챘었다. 브르통은 뉴욕 생활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 빨리 끝나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레제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에서 예술가들을 종종 만났는데 그들은 레제를 늘 주인공으로 여겼다.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레제의 유물론에 근거한 기계주의 미학은 그 논리적 귀결로서 당연히 그로 하여금 공산당에 입당하게 했다. 레제와 피카소의 공산당 입당은 당시 신문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몬드리안은 재즈를 좋아했으므로 할렘(Harlem)에 있는 댄스홀에 자주 갔고, 여가가 생기면 블루스를 추었다. 페기와 결혼한 에른스트는 이스트 51번가에 있는 페기의 고급주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뒤샹은 1915년 뉴욕에 온 이래로 파리를 자주 방문하고 있었다. 피카소, 마티스, 미로는 유럽에 남아 있었지만 나치의 반(反)모더니즘적 태도로 인해 활동할 수가 없었다. 피카소의 경우 나치는 언론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파리는 텅 빈 것처럼 보였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주제들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니라 학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의 회화방법에 감동했고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험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특히 미로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좋아했고, ‘자동주의’ 기교의 창시자인 마송의 그림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송은 그때 코네티컷 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화법으로서 그 우수함이 알려졌지만 초현실주의는 하나의 미학운동으로서 그 영역을 계속 넓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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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금숟가락을 꽂고 태어난 로버트 마더웰

마타는 1941년 여름 멕시코로 여행하던 중에 우연히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1915~91)을 알게 되었다. 마더웰은 그 무렵 캘리포니아 주에서 뉴욕으로 온 무명화가였다. 명문대학인 스탠포드와 하버드에서 철학을 수학한 그를 만나자 마타는 그를 통하여 자신을 미국에 홍보하기로 결심했다. 마더웰은 그때 스물두 살로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타를 만나고부터 초현실주의 회화에 적극적으로 가세하게 되었다.

1941년 이전까지 그는 미술사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제대로 드로잉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 해 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유능한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에게 미술사를 배우면서 그림을 직접 그리고 싶은 욕구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마타와 함께 석 달 동안 멕시코를 여행했는데 1967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는 “1941년 여름 불과 석 달 동안이었지만 마타는 내게 10년에 해당하는 초현실주의 교육을 시켰다”고 했으며 “막스 에른스트는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대가들로부터 초현실주의 미학을 직접 청취한 후 그것에 대단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동주의 화법을 실습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의 모든 그림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로서 의식과 무의식과는 전혀 다른 합성으로 나타난다. 의식은 곧은 선, 디자인한 형태, 색의 중량, 그리고 추상된 언어들이며, 무의식은 부드러운 선, 모호한 형태, 그리고 자동주의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작가들과 폭넓게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주제들은 개인적인 감각들의 재현이었으며, 자유와 필연 사이의 지독한 불화에 대한 현대인들의 경험을 배양된 반응들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융의 잠재의식보다는 프로이드의 잠재의식에 대한 이론을 더욱 포용하는 것들이었다. 대표작 <판초 빌라, 죽었느냐 살았느냐 Pancho Villa, Dead or Alive>(37)는 그의 〈스페인 엘레지 Spanish Elegy〉(36) 시리즈를 통해 스페인 동란에 대한 기억에 바치는 한 점의 그림이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야수들의 왕 마티스의 그림들을 발견했고, 1937년에는 훗날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된 작가 앙드레 말로가 스페인 동란에 관해 연설한 데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유럽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더욱 더 주제의 동기를 구하여 스페인 동란에 관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모마(Museum of Modern Art)는 그의 그림을 구입했으며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지성과 역사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는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도 동시에 받았으며 그림에서 항상 감성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동시에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피카소, 마티스, 그리고 시인이며 입체주의 예술가인 쿠어트 슈비터즈의 콜라주 기법을 실험하면서 개인적인 카타르시스와 행위적인 것들을 동시에 성취하려고 했다. 마더웰은 이 시기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는 지성인이었지만 아직 회화의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가난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인 줄 몰랐고, 경제공황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마더웰은 금으로 만든 숟가락을 귀에 꽂고 입에 꽂고 똥구멍에 꽂고 태어났다”고 말한 친구도 있다. 물론 마더웰은 이를 부인했지만 어쨌든 그는 고통을 한 순간도 겪지 못했으며 생활의 절실함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마더웰은 8번가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여름이면 멕시코로 여행하는 지독하게 팔자 좋은 사내였다. 은행의 우두머리인 아버지도 경제공황 때문에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그가 변명했지만 그 말이 동료 예술가들에게는 시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경제공황의 주범 가운데에는 은행가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이 일 주일에 겨우 50달러밖에 안 된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 돈은 WPA에서 일하는 예술가들 주급의 두 배나 많은 액수였다. 폴록과 동료 예술가들은 마더웰의 지성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와 어울렸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의 돈 씀씀이와 유명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제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곧 입증되었다. 마더웰은 폴록을 1942년 10월에 돈 많은 화랑주인 페기 구겐하임에게 소개하였다. 폴록에게 마더웰은 예술가로서는 형편없지만 능력있는 사내였다.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시팔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마더웰이 폴록을 처음 방문했을 때 폴록은 그를 호프만과 드 쿠닝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마더웰은 그들과 오래 대화할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은 폴록이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마더웰과 호프만이 대화 도중에 폴록을 부축하여 그의 아파트로 데려다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더웰과 드 쿠닝의 만남도 성사되지 않았다. 폴록이 깜빡 잊고 만나는 시각을 드 쿠닝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데다 마더웰이 폴록의 집에 당도했을 때 폴록은 쿨쿨 자고 있었다. 폴록은 마더웰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줄 알고 있었는데 아마 약삭빠른 리가 폴록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던 것 같다. 마더웰은 1943년 어느 봄날 오후 폴록과 함께 작업하며서 폴록의 작업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폴록은 종이를 찢은 후 침을 뱉기도 했고 성냥으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태우기도 했다. 마더웰은 “나는 그러한 장면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대개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고 나중에 말하면서 “난 웬지 두려움을 가지고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고 첨언했다.

마더웰은 1946년에 「미학의 이면 Beyond the Aesthetic」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는 “발견하거나 창조한 물체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만족시켜주는 질들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들의 소임으로서 예술가는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5년 4월 초에 천 장의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가장 가까웠던 친구 데이비드 스미스가 그해 5월 23일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아 드로잉을 중단했다. 그때까지 그가 그렸던 드로잉들은 모두 565점이었다.

그는 일본의 선(禪)불교 회화에서 감명을 받았는데 당시 마크 토비를 포함한 몇몇 예술가들이 선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그림들을 마더웰은 “간음하지 않은 자동주의”라고 부르면서 도 닦는 중들이 무심한 상태에서 그린 글이나 그림들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는 선불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직관에 의존하여 수채화를 그리려고 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기하학적 구성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종이에 물감이 젖어드는 것을 그대로 남기는 방법으로 관람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야 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한 그림은 당시 그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던 헬렌 프랑큰탈러, 모리스 루이스, 그리고 케네스 놀런드의 그림들과도 관련이 있었다.

1942년 봄과 가을에 그는 마타와 함께 몇몇 예술가들의 화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초현실주의에 가세할 것을 권유했다. 고키가 이를 반겼고, 드 쿠닝은 담담했으며, 캄로우스키와 부사는 관심을 나타냈고, 폴록은 들떠 있었다. 폴록은 마타가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기뻐했다. 이제 마타는 든든했는데 바지오츠를 포함하여 마더웰과 부사, 캄로우스키, 그리고 폴록까지 모두 여섯 명의 동조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는 미국 예술가들이 아주 무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랭보와 아폴리네르에 관해서도 모르고 있었으며, 그저 피카소와 미로만 모방하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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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텐 메치즈


루뱅 태생 플랑드르 화가 퀸텐 메치즈Quinten Metsys(1465/6~1530)는 1491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안트베르펜에서 활약했다.
1507년 그가 뛰어난 화가로 알려지기 전까지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가장 유명한 작품 벨기에의 왕립미술관 소재 <성 안나의 제단화 St. Anne Altarpiece>와 안트베르펜의 왕립미술관 소재 <애도 Lamentation>는 강렬한 종교적 감정과 장중하고 세련된 정신을 보여준다.
여러 면에서 메치즈는 이전 시대의 회화를 따르는 경향을 보여주지만
<성 안나의 제단화>는 기념비적인 구도와 평면의 패턴을 중시한 고도로 세련된 색채법이 적용되었다.
인물들을 이탈리아 양식의 건축물 내부에 배치하려고 시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탈리아 회화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초상화와 풍속화를 보면 그가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어울리지 않는 한쌍 The Illmatched Pair>과 <노인의 초상 드로잉 Profile Drawing of an Elderly Man>을 보면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그도 젊은이와 노인의 대비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 Magdalen>의 구도와 인물의 제스처는 더욱 더 레오나르도를 상기시킨다.
은행가, 세리, 탐욕스러운 상인을 그린 풍자적 작품은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저서들과 관련이 있다.
그가 1517년에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봐서 그를 직접 만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초상화는 토마스 모어 경에게 바쳐졌다.
말년에 그린 종교화는 질이 떨어져 훨씬 감상적인 경향을 나타내며
인물의 제스처도 이전에 비해 거칠게 나타났지만
그렇다고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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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브라크는 말했다

피카소와 마티스 모두 세잔을 존경했지만 브라크의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브라크는 말했다.
“마네가 가진 것이라고는 꽃밖에 없다.
세잔은 꽃과 뿌리 모두를 가졌다.
내게는 뿌리로부터 꽃이 된 경로가 중요하며, 그것에 모든 인생이 결집되어 있다고 본다.”


브라크는 세잔이 말년에 “원통, 원추, 그리고 원으로” 사물을 분석하라고 한 충고를 소중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브라크는 친구 리처드슨에게 말했다.

“나는 대단한 것을 발견했네. 더 이상 발견할 것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아.
내게 사물들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그것들의 조화스러운 관계만 존재할 뿐일세.
나와 사물들의 조화스러운 관계가 또한 존재하네.
이런 조화에 도달하게 되면 어떤 지성적인 진공상태에 도달한 느낌이지.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해지며 … 이는 진정한 시라고 말할 수 있네.”

“두 몸을 한데 묶고 정상을 오르는 등반가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이 20세기 미술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사물들을 분석했고, 이는 분석적 입체주의로 나타났다.
브라크는 말했다.
“우리는 몽마르트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이틀에 한 번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내가 피카소와 나눈 대화내용은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던 것들이며, 누구도 그 같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대화를 할 줄조차 몰랐다.”

1909년 초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의 원시주의 미술에 대한 피카소의 관심으로 그의 입체주의 그림이 브라크가 구사한 세잔의 후기 화법에 의한 그림과 비교되더니 이후부터는 두 사람의 상이한 점이 점차 줄어들었다.

피카소는 1910년에 암브로이즈 보아르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보아르의 단단하고 부처처럼 생긴 모습을 은빛 색으로 어렴풋이 묘사했다.
그는 보아르의 얼굴을 조각의 면들처럼 각이 지도록 분열시킨 뒤 각 면이 서로 겹치는 각진 부분에 투명한 색을 칠했고, 조각적 비례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했으며, 공간의 깊이가 엷게 나타나도록 했다.
부서진 면들이 운집되고, 색들이 미묘하게 달라졌으며, 어렴풋이 보이는 보아르의 얼굴은 15년 전 세잔이 그린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었다.
세잔이 그린 보아르와 피카소의 초상화를 비교하면 불과 15년 동안 회화에 얼마나 큰 진전이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보아르의 초상>(1910)이 전시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전시회에 온 어린 소년이 “야! 저건 보아르다!”라고 소리쳤다.
완전히 부서뜨린 보아르의 얼굴에서 그의 모습을 유추할 만큼 최소한의 요소만 남길 수 있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장점을 피카소가 유감없이 시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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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자동주의 회화의 사도 로베르토 마타

1942년부터 뉴욕에서는 유럽 예술가들의 활약도 현저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마타가 먼저 뉴욕으로 와서 초현실주의 회화에 젊은 예술가들이 동조하도록 종용했다. 고키와 윌리엄 바지오츠 두 사람은 벌써 초현실주의 회화를 추구하고 있었고, 우연히 마타를 만난 부잣집 아들 로버트 마더웰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동주의 회화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폴록도 나중에 마타의 그룹에 동조했다. 칠레인인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찬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en 1911~  )이었는데 사람들은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만 불렀다.

마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안주했고,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건축을 수학한 후 193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세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마타의 그림 한 점을 사주면서 “당신은 초현실주의 예술가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때 초현실주의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찾으려고 했던 것은 “작은 거북이가 사막 한가운데서 알로부터 깨어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씩 기어가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마타는 곧 브르통과 탕기의 친구가 되었다. 마타는 그들보다 2년 먼저인 1939년에 뉴욕으로 왔는데 젊고 영어를 잘 구사했으므로 미국 예술가들과 곧 교통할 수 있었다. 그해에 그린 <구성 Composition>은 자신이 자동주의 회화의 사도임을 사람들에게 부각시켰다. 그의 그림은 마치 우주의 어떤 미세한 장면을 크게 확대하여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고, 공상과학적 우주를 탐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자동주의적 제스처와 그가 선호한 투명한 색들은 환상적이면서도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서른 살의 마타는 앙리 마티스의 아들 피에르 마티스의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진 후 파리의 미술계에서 인정받았지만 뉴욕에서는 홀로 ‘천재 예술가’라는 과분한 칭찬을 받았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가 없는 고을에서는 토끼가 왕 노릇한다”고 했듯이 당시는 아직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브르통 등 초현실주의의 대가들이 도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착하면서 마타의 영광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마타는 그 점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브르통이 뉴욕에 도착하면서 우선 마타에 대한 칭찬이 줄기 시작했다. 유럽의 대가들이 속속 도착하자 사람들은 이제 마타에게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늘에 가려지게 되자 마타는 “시팔놈들, 난 나의 운동을 펴고 말겠다”고 말했다고 휠러는 전한다.

마타는 미국 작가들의 모임을 구성하기 위해서 9번가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여섯 예술가 부부를 자주 초대했다. 그는 그들에게 탕기와 뒤샹이 20년대에 이미 발전시켰던 게임을 소개했는데 그 게임이란 서로가 무엇을 쓰는지 모르게 한 줄씩 글을 쓴 후 그것들을 묶어서 한 편의 시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록은 이런 게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가 그 게임을 어른들의 철없는 장난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폴록을 마타는 “굳게 닫혀 있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마타는 작가들의 아내는 참석시키지 않았는데 리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아내를 프랑스 애완용 강아지 정도로밖에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폴록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타의 높은 평판과 그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보여주는 관심 때문에 겨우 참여하는 정도였다. 주로 바지오츠, 캄로우스키, 부사, 마더웰이 폴록과 함께 마타의 집에 모였고, 그들은 자동주의 드로잉을 실습했다. 예를 들면 불, 물, 땅, 공기를 주제로 무심한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이었다. 마타는 “너희들이 장님이라고 가정하고 수영장에 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하여 드로잉하라고 말했다. ‘하루의 시간들’은 마타가 선호한 주제였다.

시간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주제였다. 키리코는 시간의 부재를 그림으로 그린 적이 있었으며, 오후 두 시의 장면을 그리면서 그림의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게 했고, 달리는 녹아흐르는 시계를 그리면서 곤충기 시대를 재현했다(35). 또 자코메티는 <새벽 네 시의 궁전 The Palace at 4 A.M.>을 제작하면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것은 그가 사랑에 빠졌던 여인과 새벽 네 시에 사랑의 행위를 했던 것과 관련한 조각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시간개념은 보통 시간의 개념을 넘어서는 꿈 같은 시간이었다. 마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무의식의 상관성을 정립하려고 했다. “초현실주의는 대부분 밤(꿈)의 세계이다”라고 캄로우스키는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폴록은 어떤 메시지를 주는 그림을 그리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저 그림을 그리려고만 했을 뿐이었다. 그는 브르통의 아이디어처럼 그림을 형이상학에 사탕발림하는 그러한 행위로 인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마타는 그들에게 꽃에 대한 정의를 말하라고 물었다. 폴록은 “꽃은 굴 속에 있는 여우다”라고 정의했는데 아무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마타는 나중에 “잭슨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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