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금숟가락을 꽂고 태어난 로버트 마더웰
마타는 1941년 여름 멕시코로 여행하던 중에 우연히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1915~91)을 알게 되었다. 마더웰은 그 무렵 캘리포니아 주에서 뉴욕으로 온 무명화가였다. 명문대학인 스탠포드와 하버드에서 철학을 수학한 그를 만나자 마타는 그를 통하여 자신을 미국에 홍보하기로 결심했다. 마더웰은 그때 스물두 살로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타를 만나고부터 초현실주의 회화에 적극적으로 가세하게 되었다.
1941년 이전까지 그는 미술사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제대로 드로잉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 해 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유능한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에게 미술사를 배우면서 그림을 직접 그리고 싶은 욕구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마타와 함께 석 달 동안 멕시코를 여행했는데 1967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그는 “1941년 여름 불과 석 달 동안이었지만 마타는 내게 10년에 해당하는 초현실주의 교육을 시켰다”고 했으며 “막스 에른스트는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대가들로부터 초현실주의 미학을 직접 청취한 후 그것에 대단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동주의 화법을 실습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의 모든 그림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로서 의식과 무의식과는 전혀 다른 합성으로 나타난다. 의식은 곧은 선, 디자인한 형태, 색의 중량, 그리고 추상된 언어들이며, 무의식은 부드러운 선, 모호한 형태, 그리고 자동주의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작가들과 폭넓게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주제들은 개인적인 감각들의 재현이었으며, 자유와 필연 사이의 지독한 불화에 대한 현대인들의 경험을 배양된 반응들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융의 잠재의식보다는 프로이드의 잠재의식에 대한 이론을 더욱 포용하는 것들이었다. 대표작 <판초 빌라, 죽었느냐 살았느냐 Pancho Villa, Dead or Alive>(37)는 그의 〈스페인 엘레지 Spanish Elegy〉(36) 시리즈를 통해 스페인 동란에 대한 기억에 바치는 한 점의 그림이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야수들의 왕 마티스의 그림들을 발견했고, 1937년에는 훗날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된 작가 앙드레 말로가 스페인 동란에 관해 연설한 데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유럽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더욱 더 주제의 동기를 구하여 스페인 동란에 관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모마(Museum of Modern Art)는 그의 그림을 구입했으며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지성과 역사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는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도 동시에 받았으며 그림에서 항상 감성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동시에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피카소, 마티스, 그리고 시인이며 입체주의 예술가인 쿠어트 슈비터즈의 콜라주 기법을 실험하면서 개인적인 카타르시스와 행위적인 것들을 동시에 성취하려고 했다. 마더웰은 이 시기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는 지성인이었지만 아직 회화의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가난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인 줄 몰랐고, 경제공황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마더웰은 금으로 만든 숟가락을 귀에 꽂고 입에 꽂고 똥구멍에 꽂고 태어났다”고 말한 친구도 있다. 물론 마더웰은 이를 부인했지만 어쨌든 그는 고통을 한 순간도 겪지 못했으며 생활의 절실함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마더웰은 8번가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여름이면 멕시코로 여행하는 지독하게 팔자 좋은 사내였다. 은행의 우두머리인 아버지도 경제공황 때문에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그가 변명했지만 그 말이 동료 예술가들에게는 시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경제공황의 주범 가운데에는 은행가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이 일 주일에 겨우 50달러밖에 안 된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 돈은 WPA에서 일하는 예술가들 주급의 두 배나 많은 액수였다. 폴록과 동료 예술가들은 마더웰의 지성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와 어울렸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의 돈 씀씀이와 유명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제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곧 입증되었다. 마더웰은 폴록을 1942년 10월에 돈 많은 화랑주인 페기 구겐하임에게 소개하였다. 폴록에게 마더웰은 예술가로서는 형편없지만 능력있는 사내였다.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 ‘시팔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마더웰이 폴록을 처음 방문했을 때 폴록은 그를 호프만과 드 쿠닝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마더웰은 그들과 오래 대화할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은 폴록이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마더웰과 호프만이 대화 도중에 폴록을 부축하여 그의 아파트로 데려다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더웰과 드 쿠닝의 만남도 성사되지 않았다. 폴록이 깜빡 잊고 만나는 시각을 드 쿠닝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데다 마더웰이 폴록의 집에 당도했을 때 폴록은 쿨쿨 자고 있었다. 폴록은 마더웰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줄 알고 있었는데 아마 약삭빠른 리가 폴록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던 것 같다. 마더웰은 1943년 어느 봄날 오후 폴록과 함께 작업하며서 폴록의 작업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폴록은 종이를 찢은 후 침을 뱉기도 했고 성냥으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태우기도 했다. 마더웰은 “나는 그러한 장면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대개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고 나중에 말하면서 “난 웬지 두려움을 가지고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고 첨언했다.
마더웰은 1946년에 「미학의 이면 Beyond the Aesthetic」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는 “발견하거나 창조한 물체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만족시켜주는 질들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들의 소임으로서 예술가는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5년 4월 초에 천 장의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가장 가까웠던 친구 데이비드 스미스가 그해 5월 23일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아 드로잉을 중단했다. 그때까지 그가 그렸던 드로잉들은 모두 565점이었다.
그는 일본의 선(禪)불교 회화에서 감명을 받았는데 당시 마크 토비를 포함한 몇몇 예술가들이 선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그림들을 마더웰은 “간음하지 않은 자동주의”라고 부르면서 도 닦는 중들이 무심한 상태에서 그린 글이나 그림들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는 선불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직관에 의존하여 수채화를 그리려고 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기하학적 구성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종이에 물감이 젖어드는 것을 그대로 남기는 방법으로 관람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야 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한 그림은 당시 그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던 헬렌 프랑큰탈러, 모리스 루이스, 그리고 케네스 놀런드의 그림들과도 관련이 있었다.
1942년 봄과 가을에 그는 마타와 함께 몇몇 예술가들의 화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초현실주의에 가세할 것을 권유했다. 고키가 이를 반겼고, 드 쿠닝은 담담했으며, 캄로우스키와 부사는 관심을 나타냈고, 폴록은 들떠 있었다. 폴록은 마타가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기뻐했다. 이제 마타는 든든했는데 바지오츠를 포함하여 마더웰과 부사, 캄로우스키, 그리고 폴록까지 모두 여섯 명의 동조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는 미국 예술가들이 아주 무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랭보와 아폴리네르에 관해서도 모르고 있었으며, 그저 피카소와 미로만 모방하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