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진 젖가슴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처진 젖가슴에 대한 행법

 

1. 오른손을 왼쪽 젖가슴에 갖다 대고 젖꼭지를 중심으로 30회 마찰한다. 왼손으로 오른쪽 젖가슴을 같은 요령으로 마찰한다.

 

2. 두 손은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하여 살짝 주먹을 쥐고 꿇어앉는다. 그대로 3-4회 호흡을 고른다. 두 손을 위로 올려 천천히 젖가슴을 누른다. 그대로 팔꿈치를 뒤로 당기는 기분으로 코로 숨을 들이쉰다. 숨이 가빠지기 직전에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양 팔꿈치를 늦춘다. 이것을 9회 되풀이 한다.

 

1행법은 목욕할 때 하면 좋다. 이 행법을 하면 상반신의 기혈 흐름이 활발해져서 가슴 근육의 위축이 치료되므로 아름다운 가슴라인이 만들어지는 동시에 건강도 좋아진다.

2행법을 하면 새가슴인 사람은 신장 기능이 좋아진다. 브래지어로 젖가슴을 죄면 기혈의 흐름이 정체되어 유방암의 원인이 되기 쉽다. 착용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느슨한 사이즈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리 없는 자연스러움에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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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근깨, 점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주근깨, 점에 대한 행법

 

1. 양쪽 손바닥을 비벼서 따뜻하게 한다. 오른손바닥으로 이마에서 오른쪽 볼 그리고 턱에 걸쳐 18회 문지른다. 왼손바닥으로 이마에서 오른쪽 볼 그리고 턱에 걸쳐 18회 문지른다. 오른손바닥으로 오른쪽 눈에서 오른쪽 볼 그리고 턱에 걸쳐 18회 문지른다. 왼손바닥으로 왼쪽 눈에서 왼쪽 볼 그리고 턱에 걸쳐 18회 문지른다.

 

주근깨나 점의 원인은 피로에 있다. 주근깨와 점을 예방하는 것은 무리하게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고 육체와 정신의 피로회복에 노력하면 생기지 않는다.

눈에서 볼에 걸쳐 문지를 대 심하게 문질러 내려가면 눈이 아래로 처지므로 손바닥을 옆으로 잡아당기듯이 약간 커브를 그리면서 행한다. 하루에 2-3회 실시하면 일주일 후부터 검은 빛이 점점 사라지다가 다시 검어지기 시작하는데, 단념하지 말고 계속하면 검은 빛이 다시 엷어져간다. 한 달 정도 반복하면 검은 빛이 거의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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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약과 위하수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위약, 위하수에 대한 행법

 

1. 책상다리의 자세로 앉아서 두 손을 포개어 가슴 밑에 댄다. 고개를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입으로 숨을 내쉬고, 동시에 포갠 두 손을 몸에 댄 채로 왼쪽 위 근처에까지 자연스럽게 밀어 내린다. 이때 눈은 비스듬히 위족을 쳐다본다. 숨을 다 내쉬거든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들이쉬면서 얼굴은 정면으로, 두 손은 가슴 밑, 원래의 위치로 돌린다. 같은 방법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다. 이번에는 두 손을 오른쪽 간장 근처에까지 밀어 내린다. 숨을 다 내쉬거든 원래의 자세로 돌아간다. 이상을 3회 되풀이 한다.

 

2. 반듯하게 누워서 두 무릎을 세운다. 옷을 젖히고 배를 드러낸다. 양손을 충분히 마찰한 후 따뜻해진 양손바닥으로 배 전체를 20-30회 시계방향으로 가볍게 문지른다. 배 전체를 가로 세로 3등분한 것처럼 하여 양손의 손가락을 모아서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차례차례 눌러나간다. 누를 때에는 입으로 숨을 내쉬고 손을 뗄 때에는 코로 숨을 들이쉰다. 마지막에 배 전체를 손바닥으로 20-30회 가볍게 문지른다.

 

동물은 본래 네발걸음이라 몸이 땅과 평행을 이루는 법이다. 인간만은 두발걸음으로 몸을 수직으로 세우다 보니 위에 부담이 생기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위가 아래로 처지는 경우가 많다. 배꼽이 아래로 향한 사람은 우선 위하수로 생각하면 틀림없다.

축 늘어진 위를 원위치로 되돌리려면 목 행법이 효과적이다. 이 행법의 중요한 점은 고개를 돌렸을 때 되도록 뒤쪽을 돌아보는 것이다. 또 비스듬히 위를 흘겨볼 때에는 눈을 똑바로 뜨고 눈으로 기를 끌어들인다는 느낌으로 한다. 공복 시나 식후 2시간쯤에 행한다. 하루 2-3회씩 일주일이면 효과가 나타난다. 이 행법은 위궤양에도 효과가 있다.

이 행법을 하다보면 소변이 불어나거나 구역질이 날 수 있는데, 이는 내장이 정상 위치로 돌아가는 증거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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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트리아인들은 크리슈나를 숭배했다

 

 

 

 

 

메난드로스가 파탈리푸트라에 건립한 사리탑은 기원전 155년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위에 오르자마자 단행한 마가다 왕국 2차 침공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숭가 왕조는 데칸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비디사Vidisa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이 지역의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에는, 기원전 100년경 인더스 강을 지배했던 박트리아 왕 안티알키다스가 보낸 그리스 특사의 명령으로 새겨진, 크리슈나를 기리는 비문이 남아 있다. 당시 박트리아인들은 크리슈나를 숭배했다. 메난드로스도 갠지스 계곡에 불교 기념비를 건립했다. 당시에는 기념비 건립이 유행이었으므로 이 사실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기념비에는 “왕 중 왕이자 위대한 구원자인, 정의로운 천하 무적 메난드로스 대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거창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범한 불교도가 되고자 했다. 아들에게 양위한 후 메난드로스는 수도원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다.
샤카족이 인도로 유입되면서 박트리아의 국력도 쇠했다. 흑해 주변에 살던 그리스인은 샤카족을 스키타이족으로 여겼다. 샤카족에 이어 박트리아를 차지한 건 대월지족이었다. 단숨에 힌두쿠시 산맥까지 세를 뻗친 대월지족은 비옥한 옥서스 강 유역에 정착한다. 그들의 본거지였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목축을 하지 않았던 민족이기에 유목을 하는 대신 관개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농부와 무역상으로서의 삶에 크게 만족했다. 쿠샨 왕조가 나타나 박트리아인과 샤카족을 인도 북서쪽으로 몰아낼 때까지 말이다. 78년 쿠샨 왕조의 3대 왕 카니슈카가 즉위하기 전의 쿠샨 왕조에 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갑론을박만 존재할 뿐, 명백히 밝혀진 바는 없다. 카니슈카는 아소카 왕과 같은 열렬한 불교도였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쿠샨 왕조의 영토 내에 대승불교를 전파했다. 카니슈카의 영향력이 갠지스 강 유역의 파탈리푸트라까지 이르렀으며 인더스 유역에도 미쳤던 것으로 보이나, 인도 아대륙의 얼마만큼이 카니슈카의 영토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카니슈카는 파
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주요 산길인 카이버 고개를 통해 들어오는 중국의 실크로드 개척의 부산물을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이 문물은 인더스 계곡까지 전해졌으며 쿠샨 왕조의 상인들은 페르시아 만의 초입부분까지 진출했다.
위대한 카니슈카도 쓰라린 패배를 맛본 적이 있다. 공주에게 청혼한 쿠샨 왕조의 무엄함을 엄히 다스리고자 출병한 중국의 장수 반초班超에 의해서였다. 그럴듯한 명분 뒤에는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은 중국의 동맹국들을 위협하는 쿠샨 왕조의 행보에 훈수를 두고자 하는 중국의 속셈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투루판의 오아시스 지역의 도시 쿠추Kuchu에 본거지를 차린 반초는 쿠샨과 90일간의 전투를 벌인 끝에 그들을 박트리아의 영토 어딘가에서 격퇴했다. 반초의 부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카스피 해까지 진격했다. 중국 군대가 자국 역사상 가장 먼 서쪽,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까지 진출했던 사건이다. 하지만 중국의 이러한 일회적인 개입이 쿠샨의 흥망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쿠샨은 인도 아대륙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쿠샨 왕조는 아대륙의 문물과 고유문화를 마우리아 왕조만큼이나 반감 없이 절충했다. 쿠샨은 아대륙의 다양한 종교에 모두 관심을 보였다. 동전에 새겨진 신들의 형상에서는 훨씬 더 광범위한 영적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쿠샨 왕조가 주조한 동전에는 서아시아와 유럽의 신들뿐만 아니라 남아시아의 신들까지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카니슈카의 재위기간 중에 제4회 불전이 추진되었다. 이 불전에서 18개의 불교 종파들이 만나 교리의 차이에 관해 논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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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세계에서의 샤리아 정치

 

 

 

 

 

 

알카라다위가 “절대적인 신의 경전” 을 언급했지만, 사실 “샤리아”는 코란 45장 18절에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너희에게 바른 길을 마련하니 이를 따르라thumma ja'alnaka ala shari'a min al-amr fa attabi'uha.” 이 구절에서 코란은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는 도덕적 행위를 규정했다. “코란은… 무슬림 공동체의 삶을 위한 처방을 담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현재 이슬람법인 샤리아로 알려진 바를 구성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같은 규정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주축)을 일컫는데, 이를테면 (1) 알라 신께 복종하고, (2) 기도하며, (3) 빈민을 구제하고, (4) 라마단에는 금식하며, (5)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샤리아를 다르게 쓴 사례는 모두 코란에서 벗어난 해석뿐이었다. 서기 700년대 초, 무함마드가 타계하고 난 후 약 100년이 지나자 무슬림 서기관(정통 율법사)들은 수니파 샤리아 학파madhahib(마다힙)를 율법학파의 라이벌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수니파 이슬람교에는 하나피Hannafi, 샤피Shafi'i, 말리키Maliki 및 한발리Hanbali 네 학파가 있었다. 그들의 사명은 코란 및 무함마드 정경 해석에 근거한 법규범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고전 샤리아에서 이런 규정은 제의적 율례(이바다트)와 민사법(무아말라트) 및 물리적 처벌을 규정하는 형사법(후두드)으로 양분된다. 칼리프는 자신의 권한으로— 코란에는 기록되지 않은 권한인데, 애당초 코란은 정부의 특정 시스템을 언급하진 않았다— 샤리아를 보장할 것 같기도 했으나, 종교와는 무관한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항상 포스트 에벤툼١ 식으로, 샤리아를 들먹이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고전 칼리프 시대에는 정치(시야사)와 이슬람법(샤리아)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요제프 샤흐트는 『이슬람법 입문』에서 그 무슬림 통치자는 “신성한 율법을 적용하고 완성하는 척했으나… 실은 법관(카디)— 샤리아를 담당한 판관— 의 통제에서 벗어나 치안과 과세, 사법을 규정한, 독립적인 법률의 규제를 받았다.” 후자는 정치(시야사)로 지정된 영역이므로, 샤흐트에 따르면, 결과는 “이중 행정부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샤리아에 토대를 둔… 종교적인 행정부와— 때때로— 통치 규정의 자의성에 근거하여 정치당국이 실시한 세속적인 것이 공존했다”는 말이다.
옥스퍼드에 기반을 둔 무슬림 율법 권위자에는 이란 출신인 하미드 에나야트도 꼽힌다. 그가 집필한 『근대 이슬람교의 정치사상』에서 발췌한 두 진술도 인용할 가치가 있다. 첫째, 그는 샤리아 독트린을 거론하면서 “통합된 규정을 담고, 모든 무슬림이 기탄없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통일 이슬람제도 같은 것은 없다” 고 밝힌 후, 고전 샤리아는 “엄격한 법규의 모양을 띠지 않는다” 고 덧붙였다. 그리고 둘째, 이슬람 역사에서 샤리아가 차지하는 입지를 두고는 “통합된 제도로 시행된 적은 없으며 대부분 조항이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 고 했다. 그러므로 통합적인 제도로 시행될, 엄격한 규정의 모양새를 한 획일적인 “샤리아”를 이슬람주의자들이 강요하려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한 샤리아가 과거에 존재했다는 주장은 꾸며낸 전통의 전형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슬람법 전통을 꾸며내면서 앞서 살펴본 사실을 재해석했다. 이집트 법률기관의 전 최고 법관이자 『샤리아의 기원』의 저자인 무함마드 사이드 알아슈마위는 『정치적 이슬람교』에서 이슬람주의의 샤리아가 규정된 이슬람교는 전통 이슬람 신조(특히 고전 샤리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고전 지하드가 그랬던 것처럼 샤리아에도 똑같이 적용하여, 아주 딴판인 현대적 관행을 지어내고는 그와 고대 전통의 연속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이슬람의 사법제도를 꾸며내면서 칼리프 집권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샤리아를 국가의 법으로 둔갑시켰다. 서양 논객들은 이 같은 정치적 샤리아를 “헌법주의” 로 분류하나 이는 아주 틀린 발상이다. 대신 우리는 이처럼 꾸며낸 전통을 신성한 종교가 정치에 귀환한, 그래서 근대성의 위기를 낳은 현상 내에 두어야 하는데, 이는 세속화가 지속적인 “세상의 각성” 이라는, 베버의 가정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샤리아가 새로운 탈을 쓰고 주요 입지를 차지하게 된 세속화의 탈피를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이슬람식 헌법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이슬람교의 샤리아화가 일부 포함되는 이슬람식 정치적 부흥은 이슬람교적 원리주의의 일면에 불과하며,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를 둘러싼 주요 쟁점이기도 하다.
무슬림 율법학자인 압둘라히 안나임은 “코란은 헌법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다” 고 밝혔다. 즉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슬람식 헌법도 꾸며낸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불가침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코란을 탈피한 사상의 일례로 보아야 옳다. 안나임은 민주적 헌법주의는 “샤리아의 지배 아래 성취할 수 있다” 고 주장하며, “샤리아의 공법을 버리거나 헌법주의를 무시해야 한다는, 두 가지 대안이 현대 무슬림에게 열려 있을 뿐” 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서는 정치의 샤리아화를 위한 이슬람주의의 프로그램을 비롯해, 그것이 어제와 오늘의 샤리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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