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세계에서의 샤리아 정치
알카라다위가 “절대적인 신의 경전” 을 언급했지만, 사실 “샤리아”는 코란 45장 18절에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너희에게 바른 길을 마련하니 이를 따르라thumma ja'alnaka ala shari'a min al-amr fa attabi'uha.” 이 구절에서 코란은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는 도덕적 행위를 규정했다. “코란은… 무슬림 공동체의 삶을 위한 처방을 담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현재 이슬람법인 샤리아로 알려진 바를 구성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같은 규정은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주축)을 일컫는데, 이를테면 (1) 알라 신께 복종하고, (2) 기도하며, (3) 빈민을 구제하고, (4) 라마단에는 금식하며, (5)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샤리아를 다르게 쓴 사례는 모두 코란에서 벗어난 해석뿐이었다. 서기 700년대 초, 무함마드가 타계하고 난 후 약 100년이 지나자 무슬림 서기관(정통 율법사)들은 수니파 샤리아 학파madhahib(마다힙)를 율법학파의 라이벌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수니파 이슬람교에는 하나피Hannafi, 샤피Shafi'i, 말리키Maliki 및 한발리Hanbali 네 학파가 있었다. 그들의 사명은 코란 및 무함마드 정경 해석에 근거한 법규범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고전 샤리아에서 이런 규정은 제의적 율례(이바다트)와 민사법(무아말라트) 및 물리적 처벌을 규정하는 형사법(후두드)으로 양분된다. 칼리프는 자신의 권한으로— 코란에는 기록되지 않은 권한인데, 애당초 코란은 정부의 특정 시스템을 언급하진 않았다— 샤리아를 보장할 것 같기도 했으나, 종교와는 무관한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항상 포스트 에벤툼١ 식으로, 샤리아를 들먹이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고전 칼리프 시대에는 정치(시야사)와 이슬람법(샤리아)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요제프 샤흐트는 『이슬람법 입문』에서 그 무슬림 통치자는 “신성한 율법을 적용하고 완성하는 척했으나… 실은 법관(카디)— 샤리아를 담당한 판관— 의 통제에서 벗어나 치안과 과세, 사법을 규정한, 독립적인 법률의 규제를 받았다.” 후자는 정치(시야사)로 지정된 영역이므로, 샤흐트에 따르면, 결과는 “이중 행정부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샤리아에 토대를 둔… 종교적인 행정부와— 때때로— 통치 규정의 자의성에 근거하여 정치당국이 실시한 세속적인 것이 공존했다”는 말이다.
옥스퍼드에 기반을 둔 무슬림 율법 권위자에는 이란 출신인 하미드 에나야트도 꼽힌다. 그가 집필한 『근대 이슬람교의 정치사상』에서 발췌한 두 진술도 인용할 가치가 있다. 첫째, 그는 샤리아 독트린을 거론하면서 “통합된 규정을 담고, 모든 무슬림이 기탄없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통일 이슬람제도 같은 것은 없다” 고 밝힌 후, 고전 샤리아는 “엄격한 법규의 모양을 띠지 않는다” 고 덧붙였다. 그리고 둘째, 이슬람 역사에서 샤리아가 차지하는 입지를 두고는 “통합된 제도로 시행된 적은 없으며 대부분 조항이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 고 했다. 그러므로 통합적인 제도로 시행될, 엄격한 규정의 모양새를 한 획일적인 “샤리아”를 이슬람주의자들이 강요하려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한 샤리아가 과거에 존재했다는 주장은 꾸며낸 전통의 전형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슬람법 전통을 꾸며내면서 앞서 살펴본 사실을 재해석했다. 이집트 법률기관의 전 최고 법관이자 『샤리아의 기원』의 저자인 무함마드 사이드 알아슈마위는 『정치적 이슬람교』에서 이슬람주의의 샤리아가 규정된 이슬람교는 전통 이슬람 신조(특히 고전 샤리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고전 지하드가 그랬던 것처럼 샤리아에도 똑같이 적용하여, 아주 딴판인 현대적 관행을 지어내고는 그와 고대 전통의 연속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이슬람의 사법제도를 꾸며내면서 칼리프 집권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샤리아를 국가의 법으로 둔갑시켰다. 서양 논객들은 이 같은 정치적 샤리아를 “헌법주의” 로 분류하나 이는 아주 틀린 발상이다. 대신 우리는 이처럼 꾸며낸 전통을 신성한 종교가 정치에 귀환한, 그래서 근대성의 위기를 낳은 현상 내에 두어야 하는데, 이는 세속화가 지속적인 “세상의 각성” 이라는, 베버의 가정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샤리아가 새로운 탈을 쓰고 주요 입지를 차지하게 된 세속화의 탈피를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이슬람식 헌법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이슬람교의 샤리아화가 일부 포함되는 이슬람식 정치적 부흥은 이슬람교적 원리주의의 일면에 불과하며,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를 둘러싼 주요 쟁점이기도 하다.
무슬림 율법학자인 압둘라히 안나임은 “코란은 헌법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다” 고 밝혔다. 즉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슬람식 헌법도 꾸며낸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불가침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코란을 탈피한 사상의 일례로 보아야 옳다. 안나임은 민주적 헌법주의는 “샤리아의 지배 아래 성취할 수 있다” 고 주장하며, “샤리아의 공법을 버리거나 헌법주의를 무시해야 한다는, 두 가지 대안이 현대 무슬림에게 열려 있을 뿐” 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서는 정치의 샤리아화를 위한 이슬람주의의 프로그램을 비롯해, 그것이 어제와 오늘의 샤리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