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트리아인들은 크리슈나를 숭배했다

 

 

 

 

 

메난드로스가 파탈리푸트라에 건립한 사리탑은 기원전 155년 스스로 박트리아의 왕위에 오르자마자 단행한 마가다 왕국 2차 침공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숭가 왕조는 데칸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비디사Vidisa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이 지역의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에는, 기원전 100년경 인더스 강을 지배했던 박트리아 왕 안티알키다스가 보낸 그리스 특사의 명령으로 새겨진, 크리슈나를 기리는 비문이 남아 있다. 당시 박트리아인들은 크리슈나를 숭배했다. 메난드로스도 갠지스 계곡에 불교 기념비를 건립했다. 당시에는 기념비 건립이 유행이었으므로 이 사실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기념비에는 “왕 중 왕이자 위대한 구원자인, 정의로운 천하 무적 메난드로스 대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거창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범한 불교도가 되고자 했다. 아들에게 양위한 후 메난드로스는 수도원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다.
샤카족이 인도로 유입되면서 박트리아의 국력도 쇠했다. 흑해 주변에 살던 그리스인은 샤카족을 스키타이족으로 여겼다. 샤카족에 이어 박트리아를 차지한 건 대월지족이었다. 단숨에 힌두쿠시 산맥까지 세를 뻗친 대월지족은 비옥한 옥서스 강 유역에 정착한다. 그들의 본거지였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목축을 하지 않았던 민족이기에 유목을 하는 대신 관개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농부와 무역상으로서의 삶에 크게 만족했다. 쿠샨 왕조가 나타나 박트리아인과 샤카족을 인도 북서쪽으로 몰아낼 때까지 말이다. 78년 쿠샨 왕조의 3대 왕 카니슈카가 즉위하기 전의 쿠샨 왕조에 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갑론을박만 존재할 뿐, 명백히 밝혀진 바는 없다. 카니슈카는 아소카 왕과 같은 열렬한 불교도였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쿠샨 왕조의 영토 내에 대승불교를 전파했다. 카니슈카의 영향력이 갠지스 강 유역의 파탈리푸트라까지 이르렀으며 인더스 유역에도 미쳤던 것으로 보이나, 인도 아대륙의 얼마만큼이 카니슈카의 영토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카니슈카는 파
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주요 산길인 카이버 고개를 통해 들어오는 중국의 실크로드 개척의 부산물을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이 문물은 인더스 계곡까지 전해졌으며 쿠샨 왕조의 상인들은 페르시아 만의 초입부분까지 진출했다.
위대한 카니슈카도 쓰라린 패배를 맛본 적이 있다. 공주에게 청혼한 쿠샨 왕조의 무엄함을 엄히 다스리고자 출병한 중국의 장수 반초班超에 의해서였다. 그럴듯한 명분 뒤에는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은 중국의 동맹국들을 위협하는 쿠샨 왕조의 행보에 훈수를 두고자 하는 중국의 속셈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투루판의 오아시스 지역의 도시 쿠추Kuchu에 본거지를 차린 반초는 쿠샨과 90일간의 전투를 벌인 끝에 그들을 박트리아의 영토 어딘가에서 격퇴했다. 반초의 부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카스피 해까지 진격했다. 중국 군대가 자국 역사상 가장 먼 서쪽,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까지 진출했던 사건이다. 하지만 중국의 이러한 일회적인 개입이 쿠샨의 흥망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쿠샨은 인도 아대륙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쿠샨 왕조는 아대륙의 문물과 고유문화를 마우리아 왕조만큼이나 반감 없이 절충했다. 쿠샨은 아대륙의 다양한 종교에 모두 관심을 보였다. 동전에 새겨진 신들의 형상에서는 훨씬 더 광범위한 영적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쿠샨 왕조가 주조한 동전에는 서아시아와 유럽의 신들뿐만 아니라 남아시아의 신들까지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카니슈카의 재위기간 중에 제4회 불전이 추진되었다. 이 불전에서 18개의 불교 종파들이 만나 교리의 차이에 관해 논의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