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마스덴 하틀리는 그림에 숫자를 적어 넣었다

마스덴 하틀리는 유럽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고유한 전통미술도 보존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의 클리브랜드에서 회화를 수학했고, 뉴욕으로 와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며, 오키프와 마찬가지로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로부터 회화의 기교를 배웠다.
체이스는 유럽을 두루 돌아보고 모더니즘을 받아들인 예술가였다.

하틀리는 1912년부터 유럽을 자주 왕래했다.
베를린으로 가서 칸딘스키와 마르크를 직접 만나 청기사에 관해 듣기도 하고 청기사 그룹 예술가들의 표현주의 그림들도 직접 관람했다.
그는 1914년에 독일 국기를 주제로 연속적으로 그렸는데, 입체주의의 영향이 그의 그림에서 나타났으며, 들로네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는 베를린에서 독일의 공격적인 정신을 발견하고 <독일 장교의 초상>을 그렸다.
그 그림에 그는 숫자를 적어 넣었다. 1940년대에 그는 색을 강렬하게 사용하면서 자연을 주제로 그렸지만 입체주의 방법은 여전했다.
그가 1943년에 그린 <장미>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스티글리츠는 그의 개인전을 1909년에 열어주었다.
그가 유럽에서 2년 동안 수학할 수 있었던 것도 스티글리츠의 경제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하틀리는 “미국에서 미술은 특허 받은 약 혹은 전기청소기와도 같다. 9천만 명이 모두 그것에 관해 알 때만 성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나라가 아니라 대륙과도 같아서 폭넓게 유명해진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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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항의한 예술가들

1950년 4월 어느 날 바넷 뉴먼이 스프링스로 전화를 걸어 폴록을 바꾸어달라고 리에게 말하자 리는 폴록이 지금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므로 바꾸어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뉴먼은 아주 중요한 사항을 전달해야 하니까 가서 불러오라고 리에게 말하면서 지금 자기는 고틀립의 집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며 독촉했다.
그때 브루클린에 있는 고틀립의 아파트에는 뉴먼 외에도 마더웰, 로버트 굿나우, 로드코, 라인하트, 그리고 모마의 관장 알프레드 바 외에 다른 작가들도 있었다.
데보라 솔로몬(Deborah Solomon)이 1987년에 쓴 『잭슨 폴록의 일대기』에는 알프레드 바가 그곳에 있었다고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때 바가 실제로 참석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예술가들이 고틀립의 아파트에 모인 것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책임자가 그해 12월에 개최하기로 계획하고 있는 기획전 ‘오늘의 미국회화 1950년’에서 추상을 배제하려는 데에 반감을 가지고 그것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단체로 전람회를 보이코트하려고 결정했으며, 폴록의 이름도 그 명단에 포함시키려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라이프』를 통해 이미 5백만 독자들에게 추상화가로 알려진 폴록의 이름은 그들의 취지를 더욱 빛나게 해주리라는 것을 뉴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잭슨이 참여한다면 언론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고 존 리틀도 말했다.

리는 헛간으로 가다가 생각해보니 은근히 화가 났다.
뉴먼의 소행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난 예술가가 아니란 말인가.
나도 30년대에 많은 시위에 피켓을 들고 참여한 적이 있고, 엄연히 추상화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터에 뉴먼이 나의 서명 여부를 묻지 않은 것은 보통 괘씸한 처사가 아니다.
그곳에 모인 작자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리는 크래스너라는 이름보다는 폴록의 아내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다.
언론들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으며, 그녀 또한 폴록을 내조하느라고 자신의 작업을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폴록은 전화로 뉴먼에게 자신은 지금 그곳으로 갈 수 없지만 자신도 그들의 취지에 동조하므로 전보를 쳐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화가들은 18인의 이름으로 메트로폴리탄의 책임자 프랜시스 헨리 테일러를 비난하면서 추상을 포함시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의 편지는 5월 22일자 『뉴욕 타임즈』에 ‘18인의 화가가 메트로폴리탄을 보이코트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다음날 『헤럴드 트리뷴 Herald Tribune』은 그들의 시위를 비난하면서 ‘성급한 18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라이프』는 6개월 후에야 이 사실을 보도했다.
『라이프』의 편집자 도로시 사이벌링은 뉴먼에게 18인의 예술가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도하겠다고 하면서 메트로폴로탄 뮤지엄 앞 층계에 예술가들이 각자 자신의 그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찍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고틀립은 그렇게 되면 그들이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반대한다면서 사진은 딴 곳에서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나의 거부의사에 놀라워했다. 아무도 『라이프』의 제안을 감히 거절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고틀립은 나중에 말했다.

『라이프』의 편집자 사이벌링은 18인의 예술가들에게 웨스트 44번가에 있는 스튜디오로 오라고 해서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뉴먼이 사진사 니나 린(Nina Leen)에게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린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작가들은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면서 각자 편한 자세들을 취했는데 로드코는 자기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고, 뒤에 선 드 쿠닝은 금발의 카프카처럼 보였다.
폴록은 『라이프』에서 두 번째 사진을 찍는 것을 즐기는 기분이었는지 가운데 앉아 담배를 들고 서부영화에 나오는 배우 게리 쿠퍼와도 같은 자세를 취했는데 핸섬해 보였다.
폴록의 형수 마리는 나중에 이 사진을 보면서 “오로지 잭슨만이 보였다.
그는 우주 가운데 있었다”라고 말했다.
『라이프』지가 보도한 사진에는 폴록 외에도 테오도로스 스타모스, 막스 에른스트의 아들 지미 에른스트, 뉴먼, 제임스 브룩스, 로드코, 리처드 푸세트-다트, 바지오츠, 스틸, 마더웰, 브래들리 워커 탐린, 드 쿠닝, 고틀립, 라인하트, 그리고 헤다 스턴의 모습이 보였다.
이 기사는 1951년 1월에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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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캐딜락을 탄 폴록

1949년 11월 28일 파슨즈 화랑에서 열린 폴록의 전람회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것은 『라이프』의 보도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낯선 관람자들은 정장을 하고 있었고 유명 메이커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화랑에 온 것이 아니라 좀 더 떨어져 있는 카네기 뮤직홀에 온 것으로 착각한 것처럼 보였다.
드 쿠닝과 함께 온 밀턴 레스닉은 “내가 그곳에 들어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서로 악수를 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의 경우 전람회 오프닝 파티에 가면 아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날은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빌(드 쿠닝)에게 ‘왜들 악수를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빌은 ‘둘러봐. 대단한 사람들이 와 있어. 잭슨이 결국 얼음을 깨뜨린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해주었다.

대단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술품 수집가이며 부자 로이 누버거가 샘 쿠츠 곁에 있었고, 또 다른 수집가 버튼 트레매인, 모마의 책임자 에드가 카우프먼,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ar』의 책임자 알렉세이 브로도비치, 그밖에도 여러 명이 더 있었다.
무엇보다도 알프레드 바가 와 있는 걸 보면 폴록이 “얼음을 깨뜨린 것”이 확실했다.
몇 달 전만 해도 폴록의 그림을 의심했는데 바는 『라이프』를 본 후 “잭슨은 이제 현대미술 가족나무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폴록은 재킷에 타이를 매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서 사람들 가운데 주인공으로 서 있었다.
“잭슨은 마치 사업가인 양 행동했다”고 루벤 카디시는 기억하면서 “예술품 수집가들이 들어오자 그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리는 전시장 입구에서 『라이프』에 실린 폴록에 관한 기사내용을 프린트한 사본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었다.

11월 26일 『타임즈』에서 알렉산더 엘리엇은 “잭슨의 그림이 근래 미국미술에서 가장 활기 있는 힘이라면 몇몇 평론가들이 언급한 대로 미술은 나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적었는데 워낙 많은 평론가들이 폴록을 칭찬했으므로 그의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전람회는 12월 10일까지 계속되었고 과거 어느 전람회에서보다 그림이 많이 팔려서 폴록은 풍년의 해를 맞이했다.
어떤 사람은 “『라이프』에 소개된 화가의 그림을 한 점 사는 데 누가 수백 달러를 지불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존 록펠러의 부인 넬슨(Nelson)도 알프레드 바의 안내로 작은 그림 한 점을 구입했다.
전람회에 출품한 스물일곱 점 가운데 열여덟 점이 팔렸다.

토니 스미스가 스프링스로 폴록을 방문했을 때 폴록이 『라이프』에 난 자신에 관한 기사를 읽었느냐고 물었고 토니가 읽었다고 대답하자 폴록은 자신이 좋은 차를 몰고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잭슨, 네가 가지고 있는 차도 좋은 차야. 웬 빌어먹을 차 타령이야?”고 토니가 말했다.
“글쎄, 캐딜락이 어떨런지”라고 폴록이 말했다.
토니는 그의 말을 반쯤 농담으로 들었는데 얼마 안 되어서 폴록은 1941년 모델 중고 캐딜락을 400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그것은 컨버터블(뚜껑이 열리는)이었다.
토니는 “잭슨은 여러 면에서 직선적인 미국 소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그도 바랐다”고 말했다.
여러분은 토니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폴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그 이상을 바랐다.

『뉴욕 타임즈』는 “칸딘스키, 폴록 그리고 다른 예술가들의 후기 그림들은 …”이라고 적으면서 폴록을 칸딘스키와 같은 수준에 놓았다.
이제 평론가들 가운데 그의 그림을 ‘구운 마카로니’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라고 빈정거리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폴록과 리는 3주 동안 머물 예정으로 뉴욕에 갔다가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스프링스에서 떨며 지낼 필요가 없다고 리가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소리오가 무료로 아파트를 제공했으므로 따뜻한 겨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 폴록은 여러 곳에서 초대를 받았다.
8번가에 있는 휘트니 미술관에서 그의 <Number 14, 1949>를 소개하면서 초대했고, 한 달 후 모마에서도 <Number 1, 1948>을 소개하면서 초대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의 초대를 받았는데 리가 오소리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제 폴록은 『라이프』가 언급한 대로 “미국미술의 빛나는 새 현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그린버그가 말한 “그의 세대의 가장 훌륭한 화가” 그 이상이었다.

어느 날 폴록은 드 쿠닝과 레스닉에게 자신의 전람회에 소개된 그림들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는데 드 쿠닝은 아무 말이 없었고, 레스닉이 그의 그림 <거미집 밖 Out of the Web>(96)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왜 마소나잇(Masonite)에 캔버스를 붙여서 갈색 마소나잇이 그림의 중앙에 드러나도록 했나요?”라고 폴록에게 물었다.
폴록이 곧 “커다란 형태 때문”이었다고 말하자 드 쿠닝과 레스닉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폴록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래, 커다란 형태요”라고 거듭 말했다.
레스닉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 말은 커다란 피카소의 것 말이지?”라고 말하니까 폴록은 “그래”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드 쿠닝과 레스닉 두 사람은 폭소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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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죽음의 그림자로 얼룩진 뭉크의 생애


에드바르트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북쪽 헤드마크 지방 뢰텐의 엥겔하우겐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뭉크는 ‘승려’란 뜻이며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성직자였습니다.
뭉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육군 군위관으로 내성적인 사람이었으며 오슬로 의무담당관이 되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자녀를 스무 명이나 둔 것으로 보아 육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신체적 건강함을 유산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명랑하고 사교적이었던 어머니는 뭉크가 다섯 살 때 서른 살의 나이로 다섯 자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서를 즐겨 하고 동물을 좋아하며 종교적 성향이 강한 아버지는 스무 살 연하의 아내가 사망하자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는 고립된 생활을 자초했고 종교에 깊이 빠져든 후에는 빈민가를 돌보는 의사로 봉사했으므로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때로 자식들을 미친듯이 꾸짖는 아버지는 어린 뭉크에게 삶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훗날 뭉크는 아버지가 거의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냈다고 술회했습니다.

뭉크가 14살 때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던 누나 소피에가 어머니와 같은 병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뭉크 자신도 류머티즘. 열병, 불면증 등으로 시달렸지만 동생들과는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겪은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자신의 육체적 허약함이 그를 불안하게 했고 아버지의 정신적 방황과 가난으로 인해 삶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이런 성장환경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미학에 흠뻑 빠지게 했습니다.
죽음은 그의 인생에 반려자가 되어 어둡고 소름끼치는 그림들로 나타났습니다.
뭉크가 여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죽음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인간의 보편적인 것들로 고양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뭉크는 22살 때 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을 한 누나 소피에의 모습을 <병든 아이>란 제목으로 그려렸습니다.
어머니가 타계한 후 이모가 집안살림을 도와주었는데 이 작품에서 이모는 누나의 침대 옆에 앉아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뭉크는 26살 때 누나가 창백한 얼굴로 안락의자에 앉아 머리 뒤 베개에 의지한 채 창문으로부터 쏟아지는 햇빛을 받는 장면을 <봄>이란 제목으로 그렸습니다.
봄의 부드러운 햇살이 방안 깊숙히 들어오며 상쾌한 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방안의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를 창문 밖으로 내모는 장면입니다.
탁자에는 꽃병과 약병이 놓여 있어 투병중임을 말해 줍니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병든 아이>란 제목으로 여러 점 누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보면 누나의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마음 속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뭉크가 서른두 살 때 그린 <임종>과 <병실에서의 죽음>은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죽음의 미학을 표현한 작품들입니다.
그 밖에도 <죽은 엄마와 아이>, <죽음과 소녀> 등도 죽음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이 시각적으로 나타난 작품들입니다.

뭉크는 정신장애를 일으켰고 종종 피해망상증에 시달렸습니다.
여자로부터 쫓긴다는 생각에 시달렸고 친구 중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늘 과음했고 그로 인해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1907년 독일에서 9개월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고 발트해 연안의 한 마을에서 휴양을 취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코펜하겐으로 갔는데 개인전을 열기 위해서였고, 그는 코펜하겐 작가들과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때문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1908년 10월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다니엘 야콥슨 박사의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여 전기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8개월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전기치료를 받는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했고 야콥슨 박사와 자화상을 실재 크기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퇴원 후에는 금주가로 변신하여 건강을 돌보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전시가 유럽 각지와 미국 등지에서 개최되었으며 노르웨이 최고의 화가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931년 어머니와 다름 없던 이모 카렌이 사망했고 뭉크의 나이 예순여덟이었지만 다시금 피해망상증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뭉크는 적의를 갖고 주위 사람들을 대했으며 길을 걸을 때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늘 불안해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집에만 틀어박혀 편지로만 용무를 보는 등 스스로 고독한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뭉크와 스트린드베르크를 연구한 사람은 두 사람의 인생이 매우 유사함을 발견합니다.
뭉크가 스트린드베르크보다 14살 어렸지만 두 사람의 인생 항로는 기묘하게 일치합니다.
두 사람 모두 모국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랑하며 외로운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평생 화목한 가정을 꾸미지 못했고 여성에 대해 ‘흡혈귀’관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은 중년에 이르러 피해망상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지독한 고독과 폐쇄적인 생활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스트린드베르크는 문패는 물론 초인종도 달지 않고 방문자를 집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뭉크는 정도가 더욱 심해 그가 사망한 후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지나다 “뭉크는 부재중!”이라고 쓴 자필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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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조지아 오키프는 단순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조지아 오키프는 1905∼1906년 시카고의 미술학교에 재학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뉴욕으로 왔다.
그녀는 1907∼1908년 맨해튼 57번가에 있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로부터 수학하면서 정물화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291화랑에 자주 가서 유럽 대가들의 작품을 관람하고 로댕의 조각과 마티스의 그림에 감동했다.
그녀는 1912년 텍사스 주의 아마릴로에 있는 공립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1915년 가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이 시기 그녀는 단순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목탄을 주로 사용했다.
그녀는 말했다.

“이때가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시기였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내 그림을 본 사람도 없었고, 완전히 혼자였다.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그리면서 스스로 만족해했다.”

오키프는 뉴욕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그림을 보내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친구는 그녀의 그림을 291화랑으로 가지고 가 스티글리츠에게 보여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것을 보자 “과연 여자 예술가가 나왔구나!” 하고 감탄하며 오키프의 드로잉을 새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회에 포함시켰다.
이 사실을 안 오키프는 친구에게 화를 내면서 291화랑으로 가서 스티글리츠를 만나 드로잉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 일이 있은 후 오키프는 유부남 스티글리츠와 사랑에 빠졌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보다 24살 연상이었다.

291화랑에 전속된 예술가 아서 도브는 오키프의 드로잉을 본 후 “이 여자는 우리 모두가 하다 실패한 것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드로잉에서 유럽 예술가들의 영향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1917년에 오키프를 위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듬해 건강이 좋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에도 스티글리츠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어 그녀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녀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주로 꽃을 가까이서 본 모습으로 확대해서 그렸는데, 이런 방법은 1920년대의 사진작가들이 부분을 확대해서 사진으로 찍은 미학과 평행을 이루었다.
스티글리츠는 아내와 이혼하고 오키프와 1924년 11월에 재혼했다.
오키프는 “여왕벌”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여자 예술가들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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