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조지아 오키프는 단순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조지아 오키프는 1905∼1906년 시카고의 미술학교에 재학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뉴욕으로 왔다.
그녀는 1907∼1908년 맨해튼 57번가에 있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로부터 수학하면서 정물화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291화랑에 자주 가서 유럽 대가들의 작품을 관람하고 로댕의 조각과 마티스의 그림에 감동했다.
그녀는 1912년 텍사스 주의 아마릴로에 있는 공립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1915년 가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이 시기 그녀는 단순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목탄을 주로 사용했다.
그녀는 말했다.

“이때가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시기였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내 그림을 본 사람도 없었고, 완전히 혼자였다.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그리면서 스스로 만족해했다.”

오키프는 뉴욕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그림을 보내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친구는 그녀의 그림을 291화랑으로 가지고 가 스티글리츠에게 보여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것을 보자 “과연 여자 예술가가 나왔구나!” 하고 감탄하며 오키프의 드로잉을 새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회에 포함시켰다.
이 사실을 안 오키프는 친구에게 화를 내면서 291화랑으로 가서 스티글리츠를 만나 드로잉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 일이 있은 후 오키프는 유부남 스티글리츠와 사랑에 빠졌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보다 24살 연상이었다.

291화랑에 전속된 예술가 아서 도브는 오키프의 드로잉을 본 후 “이 여자는 우리 모두가 하다 실패한 것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드로잉에서 유럽 예술가들의 영향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1917년에 오키프를 위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듬해 건강이 좋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에도 스티글리츠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어 그녀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녀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주로 꽃을 가까이서 본 모습으로 확대해서 그렸는데, 이런 방법은 1920년대의 사진작가들이 부분을 확대해서 사진으로 찍은 미학과 평행을 이루었다.
스티글리츠는 아내와 이혼하고 오키프와 1924년 11월에 재혼했다.
오키프는 “여왕벌”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여자 예술가들 가운데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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