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화단의 왕자 드 쿠닝
드 쿠닝은 폴록과는 달리 시다 근처 이스트 10번가 그리니치 빌리지 중심에 살면서 젊은 예술가들을 늘 만나고 있었다.
그는 부르주아처럼 떨어져 살던 폴록이나 마더웰과는 달리, 또 수도원에서 금욕주의 생활이라도 하듯 했던 스틸과는 달리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늘 유머를 잃지 않았다.
전람회장에서 그는 존 록펠러 부인에게 “당신이 백만 달러처럼 보입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폴록이 그린버그가 창조한 예술가라면 드 쿠닝은 동료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상에 오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 단계씩 올라가고 있었고, 폴록은 뒤샹이 피에르 마티스에게 말했듯이 “약탈하기 위해” 올라갔던 것이다.
젊은 작가들은 드 쿠닝의 사변적이며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차근차근 말하는 태도를 좋아했다.
드 쿠닝은 전통주의의 대열에 섰다.
즉 그는 세잔느, 마티스, 피카소, 호프만, 마타, 그리고 고키의 뒤에 서려고 했다.
“만일 당신이 서양미술의 주류 전체를 선택하려고 한다면 폴록에게 대적하고 드 쿠닝의 편에 서야 한다”고 어빙 샌들러는 말했다.
젊은 작가들이 드 쿠닝을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온화한 성품에 있었다.
“그가 저녁식사에 초대받아 오게 되면 당신이 엘 그레코, 루벤스, 렘브란트의 그림을 걸어두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게 아주 작은 수채화라 하더라도 그는 당신의 그림을 먼저 바라보면서 아주 친절한 말투로 ‘당신이 그렸나요?’라고 묻고는 자신의 소감을 말해주었다”고 헴스테드가 회상했다.
존 마이어스는 “오로지 한 그룹이 있었다.
그것은 드 쿠닝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 폴록은 세계와 대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시다의 바깥 코너에서 폴록과 드 쿠닝이 서로 술병을 주고받으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콘래드 마카-랠리에 의하면 드 쿠닝이 폴록의 등을 두드리면서 “잭슨, 너는 미국 최고의 화가야!”라고 했고 폴록은 “아냐. 빌, 네가 최고야!”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 말을 반복했는데 마카-랠리에게는 “두 사람이 게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폴록은 주량이 찼으므로 테이블에 엎어지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날아갔다.
얼마 후 폴록이 시다에 다시 나타났다.
드 쿠닝이 딴 여자에게서 딸을 낳은 것을 폴록이 조롱하자 드 쿠닝의 주먹이 폴록의 입을 쳐서 피가 쏟아지게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반격을 가하라며 폴록을 응원했다.
그린버그는 수 미셸이라는 여자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화해는 사실이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
드 쿠닝은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으며 잭슨은 자신이 싫어할 사람들을 찾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문제가 있다”고 적었다.
드 쿠닝이 뉴욕 화단에서 왕자처럼 행세하고 있을 때 폴록은 소외감을 느끼면서 더욱 술을 마셨다.
그는 하루에 위스키를 1리터씩이나 마셔댔다.
1953년 3월 16일 재니스 화랑에서는 드 쿠닝의 개인전이 열렸다.
폴록은 그곳에 가서 커다란 그림 다섯 점과 몇 점의 드로잉을 보았는데 모두 여인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과격했다.
이그러진 이미지들은 성의 상징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 같기도 하고, 메두사(Medusa) 같기도 했다.
일레인의 말로는 드 쿠닝은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드 쿠닝의 어머니 코넬리아 드 쿠닝은 철과 같은 의지를 가졌던 여인으로 “그녀는 벽돌로 쌓은 벽을 뚫고 걸어갈 만했다”고 며느리가 말했다.
폴록은 그의 그림에서 동력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여인들은 온전히 그의 주제였고, 그의 이그러진 영상들이었으며, 성에 대한 그의 광풍과도 같은 인식이기도 했다.
드 쿠닝이 자신의 감성을 노출시키면서 확신과 힘을 시각적으로 전개했음을 폴록은 느낄 수 있었다.
폴록은 누구보다도 드 쿠닝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토마스 헤스가 칭찬하기 전에, 로젠버그가 “천재의 행위”라고 선언하기 전에, 모마가 그의 그림을 한 점 구입하면서 칭찬하기 전에, 평론가들이 “뉴욕파가 최종적으로 나아갈 길”이라고 알리기 전에, 그리고 『타임즈』가 그를 인정하기 전에 이미 폴록은 그것들이 대작인 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