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뉴욕 친구들

 

뒤샹은 1915년 6월 15일 정오 갑판에서 멀리 우뚝 솟은 자유의 여신상을 보았다.
뉴욕만 어귀 리버티 아일랜드에 세워진 그것은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톨디가 제작한 것으로 프랑스 정부가 미국독립 1백주년을 기념하여 1886년에 미국 정부에 기증한 조각이다.
바톨디는 2천 년 전 그리스 전성기 페리클레스시대 사람들에게나 낯익을 조각을 통해 고전주의 조각이 여전히 유용하며, 특히 그것이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에 적당하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고층건물의 높이만큼이나 커서 아무도 그것을 하나의 조각품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럽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입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여신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수평선 위로 여신의 머리가 보이면 뉴욕에 도착한 것이다.
월터 패츠가 항구에서 뒤샹을 반가이 맞아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뒤샹은 그곳에서 며칠을 묵은 후 맨해튼의 커다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는데, 아파트의 주인 월터 아렌스버그는 그때 코네티컷 주 팜프렛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아모리 쇼는 아렌스버그의 인생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이 전시회가 개최될 때 그는 보스턴에 있어서 하마터면 전시회를 보지 못할 뻔했는데 폐막되기 하루 전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와서 관람하고 곧 유럽의 모더니즘에 매료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미술품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그날은 뷔아르의 석판화 한 점만을 12달러에 구입했다.
전시회가 4월 말 보스턴을 순회하자 그는 전시회장에 자주 가서 미술품들을 눈에 익혔다.
그는 뷔아르의 석판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돌려주고 대신 세잔과 고갱의 그림을 한 점씩 구입했다.
그는 자크 비용의 그림 한 점을 81달러를 주고 또 구입했는데, 그것은 커다란 크기의 입체주의 구성을 위한 습작으로 <연기와 만발한 나무들>이었다.

아렌스버그는 1878년에 피츠버그 근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그곳에 소재한 커다란 스틸 회사 사장이었으며 회사의 주식을 부분적으로 소유한 주주이기도 했다.
아렌스버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0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로 가서 오래 머물면서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조교로 잠시 근무하다가 뉴욕으로 와 기자생활을 하면서 『이브닝 포스트』지에 이따금 미술평론을 기고했다.
그는 1907년에 메리 루이스 스티븐스와 결혼했는데 루이스는 대학 동창생의 여동생으로 아렌스버그 집안보다 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루이스는 아버지가 준 돈으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저택 새디힐을 구입했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그 집을 소유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는 찰스 엘리엇 노턴이 소유했는데 노턴은 하버드대학에 미술사학과를 만든 장본인이다.
아렌스버그는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시를 썼다.
말라르메, 베르라이느, 라호그, 그 밖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아 그들의 시를 여러 편 번역하기도 했는데, 그에게는 아쉽게도 훌륭한 시를 쓸 만한 재능은 없었다.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 무렵 1913년 그는 아모리 쇼에서 유럽의 모더니즘을 발견하고 내면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루이스와 함께 새디힐에서 뉴욕으로 올 무렵 아모리 쇼의 영향으로 뉴욕에는 상업 화랑이 다섯 개나 문을 열고 있었다.
스티글리츠 화랑이 유럽의 모더니즘을 가장 먼저 소개했지만 스티글리츠는 미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만 미술품을 팔려고 했다.
아렌스버그는 캐롤 화랑에서 주로 미술품을 구입하다가 나중에는 모던 화랑에서도 구입했다.
모던 화랑은 예술가 마리우스 데 자야가 스티글리츠 화랑을 모델로 개업한 화랑으로, 스티글리츠가 꺼려하는 지독한 상업주의 정책으로 고객들을 끌어 모았다.

아렌스버그에게 뒤샹을 소개한 사람은 패츠였다.
패츠가 아렌스버그를 만난 것은 보스턴의 아모리 쇼에서였고, 아렌스버그는 그때부터 그의 협조를 구하면서 미술품 수집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패츠는 파리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주로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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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화단의 왕자 드 쿠닝

 

드 쿠닝은 폴록과는 달리 시다 근처 이스트 10번가 그리니치 빌리지 중심에 살면서 젊은 예술가들을 늘 만나고 있었다.
그는 부르주아처럼 떨어져 살던 폴록이나 마더웰과는 달리, 또 수도원에서 금욕주의 생활이라도 하듯 했던 스틸과는 달리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늘 유머를 잃지 않았다.
전람회장에서 그는 존 록펠러 부인에게 “당신이 백만 달러처럼 보입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폴록이 그린버그가 창조한 예술가라면 드 쿠닝은 동료 예술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상에 오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 단계씩 올라가고 있었고, 폴록은 뒤샹이 피에르 마티스에게 말했듯이 “약탈하기 위해” 올라갔던 것이다.

젊은 작가들은 드 쿠닝의 사변적이며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차근차근 말하는 태도를 좋아했다.
드 쿠닝은 전통주의의 대열에 섰다.
즉 그는 세잔느, 마티스, 피카소, 호프만, 마타, 그리고 고키의 뒤에 서려고 했다.
“만일 당신이 서양미술의 주류 전체를 선택하려고 한다면 폴록에게 대적하고 드 쿠닝의 편에 서야 한다”고 어빙 샌들러는 말했다.

젊은 작가들이 드 쿠닝을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온화한 성품에 있었다.
“그가 저녁식사에 초대받아 오게 되면 당신이 엘 그레코, 루벤스, 렘브란트의 그림을 걸어두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게 아주 작은 수채화라 하더라도 그는 당신의 그림을 먼저 바라보면서 아주 친절한 말투로 ‘당신이 그렸나요?’라고 묻고는 자신의 소감을 말해주었다”고 헴스테드가 회상했다.
존 마이어스는 “오로지 한 그룹이 있었다.
그것은 드 쿠닝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 폴록은 세계와 대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시다의 바깥 코너에서 폴록과 드 쿠닝이 서로 술병을 주고받으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콘래드 마카-랠리에 의하면 드 쿠닝이 폴록의 등을 두드리면서 “잭슨, 너는 미국 최고의 화가야!”라고 했고 폴록은 “아냐. 빌, 네가 최고야!”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 말을 반복했는데 마카-랠리에게는 “두 사람이 게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폴록은 주량이 찼으므로 테이블에 엎어지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날아갔다.

얼마 후 폴록이 시다에 다시 나타났다.
드 쿠닝이 딴 여자에게서 딸을 낳은 것을 폴록이 조롱하자 드 쿠닝의 주먹이 폴록의 입을 쳐서 피가 쏟아지게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반격을 가하라며 폴록을 응원했다.
그린버그는 수 미셸이라는 여자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화해는 사실이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
드 쿠닝은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으며 잭슨은 자신이 싫어할 사람들을 찾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문제가 있다”고 적었다.
드 쿠닝이 뉴욕 화단에서 왕자처럼 행세하고 있을 때 폴록은 소외감을 느끼면서 더욱 술을 마셨다.
그는 하루에 위스키를 1리터씩이나 마셔댔다.

1953년 3월 16일 재니스 화랑에서는 드 쿠닝의 개인전이 열렸다.
폴록은 그곳에 가서 커다란 그림 다섯 점과 몇 점의 드로잉을 보았는데 모두 여인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과격했다.
이그러진 이미지들은 성의 상징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 같기도 하고, 메두사(Medusa) 같기도 했다.
일레인의 말로는 드 쿠닝은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드 쿠닝의 어머니 코넬리아 드 쿠닝은 철과 같은 의지를 가졌던 여인으로 “그녀는 벽돌로 쌓은 벽을 뚫고 걸어갈 만했다”고 며느리가 말했다.

폴록은 그의 그림에서 동력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여인들은 온전히 그의 주제였고, 그의 이그러진 영상들이었으며, 성에 대한 그의 광풍과도 같은 인식이기도 했다.
드 쿠닝이 자신의 감성을 노출시키면서 확신과 힘을 시각적으로 전개했음을 폴록은 느낄 수 있었다.
폴록은 누구보다도 드 쿠닝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토마스 헤스가 칭찬하기 전에, 로젠버그가 “천재의 행위”라고 선언하기 전에, 모마가 그의 그림을 한 점 구입하면서 칭찬하기 전에, 평론가들이 “뉴욕파가 최종적으로 나아갈 길”이라고 알리기 전에, 그리고 『타임즈』가 그를 인정하기 전에 이미 폴록은 그것들이 대작인 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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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은 로젠버그로부터 이러한 말을


1949년 로젠버그는 샘 쿠츠의 화랑에서 열렸던 전람회를 위해 글을 쓰면서 “현대의 화가는 무(無)에서 출발해야 하고 … 단지 이것만이 모방일 뿐 그외의 것들은 발명해야 한다”고 기술했다.
그때에는 그의 말이 작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1950년대 초에 뉴먼과 스틸이 과격한 개성주의 회화를 추구하면서 그의 말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였다.
폴록은 로젠버그로부터 이러한 말을 자주 들어왔으며, 어떤 의미에서 폴록이야말로 가장 로젠버그다운 예술가라고도 말할 수 있다.
폴록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 그림은 그것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난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도록 할 뿐이다”고 말했는데 이는 로젠버그가 환호하며 반길 만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드 쿠닝, 마더웰, 바지오츠, 고키는 너무 기교에 의존하면서 유럽 모더니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로젠버그는 폴록의 그림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음주벽과 술을 마시면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태도 그리고 그의 비지성적인 점 때문에, 또는 도대체 고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좋아하지 않으려 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그의 라이벌 그린버그가 폴록을 옹호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를 칭찬하지 않는 소인 같은 태도를 취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폴록을 두둔하고 싶었지만 폴록이 진지함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도 추측된다.
폴록이 고작 신비주의에 빠져서 그림을 그렸으므로 그에게는 “아주 쉽게 그린 그림”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런 그림들을 대작이라고 칭찬하기에는 로젠버그의 지성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로젠버그와 폴록이 한 쌍으로 열애하지 못했던 것은 두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에도 원인이 있었다.

로젠버그는 “화가는 배우가 된 이상 그는 행위의 대사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고 “화가의 개인적인 투쟁이 결여된 그림은 단지 계시적인 벽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신비주의를 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신비주의가 행위의 감각에 혼돈을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그림은 대화가 단절될 수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면서 그러한 예술가들을 “미술계에 살고 있는 귀신들”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가 말하는 귀신들에는 폴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글을 읽고 폴 브라크는 “내 생각에 네가 잭슨을 몰락시키기 위해서 그런 글을 쓴 것 같다”며 그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로젠버그는 그에게 “넌 아주 영리하다”고만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그림보다는 예술가의 행위에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제롬 캄로우스키는 그의 글은 “개똥들로 가득 차 있으며, 회화에 관해 말하는 것인지 사회적인 사건들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그를 비난했다.
니콜라스 카론은 “그의 글은 대부분 거짓말들로 차 있다”고 말했다.

리는 로젠버그의 글을 읽고 로젠버그 부부가 폴록과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했다고 흥분했다.
리는 그를 공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궁리를 했다.
먼저 그녀는 그린버그를 떠올려보았는데 그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했다.
리가 그린버그를 재촉하자 그는 로젠버그의 액션 페인팅을 “순전히 수사학상의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도 리에게 “넌 싸울려면 네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싸워야지, 난 해롤드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만 말했다.
그린버그는 제임스 존슨 스위니가 자신의 평론을 좋아하지 않으며, 로젠버그가 존경받는 평론가로 막 부상하고 있는 이러한 시기에 그를 공개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로젠버그가 공격하는 사람은 폴록이지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폴록이 자신에게 “멍청한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한 불쾌감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터였다.

리는 로젠버그가 사용했던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이 원래는 폴록이 사용했던 말인데 그가 도용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로젠버그는 “잭슨이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그의 입에 그러한 아이디어를 넣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러한 말조차도 부인하면서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아이디어를 구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폴록의 그림들을 “원숭이가 그린 그림들 같다”고 빈정거렸다.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는 “리가 잭슨만 빼고는 모든 사람들을 망치려고 한다”고 투덜거렸고, 리는 메이를 “미친 년!”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메이는 리를 “돈만 아는 파렴치한 여자”라고 보복했다.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으며 한때는 한 아파트에 살던 사이였는데 이제 그들은 멀어지고 있었다.
리는 로젠버그와 드 쿠닝만 미워한 것이 아니라 폴록의 평판에 거슬리는 모든 작가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미술계에 속한 사람들은 리를 위해서 폴록을 지지하든 대적하든 양자택일해야 했다.

로젠버그는 브르통처럼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했으며, 화가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이는 지성인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평론분야에서 독주하던 그린버그의 권위주의적 비평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추상에 대한 다른 견해를 들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린버그는 오만하기도 했는데 예술가들에게 이러저러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으며, 래리 리버스를 제거했다.
또한 그는 무엇이 좋은 그림이고 무엇이 나쁜 그림인지를 판단하려고 했고 누가 훌륭한 예술가이며 누가 훌륭하지 않은지를 구별하려고 했다.
예술가들은 그의 독선에 은근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시다 술집에서 밀턴 레스닉은 “그린버그는 전람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면서 어떤 예술가에게 그림을 거꾸로 걸게 하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후 상을 주었다”면서 그의 독선에 화를 내었다.
레즈닉은 어느 날 그린버그에게 “시팔놈, 난 다시는 너와 함께 합석하지 않겠다”고 말한 후 그의 테이블을 떠났는데 그때 다른 작가들도 그와 행동을 함께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용기 있는 태도에 갈채하며 지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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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에 대한 고갱의 찬사

고갱은 험담을 잘했다. 그러나 그가 평생 칭찬한 화가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에드가 드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세잔이었다.
고갱의 그림에서 톡톡 끊어 색을 칠하는 세잔의 화법을 발견하기란 쉬우며 말년 폴리네시아에서 그린 풍경화에서 세잔의 화법이 자주 발견되어 그가 세잔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은 고갱의 산문으로 세잔에 대한 칭찬을 읽을 수 있다.


몇 개의 작은 길이 만나는 곳에서 아무런 사상도 없는 시골뜨기가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건 카미유 피사로(고갱의 친구이자 스승)의 작품일 것이다.
바닷가에 우물 하나 화려한 잡색 줄무늬 의상을 걸친,
분명 야망에 굶주린 듯한 파리의 몇몇 사람들이 메마른 우물 속에서 갈증을 풀어줄 만한 물을 찾는다.
온통 색종이 조각들,
그건 시냑의 작품일 것이다.
아름다운 색채가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며 조심스럽게 친 베일 너머로도 그것임을 알 수 있다.
소녀들이 가슴 깊이 간직한 연정으로 애정을 일깨우며 서로 손잡고 애무한다.
난 주저함 없이 이것은 카리에르라고 말한다.
여자 분뇨 수거인,
싸구려 포도주,
목을 매단 사람의 집.
더이상 쓸 재주가 없으므로 최선의 방법이란 그런 것들을 보러가는 것이다.
과일이 담긴 광주리에 익은 포도가 빠져나와 있으며,
천 위에는 푸른 사과와 분홍빛 붉은 사과가 한데 어울린다.
흰 것이 푸르고 푸른 것이 희다.
세잔이야말로 진정 최고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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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편지를 썼다

패츠의 답장을 받고 3주 후 뒤샹은 다시 편지를 썼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난 이곳에서 예술가로 자유로운 삶을 살며 모든 즐거움을 누리고 또 동시에 기억할 만한 어려운 일도 해야 했으므로 파리를 떠나는 데 대한 섭섭함이 있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뉴욕에서 지내려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나는 파리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뉴욕에서 찾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에만 뜻이 있습니다.
내가 상 미셀과 라스파이 블바드에서 한 말을 당신이 기억한다면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려는 나의 이유를 알 것입니다.
뉴욕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파리를 떠나는 것이라는 점 말입니다.
이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나는 내가 참여하고 있는 예술가의 생활에 진력이 나 있었습니다.
내가 바라는 생활과는 정반대의 생활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도서관을 통해 예술가들로부터 탈출했던 것입니다. …

어디로 가야 하느냐?
당신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뉴욕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술가의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며, 일자리를 얻어 일에만 몰두하고 싶습니다.
내가 형들에게 비밀로 하라는 이유는 형들의 이해를 받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누이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

아버지는 내게 많은 것을 해주셨지만 나는 돈과 명예를 위해 예술가의 삶을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내 그림이 팔렸다는 당신의 소식을 듣고 아주 반가웠으며, 당신의 우정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팔기 위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예술가가 될까봐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난 아마 5월 22일 혹은 29일경에야 이곳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뒤샹이 뉴욕으로 떠나야겠다고 알리자 가족들은 비교적 이해하는 편이었지만 레이몽은 떠나는 시기가 적당치 않다고 했다.
뒤샹은 패츠에게 보낸 편지에 “형이 가족으로서의 섭섭함으로 현재 내가 뉴욕으로 가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말하지만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므로 나의 결심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6월 6일에 파리를 떠났다.
그의 가방에는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과 <큰 유리>를 위한 종이습작이 들어 있었다.

미국으로 향하는 항해도중 내내 선내는 매우 어두웠다.
선장이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을 끈 것이었다.
독일군은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1915년 2월 전 세계에 공포하면서 특히 영국과 아일랜드 해상에 나타나는 배들은 상선이라도 격퇴시키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중립국 배들만 예외이고 모든 배는 불을 끈 채 대서양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뉴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파리를 떠나기 위해서” 뒤샹은 뉴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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