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왜 뒤샹이 그것을 샀을까?

장 크로티가 1915∼1916년 겨울 뒤샹의 스튜디오를 함께 사용했다.
크로티는 1878년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동네에서 태어나 1896년 뮌헨으로 가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1900년에 파리로 와서 마르세유에서 무대 디자이너의 조수로 일했다.
그는 이듬해 줄리엥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이 시기 다른 젊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회화방법을 실험했다.
그는 계속해서 파리에 거주하면서 작업실을 몽마르트의 콜리안쿠르에 장만했는데, 뒤샹의 작업실 건너편 불과 몇 집 떨어진 곳이었다.
두 사람은 1901년의 앙데팡당전과 가을전에 함께 출품하면서 우정을 나누게 되었는데 뉴욕에서 재회하게 되자 몹시 반가웠다.
크로티는 풍경화를 반추상으로 그리다가 1916년부터 기계와 같은 이미지로 그리면서 기계에 성sex을 부여했고, 철사나 쇠, 유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마르셀 뒤샹의 초상>을 조각으로 제작했는데, 쇠에 색을 칠하고 유리를 사용해서 눈을 장식했다.
그는 “그것은 마르셀 뒤샹에 대한 나의 절대적인 표현이다”라고 했다.
그 조각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르나 현존하지 않는다.

뒤샹이 컬럼버스 애비뉴에 있는 철물점에서 눈을 치울 때 사용하는 눈삽을 구입했을 때 크로티도 옆에 있었다.
눈삽은 미국의 어느 철물점에서라도 구입할 수 있는 흔한 것이다.
왜 뒤샹이 그것을 샀을까?
뒤샹과 크로티는 그런 삽을 과거에 본 적이 없었다.
프랑스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뒤샹은 눈삽을 스튜디오로 가지고 와서 물감으로 <부러진 팔에 앞서서>라고 제목을 적은 후 ‘from Marcel Duchamp 1915’라고 서명했다.
그는 by라고 쓰지 않고 from이라고 적었다.
그런 후 손잡이를 철사에 묶어 천장에 매달았는데, 그가 미국에 와서 처음 발견한 혹은 선정한 레디 메이드 조각이었다.
뒤샹은 수잔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내 화실에 가게 되면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를 보게 될 것이다.
병걸이는 레디 메이드 조각으로 내가 구입한 것이다.
여기 뉴욕에서 나는 같은 특성을 지닌 물건들을 구입하여 레디 메이드로 취급하고 있단다(처음으로 영어로 ready made란 말을 사용했다).
네가 영어 ready made의 뜻을 이해할 줄 안다.
난 영어로 제목과 이름을 적어 넣는다.
예를 들면 커다란 눈삽에 ‘부러진 팔에 앞서서’라고 적었는데 프랑스어로 En avance du bras casse가 될 것이다.
그것을 낭만주의나 인상주의 또는 입체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것들과는 무관하단다.
다른 레디 메이드 조각은 <두 번에 걸친 비상사태>인데 프랑스어로는 Danger (Crise) en faveur de 2 fois이다.
이런 머릿말들은 실제로 말하기 위해서이다.
병걸이를 집으로 가져가거라.
먼 이곳에서 난 그것을 레디 메이드 조각으로 만들려고 한다.
병걸이 바닥 안쪽 둥근 곳에 은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어주길 바란다.
From Marcel Duchamp

수잔느에게 준 뒤샹의 지침은 이미 때가 늦었다.
오빠의 화실을 청소하다가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를 발견하고 수잔느는 쓰레기로 알고 내다버렸다.
현재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미국의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있는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는 뒤샹이 제작한 본래의 것들이 아니고 나중에 재생한 것들이다.
뒤샹이 편지에 언급한 <두 번에 걸친 비상상태>는 눈삽과 마찬가지로 그가 구입한 것인데,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고 현존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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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중에서 
 
단토의 변용의 미학

아서 단토에게 예술의 종말을 감지하게 한 것은 시각예술에서의 변용의 미학이다.
평범한 것을 변용을 통해 아이콘으로 만들고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과의 구별을 흐리게 한 데 있다.
일차적으로는 변용을 통해 평범한 사물을 고급 미술의 미학적 사물로 격상시키고 결과적으로는 대중적 미술과 고급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음을 주목했다.
변용은 기독교의 개념으로 소위 말하는 '변화산 정상의 사건'을 의미한다.
어느 날 산 정상에서 예수를 따르던 제자 세 사람이 예수의 모습에서 예언자 혹은 메시야의 이미지를 발견했다는 데서 비롯한 말이 변용이다.
변용은 말 그대로 모습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동일한 모습인데 바라보기에 따라서 달라진 것이다.
보는 사람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지 대상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팝아트는 바로 관람자의 인식을 문제 삼은 미술이다.
동일한 사물을 달리 인식하는 사유의 문제를 제기한 미술이다.
단토가 이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그토록 자극적이었을 수 있었던 원인이 변용적이었음을 지적한다.
평범한 사물을 통해서 인식의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 것이다.
단토는 말한다.

"팝아트 자체는 미국 고유의 업적이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도처에서 그토록 전복적이었던 것은 그것의 기본 입장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그는 팝아트가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들을 미술로 변용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추상표현주의는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들에 숨겨진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전제들에 기초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원초적인 힘과 접촉하는 무당 노릇을 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팝아트가 추상표현주의에 반발로 생겨난 미술운동이었으므로 단토는 팝아트와 추상표현주의와의 상이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의 상이한 점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추상표현주의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었다면, 팝아트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가장 일상적인 것들, 즉 콘플레이크, 수프 통조림, 비누 뭉치, 인기 영화배우, 만화 따위를 찬양했다. 그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쳐 팝아트는 이런 것들에게 거의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이에 앞서 분석철학자 단토는 철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으로 1930년대 성행했던 분석철학을 꼽았다.
분석적 철학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형이상학을 무용하게 만들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단토가 아니더라도 1930년대부터 만연되었던 사고였다.
단토는 분석철학이 철학의 종말을 재촉한 것처럼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재촉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둘 다 인식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했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해방적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파리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파리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말한 적이 있음을 들어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형화된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을 지적한다.
미술은 이러저러하다든가 미술품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든가 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이 팝아티스트들의 성과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를 억압한 과거의 인식체계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이전의 철학과 미술을 총괄적으로 조망했음을 지적한다.
분석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 전체와 대립했고 팝아트는 실제적 삶을 위해 미술 전체에 대립했음을 지적한다.

단토는 미래의 미술을 철학의 문제로 본다.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동일한 시기에 오래된 고정 관념의 인식체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며 둘 모두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학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원래 예술과 철학은 동반자 관계였는데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수준이 낮은 것으로 여겼으므로 철학과 거리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철학과 예술의 관계가 회복 내지는 정상화되었다고 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50년대 중반 철학과 미술 둘 다 당시의 인간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팝아트에 대한 그의 희망적 청사진은 대단했는데 "팝아트가 의식 속으로 끌어올린 것은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누구라도 바랄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팝아트가 심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고 예술 개념에 있어 심원한 철학적 변화를 성취한 대격변의 모멘트였다고 말한다.

변용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뒤샹은 평범한 것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레디메이드를 팝아트와 구별한다.
하지만 뒤샹이 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미술의 경계선들을 시험한 공로는 인정하면서 미술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뒤샹과 팝아트 사이에 어떤 외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팝아트가 우리로 하여금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 중 하나이며 또한 팝아트의 성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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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무엇이 미술인가

뒤샹은 별로 말이 없이 듣는 편이지만 일단 말을 하게 되면 낮은 목소리로 조리 있게 했다.
뉴욕으로 온 후 그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자유를 만끽했고, 과거로부터 단절된 자유를 맛보았다.
그는 말했다.

파리와 유럽에서는 어느 시대에서라도 젊은이들은 늘 자신들을 어떤 위대한 사람들의 손자들쯤으로 생각한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빅토르 위고의 손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영국의 젊은이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손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사회의 조직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며, 그들이 자신들의 창의력을 산출하려고 하더라도 파괴할 수 없는 전통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이 미국에는 없다.
당신은 셰익스피어 따위에 관심이 없지 않느냐?
그렇지 않느냐?
당신에게는 그의 손자란 느낌이 전혀 없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진전시키기에 이곳보다 더 훌륭한 곳은 없다.

뒤샹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욱 훌륭하게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뮌헨에서 <큰 유리>에 관하여 습작을 할 수 있었듯이 그에게는 프랑스가 아닌 신천지가 필요했고, 미국은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축복의 땅으로 여겨졌다.

뒤샹은 뉴욕에서 새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첫 인터뷰를 한 『뉴욕 트리뷴』의 편집자 브루어는 여간 고마운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교적 훌륭한 분위기의 싸구려 술집과 레스토랑과 기자들이 출입하는 곳을 뒤샹에게 소개했으며, 유행어도 가르쳐주었다.
브루어는 “제가 처음 뒤샹을 만났을 때 그는 영어를 몇 마디밖에 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꼭 영어로 대화하기로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 응하다보니 뒤샹은 미국인들에게 피카소나 마티스보다 더욱 인기가 있었다.
그는 뉴욕에 3년 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하지 않았으며, 명예와 돈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일로 수입을 늘여나갔다.
“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는 모든 물가가 쌌다. 5달러면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렌스버그가 9월에 코네티컷 주에서 뉴욕으로 돌아오자 뒤샹은 그의 아파트를 나와 빅만 플레이스에 있는 패츠의 집 건너편 집을 세 얻었다.
석 달 후에는 65번가와 66번가 사이 브로드웨이 1947번지의 링컨 아케이드 빌딩으로 옮겼다.
스튜디오지만 면적이 작지 않아 작업실로 쓸 만했다.
거처를 옮기자마자 그는 큰 유리 두 장을 사서 받침대를 만들어 세웠는데 <큰 유리>를 위한 습작을 파리에서 마친 후라 본격적으로 작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집세가 월 40달러였으므로 그는 따로 직업을 가지고 수입을 늘여야 했다.
파리의 도서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그를 퀸이 이스트 36번가에 있는 모건의 커다란 개인도서관의 책임자 벨레 다 코스타 그린에게 소개했다.
퀸은 뒤샹에게 “그 여자는 건방진 미국인이지만 그것 때문에 수줍어할 필요는 없네.
그녀가 자네를 물어뜯지는 않을 테니까”라고 귀뜸했다.
뒤샹은 11월 5일에 그녀를 만나 매일 오후 4시간씩 일하고 월 100달러를 받기로 했다.
앞으로 2년 동안 그는 경제적으로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스튜디오에서 유리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먼저 윗부분에 납으로 된 철사를 사용하여 은하계처럼 생긴 형상을 만들었고, 신비스럽기만 한 로봇처럼 생긴 신부를 만들어 부착했으며, 종이에 드로잉한 것을 유리 뒷면에 부착시킨 뒤 작업했다.
그는 철사로 만든 형상 안에 색을 칠한 뒤 납으로 얇게 덮어 산화를 방지했는데, 이는 납 성분에 관하여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납은 오히려 화학적으로 색소에 반응을 일으켜 결국 변색시켰다.
그는 하루에 두 시간씩 작업했다.
그는 회상했다.
“나는 그런 작업에 관심이 있었지만 서둘러 마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난 게으른 사람이다.
게다가 그때 난 그것을 전시회를 통해 소개하거나 팔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난 그저 작업을 했을 뿐이고,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나는 작업하고 싶은 생각이 나면 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외출하여 미국에서의 인생을 즐겼다.
나는 미국을 처음 방문한 것이라서 <큰 유리>를 작업하는 것만큼이나 미국을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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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에서   
 
제7장 팝아트와 지나간 미래

제7장 앞부분에 2차세계대전 전후의 미국 미술 계보가 나온다.
특히 토마스 이킨스, 로버트 헨리, 에드워드 호퍼의 이름이 나온다.
헨리는 이킨스의 제자였고, 호퍼는 헨리의 제자로서 미국 미술의 직선적 계보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부의 미술과 뉴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동부의 미술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 미술의 주류는 주로 동부에서 이루어졌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부에서 볼 때 서부의 미술은 비주류로 보인다.
앞에 언급한 세 화가들은 미국 전통회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피카소와 마티스를 앞세우고 몰려드는 유럽의 현대 회화로부터 자신들의 고유한 지역 회화를 지키고 미국식 회화의 장점을 알리려고 했다.

파리 아카데미 보자르에 유학했던 이킨스, Ash Can School을 창설한 헨리, 호퍼 모두 유럽 화가들이 여자의 누드를 그릴 때 프리네스, 비너스, 님프, 헤르마프로디테, 하우리 등으로 불릴 만한 이상화된 누드의 모습을 그린 것에 반대하면서 평범한 여인이 지금 막 옷을 벗었을 때의 실재 모습을 그렸다.
화가가 연출한 에로틱한 상황에서 몽상에 잠긴 여인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옷을 벗은 여인을 그렸다.
미국 화가들의 그림이 모던하게 보이지 않고 19세기 후반의 그림으로 보였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단토는 1933년경의 미국의 모더니즘 회화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0년경에 발표한 <모더니스트 회화>와는 크게 달랐던 점을 지적했는데 그 당시 모더니즘이 거의 종료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1933년 당시의 시각에서 본 '모던'은 다양한 미술을 용인했는데,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여기에 앙리 루소의 환상의 세계, 초현실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도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추상과 절대주의, 비구성도 포함되었다.
주지할 점은 호퍼를 비롯한 미국 주류 화가들은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면서 모더니티가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그는 예쁜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마치 영화 연출가가 배우에게 주문하듯 자신이 원하는 그림에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의 그림은 주로 소외된 인간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야의 주유소에서 차에 개스를 넣는 늙은 주유소 주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리를 이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 등이다.
이런 사실주의 그림은 그 자체 훌륭했지만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하자 추상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는 협소하게 정의된 모더니즘 이론에 의해 궁지에 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 전통주의 화가의 입지가 갑자기 좁아진 것이다.
호퍼를 비롯한 그들은 추상을 "딱딱한 표현 gobbledegook"이라고 부르면서 모마MoMA가 추상을 선호하는 데 반발했다.
그들은 1959~60년 휘트니 연감에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사실에 경악해 했다.
구상과 비구상의 반목이 매우 심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단토는 당시의 추상과 사실주의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양측이 얼마만큼의 도덕적 에너지를 갖고 관여했는지 의구심을 표한다.
당시의 상황은 거의 신학적 강도였으며 문명의 다른 단계였더라면 분명히 화형감이었을 정도로 심했었음을 지적한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거의 이단적 행위로 보일 정도였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보다 더욱 더 심했다고 보면 된다.
대학의 교수들은 사실주의에 관한 강의계획서를 제출했다간 강의가 배정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미국 미술계에서 그린버그의 영향을 컸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추상의 우월주의는 그에 의해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그린버그는 1939년에 추상을 일종의 역사적 불가피성으로 보았다.
에세이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주장했듯이 그에게 추상은 "역사로부터 나오는 명령"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추상미술의 옹호'에서 그린버그는 재현이란 부적합하다며 "티치아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추상적 형식적 통일성이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특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의 불공평한 특질 부여를 단토는 문제 삼는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회화를 역사적 진화의 낮은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분통을 터뜨린다.
그린버그의 독선은 그 수위를 넘었는데,
1961년에는 추상마저도 역사적 운명의 분위기를 상실했다고 추상표현주의의 조각적 분위기를 비판했으며, 추상표현주의는 1962년 거의 종결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상과 추상의 차이는 없다.
둘 다 회화의 양식에 속하는 것이지 그린버그가 말한 대로 좋고 나쁜 것의 차이도 아니며 역사적 진화와는 무관하다.
제7장의 제목에서 말하는 '지나간 미래'란 호퍼를 비롯한 미국 전통 미술이 그린버그에 의한 모더니즘론의 등장과 모마를 비롯한 뮤지엄들의 추상 전시회 선호로 인해 지나간 미래가 되었음을 지적한 말이다.
미국 회화의 미래는 모마에 의해 정의된 모더니즘의 초기에 추상이 차지했던 자리에다 온갖 회화를 죄다 쑤셔넣은 그런 꼴의 미래였다.
추상을 수많은 예술적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역사적 진보의 개념으로 본 것은 그린버그의 큰 오류였다.
게다가 조각 및 그 밖의 장르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과 회화를 사실상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과오였다.

단토는 이런 미국 미술의 상황에서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팝아트를 꼽는다.
그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본다.
팝아트는 1960년대 초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는데, 그가 부지불식이라고 말한 이유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나타난 물감흘리기와 떨어뜨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가 이런 충동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때가 1964년이었다.

한편 1964년 휘트니 뮤지엄이 호퍼의 회고전을 개최했다.
이는 사실주의 화가들이 그동안 자신들의 회화를 옹호하고 추상에 대해 끈질지게 투쟁한 노력의 댓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뮤지엄 앞에서 피켓을 들고 뮤지엄이 추상만을 선호하는 데 반대시위를 했고 일간신문 뉴욕타임즈에 추상표현주의를 공격하는 글을 쓰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해 왔었다.
호퍼의 회고전은 이런 의미에서 사실주의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
그때 막 성행하기 시작한 포토리얼리즘 운동도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옹호에 일익을 담당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추상표현주의자들 중에도 호퍼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 사람이 있었는데 폴록과 단짝이었던 드 쿠닝이 호감을 나타냈다.
드 쿠닝은 사람과 사물의 형상을 그렸다는 이유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폴록은 드 쿠닝에게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었다.
"너 구상을 하고 있잖아. 아직도 똑같이 빌어먹을 짓을 하고 있다니. 너는 구상화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드 쿠닝이 회화에 있어서 추상적 혁명의 배신자로 몰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나의 저서 <폴록과 친구들>에 소상히 나와 있다.

단토는 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를 좀더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다.
단토의 내러티브 혹은 그의 논리적 이야기에 근거하면,
팝아트는 미술의 철학적 진리를 자의식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서양 미술의 위대한 내러티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이런 고견을 갖고 있었던 그가 파리로부터 뉴욕으로 올아와 1964년 4월 스테이블 화랑에 가서 엔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았을 때 큰 자극을 받은 건 당연했다.
그 작품을 보는 순간 뉴욕 미술의 장면을 정의하고 있던 논쟁의 전체 구조가 적응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호퍼와 그 밖의 주류 사실주의, 추상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이론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마침 그때 단토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철학회에서 미학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고, 그는 <예술계 The Art World>란 제목으로 발표했고 이는 미술을 다루는 최초의 철학적 노력이었다.
그의 논문은 예술계와 철학계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 왔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단토는 팝아트가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 엎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 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는데 이것이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예술가들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훌륭한 목공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술과 실재 사이의 차이를 이제 더 이상 순수하게 시각적인 견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시각예술이 시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또한 '예술작품'의 의미를 실례들을 보여주면서 가르친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워홀과 팝아트 예술가들은 철학자들이 미술에 관해 쓴 글 모두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국지적인 중요성만을 갖는 것으로 만들었다.
단토는 팝을 통해 비로소 미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물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물음이란 다름 아닌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어떤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토는 미술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미술사 내부로부터 해명되었으며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단토가 말하는 종말이란 미술이 죽었다거나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는 같은 시기에 독일인 한스 벨팅이 주장한 바와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적이란 바자리와 그린버그의 역사관 혹은 두 사람에 의한 미술사 구성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팝아트란 말은 단토 이전에 미술잡지 <네이션>의 미술비평을 담당했던 로렌스 앨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단토는 팝이란 말이 썩 좋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사용되고 있고, 앨러웨이가 그러한 말을 사용하게 된 동기를 이해한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구분을 첨가하고자 했는데 다음과 같다.
"고급 미술 속의 팝, 즉 고급 미술로서의 팝과 팝 미술 자체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가 있다. 팝의 선구자들을 추적하고자 할 때에는 특히 이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더웰이 자신의 몇몇 콜라주에 골와즈Gauloise 담배갑을 이용했을 때, 혹은 호퍼와 호크니가 팝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에다 광고계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이용했을 때, 이런 것이 바로 고급 미술 속의 팝에 해당한다. 대중적인 미술들을 진지한 미술로 취급하자는 것이 앨러웨이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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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질문에 답했다

뒤샹을 인터뷰하려는 신문과 잡지사들이 많았는데 그에게 던져진 주요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질문: 미국 여인들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뒤샹: 미국 여인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지성적이며, 늘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또 원하는 바를 항상 획득합니다.
이 점은 미국 여인들이 남편을 노예와도 같은 은행가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으로 증명되는데 세계 사람들의 눈에는 미국 남편들이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질문: 미국이 미술의 중심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뒤샹: 고층 건물들을 보십시오!
이것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들을 유럽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뉴욕 자체가 하나의 미술품이며, 완전한 미술품으로 … 오래된 건물들과 추억의 유품들을 부수는 것은 훌륭한 일이고 …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부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우리 시대에 우리의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질문: 입체주의에 관하여 말해주십시오.

뒤샹: 입체주의라는 말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티스가 아이러니컬한 말로 표현한 것이 입체주의란 말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작은 입체주의자들을 보는데, 이런 원숭이들은 선구자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선구자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입체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은 훈련입니다.
이 말은 그들 전부에 해당하고 또 무nothing와도 같은데 … 나는 미술이 확고한 이론을 따라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의 선전에 가깝습니다.

질문: 세계대전에 관해 말해주십시오.

뒤샹: 심리적인 점에서 전쟁을 보면 아주 인상적입니다.
본능적으로 남자들을 행렬지어 보내 다른 남자들의 행렬을 무너뜨리는 일은 조심스러운 정밀조사처럼 보입니다.
애국심이란 개념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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